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6·25 자료들(1950·06·25)

26. 부산을 향한 마지막 발악

바래미나 2011. 4. 22. 02:45

26. 부산을 향한 마지막 발악

2010/03/19 08:38 | Posted by Koreanwar60


 

  북한군이 해방 5주년이 되는 1950년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겠다는 목표로 8월의 시작과 함께 개시된 치열했던 낙동강 방어선전투는 결국 국군과 유엔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 치열했던 공방전에서 아군이 승리하였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이때를  기점으로 북한군의 전력 증강은 유엔 해,공군의 후방 차단으로 거의 불가능하였다는 점이었습니다. 반면 유엔군은 계속적인 증원으로 계속 힘을 보태왔고 8월이 끝났을 때 어느덧 전력차이는 역전된 상태였습니다.


[9월이 되었을 때 피아간의 전력은 역전된 상태였습니다]


  개전 초에 병력만으로도 아군에 비해 2배나 많았던 북한군은 낙동강까지 일사천리로 밀고 내려왔지만, 9월이 시작되었을 때 국군과 유엔군은 17만여 명까지 증강되었던 반면 북한군은 10만여 명 선으로 줄어든 상태였습니다. 특히 개전 초에 국군을 공황상태로까지 몰아넣었던 전차 전력은 어느덧 5 : 1 수준까지 역전되어 있었고 공군력과 해군력은 비교불가의 상태였습니다. 이와 같이 위기의 8월을 넘기고 나서 1950년 9월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전투력은 북한군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월등히 우세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군은 9월초부터 약 열흘간 절체절명의 위기까지 몰렸습니다.


  북한군은 남침 이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9월 중순까지 주도권을 계속 장악하면서 영산, 대구, 영천, 포항 지역에서 공세를 지속하여 대한민국을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반면 국군과 유엔군은 역전된 전력을 바탕으로 공세를 펼치기는커녕 방어선을 틀어막기에 급급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단지 병력의 숫자보다 전장에서 작전의 주도권을 누가 행사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더불어 주도권을 한번 내주어주면 이를 빼앗아오기가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계속하여 공세를 가하던 북한도 그들의 전력이 상당히 소진된 상태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무너지고 녹아내린 전력을 보충하지 않고 오히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쓸어 모아 낙동강을 넘기 위해 애썼습니다. 북한군은 전선의 한곳만 제대로 돌파하면 부산으로 쇄도하여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는 마지막 희망을 한순간도 버리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착각을 하게 된 데는 김일성 등 북한의 전쟁 지도부가 한반도의 90퍼센트를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에만 너무 빠져있어 ‘조금만 더’하면 낙동강 교두보를 점령할 것으로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북한 수뇌부와 달리

마오쩌뚱은 낙동강 전선에 대해 예리한 분석을 하였습니다]


  8월말 북한의 이상조(李尙朝) 소장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의 군사사절단이 중국을 방문하였을 당시에 마오쩌둥(毛澤東)에게 희망적인 전황을 보고하였을 만큼 낙동강 돌파를 낙관하고 있었으나, 마오쩌둥의 견해는 전혀 달랐고 오히려 다음과 같은 무서울 만큼 정확한 조언을 남겼습니다.


  첫째, 북한군이 낙동강 선에서 한 달이나 공세를 지속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했다는 것은 유엔군이 계속 증원되고 있고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다.


  둘째, 유엔군의 반격은 상륙작전 형식이 될 것이며 상륙 지역은 인천 또는 남포가 될 것이다.


  셋째, 이 시점에서 북한군은 유엔군의 공세에 대비하여 축차적인 저지 진지를 준비하고, 유엔군의 인천 또는 남포상륙에 대비하여 후방 예비대를 보유해야 한다.


[그러나 조국을 지켜낸 힘은 바로 무명용사들의 피였습니다]


  결국 승리가 바로 앞에 다가온 같은 신기루에만 매달린 북한군의 수뇌부는 마오쩌둥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경인지역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예비대까지도 낙동강 전선에 투입하는 초강수를 두었고 그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판단은 침략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이고 엄밀히 말해 북한군의 진격을 막아내고 대한민국을 구한 것은 불퇴의 각오로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며 피를 흘린 국군과 적절한 시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유엔군의 노고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