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제리 회사가 슈퍼카를? 그 시절 일본은 가능했다
변성용 입력 2017.06.20 15:56 수정 2017.07.31 17:02
버블붕괴와 함께 터져버린 일본 슈퍼카의 꿈
지오토 카스피타 (Jiotto Caspita) (1)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도무? 동몽? 돌이켜보면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는 세계 경제가 다시 경험하기 힘든 어마어마한 활황기였다. 자동차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다양성에 대한 요구도 높아졌으며, 자동차 시장은 양적인 성장은 물론 질적인 성장까지 이루게 된다. 당대의 자동차 기술을 모두 쏟아 부어 만든 톱클래스의 드림카, 이른바 슈퍼카 시장 또한 이 때를 기점으로 본격화됐다.
지금까지도 전설로 군림하고 있는 페라리 F40이나 포르쉐 959같은 차들이 출현하기 시작했고, 엄청난 가격도 불구하고 발매 즉시 매진됐다. 여기에는 버블경제의 절정을 달리고 있던 일본의 매집 열기도 한몫했다. 전 세계 슈퍼카를 닥치는 대로 사들이는 최고의 고객 일본은 단순 소비자에 머무는 수준에서 슬슬 이런 차를 직접 만드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슈퍼카에 걸맞은 헤리티지나 브랜드 파워는 부족했지만, 넘쳐나는 돈과 기술은 브랜드조차 만들면 그만이라는 낙관론으로 귀결되던 시절이었다. 다만 최초의 일본 슈퍼카를 만든 곳은 토요타나 닛산과 같은 거대 브랜드가 아니다. 도무(童夢, Dome)라는 생경한 이름의 회사가 그 주인공이다.
한글로 읽었을 때 동몽, 말 그대로 어린이의 꿈이라는 이름의 회사는 이름에서 풍겨오는 낙천적 이미지와는 달리 살벌한 레이스의 세계에서 오직 실적만으로 존재가치를 증명해 온 레이스카 컨스트럭터다. 1975년 창업한 이래, 당시로서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신소재 카본 컴포지트로 레이스카 바디를 만들고, 일본 최초의 르망 그룹C 머신을 자체 개발하고, 포뮬러 3000 클래스를 주도하는 등 일본 레이스의 형태를 주도해 나갔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도무의 창업자 하야시 미노루가 있었다. 그 거침없는 행보만큼이나 그는 자신의 신념을 밀어붙이는데도 망설임이 없었으며, 관행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모든 불합리에 독설을 날려대는 사람이었다. 평생을 일본 레이싱계와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살았지만, 이건 여기서 다룰 이야기는 아니니 패스. 레이스 트랙에서 쌓은 기술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한 궁극의 도로 주행차량에 대한 그의 집념은 대규모 투자를 통해 급격하게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 란제리 회사가 슈퍼카를?
1988년 와코루(Wacoal)사의 사장인 츠카모토 요시카타는 여성용 란제리 시장을 넘어서 남성용품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할 방도를 찾고 있었다. 때는 버블의 시대, 비쌀수록 물건이 잘 팔리던 호황기니만큼, 처음부터 초고가 남성 브랜드의 런칭을 목표로 삼았다. 인지도 제로의 신생 브랜드를 라이센싱을 통해 전 세계로 확장시키겠다는 대담한 전략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모두가 우러러 볼 수 있는 브랜드의 아이콘이 필요했다.
그 브랜드의 아이콘이 초고성능 슈퍼카로 결론지어진 것은 하야시 미노루의 고집스러운 설득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와코루 스포츠카 프로젝트 위원회가 결성되고, 대규모의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개발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시작한다. 란제리 회사가 슈퍼카 제작에 손을 댄다는 이 황당한 전개는 이게 단지 버블경제의 시대였기 때문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으며, 여기에는 의외의 접점이 있기도 했다. 츠카모토 요시카타는 하야시 미노루의 처남이기도 했다.
하야시 미노루가 세운 원칙은 다음과 같았다.
-그룹 C 레이스카의 노하우를 피드백
-도로주행용차량으로 각국의 인증규격을 통과할 것
-12기통 엔진의 탑재
-시판 도로주행용 차량 중 가장 뛰어난 성능을 낼 것.
