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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성용의 '사라진' 차 /제조사와 함께 장렬히 스러져간 기아차 파크타운

바래미나 2018. 1. 31. 13:27

변성용의 '사라진' 차 변성용의 '사라진' 차

제조사와 함께 장렬히 스러져간 기아차 파크타운

변성용 입력 2017.07.31 08:02 수정 2017.07.31 17:00 


언제 사라졌는지 아무도 모르는 차, 기아 파크타운

기아차 파크타운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1997년, 순식간에 지나간 한국 왜건의 봄. 세단을 만드는 자동차 회사에게 왜건은 꽤나 매력적인 상품이다. 가진 걸 바탕으로 비교적 쉽게 확보할 수 있는 파생 모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건 왜건의 무덤이나 다름없는 한국시장에서도 다르지 않다. 길지 않은 한국의 자동차 역사 속에서도 왜건은 잊을 만하면 고개를 내민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자동차 회사들이 꾸준히 왜건을 만들어 소비자에게 건네 온 덕분이다.

1967년 신진자동차가 퍼블리카 세단을 기반으로 한 왜건을 시판한 이래로 20M 왜건, 현대 코티나 왜건, 포니 왜건, 시보레 카라반 같은 차가 나타났다가 사라져갔다. 경찰차용으로 아주 작은 양이 만들어졌던 스텔라 왜건 이후 10년 이상 공백 상태였던 국산 왜건이 다시 소비자들 앞에 선보인 것은 1995년, 서울모터쇼의 아반떼 투어링이었다. 미니밴인 척 했지만 사실은 키 큰 왜건에 가까웠던 현대 산타모, 대우의 누비라 스패건도 속속 시장에 등장했다.

기아도 부랴부랴 프라이드 베타를 기반으로 한 왜건을 만들어 시장에 뛰어들었다. 프라이드가 처음 판매를 시작한 지 10여 년 만에 나온 네 번째 가지치기 차종은 뒤늦은 감이 있었지만 금방 전체 프라이드 판매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한다. 1997년 중반, 한국의 왜건시장은 한 달에 4,000대를 넘는 정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준중형 카테고리에 머물던 라인업이 중형시장으로 확대 되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사실 기아는 콩코드 왜건을 다 만들어 놓고도 발매를 저울질 하다 크레도스의 시판날짜가 다가오면서 포기했던 전력이 있었다. 기아는 다시 크레도스 왜건의 개발에 들어갔다. 크레도스의 토대가 되었던 마쓰다의 중형차 크로노스는 세단과 해치백만 존재했기에 개발은 온전히 기아의 몫이었다. C필러의 매끈한 처리를 위해서는 프론트 도어 뒤를 모조리 새로 만드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첫 시도인 중형왜건에 너무 많은 돈을 들이기에는 부담이 컸다. 그래서 세단의 리어 도어를 그대로 쓰되 D필러 전체를 테일라이트로 뒤덮어 시선을 집중시키는 독특한 디자인이 도입된다. 7인승 이상 차량이 승합차로 분류되어 감세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점에 착안해 접이식 3열 2인 시트도 추가된다.

엔진도 새로 추가했다. 크레도스2 세단과 왜건 모두에 도입된 신형 KV6엔진은 영국 로버에서 라이선스를 받아 생산한 것으로, 높아진 배기가스 기준을 맞추기 위해 최신기능을 잔뜩 탑재하고 있었으며, 실제 로버의 플래그십 모델에 고루 사용되기도 했다. 2.5리터와 2리터 두 가지 중 크레도스에 탑재된 것은 2리터급으로, 세금 기준을 맞추되 성능과 정숙성 높은 6기통 엔진으로 승부하겠다는 심산이었다. 1997년 제2회 서울모터쇼에서 그 결과물은 베가본드라는 이름으로 선보인다. 모터쇼 직후 시판일정을 공개할 예정이지만 실제 이 차의 발매까지는 1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버리고 만다.

기아그룹은 법정관리에 들어가며 부도를 잠시 유예 받은 채새 주인을 찾는 상황에 내몰린다. 사진=MBC 캡처

◆ 외환위기의 한복판에 떨어진 레저카

1997년 초부터 시작된 대기업 연쇄부도와 갑작스러운 해외자본 회수, 동남아 외환위기 여파 등으로 경제상황이 급속도로 악화되어 급기야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경제위기가 닥쳤다. 경제난은 소비위축을 불러왔고 특히 기아의 법정관리와 부도유예조치는 차량판매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가져온다. 신차의 발매 자체가 불투명해지고 있던 1997년 11월, 채권단이 기아차 정상화를 위한 9개 모델을 양산 승인하면서 최악의 상황은 모면하게 된다. 원래 크레도스1의 얼굴을 하고 있던 왜건도 부랴부랴 크레도스2의 페이스 리프트작업을 받은 뒤 양산준비에 돌입한다.

