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오지순례]② 병든 몸으로도 ‘지금 여기서 자족’
처음엔 쾌재 불렀던 숙명통 도인들 연락처 버렸다
‘비구’ 원래 뜻은 거지, 그러니 붓다는 거지 왕초
인도 순례는 이번 생에서 하지 않으면 숙제를 마치지 못한 낙제생이라도 될 것처럼 기를 쓰고 간 것이었다. 그 순례를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 마음으로 공을 들였던가. 그랬으니 드디어 해방이라며 히말라야 설원에서 춤이라도 추어야했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울던 아내와 가슴 아파하는 어머니, 그리고 형제들과 친구들과 동료들이 그 곳까지 따라와 내 뇌리 가운데 앉아 있었다. 그 만이 아니었다. 태우려 태우려 해도 태워지지 않는 것들이 인도의 외진 게스트하우스까지 따라와선 백일몽 같은 영상들을 지친 마음에 투사하고 있었다.
멀쩡한 직장인이 1년씩 회사를 그만 두고 인도로 떠나려다보니, 그 많은 사람을 달래고 설득하고, 무마하느라 이미 인도에 가기 전부터 내 몸은 파김치가 되어있었다. 원래 출가도 가출도 그렇게 하는 게 아니건만, 이왕 가면서도 조금이 나마 욕을 덜 먹으려는 알량함이 그토록 심신의 고초를 자초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시간 너머로부터 이어져온 내 업보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어느새 달라이 라마가 머물고 있는 히말라야 산간도시 맥레오드 간지에 가 있었다. 나는 위로받고 싶었지만 이곳엔 나보다 더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인들이 선점하고 있었다. 이 세상 고통은 모두 내 차지라는 듯이. 달라이라마 궁이 있는 남걀사원으로 가는 템플 길은 늘 걸인들이 앉아 있었다. 너희가 자비의 종교인 티베트 불교를 배우려면 먼저 보시하는 법부터 배워라는 듯한 표정들이었다.
다리나 팔이 없는 이는 그 상처자국을 잘 보이게 내놓기도 하고, 양 다리가 없는 이는 다리를 질질 끌면서 기었다. 늘 울상 짓고 있는 걸인들의 얼굴. 그들의 표정이 바로 내 심정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내가 업고 다니는 것은 인연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다. 알 수 없는 시간 너머로부터 이어져온 내 업보였다. 화목하고 부유했던 가정, 그러나 죽음을 이고 산 병약했던 몸, 중2 때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중3 때 집의 화재와 어머니의 큰 화상, 고2 중퇴, 가출, 자살 시도, 뒤늦은 진학, 결혼, 일, 위기, 자유와 평화의 갈망, 수행, 그리고 지금 다시 한 가출?. 삶의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왜 태어났고, 내게 일어난 그 많은 일들, 그리고 왜 여기에 와 있는 지 그 모든 이유를 알고 싶었다. 알지 못하면 죽을 것만 같았다. 알지 않고선 도저히 이 히말라야를 떠나지 않으리라 작정했다. 내가 왜 지구에 왔는지를. 그것을 모른다면 차라리 그냥 그곳에 묻히고 말리라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숙명통을 해 전생을 꿰뚫어본다는 이들을 수소문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의 연락처를 확보한 뒤 모든 인생의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기라고 할 듯이 쾌재를 불렀다.
너무나 상식적이면서도, 정신 잃은 나를 깨우는 벼락
그러나 맥레오드 간지를 오자마자 떠날 수는 없었다. 나는 산길을 걸어 투시타명상센터에 올라갔다. 그곳엔 동굴 같은 작은 도서관이 있었다. 불현듯 라마 예쉬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천진난만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그의 얼굴에 시선이 멈췄다.
“행복은 여기에 있는데, 그대는 거기에서 찾고 있다. 그것이 없는 곳에서 찾아 헤매지 말고, 그것이 있는 곳에서 찾아라.”
너무나 상식적이면서도, 정신 잃은 나를 깨우는 벼락이었다. 라마 예쉬는 1935년 티베트에서 태어나 인도로 망명했다가 1984년 4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탁월한 수행력과 간결한 법문은 서구인들의 미망을 순식간에 떨쳐내고 출가 붐을 낳았다. 대승불교수호재단(FPMT)은 순식간에 25개국에 120여개 센터가 만들어졌다. 그의 뒤를 이어 대승불교수호재단을 이끌고 있는 라마 조파 린포체(1946~)는 고승 아티샤의 가르침에 따른 ‘사고 전환법’을 주로 가르친다.
