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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성용의 '사라진' 차/한국인이 만들어 영국을 들썩이게 했던 스포츠카, 솔로2

바래미나 2018. 1. 31. 13:38

변성용의 '사라진' 차 변성용의 '사라진' 차

한국인이 만들어 영국을 들썩이게 했던 스포츠카, 솔로2

변성용 입력 2017.09.20 10:24 수정 2017.09.26 15:03 


팬더 솔로, 그 이름만큼이나 외로웠던 길 (2)

팬더 솔로2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영국의 백야드 빌더 팬더와 김영철 사장의 인연, 그리고 그가 부활시켰던 차 칼리스타에 이어 그들이 만들고자 했던 스포츠카 솔로의 이어지는 이야기. 이번에는 솔로2를 다룬다.

◆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 솔로2

솔로의 개발 중지부터 선언한 뒤 영국으로 돌아간 김영철 사장의 고민은 깊었다. 회사의 흥망을 좌우할 결심은 이미 내려졌지만 그렇다고 솔로를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차를 완성시켜 세계적인 자동차의 반열에 올려야겠다는 꿈은 더욱 확실해졌다. 신차 개발을 위해 조직이 급격하게 불어난 팬더사도 문제였다. 이대로 멈추면 자금난이 시작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고민 끝에 그가 내린 결정은 원점으로 돌아가 개념부터 재 정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포드와의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지적되었던 상품성에 대한 부분이었다. 회사의 신용에 상처를 입지 않도록 기자와 연관 업체, 그리고 500파운드의 계약금을 이미 건넨 고객들을 설득시키는 일은 염려와는 달리 수월하게 진행됐다. 논의를 거쳐 새 차의 개발 방향 중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정해진다.

- 현재의 1.6리터 엔진보다 월등한 고성능의 터보 엔진
- 풀타임 4륜 구동 시스템
- 뒷좌석이 있는 2+2 구조

18개월 만에 프로토타입 제작을 완료한 팬더의 제작진. 가운데가 디자이너 켄 그린리

최초의 솔로는 스틸 프레임의 경량 미드십 구조를 채택한, 105마력의 포드 에스코트 XR3i 엔진을 가로 배치한 목표가 1만2,000파운드의 차였다. 9,500파운드의 양산차 토요타 MR2와 거의 모든 면에서 흡사한 일상의 스포츠모델이었다. 새 차는 양산 미드십 모델과 비교당할 일 없는 슈퍼카의 영역을 겨눈 차로 설정되었다. 솔로의 후계 차종인 만큼 새로운 차의 이름은 ‘솔로2’로 명명된다. 변경된 사양을 수용하기 위해 차량의 전체 크기가 세밀하게 재조정되기 시작한다. 뒷좌석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휠베이스가 94mm연장되고 폭도 50mm 늘어난다.

디자인은 전작에 이어 켄 그린리가 계속 맡아 진행했다. 영국산 슈퍼 스포츠를 앞세운 디자인은 전 과정이 1/3 풍동 테스트를 통해 다듬어진다. 복잡한 형상의 리어 디퓨저와 스포일러를 통해 다운포스를 끌어올리는 동시에 (후부 스포일러는 실제로 최고속도에서 37kg의 다운포스를 만들어 냈다) 공력특성에 대한 세밀한 조정이 개발 내내 진행된다. 솔로2의 가장 특징적인 회전식 헤드라이트 또한 공력 계선의 결과물 중 하나였다. 구조적 문제로 팝업식 헤드라이트를 채용할 수 없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짜낸 방식이었지만, 결과는 아주 좋았다. 헤드라이트를 닫은 상태에서는 완벽한 공기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달성한 공기저항계수는 Cd 0.33. 이런 실측 기반의 에어로 다이나믹스 디자인이 가능했던 것은 전문 레이싱 컨스트럭터의 개입 덕분이었다.

솔로2의 헤드라이트 작동 데모. 실제 라이트는 회전방향에서 17도 가량 비틀린 채로 돌았다.

후부 스포일러와 디퓨저의 복잡한 형상은 풍동 테스트를 통해 다듬어진 결과물이다.

