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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원 장군 이야기

바래미나 2011. 4. 18. 22:00

김석원 장군 이야기

    * 지휘관의 진가는 실로 난국에 처했을 때 발휘된다. 부대가 존망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면 부하들은 지휘관을 주목한다. 그러므로 지휘관은 어떠한 난관에 봉착하여서도 태연자약한 자세를 견지하고 난국타개에 대한 부하들의 신뢰심을 드높혀 사기를 진작시키는 한편 전황을 명찰하여 난국의 타개책을 신속히 창출하고 이를 과감히 밀고 나감으로써 최후의 승리를 획득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김석원장군이 바로 그런 지휘관이었다.

    김석원장군
    ◦ 1949. 1. 육군대령 임관(8기1차)
    ◦ 1949. 1. 제2여단장
    ◦ 1949. 5. 제2사단장
    ◦ 1949. 10. 예편
    ◦ 1950. 7. 수도사단장
    ◦ 1950. 8. 7. 제3사단장
    ◦ 1950. 9. 1. 대구방위사령관
    ◦ 1951. 5. 육군본부부


1. 피난가다가 수도사단장 보직을 받고 진천지구전투를 치르다.
출처 : (김석원 장군의 "노병의 한"에서 발췌)

… 전 략 …
1950년 7월 15일 밤, 공산군은 금강을 도강하여 시내로 돌입하기 시작하였다. 대전지구로 진입한 적은 3개 사단의 주력부대였다. 이 전투에서 미 24사단장 딘 소장은 몸소 적의 전차에 수류탄을 던지며 용전분투하다가 불행히도 행방불명이 된 불상사가 일어났다.

그가 적의 포로가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7월 20일, 대전지구 보문산 일대를 방어하던 미 24사단은 미 8군사령관으로부터 7월 20일까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선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 적 주력 부대의 집중공격을 받아 중과부적으로 사단사령부가 풍비박산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딘 소장은 보문산에서 야간에 부상병을 구원하고자 물을 구하려고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 그만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져 실신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부대에서 이탈되어 홀로 남게 된 것이다. 그는 보문산 산야를 헤매며 초근목실(草根木實)로 36일간을 지탱했으나 결국 적의 포로가 되었다.

    뒷날 딘 소장은 당초 계획대로 하루 전에 부대를 철수시키지 못한 점과 금산 방향으로 가는 도로상에서 정찰활동을 하던 사단 수색중대를 사단에서 직접 지휘하지 않고 연대에 배속 운용한 점을 지휘상의 큰 실수였다고 후회했다.(메인폐이지 - 북의 포로가 된 미장군 딘스르트 - 동영상 참조)

    그렇다. 아무리 상급부대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자기가 지휘하는 부대의 상황이 위기에 처하게 되면 해당부대 지휘관은 기지를 발휘해 독단활용으로 부대를 위기에서 구출해야 한다. 그런 지휘관이 유능한 지휘관일 것이다. 딘 소장은 고지식한 지휘관이었다. 8군사령관의 명령을 끝까지 따르다가 사단이 와해되고 자기 자신마저 포로신세가 된 것이 아닌가? 그는 뒷날 자기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였고 회한의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대전을 점령한 적은 다시 진로를 세갈래로 나누어 일부는 서쪽으로 호남 일대를 휩쓸며 마산으로 향했고, 일부는 경부선을 따라 대구로 그리고 일부는 동쪽을 향해 포항에 육박했다. 이때는 이미 유엔군 총사령부가 산하에 우리 국군까지 포함시킴으로써 지휘계통을 통일했으며, 또한 부대를 정비·증강하여 낙동강 전선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아 일대 반격작전을 가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 중 략 …
그런데 내가 수도사단장에 취임한 것은 대전이 적의 손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이었다. 그 즈음 내가 취임할 수도사단은 진천 바로 남방에서 전투중이었다. 나는 부관과 함께 찝차를 타고 조치원을 거쳐 진천방면으로 북상하였는데 도중 피난민들 속엔 어찌된 셈인지 국군과 경찰관도 많이 섞여 있었으며, 또한 여기저기에 완전히 사기를 잃고 어깨까지 축 늘어져있는 사병들의 모습도 보였다. 모두들 전의를 상실하고 도무지 사기가 말이 아니었다. 나는 찝차에서 내려 군도를 뽑아들고 하늘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국군 장병과 경찰관들은 들으라! 내가 이번에 수도사단장으로 부임한 김석원이다. 국군 장병과 경찰관은 생명을 바쳐 싸워야 하겠거늘 지금 너희들이 가는 곳은 어디냐? 쫓기고 밀리어 현해탄 물 속으로라도 뛰어들 생각이냐? 지금 총을 든 너희들이 여기까지 쫓겨왔기 때문에 뒤에 있는 너희 부모·형제·자매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 줄 아느냐? 돌아서라. 어서 대한의 아들아. 돌아서서 북으로 가자. 이 김석원이가 앞장서 갈테니 너희들도 같이 가서 나와 함께 싸우자.”


