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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고지 전투 (1951. 12. 25 ~ 12. 28)

바래미나 2011. 4. 19. 01:36

1951. 12. 25 ~ 12. 28 (4일간)

 

이 전투는 휴전선 설정문제로 설전을 벌이던 쌍방은 1951년 11월 27일 30일간의 조건부 잠정 군사분계선 설정에 합의 하였는데 중공군이 합의를 무시하고 벌인 전투이다.

 

 백석산의 거대한 산악 능선상에 방어 진지를 편성한 국군 제7사단도 세모를 며칠 앞둔 이날도 여느때와 다름없이 정찰활동과 방어진지 보강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중공군은 이 합의를 무시하고 12월 25일 저녁 사단의 전초진지 (일명 크리스마스고지)에 400여발의 포탄을 집중한 후 1개대대 규모로 기습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전초진지쟁탈 전투가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제204사단과 국군 제7사단은 4일동안 2차에 걸쳐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한치의 양보도 없는 혈전을 펼쳐 하얀눈으로 뒤덮혔던 고지는 순식간에 피빛으로 물들었고, 부상자들의 신음소리 또한 끊이지 않았다. 제7사단 장병들은 죽음을 각오한 강인한 정신력과 강력한 포병 및 항공화력의 지원에 힘입어 중공군을 격퇴하고 크리스마스고지의 전초진지를 사수하였다.

 

 이 전투에서 사단은 "전선에는 휴무가 없다"라는 값진 전훈을 얻게 되었다

 

전투상황

 

Christmas Eve인 전날 밤에, 제3연대 제7중대의 제3소대와 제3대대의 수색소대로 하여금 적의 침공기도를 분쇄하기 위하여 선제로 야간기습을 감행토록 하였는데 912고지와 890고지의 남쪽에서 중공군의 경계선을 교란하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진지로 반전하였다.

중공군은 고지를 에워싸고 몇차례나 저돌적인 돌격을 반복하였으나, 중대가 동요의 빛이 보이지 않자 물러가고 말았다. 중대는 1,090고지의 제3소대를 무명고지의 중대 주력에 합세토록 하여 역습하여 전과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전사 6명과 부상 21명, 실종 15명의 손실을 입었다.

26일 중대는 포병화력지원 아래 중공군과 종일토록 공방전을 반복한 끝에 고지를 수중에 넣게 되었는데 어은산으로 80여명이 도주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전날과 이날의 전투에서 북한군은 200여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어둠이 짙어지자 2개 규모의 적이 야습을 시작하여 2시간이나 악전고투 하였지만 무명고지는 또 한번 적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27일 제1중대는 제3중대와 합동공격을 준비하여 무명고지로 향하는 100여명의 적의 지원병력을 포착, 포화력을 집중하였다. 한차례의 포격으로 중공군의 전의가 상실되었을 것으로 판단한 대대장은 목표고지에 포병의 공격준비사격을 요청하여 10분간에 걸쳐 또 한번 포격을 가하고 제1, 제3 양중대로써 공격을 전개하였다.

적은 200여발에 달하는 박격포의 지원 화격아래 수류탄의 투하와 자동화기로써 발악하여 양중대는 잠시 물러나 1,218고지부터 능선을 따라 남진하였는데, 마침 상공을 선회하던 미 공군정찰기가 이를 육안으로 포착하는 즉시 포격을 유도하여 곧 미제300포병대대의 8″거포가 포효하자 중공군은 마침내 그 저항력의 한계를 보였다. 날이 저물고 양중대는 7시간에 걸친 결전으로 보유 병력이 거의 바닥나자 일단 철수하였다.

28일 제1대대장 고학룡소령은 이날 여명을 기하여 고지를 다시 탈환하기로 결심하고 06:00부터 공격을 시작하였다. 전중대원이 일시에 전지에 돌입하여 혈투끝에 고지의 정상을 탈환하였는데, 이때가 09:50이였다.

 

중대가 계속 지지를 확보하던 11:45에 어은산부근으로부터 중공군의 중박격포탄이 쏟아지더니 중공병력이 다시 고지를 탈환코자 하였지만 사단의 제16포병대와 제50포병대대, 그리고 군단지원포병인 미제300포병대대의 화력의 동시집중으로 말미암아 접근하기도 전에 모조리 물리치고 말았다.

중공군은 끝내 고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5:20부터 1개소대 규모로 다시 공격하였는데, 때마침 미제5공군의 전투기 1개가 근접공격으로 napplm탄의 세례를 가하여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중공군은 고지에 대한 단념을 한 듯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