전쟁의 핵심 전력, 예비군 군대문화 이야기(11) 조국의 위기 앞에 하던 일을 멈추고 다시 군복을 입는다
훈련 중인 대한민국 에비군의 모습 <출처: 대한민국 육군>
예비군은 말 그대로 상설군처럼 직업군인이나 특정 기간 동안 군 복무를 위해 모여 있는 군대가 아닌 ‘유사시를 위한 예비 전력’을 말한다. 예비군은 평소엔 생업에 종사하며, 일반적으로 정기적인 훈련을 소화함으로써 일정 수준의 전투력과 전문성을 유지한다. 예비군은 국가가 전면전에 나서는 상황, 혹은 적국의 침공을 받아 긴급하게 병력 수를 증강하여 방어에 나서야 할 경우에 적법한 절차를 거쳐 ‘동원(動員: Mobilize)’ 된다. 예비군을 상설군과 별도로 운영하는 이유는 우선 평시(平時) 상태의 전비 지출을 줄이기 위한 목적이다. 굳이 평상시에 불필요한 대규모 군대를 보유하는 대신 필요할 때에만 병력을 일시적으로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국가 생산성과 직결되는데, 통상 군 복무 대상자는 노동력이 가장 높은 18세~30세 미만의 청장년인 경우가 많으므로 보통 때에는 이들을 모두 군에 동원시키기보다는 사회의 생산 활동에 기여하도록 하려는 취지인 것이다. 현대전으로 오면서 예비군의 역할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 전 세계적인 추세이며, 우리나라 또한 예외가 아니다.
‘내 고향은 내 손으로!’ – 민병대 개념의 출발과 예비군
필요에 따라 임시로 민간인을 현역으로 전환하는 오늘날 예비군의 개념이 정확하게 어느 시점에 등장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예비군과 매우 유사한 개념, 즉 민간인이 전시에만 군인으로 전환했다가 다시 전쟁 종료와 함께 평민으로 돌아가는 개념은 ‘민병대’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는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의병(義兵)’의 개념과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 단지 의병이나 민병대는 국가가 나서서 동원하는 개념이 아닌 ‘자원군’ 형태였기 때문에 ‘예비군’과는 조금 다른 성격을 띠지만, 결국 이들도 전쟁 기간 중에는 상설군과 지휘체계를 통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 ‘민병대’나 ‘의병’은 수세 상황에서만 등장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고, 대부분의 경우 ‘나라’보다는 고향이나 가족을 지킬 목적으로 일어난 경우가 많아 전투 지역이 이웃 지역으로 옮겨지게 되거나 농번기 등 생업과 관련된 일이 우선되는 상황에선 흩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 문제는 임진왜란 때에도 보이지만 미국 독립전쟁 초창기에도 종종 목격되는 장면인데, 국가가 자원병 성격으로 싸우는 이들을 타 지역에서도 싸우게 하거나 생업을 포기하고 싸우게 할 강제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결국 이 해결책은 상설군의 확장으로 이어지게 되지만, 여기서 다시 대규모 상설군 운영의 부담을 개선한 오늘날의 “예비군”이 탄생하는 데는 다소 시간이 걸렸다.
