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자동차 관련-여러가지-

변성용의 '사라진' 차/한국에선 자리 잡기 힘들었던 클래식, 쌍용차 칼리스타

바래미나 2018. 1. 31. 13:31

변성용의 '사라진' 차 변성용의 '사라진' 차

한국에선 자리 잡기 힘들었던 클래식, 쌍용차 칼리스타

변성용 입력 2017.08.14 17:27 수정 2017.08.15 13:21 댓글 320


국산 최초의 2인승 로드스터 칼리스타, 그 시작과 끝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해치백이나 SUV, 2도어 쿠페에 리무진까지 빠짐없이 갖춘 국산차 라인업에서 자취를 감춘 라인업이 있다. 지붕을 열 수 있는 2도어 로드스터, 일명 ‘오픈카’가 국산차 리스트에서 사라진지 제법 되었다. 가장 최근의 기억이라면 2007년, GM 대우가 G2X란 이름으로 판매한 ‘수입차’ 새턴 스카이를 꼽을 수 있다.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기아가 만들었던 엘란을 떠올릴 수도 있다. 아마 대부분의 기억은 여기에서 끝난다. 조금만 더 무리해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뜻밖의 브랜드가 튀어나온다. ‘쌍용자동차’. 그리고 그들이 만들었던 국산 최초의 로드스터 ‘칼리스타’가 있다. 1990년대 초 한국인의 시각에서는 낯설기 짝이 없었던 이 복고풍의 차는 무슨 연유로 쌍용의 이름을 달고 나타난 것일까?

◆ 백야드 빌더의 나라, 영국.

백야드 빌더(Backyard builder), 말 그대로 뒷마당에서 차를 만드는 소규모 제작사를 일컫는 말이다. 이런 저런 부품을 가져다가 자신의 재간과 창의성을 합친 차를 만든다. 그리고 이것이 인기를 얻어 사업이 확대되어 나간다. 대량 양산을 전제로 한 오늘날의 자동차 만들기와는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이지만 이런 식으로 자리 잡은 브랜드는 유럽, 그중에서도 영국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로터스도 재규어도 그 시작은 누군가의 뒷마당이었던 회사였다.

그리고 이것은 팬더 웨스트윈즈(Panther Westwinds)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팬더 웨스트윈즈는 가업인 패션사업을 이어 받았지만 자동차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던 영국인 로버트 잔켈이 시작한 회사였다. 차는 그에게 취미이자 인생이기도 했다. 손에 닿는 대로 부품을 써서 복원시킨 클래식 카가 팔려 나가는 것을 경험하기를 몇 차례, 진득하게 소유할 생각으로 완성시킨 1930년형 롤스로이스가 수소문 끝에 찾아온 스페인사람에게 팔려 버리고 난 뒤, 그는 본격적으로 자동차 제작에 나설 것을 결심한다. 클래식한 외형을 가졌지만, 당대의 양산차 부품을 쓰는 것으로 신뢰성 높고 유지보수가 간편한 레플리카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팬더 웨스트윈즈 드빌, 전설적인 차 부가티 르와이얄의 형태를 따 왔지만 엔진과 핵심부품은 재규어의 양산파츠를 사용했다

롤 모델이였던 재규어의 족적을 따르되, 잔켈 가족의 고향 이름을 붙여 회사 이름은 팬더 (panther. 흑표범) 웨스트윈즈(westwinds)로 지었다. 1972년 재규어의 첫 차였던 SS100의 레플리카가 팬더 J72라는 이름으로 발매된다. 손으로 판금한 알루미늄 보디에 재규어제 6기통 3.9L 엔진을 얹은 차는 발매 즉시 호평을 받으며 팔려 나간다. 3년 뒤에는 부가티 르와이얄을 되살린 클래식 세단 드빌을 내놓고 1976년에는 복스홀의 부품을 사용한 보다 대중적인 2인승 클래식 로드스터 리마를 개발해 대량생산의 기틀을 잡는다. 완전한 수제작 모델임에도 불구하고 한해 300대 이상의 차를 만들어 팔 정도로 사업은 승승장구를 거듭한다.

팬더 웨스트윈즈는 이후 수퍼리치를 위한 개조사업에도 뛰어든다. 되는대로 확장을 거듭한 라인업은 1970년대가 끝나갈 즈음부터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방만한 모델 확장과 주먹구구식 운영도 문제였지만, 대표가 차량가격을 부풀려 횡령을 저지르는 회사에 미래가 있을 리 만무했다. 대출을 갚지 못하면서 은행이 개입하고, 채권단의 압류로 정상적인 차 제작이 불가능해지면서 팬더사는 정리 수순으로 접어든다. 보통이라면 여기서 끝났을 팬더사의 운명은 우연히 마주친 한국인 사업가에 의해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 한국인의 손에서 부활하다.

