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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 하얀 나신의 성산, 연꽃으로

바래미나 2008. 8. 21.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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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오지 순례]③ 인도인의 성지 난다 데비


 

공영버스 타고 15시간…‘만국 공용어’ 웃음으로 소통
간디 3일간 넋도 말도 잃어…내 넋도 묻고 발길 돌려

 

삶엔 예고편이 없다. 그 날 그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우리는 다시는 맛보지 못할 순간들을 맛보고 있다.

 

여행 또한 마찬가지다.

갠지스강의 원류인 히말라야 강고트리나 요가의 고향 하리드와르, 리시케시, 바라나시가 힌두교인이라면 누구나  순례하기를 원하는 성지인 것처럼 난다 데비도 인도인이라면 누구나 죽기 전에 한 번 보고 싶어 하는 곳이다.

 

난다 데비는 해발 7816m로 인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한국인들이 백두산 천지를 신성시하는 것처럼 인도인들은 난다 데비를 가장 신성시하고 있다. 특히 ‘축복받는 여신’이란 뜻의 난다 데비는 더 높은 히말라야 고봉들보다도 인간의 접근을 쉽게 용납하지 않는 산으로 유명하다. 1936년 영국과 미국합동대가 처음 오르고, 39년엔 폴란드 정찰대가 동쪽 봉우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51년 주 봉우리와 동쪽 봉우리의 종주를 시도한 프랑스정찰대 2명은 돌아오지 못한 채 여신의 품에 안겼다. 나는 부푼 꿈을 안고 리시케시에서 하리드와르로, 하리드와르에서 다시 15시간 걸리는 알모라를 향해 공영버스를 잡아탔다.


 


여행 또한 예고편 없는 삶 같은 것…‘인도에선 인도식으로’ 다짐 따라

 

‘인도에선 인도식으로.’

그것은 여행 출발 때부터 내 다짐이었다. 인도인들처럼 타고, 인도인들처럼 먹고, 인도인들처럼 잘 생각이었다.

 

여행객들은 대부분 우리나라 장거리 버스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관광버스를 이용했지만, 난 히말라야를 헤매고 돌아다니면서 인도의 서민들이 타는 공영버스를 탔다.

 

시골 공영버스들은 우리나라에서 시내버스가 등장한 60~70년대에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고물이다. 차에 오르니 새까만 얼굴들이 일제히 희한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관광버스도 아닌 이런 시골버스에 외국인이 타는 것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인도에선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장거리 여행이라 좁은 좌석에 두 사람이 앉는 것도 불편한데 세 명이 끼어 앉아 10시간을 넘게 달려가는 경우도 많다. 앞쪽을 보니 가족이나 친척으로 보이는 둘이 앉아 있는데, 한 명은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라서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배낭을 끌고 앞으로 가 만국공용어인 웃음으로 초를 쳤다. 그리고 비집고 앉았다. 아마 인도인이었다면 화를 냈을지도 모를 그들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의 무례를 용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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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어든 이방인에 시시콜콜…한마디한마디 생중계하며 날밤 새
 
외국인을 처음 본 듯한 이들은 아예 날밤을 새려고 작정한 듯 팔을 걷고 온갖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물었다. 그러나 그것은 약과였다. 얼굴을 바짝 갖다 대고 우리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뒷좌석 사람은 다시 그 뒷사람들에게 대화 내용을 전하고, 그 사람은 다시 뒷사람에게 전하는 식으로 내 말은 버스 안에서 생중계되고 있었다. 대화를 전해들은 승객들이 다시 질문을 해대면 그것까지 대답해야 했다.
 
2~3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질문을 받던 나는 피곤해 잠을 자는 척했다. 침낭을 꺼내 등 뒤에 괴고는 머리를 뒤로 제쳤다. 제발 질문 좀 그만하라는 신호였다. 길이 울퉁불퉁해서인지, 아니면 운전기사도 승객들과 공범이었는지 차가 잠시 허공에 뛰어오르는 듯하더니 내 몸은 의자 밑으로 미끄러져 콰당 떨어지고 말았다.
 
모든 승객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웃다가 겸연쩍은 표정을 짓던 옆 청년이 “아프냐”고 물었다. 
“너도 그렇게 떨어져 봐라. 등 안 아프겠나.”
 
