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오지 순례] ⑤ 나를 살린 힌두 성직자 스와미
자비와 비참 혼동 속 ‘성자의 미소’가 미웠는데
풀과 열매로 낫게 하고, 남은 ‘아픔’까지 가져가
아팠다. 오히려 여러 조건이 나아지면서 몸이 참았던 농성을 시작했다.
인도에 도착한 지 몇 개월 간 쓸고 다닌 최북단 히말라야보다 남단 트리반드롬의 요가아쉬람은 한국의 초여름만큼이나 따뜻했다. 난 매일 요가 아사나(몸동작)로 몸을 풀고 있었다. 그런데 온 몸이 으슬으슬 추워왔다. 기침이 계속 나왔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여행자의 설움이었다.
200여 명의 요가코스 참가자 가운데 90%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온 서양인들이었고, 동양인은 일본 남자가 2명, 홍콩 여자가 한 명 있을 뿐이었다. 아플 땐 그래도 고국 사람이 그리운데, 나 말고 한국인은 없었다.
붓다와 간디와 달라이 라마의 땅이면서도 왜 힌두의 나라인가
그 동안 여행하면서 오염된 시내를 누비며 끼니도 5~10루피(250원) 정도 하는 과일이나, 20~30루피 하는 간단한 요기로 때우는 게 예사였다. 거리의 허름한 식당에선 밀가루나 보리 가루를 튀기는 기름엔 새까만 부유물이 떠다녔다. 언제쯤이나 새 기름으로 갈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긴장의 연속이어서 게스트하우스에서도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 주로 아쉬람이나 히말라야 오지 등을 다니다보니, 손님이라곤 나 혼자 뿐인 게스트하우스에 묵는 일도 적지 않았다. 문고리조차 변변치 않은 그런 게스트하우스에서 잠을 청하다 밖에 인기척이라도 들리면, 누군가 칼이나 도끼를 들고 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망상에 모골이 송연해질 때도 있었다.
구르던 자전거가 멈추면 쓰러지는 법이던가. 이 요가아쉬람은 지금까지 다녔던 게스트하우스와 달리 안전한데다 식사도 훨씬 좋았다. 그래서 휴식을 취해 몸이 오히려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직 육신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도의 모든 상황이 아팠다. 붓다와 마하비라가 왔고, 라마나 마하리쉬가 왔고, 간디가 왔고, 지금도 달라이 라마가 와 있는 땅이건만 왜 이토록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는 계급제도가 그대로 남아 있는지, 왜 이토록 빈부격차는 심한지, 인도의 상황들이 내 안에서 용해되지 않아 나를 혼동스럽게 했고, 내 몸을 톱니바퀴 속에 끌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성자 같은 미소를 짓는 힌두 성직자인 스와미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가증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토록 평화롭고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은 그들이 신봉하는 힌두교가 완고한 카스트와 모든 모순을 지금까지 유지하는 데 일등공신이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