솔로2의 엔지니어링을 주도한 것은 마치 엔지니어링 (March engineering). 당시 F1용 섀시의 설계와 제작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마치는 자회사였던 복합소재 전문회사 콤텍과 함께 최신의 컴포지트 바디 성형 방식을 솔로2에 도입한다. 새로운 차체는 알루미늄 허니콤 구조에 에폭시 레진을 올리고 여기에 유리섬유 패널을 적층하는 샌드위치 구조로 당연하게도 F1의 방식을 적용한 것이었다. 이것은 스포츠카로서의 강성은 물론 포드와 협상 중 제기되었던 충돌안정성을 비약적으로 끌어 올렸다. 바디의 비틀림 강성은 무려 1만3,500 Nm/degree에 달했으며 이는 현대의 스포츠카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수준이었다. 운동성과 직접적으로 상관없으나 강성은 여전히 필요한 바디 마운트나 휠아치 같은 부분은 케블라와 카본파이버 같은 소재를 아낌없이 투입했다. 엔진과 서스펜션을 떠받치는 리어섹션은 튜블라 프레임 구조가 채택된다.

솔로2의 섀시. 당시로는 첨단의 복합소재 기술이 적용됐다.

엔진은 포드 시에라 RS에 탑재된 2리터 터보사양으로, 당시 그룹 A투어링카의 호몰로게이션 규정 (500대의 양산차를 발매해야 했다)을 충족시키기 위해 명문 코스워드사에서 새롭게 개발한 엔진이었다. 솔로1의 2배에 달하는 204ps의 출력은 보그워너의 T5 변속기를 거친 후 퍼거슨사의 4륜 구동 시스템을 통해 전후 33:67의 고정 비율로 네 바퀴에 전달 되었다. 하지만 엔진이 앞에 있던 시에라에 비해 솔로는 미드십 방식. 동력계의 레이아웃이 모조리 바뀐 만큼 이 복잡한 구동계를 좁은 차체에 배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변속기와 트랜스퍼 케이스를 어떻게든 센터 터널 속에 밀어 넣기 위해 엔진이 8도 가량 비스듬하게 고정된다. 앞뒤로 구동력을 분산시키는 트랜스퍼 케이스는 아예 새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체인 구동방식을 적용한 케이스는 나중에 솔로를 괴롭히는 수많은 문제 중 하나가 된다.

뒷쪽으로 세로 배치된 코스워드의 2.0 터보 엔진. 엔진이 삐뚤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착각이 아니다. 실제로 8도 가량 틀어져 있다(사진 맨위). 솔로2의 실내와 계기판(사진 아래)

적당한 포드의 양산차 부품이 있다면 철저하게 활용하는 방법은 그대로였다. 실내의 스위치와 엔진, 변속기는 물론 서스펜션 암과 ABS 모듈까지도 포드 양산차의 부품을 가져다 썼다. 다만 고급 스포츠카인 만큼 고품질의 파츠도 썼다. 레카로의 시트와 모모의 스티어링, 가죽으로 마감한 실내는 고급 스포츠카로 평가받기에 충분했다. 늘어난 휠베이스 덕에 공간은 솔로1에 비해 크게 넓어졌지만, 추가된 뒷좌석은 어린이가 타기에 적당한 정도였다. 운전석을 앞으로 밀어낸 탓에 휠하우스가 발 공간의 절반을 잠식하는 문제도 있었지만, 페달의 위치를 최대한 조정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7000 rpm의 RPM 게이지를 가운데에 놓고, 속도계와 오일압력계, 수온계, 전압과 부스트 게이지를 주변에 배치한 계기판은 영국차 특유의 담백함이 묻어 나왔다.

1987년 6월, 김영철 사장은 팬더의 지분 80%를 쌍용차에 넘긴다. 그해 10월, 개발 시작 18개월 만에 솔로2의 첫 주행 프로토타입이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모습을 드러낸다. 영국 언론들은 앞 다퉈 영국 스포츠카의 재림을 알리기 바빴다.

영국 CAR 매거진 1987년 10월호. '재규어 E 타입 이래 가장 중요한 영국제 스포츠카'라는 부제에서 당시 영국 매체가 솔로2에 보인 절대적인 호의를 짐작할 수 있다.

◆ 3년이 미루어진 시판

완성된 솔로의 핸들링은 극찬을 받을 만한 수준이었다. 당대 최고의 스포츠카였던 로터스 에스프리와의 대결에서, 솔로2는 경쟁자를 뛰어넘는 운동성으로 찬사를 받았다. 4륜구동 시스템은 진입 초기 특유의 언더스티어 성향을 보이다가도, 가속페달을 조절하는 것만으로 바로 제어 가능한 오버스티어 성향으로 바뀌었다. 운전석이 전륜과 바짝 붙어있는 덕분에 차량의 거동 변화는 직설적으로 운전자에게 전달되었다. 그립은 튼실했고, 섀시는 언제나 풍부한 피드백을 전달해 주었다.

프랑크푸르트 모터쇼에 출품된 솔로2의 초도 프로토타입 1호. 18개월 만에 만들어진 차였다.

