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자동차 관련-여러가지-

변성용의 '사라진'차 /미군에 납품하려 발버둥 치다 쪽박 찼던 람보르기니

바래미나 2018. 1. 31. 13:18

변성용의 '사라진' 차 변성용의 '사라진' 차

미군에 납품하려 발버둥 치다 쪽박 찼던 람보르기니

변성용 입력 2017.07.11 08:05 수정 2017.07.11 08:11


군용차가 되고 싶었던 비운의 람보르기니, LM002 (1)

람보르기니 LM002, 사진=Automobili Lamborghini S.p.A.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가히 SUV 전성시대다. 대중적인 브랜드는 물론 SUV를 거들떠보지 않았던 스포츠카나 럭셔리 브랜드들까지 앞다투어 SUV를 내놓고 있다. 마세라티나 벤틀리는 물론 랜드로버와 한지붕 식구인 재규어까지 SUV를 만든다. 포르쉐가 첫 SUV인 카이엔을 내놓았던 2002년, 스포츠카의 순수성을 훼손한 처사라며 성토의 대상이 되었던 기억은 이제 가물가물하다. 원래의 분야에서 특출한 성취를 이룬 회사들인 만큼, 고유의 색이 진한 SUV는 이제 볼륨모델이자 캐시카우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SUV는 이제 슈퍼카 브랜드조차 버려둘 수 없는 시장이 되어버렸다.

2012년 베이징모터쇼에서 선보였던 컨셉트카 ‘우루스’(Urus)의 양산형은 빠르면 올해 말, 늦어도 내년 중에는 선보일 예정이다. 경쟁적으로 양산을 시작한 럭셔리/스포츠카 메이커 SUV의 대미를 장식할 우루스는 이탈리아 세인트 아가타 볼로냐 공장에서 생산될 예정이며, 벤테이가도 사용한 폭스바겐 그룹의 MLB 플랫폼을 사용한다. V8 4.0L 트윈터보 엔진을 시작으로 플러그인 하이브리드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카이엔이나 벤테이가, 르반떼 등이 그러했듯이 우루스도 람보르기니의 판매량을 비약적으로 늘려줄 기대주로 손꼽힌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우루스는 람보르기니의 첫 번째 SUV는 아니다. 포르쉐가 SUV로 외도를 떠나기 10여 년도 전에 람보르기니는 SUV로 한차례 외도를 해본 적이 있다,

람보르기니 우루스 컨셉트

◆ 군용차에 사활을 걸었던 람보르기니

람보르기니는 유난히도 그 경영에 수난사가 많은 회사다. 창업자 페루치오 람보르기니가 전후 농업용 트랙터 제작으로 성공한 뒤 람보르기니를 세운 것은 잘 알려진 사실. 그러나 1970년대 농업의 퇴조로 트랙터의 수요가 급격히 줄고, 석유파동과 경제불황까지 겹쳐 회사사정은 크게 악화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노사분규까지 터지자 그는 경영권을 스위스 사업가 조지-헨리 로세티에게 넘긴 뒤 1974년 자신의 농장으로 낙향해버린다.

창업자의 손을 떠난 람보르기니의 상황은 점점 나빠져만 간다. 카운타크를 중심으로 실루엣과 우라코 같은 소형 람보르기니를 추가해 보았지만 반응은 좋지 않았다. 주문이 없다고 공장을 놀릴 수는 없는 터, 궁여지책으로 다른 회사의 개발과 생산을 대행해 주는 외주로 버텨보려 했지만 이걸로는 언 발에 오줌누는 격이었다. 코너에 몰린 람보르기니가 사운을 걸고 매달린 아이템은 ‘군용차’였다.

1970년대 베트남전을 치르고 난 미국은 오래된 M151 지프를 대체할 고기동 차량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수량이 많은 미군의 차량 교체이니 만큼 경쟁의 열기는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소문만 듣고서 참가 의사를 밝힌 회사가 60곳이 넘었고 그중 일부는 서둘러 차부터 만들기 시작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 중의 하나가 람보르기니의 미국 파트너, MTI라는 회사였다.

오프로더라고는 한 번도 만들어본 적이 없는 람보르기니는 개발과 영업을 MTI에 맞기는 대신 돈을 대고 나중에 잘 되면 생산을 맡는 물주의 역할을 맡았다. 딱히 요구사항조차 없던 상황에서 군용 오프로더의 특성을 감안한 개발 일체가 미국에서 진행되었고, 그 결과물이 1977년에 치타(Cheetah)라는 이름을 달고 등장한다. 강관프레임 섀시에 FRP 보디를 씌운 차는 특이하게도 엔진과 변속기가 뒤에 달린 풀타임 4륜구동 방식을 취했다. 자사의 엔진 대신 쓴 ‘미국제’ 크라이슬러 V8 OHV 엔진은 미군의 마음에 들어 보려는 발버둥에 가까웠다.

람보르기니 치타 컨셉트. 람보르기니의 이름을 달고 있지만 미국에서 만들어진 차다.

최고시속 167km, 0→시속 60마일(약 97km) 가속 11초의 성능은 오프로더로서는 나쁘지 않았지만, 뒤쪽에 쏠린 무게가 밸런스를 망친 탓에 핸들링이 좋지 않았고, 장비와 인원을 잔뜩 실은 험로에서는 출력 문제가 두드러졌다. 당시 물가로 2만5,000달러가 넘는 비싼 값도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람보르기니에게 있어 치타는 희망 그 자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미군과의 납품 계약이 성사되기만 한다면, 기울어져 가던 사세를 단번에 회복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치타는 미국 군용차 테스트에 응시조차 못했다. 광고영상을 찍거나 군 관계자 몇 명을 모아놓고 사막을 왔다 갔다 하는 정도가 다였다. 미군의 고기동 다목적차량(HMMWV)에 대한 요구사항이 구체화된 것은 2년의 시간이 흐른 뒤인 1979년의 일로, 람보르기니에게는 그때까지 버틸 체력이 없었다. 물주의 돈이 떨어진 것을 안 MTI는 치타의 권리를 다른 회사에 넘긴 뒤 회사 문을 닫아버렸고, 프로젝트는 공중으로 떠버린다.

더 큰 문제는 람보르기니가 군용차 프로젝트에 투입한 돈이 BMW로부터 M1 외주 프로젝트를 위해 받은 선금이었다는 것이다. BMW는 돈을 날린 것은 물론 생산지연으로 M1의 호몰로게이션 인증이 늦어지면서 레이스 계획을 모조리 취소해야 했다.

그렇게 쪽박을 찬 람보르기니는 법정관리 신세가 된다.

-2부에서 계속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