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하게 망한 GM의 흑역사 국산 첫 쉐보레, 시보레 1700
변성용 입력 2017.05.31 11:25 수정 2017.06.05 18:19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정확하게 하자면 ‘쉐보레’ 브랜드의 국내 진출은 2011년이 아니고 1972년이다. 신진자동차와 GM이 제휴해 만든 GM코리아가 출시했던 ‘시보레 1700’은 철저하게 실패했고, GM코리아는 공적 자금이 투입된 후 대우에 팔려 나가는 신세가 되었다. 만약 그 첫 쉐보레가 성공했다면 우리의 자동차 역사의 방향은 또 다르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2011년 초 GM대우는 결단을 내렸다. 사명을 한국GM으로 바꾸고 내수 시장에 쉐보레 브랜드를 공식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이미 대우라는 이름이 주는 로열티는 예전에 엷어져 버렸고 GM대우의 공장에서는 쉐보레 엠블럼을 붙인 차가 쉴 새 없이 수출되던 상황이었다. 모두가 변화를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쉐보레 브랜드의 도입은 긍정적인 시장 반응을 이끌어냈다. 판매실적은 바로 반응했고 국내와 글로벌 라인업도 자연스레 동기화가 이루어졌다. ‘쉐보레’라는 새로운 발음을 모티브로 한 대대적인 광고를 전개하기도 했다. 여기서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Chevrolet는 그 전까지 한국에서 ‘시보레’로 통했다. 굳이 무리수를 둬가며 발음을 바꾼 이유 중의 하나로 GM의 관계자는 ‘과거’의 청산을 말한 적이 있다. 과거? 과거라니?
◆ 1972년에 나온 첫 국산 쉐보레, ‘시보레 1700’
과거 한국에는 신진자동차라는 회사가 있었다. 대우자동차의 전신이기도 한 이 회사는 1960~70년대 한국 자동차시장을 주름잡던 회사였다. 토요타와의 기술제휴 덕분이었다. 그러나 1970년, ‘반공’을 내세운 국가는 물론 진출한 회사와도 거래를 끊겠다는 중국의 저우언라이 4원칙이 발표되면서, 토요타는 한국시장 철수를 선언한다. 염원하던 중국시장의 진출을 위해 한국과의 모든 관계를 청산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졸지에 자동차 생산을 멈추게 된 신진은 대신 미국의 GM과 손을 잡는다. 1972년 합작법인인 GM코리아를 설립하고 초대 사장에 신진자동차의 김창원, 수석부사장에 H.W 벤지를 선임한다. 신진자동차 시절 코로나와 크라운으로 전개했던 보급형 소형차와 고급형 중형차의 투트랙 전략을 GM코리아에서도 똑같이 적용했다. 그해 8월, 부평공장에서 시보레 1700과 레코드 1900이 생산을 시작한다.
레코드 1900은 GM의 독일 자회사 오펠의 인기 중형차 레코드(Rekord)를 들여온 것으로, 엔진과 보디 등 주요 부품을 오펠에서 수입해 만들었다. 1972년 출시 당시 값은 기본형이 263만7,000원, 디럭스가 279만3,000원 (2016년 물가 환산 시 약 4,500만원선)의 차량이었다. 당시 이런 비싼 고급차를 구입할 수 있는 고소득 계층은 정말이지 많지 않았다. GM코리아의 성공적인 안착을 위해서는 보다 대중적인 시보레 1700의 성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시보레 1700의 모태는 GM의 호주자회사 홀덴이 개발한 LJ 토라나(Torana) 였다. 길이×너비×높이 4,386×1,600×1,354mm, 휠베이스 2,540mm로, 당시로서는 돋보이는 유선형의 현대적인 디자인이 돋보이는 쿠페 스타일의 차였다. 경쟁 모델인 현대 코티나와 아시아 피아트 124에 비해 큰 차체와 엔진도 돋보였다.
직렬 4기통 1.7L(1,698cc) 엔진은 최고출력 79마력/5,600rpm, 최대토크 13.0kg·m/3,500rpm의 힘을 냈으며 4단 수동변속기로 최고시속 140km의 성능을 냈다. 출력은 당시 경쟁 모델이었던 현대자동차의 코티나 (1.6L 75마력)나 아시아자동차의 피아트 124 (1.2L 65마력)보다 강했다. 또한 앞뒤 서스펜션 모두 코일 스프링을 달아 승차감을 높였고 충격흡수식 스티어링휠과 2중 브레이크 시스템 등으로 안전성도 높였다. 출시 당시의 값은 기본형이 179만8,000원, 디럭스가 193만8,000원 (2016년 물가 환산 시 약 3,000만원) 이었다.
