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비적인 실패로 남은 닛산 GT-R LM 니스모의 도전
변성용 입력 2017.10.23 13:24 수정 2017.10.24 16:35
조롱 받던 닛산 GT-R LM 니스모의 도전, 다시 들여다보니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WEC, 그리고 르망24시. WEC(World Endurance Championship). 번역하자면 세계 내구 선수권 대회라는 생소한 이름의 자동차 경기다. 2012년 시작되어 매년 전 세계를 돌며 레이스를 열며, 내구 레이스라는 이름에 걸맞게도 모든 레이스가 6시간을 넘게 달리는 장기전으로 펼쳐지는 것이 특징이다. 총 아홉 번의 레이스가 세계 각지를 돌며 펼쳐지지만, 사실 그 곳들의 이름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이 중 여덟 번은 단 하나의 레이스를 위하여 존재하는 들러리나 다름없으니까.
◆ 한번은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르망 24시. 정식 명칭은 24 Heures du Mans.
프랑스의 작은 마을 르망에서 매년 열리는 자동차 레이싱 경기로 현재는 캘린더 상 WEC의 연 중 세 번 째 경기로 합병된 상태. 그러나 그 실체는 1923년에 시작되어 곧 100년의 역사를 채우게 될 유구한 레이스. WEC의 일천한 역사와는 비교조차 불가하다. 이 경기의 특징이라면, 이름 그대로 24시간 내내 달린다는 것이다. 메이커의 내구성을 겨루어 볼 요량으로 시작되었던 만큼 르망 24시의 성패는 얼마나 빠르냐 보다는 얼마나 ‘문제없이’ 계속 달릴 수 있느냐가 결정한다.
전용 경기장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레이스 경기장인 라 샤르트 서킷을 쓰지만, 코스의 대부분은 평일 농장을 오가는 일반 도로를 이어 붙인 14km남짓의 코스다. 여러 클래스의 차가 뒤섞인 채 밤도 낮도 없이 운전자를 교대하며 달린다. 가로등 하나 없는 거친 노면을 오직 헤드라이트에 의지한 채 360km/h까지 가속하다 보면 겨우 하룻밤의 주행거리가 5,000km를 넘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람과 자동차 모두 견디어 내기 힘든 극한의 레이스, 그럼에도 도전이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하나. 마침내 승리를 움켜진 자에게 그만한 영예가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의 자동차 회사들은 오늘도 르망24시에 도전한다. 이미 십 수번의 우승을 거머쥔 맹주나 다름없는 회사가 있는가 하면, 번번이 좌절하면서도 수십년 째 도전을 멈추지 않는 회사 또한 있다. 닛산은 그러한 도전자 중 하나였다.
◆ 2015, 닛산, 르망, LMP1
르망에서 닛산과 토요타의 공통점이라면 이미 1980~90년대부터 르망에 꾸준히 도전했다는 것이며, 둘 다 마쓰다가 우승컵을 차지하는 순간을 씁쓸하게 바라보아야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꾸준히 르망의 문을 두드려 온 토요타와 달리, 닛산의 자세는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2014년 르망의 최고 등급인 LMP1-H의 참전 선언은 확실히 오랜만의 일이긴 했다. 하지만 복귀소식보다 센세이셔널 했던 것은 그들이 들고 나온 레이스카, GT-R LM 니스모였다. 로드 고잉 스포츠카 GT-R의 이름을 가져 온 차였지만 GT-R의 동력 구조나 섀시와는 전혀 연관성이 없었다. 아니, 그보다는 전통적인 레이스카의 구조와 방식을 전혀 따르지 않았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엔진을 운전석 뒤에 배치하는 리어 미드십 방식 대신 닛산의 레이스카는 앞에 엔진을 놓고 있었다. 기어박스까지 앞에 위치해 있었으며, 여기서 나온 동력이 직접 앞바퀴를 굴렸다. 구조적으로는 FF라고 볼 수도 있었으나, 완전한 앞바퀴 굴림차도 아닌, 하이브리드 동력을 뒷바퀴에 보내는 4륜구동 방식을 사용했다. 이를 위해 포뮬러원과 유사한 KERS(Kinetic Energy Recovery Systems)를 통해 필요할 때 마다 추가 동력을 앞바퀴와 뒷바퀴 모두에 보태는 방식을 사용했다. 코스워드와 함께 개발한 3.0 V6 트윈 터보 엔진은 르망의 어떤 엔진보다도 좋은 연비를 내면서도 500마력의 힘을 냈고, 앞바퀴의 브레이크에서 에너지를 모은 KERS의 750마력을 합쳐 도합 출력은 1250마력에 달했다.