그러나 핸들링을 제외하면 솔로2는 기대만큼 빠른 차가 아니었다. 한 잡지사의 실측 테스트에서 솔로2는 카탈로그 스펙인 240km/h에 못 미치는 230km/h의 최고속도를 보였으며 이 정도는 차라리 양호한 편이였다. 0-96km/h에 6.8초, 0-400m에 18초라는 기록은 당시의 기준으로도 슈퍼 스포츠카로 등재되기에는 힘든 수준이었으며, 이것은 파워트레인을 가져다 쓴 포드 시에라 RS 보다도 느린 기록이었다. 코스워드 터보 엔진이 가진 원래의 문제, 그러니까 터보랙이 매우 심하고 5000rpm을 넘기면 나타나는 거친 회전 질감은 고성능 스포츠카의 달리기가 지향하는 바와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도 억지로 조립한 듯 한 조악한 마감 처리는 재앙 수준이었다. 무명 브랜드의 스포츠카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존 시장의 강자를 위협할 수 있는 가격과 마감, 그리고 성능이 필수이건만 솔로2는 그 중 무엇 하나도 갖추지 못한 채 세상으로 나왔다.

솔로2의 발매 지연을 알리는 오토위크 1988년 8월 15일자 기사

솔로2가 실제 판매된 것은 발표 후 3년이 지난 1989년이 되어서였다. 콤텍은 초도 섀시 30대분을 만들어 제때 납품했지만, 개발 지연과 자금, 품질 문제가 계속 솔로2의 발목을 붙잡은 탓이었다. 마침내 실체를 드러낸 솔로2는 더 이상 저렴한 스포츠카가 아니었다. 발매 시점의 가격은 40,000파운드(오늘날의 시세로 약 1억4천만원), 원래 목표였던 28,000파운드에서 크게 올라버린 가격대는 로터스 에스프리 터보나 포르쉐 911 같은 전통의 강호들이 버티고 있었다. 거듭된 발매 지연에 품질문제를 안은 채 등 떠밀리듯 나온 고가의 스포츠카를 선 듯 구입할 사람은 없었다. 솔로2가 생산을 시작한지 1년만인 1990년, 쌍용은 팬더의 영국 생산시설을 폐쇄하고 생산시설을 한국으로 이전한다. 쌍용의 평택공장 한켠에서 생산된 칼리스타가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동안에도 솔로2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대로 사라지는가 싶던 솔로가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로부터 5년 뒤였다.

1995년 첫 서울 모터소에서 선보인 솔로3. 솔로 시리즈의 마지막이었다.

◆ 쌍용의 품에서도 외로웠던 솔로

1995년 서울모터쇼의 쌍용자동차 부스에 차 한대가 솔로3라는 이름을 달고 등장한다. 휠베이스와 오버행이 어색하게 길어진 것은 새 파워트레인을 억지로 우겨 넣은 결과였다. 쌍용은 당시 벤츠와 기술제휴를 통해 3.2 리터 직렬 6기통 엔진과 5단 자동변속기를 손에 넣은 상태였다. 솔로3는 이 파워 트레인의 홍보를 위한 ‘틀’로서 기존 생산분 하나를 재활용한 목업(mock up)일 뿐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괴작의 디자이너 또한 켄 그린리였다. 팬더를 통해 시작된 그와 쌍용의 인연은 무쏘와 뉴코란도 같은 성공작을 통해 결실을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의욕적으로 작업했던 1세대 체어맨 디자인이 독일팀에게 패한 뒤, 이후 그의 역할은 자문 정도에만 머물렀다. W카라는 컨셉 스포츠모델을 마지막으로 그가 쌍용에서 차 한대를 온전히 디자인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솔로의 마지막이기도 했다.

쌍용은 애당초 솔로3를 양산과 연결시킬 생각이 없었다. 칼리스타에서 이미 쓰라린 실패를 맛본 쌍용은 수익성이 보이지 않는 스포츠카 사업을 접고, 고급세단과 SUV에만 집중하기에 이른다.

솔로2의 총생산대수는 18대였다. 그 중 3대는 아직도 영국에 도로주행차로 번호판이 등록되어 있다. 김영철 사장이 국내 반입 후 개인적으로 소장하던 양산 2호차는 2004년 국민대학교에 기증되었다. 국내에 있는 단 한 대의 솔로2는 지금도 국민대 7호관의 주차장 한 켠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잠들어 있다. 외롭게도, 마치 그 이름처럼.

김영철 사장이 국민대학교에 기증한 솔로2

기사 참조자료: 사랑과 비즈니스에는 국경이 없더라-1989, 김영철 저
영국 CAR 매거진 1987년 10월호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