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다시 쓴 상륙작전의 역사
2010/03/30 08:36 |
앞서 알아 본 것처럼 인천상륙작전은 전략상으로 대성공을 거둔 완벽한 기습이었습니다. 어쩌면 이처럼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군 내부에서도 수많은 반대 의견이 많았을 만큼 작전을 실행하는데 제약사항이 많았고 그것은 반대로 적들이 내심 안심하고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였습니다. 흔히 인천상륙작전을 ‘세기의 도박’이라 하였을 만큼 단지 전술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주위의 우려는 너무나 당연하였습니다.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세계 상륙작전의 역사를 다시 쓰도록 만들었습니다.
[인천 도심을 확보한 미 제1해병사단]
인천상륙작전은 20세기에 벌어진 마지막 대규모 상륙작전으로 남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있어왔던 수많은 다른 상륙작전과 상당히 대별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천연적 장애요인을 극복한 상륙작전이었습니다. 인천 앞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데, 사실 그보다 썰물 때 들어나는 갯벌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갯벌만 없다면 썰물 때도 상륙은 가능하지만 인천일대의 거대한 갯벌은 밀물 때만 상륙할 수밖에 없는 시간적 제한을 가하였습니다. 즉 인천상륙작전은 시간과 공간의 2중 제약을 극복하고 이뤄낸 성과입니다.
둘째, 적의 최소예상선과 최소저항선에 아군의 핵심 전력을 일거에 기습으로 투사시켜 결정적 승리를 달성한 작전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 서울의 인접이면서도 구조적으로 적의 방어선이 엷은 지역이 바로 인천이었는데 바로 이곳의 상황과 전략적 가치를 유엔군, 엄밀히 말해 작전을 주도한 맥아더는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셋째, 인천상륙작전은 적의 전투력을 격멸하는데 있어 병참선의 차단이 효과적이며, 특히 신장된 병참선의 경계는 전방전투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쉽게 전세를 역전시키기 힘들었던 낙동강 방어선의 팽팽한 대치상황이 이 작전 성공 후 일거에 무너져 내린 것만 보아도 뚜렷이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썰물 때 드러난 적색해안(Red Beach) 갯벌의 모습]
이러한 뚜렷한 전과는 지휘관의 일관된 신념과 철저한 준비에 의해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는 사실은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맥아더의 전략적 안목은 놀라울 만큼 정확하였습니다. 맥아더는 조건이 최악인 인천을 선택함으로써 북한군을 기만하고 기습을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압도적인 제해권과 제공권은 성공을 담보할 수 있었고, 처음부터 전세 반전의 확실한 축으로 작전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의 분위기를 일거에 뒤집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거대한 우회 기동을 통한 기습으로 적의 병참선을 차단함과 동시에 적의 전투의지를 파쇄시킴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아군이 빼앗고 국면을 일시에 전환시켜 버렸습니다. 유엔군이 낙동강방어선에서 지상반격작전을 감행했을 경우, 북한군은 금강선 등 최소 5개 이상의 방어선을 이용해 축차적인 지연전을 펼쳤을 것이고 만일 그렇게 되었다면 아군의 막대한 인명 손실이 발생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상륙작전의 성공은 유엔군의 인적, 물적, 시간적 손실을 최소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북한군은 전쟁의 주체에서 이탈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은 북한군에게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6·25전쟁 개전 후 3개월 만에 전쟁을 일방적으로 주도하였던 북한군은 이후 패전에 패전을 거듭하며 전쟁의 주체에서 완전히 이탈하게 되었고 그것은 이후 중국군 개입 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북한군은 종전 시까지 중국군 의 작전을 지원하는 보조 역할만 수행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결정적인 이유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었던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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