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세계를 가다

상황이 나아지니 아팠다, 마음에서 온 몸이

바래미나 2008. 8. 21. 17:30

[인도 오지 순례] ⑤ 나를 살린 힌두 성직자 스와미

 

자비와 비참 혼동 속  ‘성자의 미소’가 미웠는데

풀과 열매로 낫게 하고, 남은 ‘아픔’까지 가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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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팠다. 오히려 여러 조건이 나아지면서 몸이 참았던 농성을 시작했다.

 

인도에 도착한 지 몇 개월 간 쓸고 다닌 최북단 히말라야보다 남단 트리반드롬의 요가아쉬람은 한국의 초여름만큼이나 따뜻했다. 난 매일 요가 아사나(몸동작)로 몸을 풀고 있었다. 그런데 온 몸이 으슬으슬 추워왔다. 기침이 계속 나왔다. 그러나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여행자의 설움이었다.

 

200여 명의 요가코스 참가자 가운데 90%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온 서양인들이었고, 동양인은 일본 남자가 2명, 홍콩 여자가 한 명 있을 뿐이었다. 아플 땐 그래도 고국 사람이 그리운데, 나 말고 한국인은 없었다.

 

붓다와 간디와 달라이 라마의 땅이면서도 왜 힌두의 나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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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여행하면서 오염된 시내를 누비며 끼니도 5~10루피(250원) 정도 하는 과일이나, 20~30루피 하는 간단한 요기로 때우는 게 예사였다. 거리의 허름한 식당에선 밀가루나 보리 가루를 튀기는 기름엔 새까만 부유물이 떠다녔다. 언제쯤이나 새 기름으로 갈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긴장의 연속이어서 게스트하우스에서도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 주로 아쉬람이나 히말라야 오지 등을 다니다보니, 손님이라곤 나 혼자 뿐인 게스트하우스에 묵는 일도 적지 않았다. 문고리조차 변변치 않은 그런 게스트하우스에서 잠을 청하다 밖에 인기척이라도 들리면, 누군가 칼이나 도끼를 들고 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망상에 모골이 송연해질 때도 있었다.

 

구르던 자전거가 멈추면 쓰러지는 법이던가. 이 요가아쉬람은 지금까지 다녔던 게스트하우스와 달리 안전한데다 식사도 훨씬 좋았다. 그래서 휴식을 취해 몸이 오히려 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직 육신 때문만은 아니었다. 인도의 모든 상황이 아팠다. 붓다와 마하비라가 왔고, 라마나 마하리쉬가 왔고, 간디가 왔고, 지금도 달라이 라마가 와 있는 땅이건만 왜 이토록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는 계급제도가 그대로 남아 있는지, 왜 이토록 빈부격차는 심한지, 인도의 상황들이 내 안에서 용해되지 않아 나를 혼동스럽게 했고, 내 몸을 톱니바퀴 속에 끌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성자 같은 미소를 짓는 힌두 성직자인 스와미가 미워지기 시작했다. 가증스럽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토록 평화롭고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은 그들이 신봉하는 힌두교가 완고한 카스트와 모든 모순을 지금까지 유지하는 데 일등공신이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불교를 무신론이라 경멸하는 그들의 입에서 ‘공’이라니? 

 

스와미 타라난다를 만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요가아쉬람의 메인홀 앞엔 큰 나무들이 넓은 그늘을 드리우고 벤치가 있어 아픈 몸을 쉬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내가 늘 쉬던 벤치에 흰 수염이 근사한 스와미가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앉아 있었다. 이 아쉬람에 상주하는 스와미가 아니었다. 거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스와미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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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나누는 것도 힘이 들어 옅은 웃음만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싶었다. 그런데 살며시 미소 짓던 그가 “오늘도 어김없이 어제 갔던 해는 다시 돌아 왔다”고 혼잣말처럼 말을 했다.

 

스와미다운 아름다운 어법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련만 난 갑자기 냉소적으로 답하고 말았다.