나의 힘찬 웅변에 그들은 ‘만세’를 외치며 힘을 내기 시작했다. 사기가 높은 군대와 사기가 낮은 군대는 그 전의에 있어서 천양지차가 있다. 그러니까 나의 수도사단장 부임길은 도망치는 패잔병들을 돌려 세우는 길이기도 했다. 사단본부에 도착한 나는 공산군이 맹공격을 가하고 있는 문안산 코 앞에다 사단 CP를 옮기고 장병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누구든 사단장의 명령없이 후퇴하면 총살이다. 나와 너희들이 죽어야 할 자리는 이 문안산·봉화산 고지인 줄 알아라” 그때 사단 CP 근처에도 적군이 쏘아대는 포탄이 잇달아 떨어졌는데 미 군사고문관은 겁먹은 표정으로, “사단장께서 최전선까지 이렇게 나오시는 것은 위험합니다. 만약의 경우에 사고가 생기면 사단 지휘는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 날더러 2km 후방에 물러서서 지휘하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겁이 나서 그러는 것이다. 막말로 말해서 그들이야 전세가 여의치 않으면 부산으로 내려가 배만 타면 될 사람들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도저히 그렇게는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이곳은 내 땅이기 때문이다. 단 한치라도 적에게 내어 주느냐 혹은 우리가 차지하느냐 하는 문제는 우리 동포 형제들의 생사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끝까지 싸워보지도 않고 함부로 후퇴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하여 나는, “38선에서 이곳까지 쫓겨온 패잔병들을 후방에서 지휘하면 지휘가 잘 되겠소? 안됩니다. 그러면 또 전선이 금방 무너집니다. 겁이 나거든 당신이나 후방으로 물러가시오.” 하고 단호한 말로 거절했다. 하지만 사단장인 내가 물러나지 않고 버티고 있으니 그도 결국 나와 같이 있을 수밖엔 없었다.

그런데 문제의 문안산·봉화산 고지 탈환작전을 명령한 것은 아마 7월 8일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때도 나는 사병들의 제일 앞에 서서 군도를 빼어들고, “사단장 김원석이가 너희들 앞에 여기 이렇게 서 있다. 만약에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후퇴하면 너희와 내가 모두 함께 죽는줄 알아라.” 하고 힘차게 외쳐댔다.

이날 7시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우리 수도사단은 문안산 고지와 봉화산 고지 일대를 점령한 것이다. 참으로 죽음을 무릅쓴 피나는 전투였다. 고지를 점령해 보니 공산군 기관총병의 발목이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도록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최후 발악적으로 대들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안산·봉화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한 진천전투가 말하자면 6·25개전 이후 계속 무인지경(無人之境)을 달리듯이 남진만을 해온 공산군들이 최초로 암초에 부딪쳐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전투였다.

    이때 공산군 2사단을 지휘한 것이 바로 최현이란 자인데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그 자는 나를 두고 하는 말이 “그 못된 놈을 또 만났다.” 고 상을 찌프리며 투덜거리더란 것이었다. 최현 부대와는 이미 6·25 전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 나와 싸워 패한 일이 있는데 최현에게 있어서 진천전투는 나와 두번째의 전투라 나에 대한 그자의 감정이 썩 좋을 리가 없었다.


