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맨주먹으로 막아낸 하늘
지금까지 알아본 바와 같이 6.25전쟁 개전 당시에 남북한 간의 전력은 많이 벌어져 있었고, 이런 차이는 개전 초에 국군이 북한군에 밀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공군은 경우는 일방적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격차가 컸습니다. 당시에 북한군은 200여기의 각종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국군은 일명 건국기(建國機)라고 불린 T-6 훈련기 9기를 포함한 20여기의 항공기를 보유하였지만 전투기는 단 1기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북한이 제공권을 장악한 것은 어쩌면 너무도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국민의 성금으로 구입한 T-6 건국기]
6월 25일, 북한 지상군이 공격을 시작한지 6시간 후인 10시경이 되자 북한군의 IL-10 전투기가 서울상공에 출현하여 정찰 활동을 시작하였고, 12시경에는 YAK기 4기가 용산 상공에 나타나 용산역, 서울공작창, 통신소, 육운국 청사 등에 기총소사와 함께 폭탄을 투하하면서 6.25전쟁 최초의 공습을 단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오후인 16시경에는 5기의 YAK기가 김포와 여의도 비행장을 공습하였는데, 이때 국군의 T-6연습기 1기가 파손되었고 한국에 체류하던 미국인을 소개시키기 위해 김포 비행장에 긴급 투입되어 있던 미 공군 소속의 C-54수송기 1기가 격파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북한 공군의 공격을 하늘에서 막을 방법이 국군에게는 없었습니다.
이처럼 공대공 전투를 벌일 전투기가 없어서 개전 즉시 제공권을 북한 공군에게 내줄 수 박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한국 공군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전투기능이 없는 훈련기들 밖에 없었지만 한국 공군은 이들을 출동시켜 전선을 정찰함과 동시에 육군 작전을 육탄으로 지원했습니다. 조종석 밖으로 손을 내밀어 폭탄 274개와 수류탄 500개를 북한군 행렬에 투하하는 그야말로 처절한 작전을 전개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지상에서처럼 맨주먹으로 근근이 적의 공격을 막아내었던 것이었습니다.
[북한 공군의 활약은 3일 천하(파괴된 북한의 IL-10)]
하지만 이와 같이 일방적이었던 북한 공군의 우세는 삼일천하로 끝나게 되었습니다. 비록 국군의 전력이 갑자기 커져서 북한 공군을 막아내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미군의 조기 참전 결과였습니다. 육군이나 해군과 비교해 신속한 이동과 전개가 가능한 미 공군이 한반도로 긴급 투입되면서 곧바로 아군이 제공권을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개전 4일 경과하였을 때 38선 이남에서 북한 공군기들은 더 이상 활동할 수 없었고 오히려 38선 이북의 북한 후방에 위치한 공군기지는 물론 적의 요충지가 공습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지상에서는 아군이 일방적으로 밀려 후퇴하고 있던 6월 29일의 경우만 보아도 미 제5공군 제3폭격비행단 소속 B-26 경폭격기 18기가 적의 심장인 평양을 폭격하였을 정도였습니다. 이 같은 적극적인 작전으로 미 공군은 8월 10일까지 북한 공군을 완전 무력화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자유롭게 후방차단과 근접항공지원(CAS)에 돌입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 공군의 F-51전투기]
이와 더불어 6월 27일, 한국 공군은 미 극동 공군의 협조로 조종사 10명을 선발하여 일본 주둔 미 공군 기지에서 단 며칠간의 훈련을 받고, F-51전투기 10기를 인수해 대구기지로 귀환했는데 이때부터 한국공군도 전투기를 운용하게 되었고 7월 3일부터 한·미 공군의 연합작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개전 초에 일방적이었을 만큼 많은 전력차이가 있었지만 우리 공군은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전선으로 달려 나갔고 그러한 용기는 도움을 받아 곧바로 힘으로 승화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승화된 힘은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한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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