사실상의 공식적인 첫 “예비군”은 영국에서 운영하기 시작했다. 당시 전 세계를 무대로 밤낮없이 팽창하고 있던 대영제국은 상황에 따라 긴급하게 대규모 군대를 모았다가 해산시켜야 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이 때문에 아예 영국은 18세기 경 원래 봉급의 절반 정도만 지급하는 대신 전시 동원령이 떨어질 때에만 군복을 입는 예비군 제도를 시작했다. 이 제도는 장교 계급에 대해서만 시행이 됐는데, 이는 군대를 갑자기 팽창시킬 경우 병사 계급은 기본 교육만 동시에 이수시킬 경우 얼마든지 많은 숫자를 양성할 수 있지만, 훈련되고 전투 경험을 갖춘 장교는 갑자기 만들어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소에 예비군 장교들은 생업에 종사하면서 군 급여의 절반을 함께 받는 대신, 전시가 될 경우 재빠르게 현역으로 전환하여 새롭게 증설한 부대를 지휘하게끔 했다. 본격적인 예비군 제도의 법적 근거가 된 것은 1757년에 마련된 민병대법(Militia Act)으로, 영국은 이 법을 바탕으로 잉글랜드(England) 및 웨일스(Wales) 지방의 주민을 대상으로 추첨을 실시해 민병대원을 선발했다. 영국정부는 이들의 군적(軍籍)을 별도로 관리했으며, 증원 전력이 필요해지면 동원령을 통해 이들을 소집하여 전투복과 무기를 지급하고, 평시 훈련 때에도 이들을 참가시켜 전투 수준을 유지했다. 이렇게 시행된 예비군 제도가 처음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은 나폴레옹 전쟁 시기였다. 프랑스가 유럽을 석권하기 시작하면서 영국이 이를 저지해야 할 상황이 되자, 영국정부는 예비군 전력을 대규모로 동원했다. 하지만 예비군 전력까지 모두 해외에 전개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영국군은 상설군을 해외에 전개시켜 프랑스군과 전쟁을 치렀으며, 예비군은 상설군이 빠져나가고 난 공백을 채우며 주로 본토 및 아일랜드(Ireland) 방어 임무를 맡았다. 이때 예비군은 직접 전투에 투입되어 영국군의 전투력에 보탬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대신 상설군의 후방 임무를 인수하여 이들이 전투 수행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을 뿐 아니라 영국 군부가 취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예비군이 본격적으로 전쟁에서 활약한 첫 사례는 나폴레옹 전쟁 중에 치러진 예나-아우어슈테트(Jena-Auerstedt) 전투 때였다. 프랑스의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 1세는 프리드랑(Friedland) 전투에서 프러시아를 꺾은 후 틸지트(Tilsit) 조약을 체결하면서 프러시아의 영토를 할양 받았고, 동시에 프러시아 군의 상설 병력 수를 4만 2천 명으로 제한했다. 이에 프러시아군 총참모부의 게른하르트 폰 샤른호른스트(Gerhard von Scharnhorst, 1755~1813) 중장은 병사들을 징집한 후 짧게 기본 훈련만 시킨 후 귀가시키는 방법을 반복했다. 이렇게 제한 숫자보다 많은 병력을 훈련시킨 프러시아 군은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가 벌어지자 귀가시켰던 예비군을 총동원하여 12만의 병력을 모을 수 있었다. 비록 전투 자체는 프랑스 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기 때문에 샤른호른스트 장군의 기지는 빛이 바랬지만, 이 전투는 효율적으로 예비군을 조직하고 관리할 경우 실전에서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한 최초의 사례로 기록됐다.
세계대전을 거치며 등장한 미국의 예비군 제도
예비군 제도가 제대로 정착되면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전쟁의 규모가 극단적으로 커진 1, 2차세계대전 때였다. 특히 미국은 1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부터 간전기(間戰其) 동안 정규군과 예비군 제도를 대대적으로 보완했다. 미정부는 1920년 연방 국방법(National Defense Act)을 통과시키면서 군을 정규군(Regular Army), 주방위군(National Guards), 예비군(Army Reserves)으로 나누었으며, 대학교에 위탁하여 장교 교육을 병행시키는 예비 장교 훈련단, 통칭 ROTC(Reserved Officers Training Corps) 제도가 마련됐다. 미국은 이후 2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최대 1,200만 명까지 병력이 팽창했으나, 전후에는 다시 급속도의 감군 절차를 밟으며 150만 명까지 군대가 줄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다시 한 번 군 제도의 정비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1948년에 국가안보법(National Security Act)을 통해 대대적으로 군 조직을 정비했다. 특히 미국은 냉전 시대가 도래하면서 항상 소련과의 전면전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에 예비군 제도를 체계적으로 정비할 필요가 있었다.