하나마나 한 질문을 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더 이상 얘기가 길어지는 것을 차단하려고 “안 아프다”고 답했다. 그런데 그에겐 의외였던 이 답이 다시 날샘의 발단이 될 줄이야. 그 청년은 다시 뒷사람들에게  “안 아프단다” 고 전하고, 그 사람은 다시 뒷좌석에 “그렇게 콰당 떨어졌어도 안 아프단다” 고 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를 어찌 잠재울 수 있을 것인가. 나도 아예 잠자는 것을 포기했다. 이렇게 대화를 하다가 지치고 지칠 때쯤 잠을 잤다. 그리고 차가 고장 나 히말라야의 곡예길에서 정차해 사람들이 웅성거리면 다시 깨고, 다시 잠들고, 너무 추워서 다시 깨고 반복하기를 몇 번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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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크하고 10분쯤 뒤 괴성, 헐크같은 사내 출현에 ‘귀곡산장?’
 
이렇게 고락을 함께 15시간을 달려 대지가 꽁꽁 언 듯한 새벽 6시 히말라야의 외딴 도시 알모라에 도착했다. 정들었던 이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5시간 동안 낯선 미로를 달려 드디어 목적지인 코사니에 도착했다.
 
언덕으로 올라서니 갑자기 눈부신 설산이 펼쳐진다. 나체로 누운 숫처녀의 모습이 이럴까. 조금도 추하지 않고 눈이 부실만큼 아름답고 고귀하다.
 
그곳에서 다시 5분 정도 걸어 한적한 곳에 간디아쉬람이 있었다. 계단 위에 오르니 아름다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멀리 보이는 난다 데비 여신의 축복이 이 곳에도 가득한 것 같았다. 그래서 이 아쉬람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부풀어 올랐다. 과연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
 
매니저라고 쓰인 방문을 노크했다. 안에 인기척이 나는 것 같은데, 대답이 없었다. 손으로 문을 또 두들겼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문 앞 정원의 턱에 앉아 안에서 사람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10분쯤 지나자 안으로부터 괴성이 들렸다. 돼지 멱따는 듯한 소리였는데, 무슨 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문이 열리고, 헐크 같은 사내가 아랫도리에 수건만을 두른 채 남산만한 배를 내밀고 나타났다. 순간 내 머리 속에서 아름답던 간디아쉬람은 귀곡산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의 손에 사람을 잡는 도끼가 들려있지 않은 게 이상했다.
 
하나가 지나치게 큰 앞니를 드러내놓고 그가 웃었다.
 “공동체에서 몇 명이나 살지요?”
 “넷이요.”
 “저 말고 방문자가 있나요?”
 “아무도 없어요.”
 
그가 심하게 더듬거리는 말로 답했다. 간디아쉬람에서 아름다운 벗들을 만날 생각에 그 먼거리를 달려왔건만, 난 돌아가기엔 너무 깊은 산 속에 들어와 버린 미아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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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뒤엔 절망이, 기대 놓고 나면 다시 희망이 싹트기 마련

 

아무도 찾는 이 없는 히말라야 오지의 아쉬람에서 난 오랫동안 비어 있던 독방으로 안내되었다. 화장실까지 딸린 큰 방이었지만 햇볕이 들지 않았고, 문 사이로 황소바람이 새어 들어와 몹시 추웠다.

 

지나친 기대 뒤엔  절망이 기다리고, 기대를 놓고 나면 다시 희망이 싹트기 마련이다. 방을 나오니 역시 멀리엔 난다 데비가 햇볕에 빛나고 있고, 그 빛이 반사된 듯 반짝이는 정원 잔디밭엔 매니저가 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나를 보더니 하얀 이를 드러내놓고 웃었다.

 

나도 엉겁결에 웃었다. 우스워서가 아니라 그의 웃음이 워낙 천진난만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먼저 웃고 말았다. 그의 이름은 이샌 투피. 성지 바라나시에서 살다가 간디의 삶을 따르기 위해 이곳에 왔단다. 그의 티 없는 웃음이 여신 난다 데비와 너무나 닮았다는 것을 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난다 데비를 구경하기에 가장 좋은 장소로 알려진 이곳이 간디아쉬람이 된 것은 간디가 난다 데비를 보기 위해 여기 와 14일간 머물고 간 뒤부터였다. 간디는 여기서 아나샥티요가란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 때부터 간디를 따르는 이들이 이곳에 살면서 그의 가르침을 실천해 왔다.