1980년 트레일러 수출 건으로 영국을 찾은 김영철(당시 진도그룹 부회장)은 런던의 숙소 앞에 주차된 팬더의 2인승 로드스터 리마를 보게 된다. 1930년대의 고풍스러운 멋을 지닌 차에 첫눈에 반한 그는 팬더사가 정리절차를 밟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수소문 끝에 찾아가 협상을 시작한다. 9개월 뒤인 1980년 11월, 현금 1만 파운드에 빚 30만 파운드를 떠안는 조건으로 그는 팬더사의 주인이 된다.

팬더를 맡은 김영철 사장은 경영개선에 중점을 두었다. 연 판매 수량이 한정되어 있던 고가의 J72와 드빌을 정리하고 리마 한모델만 남긴다. 가격만 적당하다면 유럽 전역에 남아있던 영국 스포츠카의 향수를 받아들일 수요층은 충분했다. 단가 때문에 FRP로 만들어졌던 외부 패널은 한국에서 조달한 알루미늄제로 바꾸고, 샤시도 모 회사의 한국 컨테이너 공장에서 제작해 영국으로 보내는 식으로 원가를 낮췄다. 수급에 어려움을 겪던 영국제 복스홀 (GM계열) 엔진과 변속기 대신 포드의 것을 쓰고, 휠과 브레이크 페달 박스 같은 일부 부품은 한국에서 조달하는 등 공급선을 다양화했다.

선택과 집중이라는 노력은 곧장 가격경쟁력으로 이어졌고, 1만1,000파운드였던 차 값은 절반 수준인 6,800파운드까지 떨어졌다. 디자인만 비슷할 뿐, 내용물은 완전히 바뀐 차에는 리마라는 이름 대신 그리스어로 ‘작고 아름답다’는 뜻인 칼리스타 (Kallista)라는 이름을 붙인다. 1년에 12개만 만든다는 최고급 스위스 시계에서 따온 것이었다.

팬더 본사에서 칼리스타와 함께 있는 직원들. 가운데가 김영철 사장. 사진=자동차생활 1986년 4월호

1982년 10월 버밍엄모터쇼에 첫 선을 보인 칼리스타는 열흘간 120대를 주문받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포드제 4기통 1.6L와 2.9L 엔진을 얹은 차는 영국시장에서만 주력하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유럽, 일본, 동남아시아, 중동 등 세계 각국으로 판매선을 넓혔다. 칼리스타는 그해 연말까지 100여 대가 제작되었고 1984년에 이르러서는 447대를 기록하는 등 순조롭게 판매를 늘려 나갔다. 망해가던 회사를 일으켜 세운 김영철 사장은 바로 영국 자동차업계의 주목을 받게 된다. 1985년에는 포드 머스탱의 4기통 2.3L 엔진을 얹어 미국 시장에도 진출했다.

종업원은 인수 당시 17명에서 160명으로 늘어났고, 생산능력은 연간 800대로 늘어난다. 성공에 고무된 김영철 사장은 차기 모델로 자신이 꿈꾸었던 궁극의 독자모델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직렬 4기통 2.0L DOHC엔진을 미드십에 탑재한 현대적인 스포츠카 개발에 나선 것이다. 나중에 별도로 다루게 되겠지만, 솔로(solo)라는 이름을 붙인 스포츠카는 결국 의미 있는 성과는 거두지 못한 채 프로토타입에 머무르고 만다. 제휴선인 포드와의 협상이 늘어지고, 저렴하면서도 뛰어난 성능의 토요타 MR2와 폰티액 피에로가 먼저 시판되면서 새 스포츠카의 판로는 완전히 막혀버리고 만다. 뒤늦게 보다 고성능의 차량으로 방향을 선회하지만 이 때까지의 투자만으로도 회사가 경영난에 빠지기에는 충분했다. 팬더가 세 번째 주인을 찾아야만 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팬더의 미드십 스포츠카 solo 1. 당시에는 브리티시 스포츠카의 부활로 칭송 받았지만 결국 생산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 쌍용차의 품으로 간 팬더

1986년 쌍용그룹은 동아자동차를 인수해 쌍용자동차로 이름을 바꾸고, 야심차게 회사를 꾸려 가기 시작하던 참이었다. 코란도에 이어 패밀리로 독자적인 4WD 시장을 구축하던 쌍용의 김석원 회장은 ‘우연히’ 김영철 사장과 만나게 된다. 개발, 생산에 대한 해외 인력과 거점을 손에 넣고 싶었던 그는 자본투자를 제의한다. 1987년, 쌍용은 팬더의 지분 80%를 인수한다. 곧바로 쌍용의 엔지니어와 실무자가 영국 공장에 투입되고 차량의 제작기술이 이전되기 시작한다.