현재 미군은 두 가지 방법으로 예비군 제도를 운용하고 있다. 하나는 통상 8년 계약으로 정규군에 입대한 후 복무 중간에 전역을 선택한 후 남은 복무 기간을 예비군으로 지내는 방법이고, 두 번째 방법은 처음부터 8년 계약으로 예비군에 입대하는 방법이다. 미 육군 예비군은 한 달에 한 번 주말 훈련에 참가해야 하며, 1년에 한 번 두 주 동안 연례 훈련에 참가해야 한다. 이때 직장에서 발생하게 되는 금전 손실은 나라와 회사가 반반씩 부담한다. 예비군은 현역에 비해 급여가 적고 한 달에 한 번씩 주말 훈련에 참가해야 한다는 불편함이 있으나, 대신 사회에서 일반 직장인으로 생활하면서 동시에 군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 그리고 현역과 거의 다를 바 없는 의료, 교육, 복지, 연금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통상 부사관 이상에 한해 단 한 번만 예비군 자격으로 진급 기회를 주는 우리나라와 달리 미군은 예비군 상태에서도 계속 진급 심사를 거쳐 진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며, 이렇게 장군까지도 도달할 수 있다는 점 또한 매력적이다.
미군은 상대적으로 예비군 의존율이 높은 편인 군대다. 사실상의 작전 책임 지역은 전 세계 전체를 아우르는 반면, 미군의 상설 병력 숫자는 2017년을 기준으로 4군(육, 해, 공, 해병) 도합 1,281,900명에 불과하다. 심지어 육군 정규군의 숫자는 최근 이어진 감군의 결과로 2차세계대전 이래 최소 숫자인 47만 6천 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이 여전히 전 세계에서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는 이유는 정규군을 뒷받침하고 있는 약 80만 명의 예비군 덕이다. 미군은 전통적으로도 예비군 의존도가 높아왔다. 우선 독립전쟁부터 대부분 민병대 자원으로 전쟁을 시작했으며, 사상 최대 규모의 내전이었던 남북전쟁 때는 남군이 80%, 북군이 96%가량의 예비군 의존도를 보였다. 1차세계대전 때에는 최대 40만 명, 2차세계대전 때에는 약 30만 명의 예비군이 동원됐으며, 한국전쟁 때에는 한반도에 전개됐던 총 병력의 1/3인 약 10만 명가량이 예비군 전력으로 구성되었다. 이 양상은 베트남 전쟁 시기부터 바뀌기 시작했는데, 우선 여론이 좋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치르다 보니 케네디 행정부가 예비군을 거의 동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예비군을 베트남에 전개하지 않는 미군의 방침이 알려지면서 징집 회피를 위해 예비군에 입대한 사례가 많았다.
미육군 예비군 소개 영상 <출처: 미 육군 예비군 유튜브 채널>
미군은 이라크 자유작전(OIF: Operation Iraqi Freedom) 후 이라크 안정화 작전을 실시하면서 예상과 달리 병력 수급이 어려워지자 예비군을 전개하기 시작해 한때 최대 파병 병력의 40%가 예비군으로 채워졌던 적이 있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전역까지 아우르며 ‘테러와의 전쟁’을 진행하게 되자 총 21만 명의 예비군이 동원됐다. 현재 미군 전력에서 예비군 활용도가 가장 높은 부대는 주로 훈련 사·여단(100%)과 민사 부대(97%), 심리전 부대(89%) 등의 비 전투부대이며, 심지어 특수부대(25%), 전투 공병대대(26%), 전투 지원 항공 중대(26%), 화생방 제독 부대(42%) 등도 예비군 의존율이 낮지 않은 편이다.