라마 예쉬는 “고민거리가 생겼을 때, 만약 그 문제의 이익을 생각한다면, 그 고민거리는 바람직하게 된다. 나빠지기는커녕 좋아지고 유용하게 된다”고 가르쳤다. 라마 조파 린포체는 고통을 즐겁게 받아들여 행복으로 변화시키도록 했다. 한 생각을 바꿈으로서 불행감을 행복감으로 바꾸도록 하는 것이다.
목 나쁜 좁은 골목서 구걸하는 그 남자의 깡통만 유독 가득
투시타센터에서 산길을 내려올 때였다. 난 맥레오드 간지에서 남걀사원 정문과 템플길 사이의 작은 골목 안에 머물렀다. 골목이 아주 좁아서 걸인들에겐 목 좋은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 남자는 이 골목 나무 밑에 앉아 구걸을 하고 있었다. 쇼올을 어깨에 둘러맨 남자는 하얀 이를 드러내 놓고 있었다. 도무지 좋은 일이라곤 생전 있을 법하지 않은 그가 말이다.
다음날 골목을 나갈 때도 그 걸인은 여전히 앉아 씽긋 웃고 있었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나를 언제 봤다고. 옆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지팡이를 짚은 티베트 노인이 지나갔다. 그를 보고도 활짝 웃었다. 노인도 그 걸인과 친구처럼 다정하게 뭔가 얘기를 나누더니 5루피를 놓고 갔다.
남걀사원에 나올 때도 보니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활짝 웃고 있었다. 볼 때마다 자꾸 웃는 그 얼굴을 보며, ‘무슨 꼼수가 있어 그런가’하고 의심하던 나도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 못해 어느새 10루피를 꺼내 그의 깡통에 넣어 주었다. 나로선 요며칠 새 가장 큰 보시였다.
나만 준 게 아니라 오고 가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그 웃음에 빨려든 듯 깡통에 동전을 넣고 가는 것이 아닌가.
예로부터 울상을 짓는 게 거지의 유일한 전략이 아니었던가. 반협박 전략도 있긴 하지만, 굳이 나누자면 그건 강도짓이지 거지짓은 아닌 것이다. 또 환심을 사기 위해 손을 내밀며 배시시 웃는 거지 소녀들은 많다.
그러나 이 거지의 웃음은 어느 누구의 웃음보다 행복한 웃음이었다. 남걀사원 안에서도 이런 웃음은 발견한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아까 본 사진 속의 라마 예쉬의 웃음과 닮아 있었다.
애써 불쌍한 표정을 짓는 바깥 거지들의 깡통은 여전히 빈 깡통으로 남아있는데, 이 거지의 깡통은 보시물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나는 손에 든 다섯 개의 바나나 가운데 두개를 떼어 그에게 주었다. 바나나를 주면서 보니 그의 한쪽 손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 그 손엔 한 손가락만 나와 있고 나머지는 붕대로 감긴 채 보이지 않았다. 심한 병을 앓고 있는 듯했다. 한센병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병든 몸, 아무 것도 갖지 못한 몸. 어느 누구보다도 고통스럽고 불행하다 해도 시비할 수 없는 그가 아니던가.
그런데도 늘 자족한 걸인. 그는 겨우 동전 몇 루피를 받지만, 1만 루피 혹은 억 만 루피를 갖고도 늘 부족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향해 소유가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나라 잃은 망명객의 신세로, 독신 수행자의 몸으로 강한 나라와 많은 돈, 처자식까지 가진 부자 나라 사람들을 오히려 위로하고 행복을 나눠준 라마 예쉬나 달라이라마처럼.
업보부터 고통의 그림자 더듬어 셈하고 셈하던 내가 달라져
‘비구’의 원래 뜻도 ‘걸사’, 즉 거지다. 붓다는 거지 왕초였던 셈이다. 그러나 가진 것 많던 왕과 장자(부자)들은 앞 다투어 걸인을 찾았다. 자신이 얼마나 많이 가진 지를 잃어버리고, 정말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걸인에게 제발 뭔가를 좀 달라고.
그 걸인의 웃음 사이를 하루에도 몇 번씩 거닐면서, 나를 괴롭게 한 전생의 업보부터 모든 고통의 그림자를 더듬거리며 셈하고 또 셈하던 나의 셈법이 달라지고 있었다.
걸인의 웃음이 내게 말해주었다. 그 업보들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지금 그대가 갖고 있는 것에 대한 자족감을 잃어버렸기에 괴로운 것이라고. 나는 이 걸인보다 무엇이 부족해서 그렇게 불행하다고 한탄했던가. 나는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디에서 행복을 찾았던 것일까. 다시 걸인이 나를 보고 그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숙명통을 했다는 그 도인들의 연락처를 버려 버린 것은 바로 그날이었다.
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