 

“해는 가고 온 적이 없다. 도는 것은 지구다. 해가 오고 간다는 생각은 착각 일 뿐이다.”

 

그는 나의 갑작스런 응수에 멈칫했지만 이내 “해도 스스로 돌고 있다”고 답했다.

 

그가 태양의 자전을 말한 것이다. 무지렁뱅이 스와미가 아님에는 틀림없었다. 보통의 떠돌이였다면 어떤 문답도 지나치고 말 일이었지만, 상대 스와미가 힌두 철학에 대해 나름대로 아는 것 같다는 인상이 들자 별로 말이 없던 내게도 할 말이 생기곤 했다. 그것은 인도를 여행하며 대다수 민초들, 즉 카스트 하층 계급들의 비참한 삶을 대하면서, 카스트 이론을 뒷받침해주는 힌두 철학자들에 대한 불만 때문이기도 했다.

 

내 생각이 이렇다 하더라도 아무에게나 힌두교의 문제를 책망할 수는 없는 일. 그에 앞서 그의 소속을 물었다.

 

“어디에서 왔는가?” 

“온 곳이 없다.”

 

난 순간 당황했지만, 그가 떠돌이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다시 물었다.

“당신은 누구로부터 배웠는가. 당신의 스승은 누군가”

 

우리나라 수행승들의 문중보다 더 계보를 중시하는 게 요기들의 전통이어서 그 계보를 물은 것이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손가락을 공중을 향해 가리켰다.

 

“저 하늘이 당신의 스승이란 말인가?”
“…”
“그럼 지, 수, 화, 풍, 공을 말하는 것인가?”
“…”

 

그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엠티니스(空).”

 

의외였다. 신과 공을 하나로 보기도 하지만, 신을 부인하는 불교를 무신론이라며 경멸하는 힌두 성직자들은 통상 궁극을 ‘신’ 또는 ‘디바인 슈프림 파워(신성한 궁극의 힘)’ 라고 표현하곤 했기 때문이다.

 

철학, 정치, 지리 등에도 밝은 떠돌이 성직자

 

Untitled-19 copy.jpg서로 말문이 트인 우린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 얘기를 주고받았다. 64살인 그는 수백살 먹은 성인들이 즐비하다는 히말라야 강고트리 위 갠지스의 시원지 거묵에서 수행했으면서도 종교 뿐 아니라 철학, 정치, 지리 등에도 밝았다.

 

떠돌이 요기였지만 아쉬람의 스와미들과 다른 떠돌이 스와미들도 그에게 누구보다 깍듯이 대했다. 그러나 난 인도 사회를 해결 난망으로 이끈 카스트 시스템을 해체하기보다는 더욱 공고히 하는 힌두교의 문제점을 그에게 공박하곤 했다.

 

그 때마다 조용히 내 말을 경청하던 그는 “잘못 행하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진리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거나 “진정으로 디바인 파워(신성)를 체험하면 인간을 차별할 수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수많은 신이 있지만 신성한 근원의 다양한 표현일 뿐이라고 했다.

 

아쉬람에서 일주일이 지나면서 몸의 상태는 더욱 나빠졌다. 담까지 절여 요가 동작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서양 학생이 90% 이상인 아쉬람에선  크리스마스 축제로 떠들썩했지만 난 줄줄 새어나오는 콧물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 외엔 한국인은 한 명도 없었다. 요가고 뭐고 모두 그만두고 아쉬람을 떠나고 싶었지만 몸이 너무 아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이제 요가 시간에도 참석하지 못하고 아예 기숙사에서 누워 있었다.

 

Untitled-21 copy.jpg이때 타라난다가 나타나 내게 이름도 알 수 없는 풀과 나무 열매들을 내밀었다. 그것을 끓여 마시고, 아쉬람에서 소금을 얻어 목을 가글하라고 했다.

