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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해군 의 항공사

바래미나 2011. 4. 18. 23:41


육군·공군과 달리 해군의 항공사(史)는 외국에서 도입한 항공기가 아닌 비행이 불가능한 미군 항공기를 해군이 자체적으로 개조·운용한 것으로 시작된다.

동아일보는 이 사실을 1951년 8월23일자 사회면에서 ‘해군 기술 장교의 창안으로 육상 비행기를 수상 비행기로 개조하는 데 성공하여 과거 18일 진해 공작부 해상에서 시험 비행에 개가를 올리었다’는 내용의 기사로 말해 주고 있다.

주인공은 해군의 조경연(1918~1991) 예비역 중령과 그가 제작한 해취호(海鷲號·바다독수리).

해군특별교육대 9차로 입대, 임관한 조경연 중위는 일찍이 10대·20대 나이에 항공기를 개발하겠다는 열정을 보여 그의 고향에서는 ‘비행기 만든 사람’으로 불렸다. 비록 이륙 실패로 귀결됐으나 그는 나무를 깎아 만든 동체에 오토바이 엔진과 직접 만든 부품을 부착한 목재 모형 비행기를 제작, 멍석을 깐 논바닥 활주로를 달린 것이다.

조중위는 압록강함(PF-62) 전기사관으로 임무를 수행하던 51년 1월 목포항에 잠시 계류하면서 미 공군 소속으로 불시착한 채 방치되다 폭파 해체를 눈앞에 두고 있던 AT - 6기 한 대를 발견한다. 그는 개조하면 해군의 수상 정찰기로 쓸모가 있겠다는 생각에 함장 박옥규 중령에게 이 항공기를 인수하고 싶다고 보고했다.

함장은 조중위의 뜻을 받아들여 이를 해군본부에 보고하고 해군은 이 문제를 두고 미 군정 당국과 교섭을 벌인 끝에 ‘한국 해군에서 교육 자료용 항공기로 사용한다’는 조건 하에 인도받았다.

항공기가 진해로 이송되면서 역시 해군 공창(工廠)으로 전속된 조중위는 공창장의 도움을 받아 각 작업장에서 일제 때 진해 항공창에서 근무했던 기술 문관 14명을 선발, 1951년 4월1일 항공반을 조직하고 항공기 수리·개조에 들어갔다. 마침내 넉 달 반이 지난 8월15일 항공반은 수상 착륙 장치인 알루미늄 부주(浮舟·float)를 장착한 새로운 모습의 항공기를 선보였다.

조중위는 시험 비행할 조종사가 없어 고민에 빠지기도 했으나 당시 진해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던 미 공군 18전폭기 대대의 듀피 대위가 자진해 시험에 나서 성공을 거뒀다. 듀피 대위는 “성능이 훌륭한 편”이라고 평가했다.

해군은 이에 10일 뒤인 25일 진해 통제부 항무과 부두에서 명명식을 갖고 이 항공기를 ‘해취호’로 이름 지었다. 이로써 해취호는 한국 함대에 예속된 최초이자 유일한 항공기가 됐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개발 항공기라기보다 최초의 독자적인 개조 항공기로서 자리하게 됐다.

해취호 완성과 더불어 해군은 공군에 파견돼 있던 조용익 소령과 박기수 대위를 해군으로 복귀시켰다. 일제 시대 때 조종사·정비사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이들은 듀피 대위로부터 비공식적으로 비행 교육을 받고 해취호의 조종을 맡았다.

해취호는 해군의 사기를 드높이며 함대의 해상 경비 작전 지원, 업무 연락, 인원 수송 등의 임무를 수행해 나갔으나 취역 만 3개월도 안돼 비극적인 삶을 마감하고 만다.

1951년 11월22일 해취호는 진해∼포항 간 해상 정찰 임무를 수행하고 진해항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항 인근에 도달했을 때는 이미 일몰이 지난 데다 비구름이 몰려와 시정이 극도로 좋지 않았다. 착수(着水)할 지점인 해군사관학교 앞바다로 내려오던 해취호는 갑자기 급상승하더니 다음 순간 배면으로 해상에 추락하고 말았다.

