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 미드십 스포츠카를 향한 어느 한국인 사업가의 꿈
변성용 입력 2017.08.29 14:24 수정 2017.08.29 16:09
팬더 솔로, 그 이름만큼이나 외로웠던 길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영국의 백야드 빌더 팬더와 김영철 사장의 인연, 그리고 그가 부활시켰던 차 칼리스타에 이어 그들이 만들고자 했던 스포츠카 솔로1과 솔로2를 2회에 걸쳐 다룬다.
◆ 클래식 레플리카를 넘어 미드십 스포츠카로
칼리스타의 성공적인 판매는 팬더사에 커다란 자신감을 불어 넣었고, 다음 차를 꿈꾸게 할 동기와 자본을 마련해 줬다. 하지만 새 모델은 팬더가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클래식 레플리카와는 판이하게 다른 노선을 취했다. 김영철 사장이 만들고 싶었던 차는 현대적인 모습과 성능을 갖춘 스포츠카였다. 그리고 백야드 빌더와 레이스 컨스트럭터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영국에는 풍부한 경험을 쌓은 인력이 있었다. 자칫 이상에만 머무르고 말았을 아이디어를 실체화 한 솔로의 설계자 렌 베일리(Len Bailey)도 그 중 하나였다.
렌 베일리. 이미 60세를 넘긴 나이의 노장은 지금의 자동차 제작환경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종류의 개발자였다. 정규공학교육을 받는 대신, 16살에 견습생으로 자동차 회사 오스틴(Austin)에 들어가 바닥부터 개발의 실무를 익혀 나갔다. 당시만 해도 남아있던 도제방식(apprentice)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였다. 2차 대전이 끝난 뒤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레이스카 부흥기의 한복판을 제작자로 지냈다. 숱한 차의 개발 현장에 몸담았으며 그 중에는 포드의 초대 머스탱이나 르망 24시의 포드 GT40같은 전설적인 차도 있었다. 김영철 사장을 만났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60대 중반으로 업계에서 은퇴한 뒤였다. 하지만 평생을 자동차 바닥에서 보낸 이의 마음은 김 사장의 열정과 함께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매일같이 머리를 맞대고 씨름하며 팬더의 새로운 차를 형상화하기 시작한다.
- 높이 48인치(약 1210mm), 휠베이스 98인치(약 2500mm) 이하의 미드십 2인승 구조
- 가로배치 엔진 레이아웃
- 기존의 팬더차와 같이 포드 양산차의 엔진과 부품을 사용
- 저렴한 부품과 좋은 연비를 실현
모델이 된 것은 당대 스포츠카의 정점이였던 페라리 308GTB였다. 이 차의 형식을 따르되 가격은 이탈리아제의 절반 이하를 목표로 하는, 그러니까 미니 페라리에 가까운 존재가 솔로였다. 최초 베일리가 그려낸 원안은 고성능 슈퍼카에 가까운 존재였지만, 솔로는 그보다 아래의 틈새시장을 노리고 있었다. 엄청난 재산가가 아니어도 살 수 있는 차, 일상을 함께 해도 부담 없는 보다 대중적인 경량 스포츠카 시장은 달리 경쟁자가 없어 신예 스포츠카 브랜드가 진입하기에 딱 좋은 니치마켓으로 인식되기 충분했다. 솔로가 목표한 시작가격은 미화 1만5,000달러 (오늘날의 물가로 약 6,000만원), 현실과 목표를 조정해 가면서 차량의 개발방향도 점점 형태를 잡아간다.
엔진과 변속기는 포드 에스코트의 고성능 버전 XR3i에 들어가는 4기통 1.6리터 DOHC과 5단 수동. 이것을 차량의 중심부에 놓되, 운전석은 최대한 앞으로 밀어내는 캡포워드 디자인을 적용했다. 자연스레 시트와 격벽 사이 공간이 확보되며 미드십 스포츠카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여유로운 공간도 생겼다. 경량 스포츠카로 제작되었지만 최초의 설계방식을 유지했기에 섀시의 허용출력은 400마력이나 되었다. 이를 활용하기 위해 고출력 터보엔진이나 4륜구동 탑재까지도 염두에 둔 개발이 진행된다. 바디패널은 초기 알루미늄이 검토되었지만, 이미 칼리스타의 부품을 대기도 빠듯한 상황. 벨트라인 상부만 알루미늄으로 하고, 하부는 모두 글래스 파이버의 외피로 감싸는 형태로 진행된다.