난항을 거듭하던 생산에 활기를 불어 넣기 위해 1990년에는 생산라인 일부를 국내로 이전하기에 이른다. 알루미늄 보디와 섀시 제작도 쌍용으로 이전되어 완성된 부품을 영국으로 보낸다. 그러나 영국 현지공장의 인건비 상승, 생산성 저하 등으로 생산원가가 높아지면서 영국산 칼리스타의 경쟁력은 나날이 떨어져만 간다. 판매가 거의 이루어 지지 않는 상황에서, 아예 한국에서 제조와 판매를 하는 쪽이 거론되기 시작한다. 품질과 원가를 통제할 수 있는 한국으로 생산라인을 모두 이전하고 영국은 개발만 집중하는 체제로 전환이 결정된다. 1991년 1월, 쌍용의 평택공장으로 칼리스타의 생산라인이 옮겨지기 시작했다. 해를 넘기지 않은 12월, 평택공장에서 첫 국내 생산 칼리스타가 선을 보인다.

당시 쌍용은 칼리스타의 생산에 대해 “고전적인 스타일의 스포츠카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고 호화사치성 외제 스포츠카의 수입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팬더사의 기술을 접목해 기술력을 높이고 고성능, 고품질의 차를 개발해 차종 다양화를 꾀할 것”이라고 밝혔다.

1992년 3월 2.9L 엔진과 수동변속기를 얹은 칼리스타의 주문생산이 시작된다. 곧바로 자동변속기와 2.0L DOHC 엔진도 추가 된다.

쌍용차가 국내 시판한 칼리스타. 위가 2.0 아래가 2.9 모델이다. 사진=쌍용차 브로셔

당시 칼리스타의 값은 2.0L DOHC 엔진의 STD가 3,170만 원, 2.9L MT 모델 DLX 3,370만 원, AT인 골드는 3,670만 원이었다. 길이×너비×높이는 3,920×1,760×1,300mm로, 길이는 소형차보다 짧았고, 높이는 당시 국산차 중에서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낮았다. 포드에서 가져온 V6 2.9L 엔진은 145마력의 힘으로 최고시속 208km, 0→시속 100km 가속 8.45초의 성능을 냈다. 앞 더블 위시본, 뒤 5링크 리지드 액슬 서스펜션에 이태리제 호두나무 원목을 가공한 패널과 고풍스러운 인스트루먼트 패널, 나르디(Nardi) 스티어링 휠과 기어 노브, 부드러운 가죽 시트로 꾸민 인테리어는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현대적인 기술이 접목된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주문제작 방식의 장점을 살려, 자동변속기 이외에는 별도의 옵션비용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어떤 까다로운 요구라도 별도의 비용을 받지 않으며, 그걸 보고 딴사람이 똑같이 만들어 달라고 해도 거절하는 완전한 비스포크 제작을 천명할 정도로 제작팀의 의욕은 하늘을 찔렀다.

쌍용에서 생산한 칼리스타의 인테리어

칼리스타의 국내 시판은 본격적인 고도 성장기에 들어선 한국의 내수 시장을 지나치게 낙관한데 따른 결정이었다. 칼리스타는 많은 관심을 모았고 초기에는 70여대의 선주문을 받으며 고무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시판에 나선 뒤로는 내수와 수출 모두 부진을 면치 못했으며, 연간 생산량은 고작 20대 전후에 그쳤다. 칼리스타가 태어난 영국은 클래식카에 대한 집단의 경험과 존경, 소위 헤리티지(Heritage)가 자동차 문화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곳이다. 삶과 역사의 한 부분으로 클래식카가 복원되고 거래되는 곳이라면 클래식 레플리카가 설 자리도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건너뛴 채 클래식 스포츠카와 갑자기 마주한 한국시장의 반응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클래식카는 커녕 현대적인 스포츠카조차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에서, 고급 대형차를 살 수 있는 돈으로 작고 튀는, 더군다나 복고풍의 2인승 로드스터를 사겠다는 사람이 일 년에 스무 명 씩이나 있었던 것이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극소수의 주문을 받아 간신히 명맥을 잇던 칼리스타는 판매를 시작한 지 3년 뒤인 1994년 말 생산을 중단한다. 남아있던 재고를 모두 털어내는 데에는 그로부터 1년이 더 소요되었다. 3년 동안 만들어진 칼리스타의 총 생산대수는 76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생산차량의 상당수가 해외 수집가에게 팔려나간 덕에 국내에 남아있는 칼리스타는 10여 대에 그칠 것으로 추정된다. 칼리스타는 국내에서 생산된 최초의 클래식 레플리카일 뿐만 아니라, 최초의 FR 스포츠 모델이면서 최초의 2인승 로드스터이기도 했다. 이 진귀한 계보를 잇는 차가 다시 한국에서 만들어질 일은 불행하게도 없을 것이다.

영국에서 태어난 클래식 로드스터는 이렇게 먼 이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

관련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