전쟁이 끝난 뒤 진천 주민들은 문안산 근처의 대로변에다 나를 위해 전승기념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고마운 마음 한이 없으나 아직 가보지는 못했다.
… 후 략

2. 미호천에서 청주 남쪽으로 철수
18연대가 사력을 다해 봉화산을 지키고 있을 때 적 2사단의 집요한 반격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봉화산에 배치된 18연대는 적 1개 연대의 3차에 걸친 공격을 막아내어 끝내 진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옆 진지에 배치된 17연대는 적의 기습으로 일시 문안산을 탈취당했으나 예비대인 1연대와 함께 야간 역습을 감행하여 재탈환하였다.
이에 힘입어 수도사단장 김석원 준장은 진천 탈환작전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1군단의 좌·우측 전선이 모두 남하함에 따라 전선의 균형유지를 위해 청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수도사단장은 철수하지 않겠다고 완강히 버티었다. 미군들이야 싸우다가 불리하면 대구-부산을 거쳐 바다건너 제 나라로 가면 그만이지만 김석원으로서는 내 나라 내 땅을 죽음으로써 지켜 사수하여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눈물을 삼키며 7월 10일 저녁 17연대와 20연대의 엄호하에 미호천 남안으로 철수하기로 하였다. 수도사단이 철수를 서두르고 있을 무렵, 적 2사단장 최현 소장은 작전을 전환하여 우회기동으로 수도사단의 배후차단을 기도하였다. 적은 일부 병력으로 문안산을 양공하면서 주공부대로는 진천 남동 신정리와 장원리에 배치된 아군의 16연대와 20연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유엔 공군 B-29, B-26 편대가 18연대 장병들이 있는 수도사단 상공에 불시에 나타나 진천읍과 신정리 일대를 1시간 이상 맹폭하여 적의 공격대열을 와해시켰다. 또 F-51전투기가 후속하여 와해된 적에 대해 네이팜탄을 투하하였다. 이러한 유엔 공군의 엄호를 받은 수도사단은 무사히 철수하였다. 그리하여 유엔 공군 전투기를 처음 본 장병들은 사기가 크게 고무되었다. 적이 다시 병력을 수습하고 양천산 일대로 공격을 재개했을 때는 이미 철수엄호를 받은 20연대와 17연대도 철수한 뒤였다.

수도사단은 미호천 남방 오근장역을 중심으로 좌로부터 8연대, 1연대, 18연대 순으로 배치하여 새로운 강안진지를 급편하였다. 미호천의 하폭은 70여 미터였고 수심이 무릅 정도였기 때문에 사람은 물론 전차나 포차도 도섭이 가능했다. 그러니 미호천은 강이라는 심리적인 도움만을 줄 뿐 작전에는 피아간에 큰 장애물이 되지 못하였다.
수도사단의 철수를 뒤늦게 알아차린 적 2사단은 양천산을 경유하여 남진, 7월 11일 아침, 미호천 북안까지 진출하였다. 미호천 교량을 폭파한 뒤 진지보강에 주력하고 있던 수도사단은 적의 선두부대가 접근하는 즉시 야포로써 제압하고 항공지원을 요청하여 적 집결지를 집중사격하는 등 적의 공격을 사전에 철저히 분쇄하였다.

그런 가운데 군단 지휘소에서는 청주 고수 여부에 대한 군단 작전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군단장 김홍일 소장, 수도사단장 김석원 준장, 육본 작전참모부장 김백일 대령, 각 연대장과 관계 참모들이 참석하였다. 최종적으로 군단장은 청주보다는 그 남쪽에서 방어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청주에서 철수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이미 경부축선에서는 미군이 조치원에서 철수하여 금강선으로 이동하였으므로 전선정리가 불가피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 이유로서는 청주가 교통의 요지이기는 하지만 시가전을 치르려면 많은 희생이 뒤따르므로 보다 유리한 지형에서 적의 남진을 방어하겠다는 의도 때문이었다. 수도사단은 미호천에서 접적이탈을 단행해 청주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7월 13일, 미호천에서 치열한 전쟁을 한바탕 치른 18연대는 7월 16일에는 보은까지 그리고 보은에서 상주, 예천을 거쳐 안동까지 철수하게 된다.

