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6·25 자료들(1950·06·25)

9. 침략자의 실책

바래미나 2011. 4. 22. 02:38

  9. 침략자의 실책

 
   3일 만에 서울이 적에게 점령당하였다는 사실은 개전 초기의 주도권을 북한이 확실히 잡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반면 이것은 우리에게 더 할 수 없는 치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략적으로 서울을 확보하였다는 점을 빼놓고 단지 전투의 측면에서 살펴 볼 때 서울 점령이 북한에게 그리 만족할만한 전과를 올려주지 못했음은 이후 여러 자료를 통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서울 점령 당시에 선전수단으로 이용된 전차]


  우선 북한군의 전차부대 운용술이 미흡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흔히 북한 전차에 밀려 국군이 눈물을 흘리며 일방적으로 밀려났다고 생각하고 있는 경향이 많고 그런 점도 있었지만, 사실 북한군도 그들의 승리를 이끌어 준 전차부대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천혜의 교통로인 경원축선에서 벌어진 실책이었습니다. 북한은 서울을 공격할 주 공격로로 경원축선의 동두천-의정부 도로와 포천-퇴계원 도로, 두개를 선정하고 제105전차여단 예하의 전차연대를 각각 배치하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전쟁 전에 포천-퇴계원의 도로상으로 전차가 기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나 실제로는 이 지역은 탱크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험한 지형이었습니다. 결국 105전차여단 예하 109전차연대는 서파까지 진입했다가 다시 포천으로 역행군을 해야만 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포천-퇴계원간 도로를 이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의정부-창동의 좁은 통로에 2개의 보병사단과 2개의 전차연대가 몰리면서 교통체증을 겪었고 이로 인하여 북한의 전차부대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북한군은 6월 26일 13시에 이미 의정부를 점령하고도 미아리 방어선까지 15킬로미터를 더 진출하는데 무려 35시간이나 소모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서울 점령이 최소한 하루 이상 늦춰지게 되었습니다.


[북한군 제105전차여단 소속 T-34]


  하지만 가장 큰 미스터리는 6편에서 언급한 것처럼 가장 중요한 시기에 북한군 주력인 북한 제1군단이 서울에서 3일간을 지체한 사실입니다.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지금까지 수많은 가설이 제시되었는데, 애당초 한강 이남에서의 작전계획이 없었다는 주장부터 남한의 민중봉기를 기다렸다는 설, 심지어 북한이 자축연을 벌이면서 아무 생각 없이 3일간을 허비했다는 설까지 다양합니다. 더구나 북한의 서울 점령 직후까지만 하더라도 폭파에 실패한 한강철교도 남아있어서 도강의지만 있었다면 한강을 건너는데 그리 큰 문제는 없었고 이미 북한군 제6사단은 한강하구를 건너 김포반도에서 영등포로 향하고 있던 중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연히 북한 제6사단이 국군의 배후를 위협하는 동안 한강을 건너 진격을 계속하여야 함에도 그러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전쟁 전 소련 고문단이 수립한 작전계획에 따르면 서울의 점령보다 서울 일대에서 국군의 주력을 포착 섬멸하는 것이 개전 초 작전의 주목적이었는데 북한군의 서울 지체는 이런 계획 자체가 실패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엄밀히 말해 북한이 한강을 도강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보다, 도강 할 수 없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맞을 듯합니다. 그렇게 된 데는 중동부 전선에서 북한 제2군단의 남진을 저지한 국군 제6사단의 용전과 김포반도에서 급조된 병력으로 긴박하게 방어전을 펼치면서 북한군 제6사단의 남하를 막았던 김포지구전투사령부 분투가 결정적인 요인이었고 이로 인하여 북한의 대 포위 섬멸전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실책이면에는 국군의 투혼이 있었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북한이 겉으로 드러난 승리 이면에 숨어있던 실책이 있었고 이것은  국군이 낙동강까지 지연전을 수행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확보하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이 이런 실책을 범하게 된 데는 단지 그들의 착오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중과부적임에도 불구하고 살신성인의 정신을 발휘하여 침략자를 피로 막아낸 국군의 놀라운 투혼이 있었기에 그런 역사가 이루어졌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비극의 1950년 6월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