구조적인 완성도에 비해 섀시는 놀랄 만큼 단순한 형태를 지녔다. 강재나 파이프를 복잡하게 얽은 스페이스 프레임 대신 오직 강판을 이용, 절곡하고 용접하는 박스형 모노코크 방식으로 만들었다. 프론트와 리어에 자리잡은 허니컴 구조의 벌크헤드는 그 자체로 격벽 역할을 하면서 측면 하부 박스부와 결합하며 강성을 증대시켰다. 여기에 벌크헤드 자체가 차체를 떠받치는 구조물로 서스펜션과 차체의 하중을 직접 받아내는 구조는 당시 레이스카의 제조 방식을 그대로 이식한 결과였다. 엔진 뿐만 아니라 미적 요소와 상관없는 부품들은 모조리 다른 포드차에서 가져왔다. 프론트 서스펜션 암은 중형차 코티나에서, 리어 서스펜션 암은 소형차 에스코트에서 이식했고, 조향장치는 시에라의 랙 앤 피니언 컬럼에 에스코트의 일부를 조합해 썼다. 네바퀴의 디스크 브레이크와 허브도 모두 포드제였다. 목표한 특성을 맞출 수 만 있다면 따로 만들 필요가 없는 양산 부품들이었다.
섀시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차를 완성시킬 디자이너를 수소문하기 시작한다. 쥬지아로로 유명한 이탈디자인에 연락을 해 보았지만 답변조차 받지 못하는 무시를 당하기도 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이름 있는 디자인회사들은 하나같이 수백만달러에 이르는 엄청난 금액을 요구했다. 팬더의 자금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액수였다. 고심하던 어느 날, 김 사장은 영국의 자동차 디자인 명문 로열 컬리지 오브 아트 (Royal College of Art)에서 졸업작품전을 한다는 소식을 접한다. 졸업생들이라도 몇 명 구해서 일단 디자인을 시작해 볼 요량으로 찾아간 자리에서 그는 학생 대신 두 명의 교수와 마주하게 된다. 후일 솔로의 인테리어를 담당할 존 헤프논과 익스테리어를 담당할 켄 그린리였다.
김영철 사장의 설명을 들은 두 명의 교수는 새 차의 디자인을 맡겨 달라고 요청한다. GM과 아우디에서 일해 본 경험은 있었지만, 차량 한 대를 온전히 디자인해 본 적은 없는 사람들이었다. 다분히 모험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였지만, 김 사장은 이를 협상에 이용하는 사업가였다. 원래 제시한 금액에서 크게 깎은 3만파운드에 디자인을 맡기는 것이 최종 합의된다.
원래의 절반 비용에 1/5와 1/1 클레이 모델 제작까지 떠맡게 된 상황이였지만, 이는 두 교수들에게 결코 손해만 보는 상황은 아니었다. 화제의 중심에 서게 될 영국제 스포츠카의 디자이너가 되는 것은 명성을 얻는 지름길이었으며 두 번 다시 없을 기회이기도 했으니까. 다섯가지의 원안 스케치 중 최종적으로 켄 그린리의 디자인이 선택되고, 존 헤프논은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담하게 된다. 엔지니어와 디자이너 사이의 고단한 협업이 시작된다. 때로는 언성을 높이고 싸우면서 절충점을 찾아내기를 꼬박 1년, 실물 사이즈의 엔지니어링 목업이 모습을 드러낸다.
모습을 드러낸 솔로는 당시 도입되기 시작한 에어로 다이나믹스 개념에 충실한 차였다. 캡포워드 형식을 따른 차는 후드의 길이와 유리창의 각도, 뒷유리의 디자인과 리어윙까지 모두 풍동테스트를 통해 다듬어졌으며 최종적으로는 공기저항계수 0.30 Cd를 달성하기도 했다. 켄 그린리가 익스테리어 작업에 주력하는 동안, 존 헤프논은 인테리어를 완성시키기 위해 애썼다. 양산파츠를 쓴 스티어링 휠이나 계기판, 공조장치 같은 것들이 자유로운 디자인에 제약으로 작용했지만, 포드나 MG의 느낌은 싹 걷어낸 독립적인 캐릭터를 주기 위해 애썼다.
1984년, 타르가톱을 장비한 최초의 프로토타입이 런던 모터쇼에 출품되었고, 팬더의 부스는 대 성황을 이룬다. 목표로 한 첫 해 파일럿 물량은 30대였지만 100대의 선주문이 들어올 정도였다. 반응에 고무된 팬더사는 1년에 2000대의 솔로를 제작할 계획까지 세운다. 목표대로만 된다면 칼리스타의 전체 생산량의 2배가 넘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이 차를 눈여겨 본 사람은 일반 고객만이 아니었다. 당시 포드 유럽의 부사장이였던 밥 루츠도 솔로에 관심을 기울였다.