◆ 와코루의 자금지원으로 개발 시작
1988년 7월 차량의 디자인이 시작됐고, 브랜드 이름은 지오토(Jiotto)로 결정됐다. 자사 상품만을 디자인하는 전문회사 지오토 디자인을 설립하고 GM의 디자인 센터 출신인 일본인 디자이너 이토 쿠니히사를 영입한다. 200여개의 디자인 스케치가 경합한 끝에 선별된 3개의 최종 후보 디자인은 실제로 1:5 모형으로 제작되어 풍동 테스트를 통해 가장 뛰어난 공력특성을 가진 모델로 선택됐다. 그룹 C카를 연상시키는 유선형의 에어로 다이나믹 모델은 또다시 1/5 풍동 테스트를 통해 더욱 세밀하게 다듬어졌다. 익스테리어 디자인이 기능에 치중하여 완성될 동안, 수많은 슈퍼카의 스타일링을 기반으로 한 인테리어 디자인도 형태를 잡아갔다. 레이스카의 기능미를 극대화하되, 장식을 배제한 오직 달리기에만 집중하도록 한 스파르탄한 디자인이 특징이었다.
샤시 개발도 빠르게 진행됐다. 카본과 알루미늄을 적층한 샌드위치 구조의 모노코크 바디를 오토클레이브 오븐에서 고열로 구워 성형한다는 개념은 현재에도 쓰이고 있을 정도로 선진적이었지만, 1980년대는 아직 카본을 다루는 기술이 안정화되기 전이었다. 모노코크 쉘 하나를 완성시키기 위해 최소 두 달이 소요되는 것은 양산에 큰 장애요소로 지적되었지만, 그 해결책은 그냥 오토클레이브를 많이 사는 것이었다. 어쨌든 돈은 넘쳐나는 시절이었기에.
◆ 스바루도 파트너로
엔진수급도 새로운 파트너인 스바루가 뛰어들면서 해결된다. 당시 F1에 참전을 준비하고 있던 스바루는 막 이태리로부터 F1용 ‘수평대향’ 3.5리터 12기통 엔진을 손에 넣었다. 이 엔진은 알피로메오의 치프 엔지니어였던 카를로 치티가 독립해 세운 회사 모토리 모데르니가 제작한 것으로, 원래는 F1의 엔진 규정변경을 노리고 알파로메오에 팔 생각으로 시작한 프로젝트였지만, 정작 알파로메오가 F1을 관둬 버리면서 중간에 붕 떠버린 물건이었다.
사족이지만, 스바루의 F1 참전은 이제 아무도 기억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실패한다. 훗날 WRC의 빛나는 업적을 이룩하기 전까지 스바루의 F1 진출은 두고두고 브랜드를 괴롭히는 흑역사가 된다. 하지만 이 엔진을 가지고 F1에 나가라는 꼬드김에 넘어간 데에는 혼다의 F1 성공에 맞서 ‘수평대향’ 박서 엔진을 마케팅해야 할 스바루만의 이유가 있었다. 여기에 공도용 슈퍼카까지 손에 넣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기대한 그들은 선뜻 엔진을 내놓는 것은 물론 모토리 모데르니에 엔진의 디튠을 주문하기에 이른다. 비록 일반 도로용으로 조절되면서 출력이 낮아지긴 했지만, 450마력은 당시 슈퍼카로 등극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출력이었다.
형태를 갖추어 나갈수록 보는 사람마다 내뱉는 감탄사를 아예 이름으로 붙이자는 의견에 따라 차 이름은 이태리어로 ‘와우’라는 감탄사에 해당하는 “Caspita(카스피타)’(주1) 라고 지어진다. 1989년, 아직 개발을 마무리 짓지 못한 상황이였지만 새 차를 자랑하고 싶어 몸이 달은 스바루가 반 강제로 자사 부스에 차를 끌어다 올려놓는 것으로 일본 최초의 슈퍼카는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다. 모두가 이 차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던 시간, 운명은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버블 붕괴’라는 이름으로..
(주1: 또다른 이탈리아 슈퍼카 이름인 Countach!는 감탄사라는 점에서는 같으나 1)멋진 아가씨를 볼 때 내 뱉는 용례 한정사이며, 2)피에몬테 지방에서만 쓰이는 방언입니다. 쿤타쉬! 라고 읽습니다.)
-2부에서 계속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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