미공군 예비군 소개 영상 <출처: 미공군 예비군 유튜브 채널>
전시 징병제 국가의 또 다른 예비군 모델 – 이스라엘 방위군(IDF)
예비군 제도의 재미있는 비교 대상은 전시(戰時)국가지만 인구가 적어 예비군 의존도가 높은 이스라엘 방위군(IDF, Israel Defense Forces)이다. 사실상 주변 국가 중 이집트와 요르단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가 준 적대 국가인 가운데 이스라엘의 인구는 780만 명에 불과하고, 상설군은 17만 명 밖에 되지 않으므로 유사시가 될 경우 45만 명의 예비군 전력이 사실상 전투 세력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이스라엘은 남성의 경우 의무 복무 기간 3년, 여성은 2년이며 함께 입대한 인원으로 소부대를 편성한다. 이들의 복무 기간이 끝나면 해당 부대가 통째로 예비군 부대로 전환되며, 전환된 예비군 부대는 향후 약 20년간 매년 소집되어 함께 훈련 받고, 유사시에는 다시 한 부대에서 전우가 되는 예비군 동지가 된다. 병과와 병종, 임무의 고유성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모든 예비군 부대는 연간 약 30일가량의 훈련을 소화하며, 현역 때부터 동일한 임무를 맡아온 인원들로 편성되기 때문에 매년 예비군 소집 때마다 기초 훈련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연 단위로 심화된 교육과 훈련을 수행할 수 있다. 이런 점은 매번 지역 단위로 소집하여 부대를 편성하기 때문에 각 인원의 특기와 연차가 달라 매년 기초 훈련만 반복할 수밖에 없는 우리 군의 상황과 크게 다르다. 이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징집 제도와 작은 영토 면적에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현재 이스라엘의 예비군 복무 기간은 병사의 경우 40세, 전투병과 장교의 경우 42세, 비전투병과 장교의 경우 45세이며 여군의 경우는 통상 첫 자녀를 출산하면 이후 예비군 의무를 면제시켜주고 있다. 특히 30년 이상 같은 부대원들이 예비군 교육을 받으며 ‘평생의 전우이자 친구’가 되는 것이 이스라엘 예비군 제도의 가장 큰 장점이다. 예를 들면 전쟁이 터져 동원령이 내렸을 때, 가족들은 가장이 예비군 동원에 응소하지 말라고 말리지만 당사자 자신은 오히려 가족을 안심시키며 “내 평생지기들이 모두 전쟁터로 가는데 내가 가지 않을 수 없다”면서 응소한다고 한다.
이스라엘 전사(戰史)에서 예비군의 활약은 눈부시다. 당장 4차중동전 때 아랍연맹군은 대다수의 이스라엘군 병력이 휴가를 떠나는 속죄일(贖罪日) 명절을 골라 기습했지만, 순식간에 가동된 예비군 동원체계 덕에 대부분의 예비군은 하루 만에 응소를 마쳤다.
현대 예비군의 활동과 범위
예비군은 통상 전쟁이 발발하면 동원령 선포와 함께 모집을 시작하지만, 동원체계와 국토의 크기, 예비군 부대의 편성에 따라 이들의 응소가 완료되는 시점은 편차가 있다. 전쟁의 사전 징후가 분명하게 포착되는 상황이라 개전 전에 동원 선포를 할 수 있는 상황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적에게 선제 기습을 당한 경우라면 필연적으로 동원령 선포가 늦을 수밖에 없고, 국내의 교통 체계 등이 혼란 상황일 가능성이 높아 예비군 응소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예비군의 힘이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은 전쟁이 본격화된 중기 단계일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육군 예비군 소개 영상 <출처: 유튜브 채널>
통상 예비군은 평시 반편(半編) 상태인 동원 부대나 향토부대에 편성되어 신규 부대를 구성하거나, 아니면 이미 초전에서 적과의 전투로 피해를 입은 부대가 전투력 복원 작업에 들어갈 때 보충 혹은 증원 병력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특히 국군이 운용 중인 향토부대는 상설부대가 전방으로 이동하고 난 후 후방 업무를 인수하는 역할을 맡는데, 이를 통해 즉시 전력인 전투부대들의 활용도를 높게 해주는 역할을 수행할 수도 있다.