1972년 9월 19일, 조선호텔 그랜드 볼룸에서 시보레 1700과 레코드 1900의 신차발표회가 열린다. 우리나라에서 글로벌 개념의 신차발표회가 열린 것은 이때가 처음으로, 장관과 정·제계 인사, 주한 외교관, 운수업자 등 5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루었다. 현재와 같은 신차발표회 개념이 없었던 시대에 글로벌 브랜드인 GM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신차발표회 같은 이벤트가 열릴 수 있었던 셈이다.
GM코리아는 전국 주요 33개 도시를 돌며 새 차 이벤트를 열었고 당시로는 보기 드문 24개월 할부 프로그램과 월 1.081%의 국내 최저 할부이자율 등으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생소한 ‘시보레’ 브랜드를 알리기 위해 GM코리아는 신문과 잡지에 이런 식의 광고 카피를 사용했다.
‘캐딜락을 아시지요. 지엠의 자동차입니다.
빅크(buick:뷰익)를 아시지요. 지엠의 자동차입니다.
올즈모빌을 아시지요. 지엠의 자동차입니다.
폰티악을 아시지요. 지엠의 자동차입니다.
시보레 1700도 지엠의 자동차입니다.’
◆ 신진 시절 코로나와 전혀 다른 처절한 실적
시보레 1700이 나올 당시 대중차 시장은 선대 모델이자 절대강자였던 신진자동차 코로나의 단종으로 아시아자동차의 피아트 124(1970년 3월~1973년 4월)와 현대자동차의 뉴 코티나(1971년 11월~76년 12월)가 양분하고 있었다. 여기에 새롭게 등장한 시보레 1700은 신진자동차의 맥을 이은 GM코리아의 첫 모델이자 야심작이었기에 데뷔 초기에는 치열한 판매전이 예상됐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튼튼하고 힘은 좋았으나 낮은 연비가 문제였다. 베이스가 되었던 홀덴 토라나는 최대 V6엔진을 탑재하기도 한 차다. GM의 기준에서 1.7리터 엔진은 토라나 정도의 덩치를 움직이는데 적당한 출력과 연비였지만, 경제성을 따지던 한국 고객들에게는 ‘크게’ 느껴졌다. 당시 일반 승용차 배기량의 심리적 한계선인 1.5리터를 넘는데다가 실제 연비마저 이제껏 경험한 다른 차들에 비해 낮았다.
GM코리아에서는 연비가 14.5km/L로 좋다고 선전했지만 시보레 1700의 연비가 나쁘다는 소비자들의 불만은 바로 퍼져 나갔다. GM코리아는 브랜드 차원에서 ‘Z-세이버’라는 연료 절약기를 달아 주기도 하고 서울에서 추풍령까지 시험주행을 하면서 연비가 세간의 인식만큼은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지를 깨는데는 역부족이었다. 택시 시장에서조차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낮은 지상고도 문제였다. 163mm의 최저 지상고는 현대 코티나(180mm)는 물론 자사의 중형차 레코드 1900(187mm)보다도 낮았다. 도로 포장률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낮았던 한국에서 걸핏하면 바닥을 긁어 대는 차는 고객들 사이에서 큰 불만을 샀다. 그렇게 연비와 지상고 악재로 고전하던 와중에, 결정타가 찾아온다.
◆ 매력적인 경쟁차의 등장으로 서둘러 단종
1973년 4차 중동전쟁이 아랍권의 패배로 끝나면서, 중동 산유국들은 일제히 석유 감산을 선언하며 원유가를 올려 버린다. 12월에 유가가 평균 30% 인상되었고 1974년 1월 다시 두 차례에 걸쳐 102%(28+74%)가 올랐으며 4월 들어서 또다시 11%가 상승했다. 1차 오일쇼크가 들이닥친 것이다. 해외 자동차 시장은 물론 국내 자동차 시장도 급속하게 얼어붙었다. 그 중에서도 연비가 좋지 않은 시보레 1700의 타격은 불을 보듯 뻔했다.
GM코리아의 시장 점유율은 1973년 57%에서 1974년 21%, 1975년 15.4%로 뚝뚝 떨어졌다. 여기에 기아와 현대가 고유가 상황에 부합하는 매력적인 소형차를 내놓으면서 시보레 1700의 입지는 더욱 쪼그라들었다. 먼저 기아자동차가 일본 마쓰다와 손을 잡고 파밀리아를 기본으로 배기량이 1,000cc도 안 되는 소형차 브리사(S-1000)를 내놓았다. 1974년 말 생산을 시작해 1975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판매되기 시작한 브리사는 예쁜 스타일에 연비도 좋은 데다 자동차세도 다른 소형차보다 낮아 나오자마자 시장점유율 58.1%의 대박을 터트렸다. 가뜩이나 현대 뉴 코티나에 밀려온 시보레 1700은 브리사의 등장으로 더욱 설자리를 잃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쐬기를 박는 차가 등장한다.
