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6·25 자료들(1950·06·25)

31. 낙동강아 잘 있거라

바래미나 2011. 4. 22. 02:52

31. 낙동강아 잘 있거라

2010/04/02 08:31 | Posted by Koreanwar60

 

  인천상륙작전 다음날인 9월 16일 09시, 낙동강 방어선에서 드디어 제8군의 반격이 개시되었습니다. 피 말리는 북한군의 9월 공세를 가까스로 막아내었던 힘들 중에는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일거에 뒤엎을 수 있다는 간절한 기대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기대처럼 성공적으로 상륙부대가 적의 배후 깊숙한 곳을 강타하는데 성공하자 낙동강방어선을 사수하고 있던 아군은 교두보를 박차고 나와 북한군을 돌파하여 경부 축선을 따라 진격해 인천상륙부대와 연결하는 사전계획대로 진격을 개시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인천상륙과 동시에 낙동강 방어선에서도 공세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북한군은 김천에 설치한 전선사령부 예하의 13개 보병사단과 1개 전차사단이 낙동강가에 촘촘히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엔공군의 후방차단으로 보급 및 병력보충이 불가능하여 총병력은 7만 여명에 불과했고 그 대부분도 점령지에서 강제 징집한 신병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기초훈련 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여 전투력도 모자랐고 식량 및 탄약이 절대 부족하여 사기도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에 전선붕괴는 시간문제로 보였습니다. 반면 국군과 유엔군의 병력은 총 16만여 명까지 늘어나 있었고 전차, 야포 등의 중화기 전력은 어느덧 10배 이상의 우위를 보였습니다. 더구나 하늘과 바다에서의 전력차이는 비교불가의 상태일 만큼 일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처럼 아군의 전선 돌파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인천에 아군이 상륙한 이후인 9월 16일 까지만 해도 전장의 주도권을 아직도 북한군이 장악한 상태였습니다. 오히려 북한군은 7월 31일 이후 거의 고착화되어 있던 마산-왜관-영천-포항을 연하는 선에서 집요한 공격을 감행하던 중이었습니다. 따라서 아군의 반격작전이 시작된 9월 16일부터 18일까지는 어느 쪽이 공자(攻者)이고, 어느 쪽이 방자(防者)인지도 모를 정도로 전선이 혼란스러웠던 상태였고 더구나 기상악화로 항공지원이 곤란하자 제8군의 공격은 고착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북한군의 대응은 집요하였고 전선 돌파는 힘들어 보였습니다.]


  9월 18일, 비가 그치고 기상이 호전되자 돌파구를 개척하려 왜관-김천축선에 B-29폭격기 42기가 집중적인 공중폭격을 가하였으나 공격은 진척이 없었고 반격의 선봉으로 내정 된 미 제1기병사단은 계속 제자리에 머물러있어야 했습니다. 당시에 낙동강전선에 투입된 북한군 사단장까지도 유엔군의 인천상륙 사실을 알지 못하였기에 계속 낙동강에만 몰입되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처럼 당시의 낙동강방어선에 모여든 북한군은 자신들의 정확한 처지도 모르고 오로지 공격에만 매몰되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계획에 차질이 발생하자 제8군사령관 워커의 근심은 커져갔고 맥아더는 군산에 추가적인 상륙작전 준비를 지시했을 만큼 초조해 하였습니다. 자칫하면 인천에 상륙한 미 제10군단이 경인지역에 고립되어 버릴 수도 있는 최악의 경우까지 상상될 정도였습니다. 바로 이때 이런 어려운 고비를 뚫었던 것은 국군 제1사단이었습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에 작별인사를 하고 앞으로 내달렸습니다.]


  원래 주공으로 예정되었던 미 제1기병사단의 우측에 있던 국군 제1사단은 북한군의 방어지역을 공격하던 중 가산산성 우측계곡이 텅텅 비어있던 것을 알고 이곳으로 신속히 돌파를 감행하여 9월 19일에 기습적으로 갈뫼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갈뫼가 아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대구공격에 투입되어 있던 북한군 제1, 3, 13사단의 동측이 완전히 차단되었는데, 그 여파는 실로 대단하였습니다. 배후가 차단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낙동강가의 북한군 전체가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국군의 선전으로 미 제1기병사단은 19일 14시경, 북한군 제3사단을 붕괴시키면서 왜관을 탈환하고 이어서 저녁 무렵에는 낙동강을 건너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9월 22일, 국군 제1사단이 지난 8, 9월 내내 양측이 명운을 걸고 피로 물들였던 다부동에서 미 제1기병사단과 연결되자 나머지 국군과 유엔군의 모든 부대들은 낙동강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앞으로 내달릴 일만 남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