 

“스와미들은 떠돌아다닐 때 얇은 천 하나만을 걸치고 한뎃잠을 많이 자는 경우가 많다. 돈이 없어 약을 사먹기도 어렵지만, 병에 걸리는 경우는 별로 없다. 신의 선물인 풀과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병을 가져다주듯이 해결책도 가지고 있다. 또 만트라를 외면 자연과 바이브레이션(진동)이 일치해서 병이 몸에 잘 침입할 수 없게 된다.”

 

풀을 무심코 받아 침대 머리맡에 놓아두긴 했지만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한국에서 가져간 약들을 먹어도 도무지 차도가 없었다.

 

그래도 그의 성의 때문에 풀을 버릴 수는 없었다. ‘밑져 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전기 쇠막대기를 컵에 꽂아 풀과 열매를 펄펄 끓였다. 그 물을 마시고, 소금으로 목도 가글했다. 또 입으론 “옴~”하며 만트라를 외기까지 했다. 살기 위해 그가 가르쳐준 방법을 결국 다 한 것이다.

 

따뜻한 것을 마셔서인지 아무래도 콧물이 덜 나오는 것 같았다. 컵에 물을 더 붓고 풀을 끓여 계속 마셨다. 그렇게 이틀째. 좀체 나을성싶지 않던 몸이 어느새 가뿐해진 것이 아닌가.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는 어제 가져온 것과 같은 종류의 풀을 다시 뜯어 가져왔다. 사르반가 잎과 댓잎 같은 테자마타잎, 크러브, 조그맣고 동그란 알갱이인 블랙 페퍼와 진저라고 설명까지 해주었다. 몸에 열을 내주어 감기를 쫓고 통증을 가라앉히는 풀들이라고 했다. 그것을 몇 번 더 끓여먹자 놀랍게도 콧물까지 멎고 몸살기도 사라졌다.

 

흐르는 강물을 살포시 가리키고 살포시 웃으며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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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않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 했지만, 난 이렇게 체험하고 나서 믿는 타입. 그 뒤 타라난다의 눈빛이 깊다는 것을 느꼈다.

 

어느 날 난 다시 메인홀 앞 고목나무 아래서 달밤에 그로부터 그의 출가담을 들었다. 그는 캘커타대학을 졸업하고 유명 선박회사에 취직해 많은 보수를 받았단다. 세계의 바다를 누비던 그는 고향에 돌아와 강가에서 강을 바라보던 순간 “흘러가는 모든 게 덧없다”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사회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출가했다고 한다.

 

타라난다는 아무 것도 몸에 지니지 않은 무소유자였다. 힌두 사원 앞에서 순례객들이 주는 몇 푼의 보시금으로 차비를 하거나 끼니를 때우지만 여의치 않을 때가 많다고 했다. 최남단 께냐꾸마리에서 이 아쉬람을 올 때도 돈이 없이 이틀을 굶고 걸어왔다는 것이다.

 

나와 같은 날 아쉬람에 도착했던 타라난다는 15일만에 내가 떠나기로 한 날 아침 아쉬람을 떠났다. ‘아픈 인도’를 아파하고 힌두 성직자들을 미워하다가 몸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아파진 나를 한 힌두 성직자는 살려 놓고는 떠나갔다. 이 생에서 다시 만날 어떤 기약도 없는 그 곳으로. 그가 내게 남은 마지막 아픔까지 가져가려는 듯이 텅비어서 큰 가슴으로 나를 꼭 껴안았다. 무소유 노숙자의 갈비뼈 사이에서 자유의 바람이 가슴에 느껴졌다. 못내 아쉬워 눈물이 글썽이는 내 모습이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고 있었다. 그는 내 앞에서 손으로 흐르는 강물을 가리키고는 살포시 웃고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렇게 떠나갔다. 이 생에서 다시 만날 기약이 없지만, 우리가 언제든 함께 하는 그 곳으로.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동영상 온라인뉴스팀 장수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