7월 12일 육군 본부는 1군단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함창에서 2군단을 창설하고 같은 날짜로 준장에 진급한 김백일을 군단장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한국군은 2개 군단과 1개 직할 사단으로 지휘체계를 정비하고, 미군이 급히 계획한 금강 방어선과 연계해 새로운 전선 형성에 임하게 됐다.

3. 김홍일, 김석원 장군 해임에 관하여
(출처 : 한국전쟁비사(2), 김용현 저, pp. 171~179 )
8월 25일 06:00부터 적 제12사단은 공격에 나서 수도사단은 기계외곽까지 후퇴하고 이어서 30일에는 기계 남쪽으로 철수하여 기계는 적의 수중에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기계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미군의 전차와 포병을 지원하여 기계를 공격하여 재점령하는데 성공했으나 4차에 걸친 쟁탈전 끝에 적에게 피탈되고 말았다. 육군본부에서는 기계재탈환을 독전했음에도 끝내 실패하자 9월 1일 제1군단장에 김백일 준장을, 수도사단장에 헌병사령관이었던 송요찬 대령을 보직하는 인사를 단행하였다. 백인엽 사단장의 교체에 관하여 송요찬 대령의 회고에 의하면, 육군본부에서 출두전화를 받고 육본에 달려갔다. 정일권 총장은 '백사단장(27세)은 아직.........'하면서 말꼬리를 흐리면서 나에게 그와 교대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면서 정총장은 강문봉, 장창국, 장도영은 상황이 너무 돌변하여 사단장으로 나가는 것을 주저한다고 말하면서 당신 후임에는 장창국대령이 될 것이라고 했다.

김홍일 장군의 해임에 대해서는 억측에 지나지 않으나, 작전지휘측면에서 콜터 소장과의 의견충돌에서 기인하였다고 본다. 콜터 소장은 실질적인 제1군단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었으며 26일 사단이 포항으로 밀렸을 때 콜터 소장은 김홍일 군단장에게 반격을 권고했으나 그는 「병사들이 너무 지쳤다」는 이유로 이 제의를 거부했었다. 뿐만아니라 제73전차 대대의 1개 전차소대 (5대)의 활용문제에 있어서도 김홍일 군단장은 수도사단 정면인 안강배치를 주장한데 반하여 콜터 소장은 포항을 중시하고 있었다.

김석원 준장은 후일 그의 저서 「노병의 恨」에서 「아연실색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아마도 그는 김홍일 소장과 같은 노련한 야전지휘관을 아무런 사전연락도 없이 한직인 종합학교장으로 전보한데에 대해 그의 오랜 전투경험에서 쌓은 눈으로 보고 군의 장래를 생각하고 우려했던 것 같다. 김석원 장군은 자신에 대하여는 「부하도 책상도 없는 특명검열단장」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한직도 되지 않은 자리였다.
군단장 및 사단장의 인사에 대하여 육군본부의 고위층은 「연령, 병환, 적합한 자리(학교장을 말하는 듯)를 마련해 주기 위해......」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런 것 같지 만은 않은 것 같다. 여기에 신임 김백일 군단장과 김석원 사단장 사이는 여러번 물과 기름과 같이 걷돌아 군단 지휘를 용의하게 하기위해 사단장도 교체했던 것으로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4. 그 때 그 이야기 ; 김석원 장군
(출처 : 이재전, 국방일보, 2003.7.2-7일, )
내가 김석원(金錫源·육사8-1기·소장 예편)장군을 먼발치에서나마 처음 본 것은 일제 치하인 1930년대 충남 천안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였다. 일본은 당시 정책적으로 한국인을 순화하기 위해 시국강연을 장려했는데, 그때 중국에서 명성을 날린 일본군 대좌였던 김석원 장군이 무공담을 들려줬다.