이 사고로 조종사 박대위와 정비 장교 조소령이 순직했다. 또 추락 사고 여파는 함대 항공대는 물론 해군 전체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조대위를 비롯한 해군 항공반이 다시 항공기를 제작하기까지에는 3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해군의 두번째 자체 제작 항공기

 

 

1951년 11월22일 해취호의 추락 이후 53년 휴전 성립 때까지 해군의 항공기 제작 시도는 일시적으로 중지됐다. 하지만 조경연 대위를 비롯한 항공반 요원들은 해군의 자체적인 항공기 제작 열망을 결코 포기하기 않았다.

휴전 직후 조대위는 새로운 수상 비행정 제작을 위한 일련의 계획을 담은 보고서를 해군총참모장(현재의 참모총장)에게 제출, 승인과 함께 예산 지원을 받았다. 해군의 두 번째 자체 항공기 제작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53년 9월15일 진해 해군 공창의 창장은 조대위를 항공기 제작에 관한 책임자로 임명했다. 조대위는 10월20일 2호기 제작을 위해 항공반을 재조직하고 경험 많은 기술 문관 23명을 모집했다. 그들은 70평 가량의 창고를 개조, 임시 항공기 제작 공장으로 정하고 작업에 착수했다.

조대위는 54년 1월 공군에서 복무하던 그의 친구 배덕찬 중령으로부터 180마력짜리 L-5 경비행기 엔진을 무상으로 획득했다. 또 해군 병기감 박병태 대령이 지원해 준 재원으로 항공기의 동체 부분을 이루는 재료와 계기 등을 일본에서 구입해 왔다. 준비를 완료한 그는 항공반 요원들과 함께 항공기 구성품들을 제작·조립했다.

조립 작업은 새로 합류한 정학윤(鄭鶴允)이라는 훌륭한 기술 문관의 활약으로 순조롭게 진행됐다. 그는 광복 전 일본 항공기술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바탕으로 항공기 동체 구조와 날개의 각도 등에 관해 전문적인 조언을 많이 해 주었다. 그렇게 하여 항공기 골격을 비롯한 날개·동체·조종 계통·엔진 장착부 등 대부분의 중요 부분이 항공대 요원들의 손으로 만들어진 단발 수상 정찰기가 완성됐다.

이 항공기의 첫 시험 비행은 54년 5월3일 진해만에서 정학윤 문관이 실시했다. 시험 비행차 수상을 활주하면서 여러 차례 이륙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조사 결과 항공기의 부양 장치 부분과 무게 중심(center of gravity)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항공반 요원들은 항공기를 다시 양륙, 문제가 있는 부분을 수리하고 무게 중심을 재조정했다. 그 결과 5월 말에 실시한 두 번째 시험 비행에서는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왔다. 항공기는 이후 계속된 두 차례의 시험 비행을 거친 후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됐다.

항공기 명명식은 54년 6월14일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 해군총참모장 박옥규 제독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항무과 부두에서 열렸다. 본래 이 항공기의 이름은 해군 장병들에게 명칭을 공모한 결과 ‘충해호’(忠海號)로 내정돼 있었지만 한문에 능한 이대통령이 충해호 대신 직접 ‘서해호’(誓海號·SX-1)라는 이름을 붙였다.

‘서해’는 이대통령이 이순신 장군이 읊었다는 한시 중 ‘바다에 맹세하니 어룡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아는구나’(誓海漁龍動, 盟山草木知)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당시 이대통령은 우리나라의 연안 수역 보호를 위해 해안에서 일정 거리에 평화선을 설정, 그 구역 내에서 일본 어선의 조업을 금지하고 있었다. 서해호는 함대에 예속돼 일본 어선의 평화선 침범을 감시하는 역할을 주로 수행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서해호의 수상 착륙 장치인 알루미늄 부주(浮舟·float)와 본체를 연결하는 부위에 부식 현상이 심하게 발생했다.

당시에는 부식을 방지하는 특수 페인트와 코팅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 수상기였던 서해호의 기체 수명이 단축된 것이다. 결국 해군은 이듬해 5월 서해호의 운항을 중지하고 기체도 해체했다.

