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운명의 그날
2010/03/22 08:14 |
낙동강가의 혈전이 최고로 치닫고 있던 1950년 9월 14일 밤, 마지막 배가 인천항 외항 해역에 진입함으로써 총 261척으로 이루어진 어마어마한 규모의 미 제7기동함대는 집결을 완료하였습니다. 이들 선단에는 총 7만 5천명의 국군 및 유엔군 병력이 승선하고 있었고 이들은 다음날 새벽부터 차례대로 인천으로 상륙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02시, 상륙명령이 하달되자 칠흑 같은 야음을 뚫고 19척의 선두함대가 종대대형으로 인천항으로 향하는 좁은 비어수로(飛魚水路)를 따라 인천항을 향해 전진하면서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요도]
사실 6·25전쟁 초기의 향방을 일거에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은 상륙병력과 장비를 실은 선박들이 일본 및 부산항을 출발한 9월 12일부터 본격 개시된 것과 다름없었습니다. 각지에서 출발한 이들 함정들이 인천 주변 해역으로 몰려듦과 동시에 13일부터 상륙예정지인 인천항 일대 요충지에는 쉴 새 없는 폭격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불벼락에서 살아남은 북한군 해안포의 간헐적인 저항이 있었지만 05시부터 8기의 함재기가 아군이 최초로 상륙할 월미도 일대를 폭격함과 동시에 인천항 주변에 도열한 군함으로부터 함포세례가 이어지자 더 이상의 저항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미 제1해병사단 5연대 3대대 병력이 탑승한 17척의 상륙정과 전차 9대를 적재한 전차상륙함은 녹색해안(Green Beach)로 명명된 월미도 해변을 향해 일제히 전진하였습니다. 그리고 06시 30분, 무사히 해안선에 도착하여 병력을 상륙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상륙군은 곧바로 월미도 내륙으로 진출하였습니다. 해안가의 북한군은 이미 사전 포격과 폭격으로 제거된 상태였지만 일부 북한군이 섬 곳곳에 만들어진 동굴에서 저항하자, 후속 상륙한 도저전차가 입구를 봉쇄해 북한군 잔당을 생매장시키고 동시에 화염 방사기로 잔적을 소탕하면서 08시경 월미도를 완전 장악하였습니다. 이런 강력한 방법은 태평양전쟁 당시 옥쇄를 각오하며 치열하게 저항했던 일본군을 소탕하며 얻은 전투 기법이었습니다.
[화염방사기로 월미도 정상의 북한군 통신소를 공격하고 있는 모습]
당시 월미도를 방어하고 있는 북한군은 제226해안포병대대와 제64해안보병연대 병력으로 구성 된 약 400명이었는데, 전투 결과 사살 108명, 포로 136명 그리고 100여명이 생매장되면서 완전히 붕괴된 반면, 아군의 피해는 상륙초기 해안 기관총 사격으로 사상 당한 17명이었을 만큼 압도적인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인천상륙작전 동안 가장 긴박한 순간은 지금부터 시작이었습니다. 비록 월미도를 장악했지만 썰물로 인하여 함대는 후방으로 물러났고 오후 물때에 후속 주력부대의 상륙전까지 월미도에 상륙한 해병대는 적 지역에 고립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북한군이 전차 같은 중화기를 앞세워 인천에서 방파제를 건너 월미도로 진격하여 온다면 월미도에 상륙한 1개 대대만으로 얼마나 교두보를 사수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지휘함 마운트매킨리(USS Mount McKinley)호에서 직접 작전을 지휘하던 맥아더도 긴장하였고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를 막기 위해 함재기들이 출동하여 인천을 중심으로 반경 40킬로미터 지역의 도로를 맹폭격하면서 북한군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강변까지 일사천리로 진출한 미 해병대]
그리고 오후 물때가 되자 제5해병연대 본대가 17시 33분, 월미도 건너편에 설정된 적색해안(Red Beach)으로 상륙하면서 월미도를 사수하던 3대대와 연결되었고, 거의 동시에 제1해병연대가 인천항 남측의 낙섬 인근 해안에 설정된 청색해안(Blue Beach)에 상륙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두 연대는 9월 16일 새벽까지 인천 도심을 서에서 동으로 그리고 남에서 북으로 횡단하며 시가지를 완전히 장악하였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않고 제5해병연대가 동쪽으로 진출해 9월 18일 아침에 김포비행장까지, 제1해병연대는 부천을 거쳐 19일 밤 영등포 외곽까지 진출하였고 후속하여 9월 17일부터 인천으로 상륙한 미 제7사단은 낙동강에서 반격하여 올라오는 북진부대와 연결하기 위해 오산방향으로 남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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