1974년 현대차가 첫 고유모델 소형차인 포니를 발표한다. 1974년 10월 토리노모터쇼에서 선보인 국내 첫 고유모델인 포니는 길이×너비×높이 3,970×1,558×1,360mm의 아담한 차체에 미쓰비시제 1.2L 새턴 엔진으로 80마력의 출력을 냈다. 시보레 1700보다 훨씬 적은 배기량으로 더 큰 출력을 내면서도 연비는 훨씬 좋았다.
포니가 본격 양산을 시작한 1975년 말, GM코리아는 시보레 1700의 단종을 결정한다. 생산은 1972년 9월부터 1975년 12월까지 불과 3년 4개월 동안 유지되었고, 고작 8,105대가 생산되는데 그쳤다. 국내 첫 쉐보레는 떨어지는 상품성과 여러 가지 악재 속에서 철저히 실패한 후 대중들에게서 잊혀져 갔다.
◆ 시보레 1700의 파생모델들도 모두 실패
시보레 1700이 망할 조짐을 보이자, GM코리아는 나름 살 길을 찾아 나섰다. 레코드 1900을 레코드 로얄로 업그레이드시키는 한편 적자를 보전하기 위해 시보레 1700을 기반으로 한 파생 모델을 만들었다. 1974년 11월, 남아도는 시보레 1700의 엔진과 섀시를 이용해 급조한 픽업트럭이 ‘새마을트럭’이라는 다분히 정치적인 이름으로 발매된다. 이 차도 연비가 발목을 붙잡으면서 1979년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2,100여대 밖에 팔리지 못했다.
스테이션 왜건도 만들었다. 1976년 1월 시보레 1700을 바탕으로 한 왜건 모델인 캬라반은 일반 승용차라기 보다는 앰뷸런스 같은 특수 목적차 시장이라도 잡기 위해 만든 것이였다. 앞모습과 실내는 시보레 1700 그대로였던 캬라반은 값이 기본형 285만원, 디럭스가 300만원이었다. 이 모델 역시 비싼 값과 좋지 않은 연비가 발목을 붙잡으면서 1976년 1월부터 1979년 3월까지 겨우 966대 생산된 후 단종됐다.
시보레 1700의 세 번째 변종은 시보레 1700에 1.5L급 다운사이징 엔진을 얹은 모델이었다. 1976년 1월 캬라반을 내놓은 데 이어 불과 3개월 만에 시보레 1700에 1.5L급 1,492cc 엔진을 얹어 내놓은 카미나(Camina)가 시판된다. 이 차는 시보레 1700 엔진의 실린더 내경을 5.5mm 줄이고 배기량을 206cc 줄인 1,492cc의 배기량으로 최고출력 66마력/5,000rpm, 최대토크 11.2kg·m/3,100rpm의 성능을 냈다.
카미나는 엔진만 바꾸지 않고 겉모습과 실내도 살짝 손봤다. 길이×너비×높이는 4,353×1,600×1,370mm로 시보레 1700보다 33mm 짧고 16mm 높았다. 시보레 1700을 기본으로 앞쪽에 수평형 와이드 그릴을 달아 새로운 느낌을 냈고 앞뒤 범퍼에 기존보다 두툼한 크롬 범퍼를 장착했다. 소형차로는 보기 드문 헤드 레스트도 처음 달았다. 하지만 카미나 역시 시장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낮은 최저지상고 등 시보레 1700의 약점은 그대로 안은 채 경쟁 모델보다 큰 차체를 끌게 된 1.5L 엔진은 힘 없다는 평가를 내내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카미나도 77년 3월까지 단 922대만 생산된 뒤 시장에서 사라졌다.
◆ 결국 망한 GM코리아, 새한 거쳐 대우차로…
판매와 수익의 중추를 담당할 차와 후속모델이 모조리 망하고 오일쇼크의 악재까지 겹치면서 1975년 GM코리아는 회사 설립 이후 최악의 시기를 보내게 된다. 1976년 결국 GM코리아는 산업은행의 관리업체가 된다. GM과의 관계는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회사 이름은 새한자동차로 변경되고, 산업은행이 GM과의 합작 주체가 된다.
새한자동차는 실패한 시보레 1700과 카미나를 버리고 1977년 말 이스즈 제미니를 베이스로 한 새한 제미니를 내놓았다. 이 차는 오펠의 인기 소형차 카데트의 이스즈 버전으로, 섀시와 보디는 새로웠지만 엔진은 카미나의 1.5L 유닛을 조금만 개선한 채 그대로 얹었다. 이후 새한자동차는 대우에 인수되었고 제미니는 ‘맵시’란 새 이름을 얻었지만 이때에도 제미니, 그러니까 카미나의 엔진이 그대로 들어갔고, ‘나쁜 연비’ 이미지도 계속 이어진다. 시보레 1700의 잔재를 완전히 떨쳐내게 되는 것은 이로부터 한 참 뒤였다. 대우자동차가 자체개발한 1.5L급 XQ엔진을 탑재하고 맵시의 차명을 맵시-나로 바꾼 것은, 1983년 9월이 되어서였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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