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 그리고 최후가 된 미니밴 쿠페 르노 아방타임
변성용 입력 2018.01.24 14:06 수정 2018.01.24 14:08
아방타임 이후 르노는 더 이상 아방가르드를 추구하지 않는다
[변성용의 사라진 차 이야기] 내친 김에 럭셔리 MPV 쿠페까지 만들지 뭐. ‘가장 프랑스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 임을 확신한 르노의 대모험, ‘벨사티스’의 탄생과 실패는 이미 지난 편에 다룬 바 있다. (http://v.auto.daum.net/v/o7NWjKQr5R) 여기서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당시 르노의 2박스화 컨셉은 4도어 세단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르노의 목표는 모든 장르, 그러니까, SUV는 물론이고 럭셔리 ‘쿠페’까지 2박스 스타일로 만들어 버린다는 자신감 속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편한 운전 포지션, 여유로운 공간이야 말로 고급차가 지향해야 할 가장 중요한 목표였으며, 미니밴은 이들의 이상을 실현해 줄 최적의 형태라고 그들은 믿었다.
르노가 특히 눈 여겨 본 것은 공간활용성을 극대화한 쿠페, 이른바 슈팅 브레이크라는 장르였다. 짐을 싣기 위해 쿠페의 지붕을 잡아 늘여 트렁크 끝에다 붙인 차는, 난폭하게 말하자면 3도어 왜건이라 불러도 무방할 물건이었지만, 기반이 된 쿠페의 동력특성과 고급차로서의 품질은 그대로 유지했기 때문에 지금도 간간히 시판되곤 하는 장르다. 처음부터 공간활용성이 뛰어난 MPV 스타일로 쿠페를 만든다면, 원래 슈팅브레이크로서 가져야 할 장점은 더욱 극대화 될 수 있다는 것이 르노의 생각이었다. 남은 것은 프랑스만의 감성으로 차를 빚어내는 것뿐.
◆ 어디 한번 맘대로 해 보시게나
아방타임의 디자인을 지휘한 것은 르쿼망의 르노로 되어 있지만 이 차를 실제 디자인한 곳은 르노의 자회사 마트라(MATRA). 2박스 쿠페에 대한 개념만 전해 졌을 뿐 나머지는 완전히 마트라의 재량 하에 진행된다. 생산까지 마트라가 모두 맡기로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마트라의 디자인을 이끌던 사람은 1세대 에스파스를 디자인 했던 필립 귀뇽 (Philippe Guédon). 카 디자이너일 뿐만 아니라 현대 건축가이기도 했던 그는 르 코르뷔지에의 열렬한 추종자였으며, 살아 생전 그가 만들었을 법한 자동차 디자인을 완성하고자 했다.
MPV의 형태를 정립시킨 차 에스파스의 창조자로서 대단한 긍지를 가진 사람이었던 만큼, 새 차가 에스파스의 잔향을 담게 될 것임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실제로 개발 컨셉은 ‘초대 에스파스를 타고 다녔던 어린이가 자라서 향수를 느끼고 구입하고 싶어질 쿠페’로 정해진다. 타겟층이 지나치게 협소한 것이 놀랍긴 하지만, 이미 프랑스 최고를 외치던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결정이었을 터. 중앙 배치 계기판이나, 그린하우스의 프레임을 그대로 노출한 구조 등 안팎으로 에스파스의 이미지를 가져오려는 시도가 이어진다.
쿠페였지만, 남들 다 하듯 루프라인을 깎아서 날렵한 스타일을 낼 생각은 아예 없었다. 기존의 자동차들이 답습한 구성을 깡그리 무시한 완전히 새로운 형상의 차가 디자인 된다. 1999년, 제네바 모터쇼에 등장한 차는 당연하게도 신형 에스파스의 디자인 실험(experiment) 정도로 취급되었다. 쿠페라고는 했지만, 벨사티스보다 더 원박스 감성이 물씬했으니까. 누구도 문짝을 3개만 단 미니밴이 진짜로 만들어질 것 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2년 뒤, 이 차가 이 모습 그대로 생산될 때 까지는.
◆ 벨사티스보다 더 희귀한 크로스오버 쿠페
아방타임(AVANT+TIME), 말 그대로 시간을 앞서 가겠다는 뜻을 담은 차는 그 이름만큼이나 아방가르드(avant garde)한 구성이 넘쳐났다. B필러인지 C필러인지 분간 자체가 애매한 그린 하우스는 굉장한 개방감을 자랑했으며 5명이 앉고도 넉넉한 실내공간을 갖췄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분류의 차였지만 르노는 이 차가 쿠페라고 단언했다. 세단보다 실내공간이 좁고 스포티한 유선형 보디라인이 특징인 쿠페의 개념을 박살내겠다는 듯 아방타임은 전위적인 디자인과 넓은 실내를 고루 갖추었다. 미니밴 베이스였던 만큼 키가 아주 높았으며 (1,630mm)와 뒷좌석은 어지간한 고급세단보다도 넓었다.