일본육상자위대 예비자위관 소개 영상 <출처: 일본 육상자위대 유튜브 채널>
최근에는 예비군의 평시 활용폭도 늘어나는 추세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해외 파병의 경우다. 특히 한시적인 인도적 구호 작전을 실시할 경우, 작전 책임 지역과 임무가 정해져 있는 상설부대를 갑자기 빼내는 것은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예비군을 활용하는 것이 가장 부담이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육군 예비군 소개 영상 <출처: 유튜브 채널>
향후 예비군 제도가 가야 할 길
예비군의 가장 큰 장점은 이미 훈련을 받고 경험이 쌓인 병력이기 때문에 유사시에 동원하더라도 기초 교육이나 재교육을 시켜야 할 부담이 적다는 점이며, 예비군 전력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유사시에 동원이 가능한 숙달된 가용 병력도 커지게 된다. 어떤 면에서 이런 장점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했던 사례가 맨 처음에 언급했던 프러시아군의 사례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예비군 제도를 잘 활용할 경우, 정부 입장에서는 비용을 크게 아끼면서 전문화된 병력을 보유해 놓을 수 있다. 특히 최근에는 해외 파병 등에 예비군이 동원되어 좋은 성과를 내는 사례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일례로 이스라엘군의 경우 필리핀이 태풍 “욜란다”의 피해를 입자 의무부대를 파병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이스라엘군은 예비군 중심으로 인도적 구호 작전을 실시할 부대를 구성했다. 이스라엘군은 응소한 예비군이 파병 기간 중 받게 될 급여의 반을 지급하고, 해당 예비군이 소속된 직장이 나머지 반을 부담하기로 방침을 정한 후 주로 군의관 중심으로 예비군을 받았다. 그러자 예비군에 응소한 군의관이 모집 숫자를 한참 상회했기 때문에 선착순으로 끊어야 했다. 특히 이렇게 파병된 부대는 파병 기간 중 높은 사기를 유지한다는 점도 긍정적인 부분이다.
예비군 제도의 단점은 통상 이들의 군사적 전문성에 비해 2류 급 장비를 지급받는 경우가 많으며, 대부분 현역 부대에서 퇴역시킨 장비 중심으로 지급하는 경우가 많아 무기체계 연동성이 떨어지고, 사기나 전투 효율도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아무리 유사시에 동원한 병력이라고는 하지만, 생업이 따로 있는 인원들이므로 동원 기간을 지나치게 길게 잡을 수도 없다는 점 역시 단점으로 작용한다. 또한 앞서 말한 미국, 이스라엘의 사례처럼 국가와 기업이 동원된 예비군의 급여를 감당해야 하는 경우, 기간에 따라서는 상설병을 운용하는 것보다 비용이 더 들어가게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런 이유로 예비군을 지나치게 자주, 혹은 길게 동원하는 것은 국가 차원에서도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예비군은 적의 침공을 받은 후 전쟁이 장기화될 시에 가장 ‘든든하게’ 믿을 수 있는 전력이며, 국가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소중한 전력 자원이다. 한편 대한민국은 국가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해외 파병을 비롯한 국제 평화 유지 사업에 참가할 기회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전 세계적인 추세로 본다면 효율적인 예비군의 운용은 미래 군 구조와 운영에 중요한 한 부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저자 소개
윤상용 | 군사 칼럼니스트
예비역 대위로 현재 한국국방안보포럼(KODEF)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 머서스버그 아카데미(Mercersburg Academy) 및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 국제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육군 통역사관 2기로 임관하여 육군 제3야전군사령부에서 군사령관 전속 통역장교로 근무했으며, 미 육군성에서 수여하는 육군근무유공훈장(Army Achievement Medal)을 수훈했다. 주간 경제지인 《이코노믹 리뷰》에 칼럼 ‘밀리터리 노트’를 연재했으며, 역서로는 『명장의 코드』, 『영화 속의 국제정치』(공역), 『아메리칸 스나이퍼』(공역)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