 

간디의 사진들이 전시된 간디홀 바깥 벽면엔 아쉬람의 멤버로서 선언해야 할 것들이 적혀 있다.

 1.마하트마 간디의 고귀한 철학과 원칙을 존경하고, 강한 신념을 지닌다.
 2.인도의 자유와 통합을 꾀하고, 모든 종교와 그들의 계율을 존중한다.
 3.비폭력을 믿는다.
 4.여행가로서가 아니라 정신과 영적인 평화를 찾는 데 아쉬람 시설을 이용한다.
 5.아쉬람의 원칙과 고귀함을 존중하고, 아쉬람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는다.
 6.아쉬람 안에서 담배, 술, 계란, 고기, 생선을 먹지 않고, 다른 악행도 하지 않는다.
 7.아쉬람의 일과를 지원하고, 매일 기도에 정기적으로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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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고는 하지만 그럴 것까지야’했던 내 마음도…

 

아쉬람엔 이샌 투피와 요리사와 재봉사 등 4명이 식구의 전부였다. 오후 6시 기도 시간에만 기도실에 함께 모여 기도할 뿐이었다. 5년 전 난다 데비와 간디의 축복에 잠기러 이곳에 왔다는 이샌 투피는 한낮이면 양지 바른 잔디밭에 눕고, 해질녘이면 난다 데비의 모습을 바라다 보았다.

 

간디가 부러워할 만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간디는 이곳에 와서 처음 난다 데비를 보고는 3일 동안 넋을 잃고 말도 잃은 채 난다 데비만을 바라 보았다고 한다.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그럴 것까지야’했던 내 마음도 난다 데비의 변화를 겪고는 간디의 심정이 되고 말았다. 해질녘 구름이 걷히면서 난다 데비는 햇살에 비쳐 조금씩 옷을 벗고 있었다. 처음엔 새하얀 속살이 드러나는 듯하더니, 어느새 신혼의 첫 밤 호롱불처럼 연분홍 빛깔이 반사된다. 굴곡 있는 나신이었다.

 

그러나 마침내 그 나신이 온 몸을 비트는 듯싶더니 순식간에 한 송이 꽃이 피어난다. 인도의 상징 연꽃이다. 난다 데비의 일몰을 보며 여신의 축복을 받기 위해 몰려 든 수십명의 인도인들은 말을 잃은 표정으로 기도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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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명한 산악인이 딸 묻고 돌아간 시린 전설 뒤로 하고

 

땔감으로 때서 하는 밥과 간단한 인도 음식, 장엄이 없이 꾸밈없는 노래와 기도, 이샌 투피의 웃음 속에서 나도 난다 데비의 전설 속으로 빠져들었다.

 

미국의 한 유명한 산악인은 젊은 날 난다 데비를 등정하고, 난다 데비에 깊이 빠져 들었다고 한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 결혼해 귀여운 딸을 낳았는데, 딸의 이름을 난다 데비라고 지었다. 그리고 늘 딸에게 아름다운 난다 데비의 얘기를 들려주고, 언제든 난다 데비에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했다.

 

약속대로 그 딸이 20살이 되자  인도로 향했다. 성년식을 난다 데비에서 치르기 위해. 마침내 산에 오른 난다 데비는 나르시스트처럼 난다 데비 산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했다. 그러나 고산증으로 산 정상 부근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빠는 사랑하는 딸 난다 데비를 난다 데비의 품에 묻고  돌아갔다고 한다.

 

눈이 시릴만큼 새하얀 난다 데비엔 내 넋도 함께 묻혔다. 그리고 내 육신은 시골 버스에 다시 실렸다. 만나면 헤어져야 하고, 헤어지면 언젠가는 만나는 것. 그래서 만남의 기쁨도, 이별의 슬픔도 난다 데비와 함께 안녕!

 

 

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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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찍은 난다 데비의 사진을 보면서 들을 수 있도록 배경음악을 스페인의 Haizea가 부른 바스크지방의 민요 Loa Loa(나의 작은 태양)로 깔았습니다. 딸을 난다 데비에 묻은 산악인의 얘기를 들으면서 너무나 가슴이 아팠고, 너무도 아름다운 난다데비가 해저물녁 해에 반사된 모습을 보며 황홀하게 취했었는데,  이 곡은 마치 난다데비 여신이 나에게 손짓을 하는 기분에 젖게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