◆ 지연되는 협상, 그리고 원점으로
BMW를 시작으로 포드를 거처 나중에는 크라이슬러, GM의 최고위 요직을 모두 거치게 될 이 전설적인 인물이 이 차에 관심을 가진 것은 순전히 포드의 ‘부품’ 때문이었다. 당시 포드는 이미지 리더로 쓸 스포츠 모델들이 죄다 어정쩡한 괴작 수준에 머물러 고심하던 상황. 이 때 엔진부터 경첩까지 포드제 부품을 가득 채운 신형 스포츠카가 갑자기 눈앞에 떨어진 것이다.
팬더의 공장을 방문한 그는 직접 시작차에 탑승하여 차량을 확인한 뒤 솔로를 포드의 스포츠카로 판매하는 방안을 연구 검토할 것을 지시한다. 곧바로 포드의 엔지니어링과 마케팅 인력이 투입되고 합작 개발에 대한 타당성 검토가 시작된다. 팬더사 입장에서는 엄청난 흥분에 빠질 사건이었지만, 협상은 순탄하지 않게 전개된다. 양산 포드 수준의 생산 품질과 충돌안정성 확보를 위해 엔지니어링과 생산방식의 전면 수정 요구가 전달된다. 차선책으로 팬더의 이름을 사용하는 방법도 제시되지만, 이번엔 마케팅 쪽에서 반대한다. 다른 브랜드의 차를 포드의 딜러망을 통해 팔았다가는 이후 딜러가 딴 차를 팔아도 막을 수가 없게 된다는 이유였다.
지루한 협상이 이어지던 가운데 이번에는 조직이 변경된다. 검토를 지시했던 밥 루츠가 크라이슬러로 자리를 옮기고 협상의 완충 역할을 하던 포드의 마케팅 이사까지 다른 업무로 발령을 받는다. 6개월간의 협상이 원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원래 완성되었어야 할 주행 테스트용 프로토타입은 협상 완료 후 요구사항을 반영하기 위해 6개월 째 진행도 못한 상황이었다. 진이 빠져버린 김영철 사장은 머리라도 식힐 겸 다른 사업장이 위치한 괌에 들렸다가 뜻밖에도 솔로 프로젝트의 결정적 저주와 마주치게 된다. 그것은 평소에 알고 지낸 토요타 딜러의 사장이 호의로 빌려준 신형차였다.
◆ 본의 아닌 저승사자, MR2
MR2. 미드십 리어 드라이브 2시터라는 차량의 성격을 그대로 이름에 드러낸 차는 토요타가 1976년부터 선행개발을 시작해 내놓은 결실이었다. 양산 파워트레인의 배치를 바꾸는 것으로 운동성을 끌어올리려던 사내 연구가 일본의 경기부흥과 맞물려 대량양산 미드십 스포츠카라는 초유의 제품으로 귀결된 것이다. 코롤라의 앞바퀴굴림 1.6리터 엔진과 변속기를 그대로 반전시켜 좌석 뒤에 배치한 간편한 형태의 미드십 차체는 로터스와 협업으로 개발한 것으로, 영국의 손길이 닿은 차답게 공차중량은 고작 950kg에 불과했다. 미드십 특유의 뛰어난 운동성, 토요타의 차다운 고품질과 마감, 무엇보다도 솔로의 목표가격과 비교하면 훨씬 저렴한 가격은 충격적이었다.
김영철 사장 또한 이 차의 발매는 알고 있었지만, 솔로에 대한 자긍심 때문에 애초 비교대상이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만난 MR2는 디자인 외에는 도저히 흠잡을 곳을 찾기 힘든 차였다. 이대로 솔로를 완성시켜 본 들 승산이 없어졌음을 그는 직감한다. 때는 1984년, 본격적인 경기 부흥의 시대. 대량양산 양산 미드십 스포츠카라는, 지금 보면 미친 카테고리의 장르화가 막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MR2를 탄 다음 날, 그는 영국본사에 장문의 텔렉스를 보낸다. 솔로 프로젝트를 중지할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었다. 새로운 영국제 스포츠카를 향한 노력은 이렇게 무위로 돌아가는가 싶었지만, 아직은 끝난 게 아니었다. 원래 목표로 했던 경량 스포츠카 대신, 팬더사는 한층 업그레이드 된 고성능 스포츠카를 개발할 것을 결심한다. 1985년, 솔로2의 개발이 다시 속행된다.
2부에서 계속
기사 참조자료: 사랑과 비즈니스에는 국경이 없더라-1989, 김영철 저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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