유년학교 4년을 마치고 1913년 일본 육사27기로 입교해 1917년 소위로 임관한 김석원은 위관 시절에는 승진이 다소 늦었으나 좌관(佐官·영관) 시절에는 승진이 빨라 1934년에 소좌, 1940년에 중좌, 1944년에 대좌로 승진했다. 그는 비록 일본군에 있었지만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만주지방으로 출동해 마점산군과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림으로써 거금 700원의 승전상금을 받기도 했다. 이 돈은 뒷날 원석학원 창설의 자본금이 됐다. 김장군은 교육의 불모지인 이태원에 이태원 초등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그가 중좌일 때 김석원 대대는 중일전쟁 초기 중국군 1개 사단을 섬멸하는 신화를 남기기도 했다. 8·15 광복 뒤 이승만 대통령과 장제스(蔣介石)총통이 진해 별장에서 회담할 때 이대통령이 “건군 초기의 우리나라에는 지휘관이 부족해서 걱정입니다”라고 말하자 장총통이 “아, 한국에는 김석원이라는 용감한 군인이 있지 않소”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당시 김석원 대대가 중국군 1개 사단을 섬멸할 때 일본인 종군기자가 원고를 손에 쥐고 전사하자 다른 사람이 이 원고를 일본·중국의 신문에 보내 대서특필하게 됨으로써 김석원 중좌는 한·일·중에 널리 알려져 일약 ‘전쟁영웅’이 됐다. 이런 일로 하여 그는 조국이 광복되는 그날까지 일본군에서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지냈다.

김석원 장군은 그때 “진짜 장군 노릇하려면 김부대로 오라”고 호언할 정도로 무공이 뛰어나 일본 최고 무공훈장인 금지(金 至鳥)훈장을 받았는데, 한국인이 금지훈장을 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정도였다. 물론 그로 인해 친일 낙인이 찍히기도 했지만 전쟁 유공자라는 무공 덕분에 일제로부터 사립 성남고 설립 허가를 받아 육영사업을 통해 민족운동에 헌신하기도 했다. 또 그 때문에 성남고 출신들이 사관학교에 많이 입교하기도 했다.

나는 사관학교에 입교해 김석원 장군을 두 번째로 만났다. 이번에는 어릴 적 선망의 대상이었던 ‘금지훈장에 빛나는 일본군 대좌’가 아닌 ‘동기’로서 만났다. 물론 말이 동기지 8기 1차로 곧바로 대령으로 특별임관한 경우여서 소위로 임관한 우리 진짜 동기와는 천양지차가 있었지만.

김석원 장군은 일본 군인이 된 것을 반성하는 뜻에서 건군 대열에는 처음에 여러 선후배가 권유했지만 참여하지 않다가 6·25전쟁 직전에 특임으로 임관, 1사단장으로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 ‘육탄 10용사’의 신화를 남기고 군을 떠났다. 6·25전쟁이 터지자 그는 학도의용군을 모집하다가 다시 군복을 입고 수도사단장·3사단장·전시 검열단장을 지냈다.

내가 세 번째로 김석원 장군의 풍모를 곁에서 지켜본 것은 6·25전쟁 때였다. 그때 내가 목격한 바로는 6·25전쟁이 일어나 한강 방어선이 뚫렸는데 김장군은 채병덕(蔡秉德·군영·중장 예편·작고)장군의 참모와 내분이 있어 예편해 무보직 상태였다.