키가 아주 크기 때문에 앞좌석에 들어가기 편하고, 바닥에서 좌석이 상당히 높았다. 뒷좌석이 앞쪽보다 높아 뒷좌석 승객의 시야가 넓고, 푹신한 시트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센터(B)필러가 없고, 180도로 감싸는 뒤창 덕택에 시야 역시 일반 쿠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두 도어는 아주 크고, 전동으로 앞뒤로 움직이는 시트 적분에 뒷좌석 승하차도 쉬웠다. 미니밴보다도 넓은 도어 때문에 좁은 곳에서 빠져나오기가 어려울 것 같았지만, 아방타임은 도어에 2개의 힌지를 다는 것으로 이를 쉽게 해결해 버린다. 도어를 밖으로 밀어 앞으로 보내는 식으로 쉽게 오르내릴 수 있게 한 것이다.
미니밴 에스파스를 위해 만든 차기 플랫폼을 썼지만 상부 구조를 통째로 알루미늄 스페이스 프레임으로 만드는 비싼 방식을 채용했다. 중량을 줄이고 강성을 높여 안락성과 핸들링, 충돌 안전성을 높이기 위한 방편이었다. 에스파스를 손질한 덕에 운전석이 눈에 띄게 앞으로 나온 캡 포워드 공간은 넓다 못해 광활했다. 길이는 4,620mm에 불과했지만 트렁크 크기는 메르세데스 벤츠의 S클래스 못지않았고, 뒷좌석을 앞으로 접으면 짐칸은 1600리터까지 커졌다.
차광처리를 한 7mm 두께의 글라스 루프 또한 특징이었다. 2개 부분으로 나뉜 유리가 지붕을 완전히 덮어 개방감은 엄청났으며, 그중 앞쪽 절반이 전동식 선루프로 완전히 열렸다. V6 3.0L와 4기통 2.0L 터보 두 종류의 가솔린과 2.2L 디젤 엔진을 준비해 선택의 폭까지 넓었다. ABS, 브레이크 어시스트와 주행안정장치(ESP)를 비롯해 자동 점등장치, 자동식 와이퍼, 차광 유리창 같은 고급 장비가 모두 기본으로 들어갔다. 아방타임에 마련된 옵션은 오직 내비게이션 하나 뿐이었다.
플랫폼이 가지는 특성 상 핸들링은 미니밴의 범주에 머물렀다. 핸들링 성능을 높이려 상부 구조물을 전부 알루미늄으로 짜는 강수를 뒀으며 덕분에 전체 무게는 1.7톤 중반 정도로 나쁘지 않았지만, 선루프의 무게만 40kg나 되다 보니 자연스레 무게중심이 올라갔다. 고속 코너에서는 롤링이 컸으며, 쿠페에서 기대할 법한 스포티한 움직임도 아니었지만, 대신 차는 안전하고 조용하며 편안했다. 파격의 스타일링까지 더 해진 덕분에 적어도 아방타임은 그랜드 투어러 (Grand Tourer/GT)라고 불리기에 무리 없는 차였다. 선뜻 손이 갈 물건은 아니었을 지 언정 이 대담한 시도가 어떤 시장반응을 일으킬지 관심이 모아졌다.
◆ 고집을 밀어붙인 결과
예상했겠지만, 아방타임은 망했다. 르노는 아방타임을 럭셔리 쿠페로 인정받고 싶어했지만 정작 시장은 이 차를 아주 특이하고 비싼 크로스오버 모델로 받아들였다. 풀옵션 3만4,700달러나 되는 가격은 르노의 역대 최고가로 평소 작고 실용적인 차를 만드는 르노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프랑스 내의 판매량은 처참한 수준이었다. 르노가 믿고 밀어붙였던 프랑스다움의 결과물은 정작 프랑스인들조차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진보적인 면으로만 보자면 벨사티스보다 더 혁신적인 차였지만 아방타임은 시장에서 참패한다. 이미 프랑스식의 쿠페를 천명해 놓은 마당에 안 팔린다고 때려치울 수는 없는 일. 르노는 이 차를 조금 더 밀어 붙여 보고 싶었지만, 결국 적자를 견디지 못한 마트라가 먼저 파산해 버린다. 마트라가 망하면서 아방타임을 생산할 방법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혼란의 와중에서 그나마 르노가 건져낼 수 있던 차는 또다른 위탁 생산차였던 벨사티스 정도였다.
2003년, 데뷔 후 불과 2년을 채우지 못한 채 아방타임은 단종된다. 총 판매량은 8,000여대에 불과했다. 르노의 디자인 파격은 한동안 계속 되지만, 그것은 어떻게 생겨도 팔렸을 소형차에 국한된 작은 시도에 머물렀다. 이제 르노는 더 이상 아방가르드를 추구하지 않는다.
자동차 칼럼니스트 변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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