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부활을 준비하는 투 더 퓨처' 車 DMC-12
오토엔 입력 2017.05.08 17:50 댓글 20개
비운의 천재가 만들어낸 비운의 차, 드로리언 DMC-12 (2)
[변성용의 ‘망한’ 차 이야기]
◆ 영국의 지원, 북아일랜드의 공장
디자인과 개발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존 드로리언은 돈을 마련하려 애를 쓰고 다녔다. 폰티액 시절부터 공고하게 다져진 400개의 딜러는 그가 차를 만든다는 소식에 실물도 보지 않고 덜컥 200대를 주문한다. 순식간에 모인 800만달러는 드로리언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했지만, 개발과 생산을 독자적으로 진행하려는 그의 계획에는 최소한 1억 5천만달러는 필요했다. 이런 엄청난 투자액을 손에 넣기 위해 그가 선택한 길은 개별 ‘국가’와 협상하는 것이었다. 최신의 자동차 제조기술과 함께, 고용창출과 매출을 빌미로 해당국 정부의 직접 투자를 이끌어 내겠다는 심산이었다.
시작은 아일랜드였다. 협상은 초기에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존 드로리언이 GM을 쳐부술 ‘글로벌 자동차 회사’에 대한 장광설을 늘어놓으면서 엉클어지기 시작했다.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간단하다는 식의 태도는 실무적인 관료들에게 드로리언을 허언증 환자로 여기게 만들기 충분했다. 아일랜드를 걷어찬 뒤 접촉한 푸에르토리코 정부는 부지와 세금감면 혜택만을 약속했을 뿐, 중요한 비용 투자 부분에는 미적거렸다. 지루한 협상이 이어지던 와중에 GM지사장의 소개로 북아일랜드 정부가 연결된다. 답을 기다리던 푸에르토리코 관료들을 뉴욕 호텔에 내버려 둔 채 드로리언은 바로 북아일랜드로 날아간다.
1949년 영국에서 분리된 아일랜드와 달리 여전히 영국령이었던 북아일랜드는 독립파와 정부가 총격전을 벌이고 구교와 신교가 서로 폭탄을 던져대는 내전에 가까운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30%가 넘는 실업률을 낮추고 갈등을 잠재울 수 있다면 투자는 오히려 저렴하게 먹히는 쪽이었다. 영국 정부는 공장부지 제공과 함께 별도로 1억2천만달러(현재 한화 환산 시 약 6,000억원)를 지원한다는 제안을 내밀었다. 1978년 드로리언은 영국 정부와 계약을 맺고 북아일랜드의 수도 벨파스트 근교 던머리에 6만1,000제곱미터에 이르는 공장을 착공한다.
◆ 실차 개발은 로터스가 맡아
생산 문제를 해결한 뒤에는 표류하고 있던 개발을 처리해야 했다. 처음부터 개발조직을 구축할 마음이 없었던 드로리언은 개발 전과정을 외주 처리하려 했다. 그러나 적은 예산과 빠듯한 일정을 선뜻 받아들일 회사가 없었다. 구원의 손길은 이탈디자인을 통해 영국에서 온다. 로터스의 간판 스포츠카 에스프리를 디자인했던 쥬지아로는 로터스의 오너 콜린 채프먼에게 드로리언의 기술지원이 가능할지 의사를 타진한다.
돈이 궁했던 로터스는 18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차를 만들어 줄 것을 약속한다. 차량의 골격이 되는 튜브프레임에 파워트레인과 서스펜션을 매단 뒤 외피를 씌우는 백본 프레임 구조는 큰 변형 없이도 DMC-12의 기획의도를 담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선택지였다. 로터스는 DMC-12에 맞도록 에스프리의 백본 프레임을 대폭 수정한 차를 넘긴다. 하지만 대량 양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로터스의 백야드 빌드식 제조방법은 이후 생산시점에서 막대한 장애요소가 된다.