그런데 6·25전쟁 초기 초야에 묻혀 피난길에 올랐던 김석원 장군은 전세가 위기로 치닫게 되자 현역으로 복귀, 수도사단장으로 부임해 싸웠다. 다들 전쟁이 나면 도망갈 판인데 그는 경기도 시흥에 있는 김홍일(金弘壹·특임·중장 예편·작고)시흥지구 전투사령관을 찾아가 “전쟁이 났는데 내가 조언해줄 게 없을까 해서 찾아왔다”고 말한 진짜 군인정신의 소유자였다. 나는 당시 중위 계급장을 달고 연대장의 명령 수행차 시흥에 갔다가 그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6·25전쟁 초기 민간인 신분으로 피난길에 오른 김석원(金錫源·육사8-1·소장 예편)장군은 전세가 위기로 치닫자 현역으로 복귀, 수도사단장으로 부임했다. 대부분의 사단장이 30세 전후의 청년층이었던 데 비해 56세의 노령이었지만 지휘자세는 숙연하고도 확고부동했다. 특히 수도사단장 부임 당시와 3사단장으로 포항이 북한군에게 떨어졌을 때 영덕 일대 전투에서 칼(일본도)을 빼들고 지휘, 미군 고문관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있다. 김석원 장군은 전선에서 늘 왜정 때 차던 일본군 군도를 부관이 갖고 따라다니게 했다. 김석원 준장이 수도사단장에 취임한 것은 대전이 적의 손에 들어가기 바로 직전이었다. 그즈음 수도사단은 충북 진천 바로 남방에서 전투 중이었다. 김장군은 부관과 함께 지프를 타고 충남 조치원을 거쳐 진천방면으로 북상하다가 국군과 경찰관들이 섞여 있는 피난민 행렬을 만났다. 완전히 사기를 잃고 어깨가 축 늘어져 있는 병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는 지프에서 내려 군도를 뽑아들고 하늘이 울리도록 큰 소리로 외쳤다. “국군 장병과 경찰관들은 들으라! 내가 이번에 수도사단장으로 부임한 김석원이다. 국군 장병과 경찰관은 생명을 바쳐 싸워야 하겠거늘 지금 너희들이 가는 곳은 어디냐. 쫓기고 밀려 현해탄 물속으로라도 뛰어들 생각이냐. 지금 총을 든 너희들이 여기까지 쫓겨왔기 때문에 뒤에 있는 너희 부모·형제·자매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 줄 아느냐. 돌아서라, 어서. 대한의 아들아, 돌아서서 북으로 가자. 이 김석원이가 앞장서 갈 테니 너희들도 같이 가서 나와 함께 싸우자.” 그의 힘찬 웅변을 들은 군인과 경찰들은 만세를 외치며 힘을 내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김석원 준장의 수도사단장 부임길은 도망치는 패잔병들을 돌려세우는 길이기도 했다. 그는 수도사단장에 부임하자마자 사단지휘소가 전선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음을 지적, 공산군이 맹공격을 가하고 있는 문안산 코앞에 사단 CP를 옮기고 장병들에게 “누구든지 사단장의 명령 없이 후퇴하면 총살이다. 나와 너희들이 죽어야 할 자리는 이 문안산·봉화산 고지다”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때 사단 CP 근처까지 적군이 쏘아대는 포탄이 떨어지자 잔뜩 겁먹은 미 군사고문관은 “사단장께서 최전선까지 이렇게 나오시는 것은 위험합니다. 만약 사고가 생기면 사단 지휘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 2㎞ 후방으로 물러서서 지휘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그는 “김석원이를 죽일 포탄을 아직 만들지는 못했소. 병사들이 쓰러지고 있는데 나만 안전한 곳에 있을 수 없소”라고 하면서 고문관의 건의를 거절했다. 또 때때로 적의 압박을 못이겨 병사들이 동요하면 “사단장이 여기 있다. 후퇴하면 어디로 갈 것인가. 그대들은 부모·형제를 버릴 것인가, 용사들이여, 나와 함께 싸우자”라고 연설해 병사들을 돌려세우곤 했다.

김석원 장군은 이처럼 적(敵)과 대면하고 있는 진천 가까이의 잣고개로 나아가 부대를 직접 진두지휘했다. 여기저기 포탄이 작렬하는 전선에 우뚝 선 그의 용맹스러운 모습은 거듭되는 후퇴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된 병사들의 전의를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지휘관의 진가는 실로 난국에 처했을 때 발휘되는 법이다. 부대가 존망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면 부하들은 지휘관을 주목한다. 그러므로 지휘관은 어떠한 난관에 봉착해도 태연자약한 자세를 견지하고 난국타개에 대한 부하들의 신뢰감을 높여 사기를 진작시키는 한편 전황을 정확히 파악, 타개책을 신속히 창출해 이를 과감히 밀고 나가야 하는데 김석원 장군은 바로 그런 지휘관이었다.

