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맥아더의 집념 그리고 반대
2010/03/26 08:48 |
인천상륙작전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맥아더 원수의 고집에 의해 실행되었다고 하여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닐 만큼 그와 떼어놓고 생각하기 힘듭니다. 맥아더는 6월 29일, 전쟁발발 후 한강방어선 시찰당시에 이미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그는 북한군을 일거에 격멸하고 전세를 뒤집기 위해서는 병참선의 요충인 서울을 측방에서 기습 공격함으로써, 북한군의 보급로와 후방을 차단하는 대담한 작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더불어 서울을 조속히 탈환하여야 한국 국민들에게 정치적, 심리적 안정감을 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를 떼어놓고 생각하기 힘듭니다.]
그는 신속히 참전한 미군 전초부대조차 무참히 붕괴되며 후퇴를 거듭하던 7월초, 이미 구체적 작전수립을 지시하였습니다. 명령에 따라 미 극동사령부는 서해안의 인천, 군산, 그리고 동해안의 주문진에 상륙하는 세 가지 제안을 상정하였고 이중 인천으로 상륙하는 100-B계획을 채택하였으나, 8월이 되어도 북한군 공세가 예상 외로 강하여 막상 상륙작전을 실행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전선의 상황과는 별개로 미 합참뿐만 아니라 극동군 해군조차도 인천상륙을 처음부터 반대하였습니다.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었는데 사실 모두 타당한 분석이었습니다. “인천은 조수간만의 차가 9미터나 되어 상륙시간이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낙동강 방어선과 거리가 너무 멀어 상륙군이 각개 격파될 위험성이 크다. 현재 보유한 원거리 상륙용 선박이 부족하고 상륙병력 차출 시 병력 부족으로 인하여 낙동강 방어선의 유지가 곤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모든 병력이 한반도 집중되면 일본방어에 공백이 발생한다.”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계획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로 같은 이유 때문에 방심하고 있는 적을 기습하기 위해서라도 인천으로 상륙하여야 한다고 강조했고, 더불어 만일 낙동강 방어선부터 차근차근 북진할 경우에 예상되는 약 10만의 아군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반대 의견을 제시하러 본토에서 극동군사령부를 일부로 찾아온 콜린스(Joseph L. Collins) 미 육군 참모총장이 맥아더에게 오히려 설득되었던 사실은 그의 신념이 어느 정도로 강렬하였는지 알려주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결국 맥아더의 생각대로 계획은 진행되었고 9월을 목표로 카운트다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상륙전 함상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 국군 해병대]
맥아더는 상륙군으로는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사단을 주축으로 미 제10군단을 재창설하여 자신의 심복으로 극동군사령부 참모장인 알몬드(Edward Almond)에게 지휘를 맡겼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미군은 극심한 병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어서 예정된 시간 내에 부대를 구성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비록 예비역을 소집하여 연대별로 부대를 구성하는대로 배에 실어 일본으로 보내고 있었지만 작전 개시 직전까지 완편 된 부대의 참가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결국 국군 제1해병연대가 미 제1해병사단에, 국군 제17연대가 미 제7사단에 배속됨으로써 작전 직전에 부대를 완편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국군도 역사적인 작전에 당당한 주역으로 참여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준비에도 불구하고 원래부터 상륙작전은 치밀한 사전정지 작업이 없이는 성공하기 힘듭니다. 특히 인천은 수로 조건이 나빠 야간에 대규모 선단 운행이 불가능하고 수간만의 차가 심하여 일거에 상륙군을 투입하기 구조적으로 어려워 더더욱 상륙군이 적진에 고립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따라서 아침과 저녁 만조시간에 맞추어 2단계 상륙계획을 작성했고 12시간의 간격동안 함포사격과 항공차단으로 북한군의 증원을 저지하는 대책을 강구했습니다.
[적색해안에 상륙하는 미 제5해병연대 병사들]
더불어 상륙지역에 대한 정보 수집을 위해 클라크(Eugene F. Clark) 대위를 책임자로 하는 정찰대를 9월 1일 영흥도로 파견하여 인천항 주변의 북한군 배치 및 기뢰 부설 상황 등을 정찰하였고, 아울러 상륙 당일에 팔미도 등대를 수리해 함대 진입시간에 맞추어 점등함으로써 상륙작전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작전 개시에 맞추어 상대방이 오판하도록 기만책을 병행하여 인천에 대한 포격과 동시에 동해안의 영덕과 삼척, 주문진 그리고 서해안의 군산과 남포 일대에 대해 양동작전을 펼쳐 북한군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한마디로 치밀한 작전에 의해 거대한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하였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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