해취호와 마찬가지로 서해호도 개발 후 대량 양산된 항공기는 아니다. 하지만 50년대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독자적인 무기 체계 개발을 위해 노력을 기울인 건군 초창기 국군의 노력을 잘 보여 주는 눈물겨운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제해호

 

6·25전쟁이 끝난 후 한국 해군에 대한 미국의 원조는 매우 소극적이었다. 당연히 해군 항공기 확보를 위한 미국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었다.

 

더구나 해군 공창은 함정 수리 항목으로만 예산을 확보해 두고 있었으며 해취호 등 항공기 제작을 주도한 해군 공창 항공반에는 항공기 개발·연구와 관련된 공식적인 예산이 없었다.

예산 문제로 해군 항공기 제작 사업이 난관에 빠지자 해군참모총장 정긍모 제독은 해군공창 항공반을 해군과학연구소 제1연구부 항공과로 개편하고 항공기 개발 사업을 적극 추진해 나가도록 지시했다.

 

 해취호·서해호를 제작한 조경연 소령은 해군과학연구소 제1연구부의 항공과장에 임명돼 항공기 제작 임무에 계속 종사했다.

해군과학연구소로 소속이 변경된 이후에도 항공기 제작 비용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조소령은 예산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6·25전쟁 당시 추락한 각종 항공기 잔해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조소령은 6·25전쟁 당시 설악산 인근에 수많은 미군 항공기가 추락했다는 소문을 듣고 설악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조소령이 발견한 것은 수많은 시신과 깨어진 유리 조각뿐이었다. 어려운 경제 사정 속에 고철 수집상들이 이미 항공기 잔해 부품을 수집·매각해 버린 것이다.

조소령 일행은 다시 춘천에 있는 육군항공대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비행 사고로 추락한 많은 항공기를 발견한 그는 교재용으로 사용한다는 양해를 구하고 항공기 엔진 4대를 무상으로 획득했다.

조소령은 이 엔진들을 이용, 세 번째 해군 자체 제작 항공기인 ‘제해호’(制海號·SX-3·사진)와 또 다른 시험 항공기인 ‘통해호’(統海號)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1957년 3월30일 각고의 노력 끝에 드디어 제해호가 완성됐다. 조소령과 정학윤 중위가 실시한 시범 비행도 성공했다. 제해호는 적재 중량을 크게 늘려 승무원을 6명까지 태울 수 있는 중형 수상 정찰기였다.

제해호는 엔진을 제외한 기체 전부를 해군 기술진이 직접 제작했다는 점에서 해취호·서해호와 또 다른 의미를 가진 항공기였다.

또한 처음으로 무기를 장착, 공격 능력을 보유했다는 점은 해군 항공 역사상 큰 의의로 남는다.

해군은 제해호를 기반으로 57년 7월15일 해군 사상 첫 항공 부대인 함대항공대를 창설했다. 해군함대항공대로 예속된 제해호는 남해안 일대의 해상 감시를 비롯해 함정 엄호, 대공 훈련(표적 예인과 추적 훈련) 지원, 함포 탄착 수정, 긴급 수송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함대 항공대는 57년 말까지 10명의 조종사와 22명의 정비사를 확보하고 58년 해군과학연구소가 제작한 4대의 항공기를 추가로 배치·운용하게 됐다.

50년대만 해도 국군은 자체적인 국방 예산이 부족, 미군의 군사 원조에 의해 무기 체계 운용 비용을 감당했다.

문제는 해군이 자체 제작·보유한 항공기가 미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무기 체계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미 군사고문단은 61년 제해호를 비롯한 한국 해군의 항공기에 대해 더 이상의 군수 지원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해군은 61년 2월23일 자체 제작 항공기를 모두 해양경찰대로 이관하는 가슴 아픈 결정을 내렸다. 항공기를 상실한 해군함대항공대도 63년 3월1일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처럼 초창기의 해군 항공대는 5년 8개월을 일기로 짧은 역사를 마감했다.

하지만 해취호·서해호·제해호 같은 해군 자체 제작 항공기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 초창기 해군 항공 역사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항공기에 열정적이었던 한 해군 장교와 항공기 제작팀이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고 이룩해 낸 쾌거로 해군 역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