엔진도 처음부터 외부에서 가져올 계획이었다. 초기의 미드십 계획과 달리 RR차가 되어버린 DMC-12에 올릴 수 있는 것은 V6 엔진이 한계였다. 검토 끝에 선택된 엔진은 PRV 엔진. 푸조(P)와 르노(R), 볼보(V)가 자사의 승용모델에 쓰려 합작 생산한 것이었다. V6 2.8L 130마력 엔진은 스포츠카의 그것으로는 모자란 구석이 많았지만 타사의 고성능 엔진은 너무 비쌌고 관리도 수월치 않았다. 이것 말고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1980년, 3년 늦어진 1호차 출고
악전고투를 거치며 모양을 갖춰 나가고 있었지만, DMC의 첫 출고는 이미 원래의 계획에서 3년이나 늘어진 상태였다. 1980년 12월, 1호차가 만들어질 때쯤 DMC의 자금난은 한계에 이른다. 시판을 서두르면서 5만 마일 내구테스트를 제외한 모든 테스트가 취소된다. 내구테스트도 북아일랜드 안에서만 달린 것일 뿐 혹한이나 혹서 테스트도 건너뛴다.
양산을 시작하니 이제는 인력의 자질 문제가 불거져 나왔다. 첨단기능을 잔뜩 넣은 DMC-12를 조립할 임무를 받은 사람들은 공장 주변에서 끌어모은 실업자들로, 생전 기계 비슷한 것은 만져본 적 없는 비숙련자들이었다. 이들을 데려다 작업 지침서 하나 없이 투입한 조립라인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시동조차 걸리지 않는 차들이 속출했고, 걸윙 도어 태반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 와중임에도 납기 독촉은 이겨낼 방도가 없었다. 그 상태 그대로의 초도 물량 379대가 최초로 미국에 선적되었다. 양산 시작 6개월만이었다.
GM의 천재 엔지니어 존 드로리언과 조르제토 쥬지아로의 이탈디자인, 로터스의 창시자 콜린 채프먼의 손길을 거쳐 탄생한 DMC-12는 공개 직후부터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걸윙 도어를 갖춘 미래적인 스타일과 스테인리스 스틸 보디, 로터스의 백본 프레임 기반 차체, 당시로서는 고성능이었던 0→시속 60마일(약 97km) 가속 8.5초, 최고시속 210km 등의 제원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영국 파운드화 폭등까지 겹치면서 시판 가격은 원래 예정가의 두 배를 넘는 2만5천달러(당시 환율로 1,750만원, 현재 가치 환산 시 약 8,000만원)까지 오른 상태. 풀옵션 콜벳이 2만달러가 넘지 않던 상황이었지만 시장은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순식간에 차량가액의 1/5인 5천달러의 프리미엄이 붙었고, 딜러마다 수십 명이 계약금을 내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광풍의 한가운데로 문제의 초도 물량이 떨어진 것이다. 고객 인도 전 차를 확인한 딜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 상태로는 인도가 불가능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모든 DMC-12를 다시 뜯어서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차량 당 500시간이 추가로 들어가면서 고객 인도는 또 늘어졌다. 가까스로 차를 인도받은 고객들이 생기기 시작했지만, 진짜 재앙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걸윙도어는 물이 새거나 제대로 닫히지 조차 않았으며, 알터네이터의 용량부족으로 차가 길 한복판에서 퍼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DMC-12의 품질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나갔고, 기다리던 고객들도 슬금슬금 발을 빼기 시작한다.