1998년 7월의 파크타운 신문광고. 당시 부도유예조치로 최악의 상황에 처한 기아차 입장에서는 마지막 희망 중 하나였다.

부도유예의 마감시간이 다가오던 1998년 2월, 다급한 기아의 마지막 승부수가 띄워진다. 중형차 최초로 V6 엔진을 탑재한 크레도스2가 시판되고 5개월 뒤, 왜건형 모델 파크타운이 데뷔한다. 중형차 기반의 왜건도 처음이었지만, 4기통 2.0L, 1.8L엔진은 물론 V6엔진까지 선택할 수 있는 왜건도 국내 최초였다. D필러에 단 수직 테일램프는 개성이 넘쳤으며, 뒷좌석 시트를 모두 접으면 나타나는 2,606L의 큰 화물공간도 매력적이었다. 고장력 강판 사용 비율을 31%로 높여 안전성을 강화하였으며 자전거와 스키, 서핑보드를 적재할 수 있는 루프랙을 갖춰 레저용 자동차의 면모도 갖췄다.

그러나 세제 혜택을 받고자 만든 7인승 모델은 뜻밖의 암초를 만난다. 발매 직전 건설교통부가 파크타운을 세금 혜택 대상에서 제외해 버린 것이다. 사전 승인 없이 3열 시트를 장착하였다는 이유였다. 세금 때문에 억지로 달았던 비좁은 3열 시트는 쓸모도 크지 않고, 감세효과도 없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건설교통부가 끝내 7인승 승인을 내주지 않았던 이유인 3열 시트의 모습. 왜 그랬을까? 판단은 당신의 몫이다. 사진=자동차생활 1998년 7월호

◆ 불명예 기록을 경신한 뒤 사라지다

그러나 파크타운이 발매될 즈음 이미 기아차의 사세는 기울대로 기운 뒤였다. 소비심리가 최악으로 얼어붙은 상황에서 레저용 중형 왜건이 발을 디딜 곳 따위는 아무데도 없었다. 파크타운이 발매되고 3개월 뒤, 기아차는 현대차로 인수된다. 파크타운은 1998년 7월에 출시해 1999년 상반기에 후속 차종 없이 단종되면서 대한민국 자동차 역사상 수명이 가장 짧은 모델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판매량은 약 870대로 알려져 있으며 판매 종료까지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 정확한 단종 시기는 기아차 내부에서 조차 모를 정도였다.

외환위기가 아닌 좋은 시절을 만났다면, 이런 모습이 한국에서도 자주 펼쳐졌을 수도...

외환위기 이후 환율상승으로 휘발유 값이 큰 폭으로 오르면서 자동차 시장의 중심은 디젤과 LPG 엔진을 단 7인승 세제 혜택의 SUV와 RV로 옮겨간다. 달아오르던 왜건 시장이 된서리를 맞았음은 물론이다. 현대는 싼타모를 라인업에 더하는 한편 싼타모를 바탕으로 개발한 카스타를 기아에 OEM 공급했다. 기아는 1999년 LPG 엔진을 쓰는 카렌스, 디젤 엔진을 쓰는 카니발을 내놓는다. 대우도 2000년 레조를 내놓아 크로스오버 미니밴 시장에 뛰어들었다. 1999년 현대 트라제 XG, 2000년 현대 싼타페 등 실용성을 강조한 승용차 바탕의 신개념 크로스오버카가 줄지어 나왔다.

파크타운은 여러 가지 기록을 남겼다. ‘이전 세대도 다음 세대도 없이’, 단 한 세대만 출시해 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짧은 생을 마감했으며, 한정판도 아니건만 채 1,000대도 만들어지지 못했다. 범국민적인 세단 사랑에 정면으로 호소한 중형 왜건이자, 회사와 함께 장렬히 스러져간 차, 지금의 기아와는 많이 달랐던 기아가 만든 차, 내가 기억하는 파크타운이다. 20년의 시간을 지나, 파크타운의 적자라 할 수 있는 K5 스포츠왜건을 한국에서 만날 기회는 과연 올 수 있을까?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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