르망이라는 특이한 환경에서 우승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에어로 다이나믹스. 초고속 주행에 특화된 에어로 터널 구조를 먼저 확보하고 남는 공간에 엔진을 우겨 넣는 방식을 취했다. 접지력을 확보하기 힘든 변화무쌍한 도로에서도 쉽게 스핀하지 않는 안정적인 차를 만들기 위해 앞바퀴 굴림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구동과 조향이 앞바퀴에 집중되면 어떻게든 앞의 접지력을 최대한 높일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전면 다운포스를 만들기 위한 낮고 길고 평평한 노즈가 만들어진다. 뒤로 갈수록 차가 좁고 얇아지는 것은 공기저항계수 감소를 염두에 두고 설계한 것이다. 이 차는 오직 르망에서의 우승만을 위해 만들어진 차였다. 2015년 6월 3대의 레이스카가 르망에 투입되지만, 정작 이 차들이 자주 카메라에 잡히는 일은 없었다.
◆ 가장 필요했던 것은 시간
결과만 놓고 본다면, 2015년 르망의 닛산은 아주 확실하게 망했다. LMP1의 경쟁자들과는 한 바퀴에 20초씩 벌어졌고 하위 클래스인 LMP2보다도 느렸다. 심지어는 코너에서 양산 투어링카인 GTE들에게 추월당하기도 했을 정도니까. 완주는 했지만 기록은 인정받지 못했다. 르망은 우승자가 달성한 랩의 70%를 달리지 못하면 가차 없이 기록에서 탈락시켜 버린다. 생김새도 구동방식도 전부다 마음에 들지 않던 사람들에게 닛산의 도전은 실패가 확정된 바보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전통을 따르지 않은 차가 내놓은 결과에 ‘예상대로’라는 혹독한 평가가 쏟아졌다. 비웃는 것은 쉽다. 하지만 당시 이 차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는 한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닛산이 택한 방법은 발상의 전환이라도 볼 수 있는 급진적인 방식이었다. 똑같은 방법으로 접근해 봐야 기존의 강자를 넘어서는데 한계를 느꼈던 그들은 르망24시라는 레이스와 규정에 최적화 된 고유의 접근을 처음부터 원점 검토했다. 그리고 엄정한 이론과 기술을 토대로 적지 않은 비용과 기술을 투입했다.
다만 미드십 후륜구동 레이아웃을 버렸다는 것은 그동안 쌓아온 레이스의 노하우와 데이터를 쓸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개발에 주어진 시간은 불과 14개월. 사전 테스트를 할 새도 없이 WEC 시즌이 시작되었고 르망이 닥쳐왔다. 신뢰성 테스트를 할 여유조차 없이 일단은 실제 레이스에 나가서 가능한 많은 데이터를 모으는 것으로 결정된다.
개발이 난항을 거듭했던 가장 큰 이유는 에너지를 저장하는 KERS였다. 영국의 토로트락(Torotrak)사가 제작한 하이브리드 시스템은 원래 1500마력을 목표로 만들어진 물건이었지만 내구성을 이유로 원래 목표의 절반인 750마력 수준으로 하향되었으며, 그나마 르망이 시작될 때까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이는 엔진의 출력만 의존해 달려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LMP1의 경쟁 모델에 비해 랩당 최소 16초가 벌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출력 부족 외에 문제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하이브리드와 연결된 뒷바퀴의 트랙션이 몽땅 죽어 버린 차는 가속할 때마다 앞바퀴굴림 특유의 무시무시한 토크스티어를 일으켰고, 감속에너지를 회수할 수 없던 상태로 제동에너지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던 브레이크는 오버히트를 거듭한 끝에 결국 녹아 내렸다. 이런 상황을 24시간 동안 투지로 버텨낸 드라이버와 미캐닉이 바란 것은 오직 하나. 데이터, 데이터의 확보였다. 전대미문의 영역을 스스로 달려 나가면서 데이터가 쌓이고 차의 세팅도 잡혀 가기 시작했다. 레이스가 끝나갈 무렵의 아침, 차는 뮬잔느 스트레이트에서 최고속 338km/h를 찍으며 최고기록을 갱신했다.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GT-R LM 니스모의 실전 데이터는 다른 곳이 아닌 바로 르망24시 레이스의 한복판에서 얻어낸 것이다.
“앞바퀴 굴림 레이스카를 가지고 르망에 출전한다는 사실 자체가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일입니다. 지금까지의 믿음을 거스르는 일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우리가 맞다면, 모두의 생각도 바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달릴 겁니다. 우리의 목표 또한 우승이거든요.”
팀 디렉터 벤 보울비의 말이다. 그는 2016년 완성된 하이브리드 시스템을 장착한 차로 르망에서 제대로 싸울 것을 다짐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은 GT-R LM 니스모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단기간 내 실적을 기대했던 닛산의 이사회는 르망으로의 대규모 투자가 조롱으로 돌아오자 더 이상의 비용 투입을 멈추기로 결정한다. 닛산의 LMP1 팀은 해체되었고, 책임자는 해고 되었으며, 개발 인력은 WEC의 하위 클래스인 LMP3의 엔진 연구개발로 돌려진다.
급진적이기까지 했던 닛산의 도전은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우리 손에 또 하나의 르망 스토리를 남겨 놓고 떠났다. 그들은 달리 생각했고, 과감히 실행에 옮겼으며, 치열하게 싸웠다.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면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야말로, 그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단 한가지였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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