이런 대소동의 와중이었지만 북아일랜드 공장의 상황은 오히려 좋아지는 중이었다. 작업숙련도가 쌓이기 시작했고, 산적한 생산문제도 해결방법을 찾아 나가면서 차량 자체의 품질은 급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악재는 계속 터졌다. 1981년 말, 폭설과 강추위가 북미를 덮치면서 모든 자동차의 판매가 곤두박질친다. 여기에 회계 담당자가 드로리언이 회사 돈을 빼돌려 호화생활을 했다고 폭로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그는 고용을 늘리는 것으로 영국정부에게 추가 비용을 받아내려 했으나, 수출차관까지 포함해 이미 2억달러 이상을 털어넣은 영국 정부는 더 이상 자금을 내줄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급여가 밀리기 시작하면서 궁여지책으로 공장은 일주일에 3일만 문을 여는 상황에 이른다. 드로리언은 공장을 유지할 돈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녔으며 막판에는 중동의 오일머니까지 찾아다니며 회사를 ‘인수할’ 사람을 찾아 호소했지만, 1982년 2월, 결국 DMC는 부도처리 된다. 근로자들은 13주간 출근투쟁을 벌이며 회사를 지키려 했지만, 돌이키기에는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 짧은 영광, 그리고 급속한 몰락
사면초가에 몰린 사람들은 때로는 터무니없는 짓을 벌이기도 한다.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겠다는 각오가 지나쳤던 탓일까, 드로리언은 절대로 해서 안 되는 일마저 손을 댄다. 1982년 10월, 드로리언은 3,400만달러(당시 환율로 약 270억원, 현재 가치 환산 시 약 1,250억원)어치의 마약을 거래하려 한 혐의로 잠복 수사관들에게 현장 체포된다. 최대 15년 형이 가능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가까스로 무죄 판결을 받고 빠져 나오게 된다.
불법적인 증거수집과 함정수사 과정 때문에 법정에서 채택될 수 있는 합법적인 증거가 부족했고, 유명인을 곤경에 몰아넣어 수사성과를 과시하려 한 FBI의 공작으로 몰아세운 언론들 덕분에 배심원들은 드로리언에게 호의적이었다. 형사소송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부채로 인한 채권단과의 민사소송은 2005년 드로리언이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영국 법정에 설 경우 무조건 구속을 예상했던 그는 죽을 때까지 영국에 가지 않았으며, 로터스는 개발비 착복과 은닉혐의로 결국 대표이사가 구속되기에 이른다 (‘회장’이였던 콜린 채프먼은 사망으로 인해 이 모든 일의 책임을 피한다). 1999년,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뉴저지의 대저택이 압류당할 때 즈음에서야, 그는 재기에 대한 미련을 버린다. 사족이지만, 경매에 나온 땅을 냉큼 손에 넣어 골프장을 만들어 버린 부동산 업자는 훗날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이 된다.
◆ 그리고 Back to the future
DMC가 문을 닫기 전까지 모두 8,500대의 DMC-12가 생산됐다. 아이러니하게도 1985년 작 영화 ‘백 투 더 퓨처’는 DMC의 명멸과는 상관이 없는 영화였다. DMC가 문을 닫은 지 2년 뒤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식어가던 DMC-12의 관심은 이 영화 덕분에 다시 살아나며 전 세계 사람들의 기억 속 한 켠에 자리 잡게 된다. DMC가 문을 닫은 뒤 공장은 철거되었고, 남은 자재는 고철로 헐값에 매각되었다. 폐업의 혼란 속에 뒤죽박죽이 된 자재는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한 사업가에게 넘어간 뒤 자그마치 15년에 걸친 재분류 과정을 거쳐 미국 텍사스에 자리를 잡게 된다.
그리고 2007년, 드로리언의 이름을 딴 회사가 새로이 문을 열었다. 200대 분의 새 차를 만들 수 있는 자재를 이용하여 한동안 차량 복원사업을 하던 그들은 2017년 소량생산 차에 대한 법 개정이 이루어지면서 전기차 버전은 물론 최신 배기규정을 맞출 신형 엔진과 변속기를 탑재한 새 DMC-12의 생산을 준비 중이다. 존 드로리언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DMC-12의 여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아니, 지금도 쉼 없이 미래로 돌아가는(Back to the future) 중이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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