중일(中日)전쟁 당시 일본군 대대장으로 중국군 1개 사단을 섬멸하는 신화를 남긴 김석원 장군이지만 6·25전쟁 당시 무용담(武勇談)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진천 전투다. 문안산·봉화산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벌인 진천 전투는 6·25 개전 이후 계속 무인지경을 달리듯 남진(南進)만 해온 공산군이 최초로 국군에 의해 저지돼 퇴각한 전투였다. 육군본부는 당시 한·미 간의 전선 조정을 위해 수도사단이 인민군 제2사단의 진출을 3일 동안만 진천에서 저지해줄 것을 희망했는데, 수도사단이 7일 동안이나 이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격전 중 부임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휘관으로서 진가를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인민군 제2사단장 최현은 파죽지세로 밀어붙이던 그들의 진격이 진천에서 저지되자 혼잣말처럼 “그놈과 또 만나 이 꼴이 됐군. 그놈은 교묘히 병사들을 휘어잡는단 말이야”라고 불평을 털어놓았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최현은 6·25전쟁이 나기 전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도 당시 제1사단장이던 김석원 장군과 맞붙어 곤욕을 치른 경험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1군단의 좌우측 전선이 모두 남하함에 따라 수도사단도 전선의 균형 유지를 위해 청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김석원 수도사단장은 처음에 철수하지 않겠다고 완강히 버텼다. 미군들이야 싸우다가 불리하면 대구·부산을 거쳐 바다 건너 저희 나라로 가면 그만이지만 그로서는 내 나라, 내 땅을 죽음으로 사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눈물을 머금고 철수해야 했다. 그런 가운데 군단 지휘소에서 청주 고수 여부에 대한 군단 작전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군단장 김홍일 소장, 수도사단장 김석원 준장, 육본 작전참모부장 김백일 대령, 각 연대장과 관계 참모들이 참석했다. 그리고 7월12일 육군본부는 1군단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2군단을 창설하고 같은 날짜로 준장에 진급한 김백일을 군단장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한국군은 2개 군단과 1개 직할 사단으로 지휘체계를 정비하고 미군이 급히 계획한 금강 방어선과 연계해 새로운 전선 형성에 임하게 됐다. 그리하여 7월14일부로 국군의 작전지휘권은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사령관에게 이양됐다.

이후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리면서 안강·기계까지 적의 수중에 다시 들어가게 됐다. 아군은 기계의 중요성을 인식해 미군의 전차와 포병을 지원, 기계를 공격해 재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4차에 걸친 쟁탈전 끝에 적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래서 육군본부는 기계 재탈환을 독전(督戰)했음에도 끝내 실패하자 9월1일 제1군단장에 김백일 준장, 수도사단장에 헌병사령관이던 송요찬 대령을 보직하는 인사를 단행했다.

김석원 준장은 후일 그의 저서 ‘노병의 恨’에서 이 전시(戰時) 인사에 대해 “아연실색했다”고 표현했다. 아마도 그는 김홍일 소장 같은 노련한 야전지휘관을 아무런 사전연락도 없이 한직인 종합학교장으로 전보한 데 대해 자신의 오랜 전투경험에서 쌓은 눈으로 보고 군의 장래를 생각하고 우려한 것 같다. 김석원 장군은 자신의 인사에 대해서는 “부하도 책상도 없는 특명검열단장”이라고 표현했다. 신임 김백일 군단장과 김석원 사단장 사이가 물과 기름처럼 겉돌아 군단 지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사단장도 교체한 것으로 간주됐다. 김석원 장군은 1956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했다. 그 뒤 그는 오직 육영사업에 몸과 마음을 바치다가 1978년 8월6일 향년 85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증언 4. (출처 : 정호영,『용병의 원리와 실제』,1985년, p.25)
한국전쟁 초기 초야에 묻혀 피난길에 올랐던 김석원 준장은 전세가 위기로 치닫게 되자 현역으로 복귀되어 수도사단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단장이 30세 전후의 청년층이었던데 비해 56세의 노령이었지만 그의 지휘자세는 숙연하고도 확고부동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사단지휘소가 전선에서 너무 멀리떨어져 있음을 지적하고 청주 북쪽의 여토리로 추진하는 한편, 그 자신은 접촉선인 진천 가까이의 잣고개로 나아가 부대를 진두지휘했다. 여기저기 포탄이 작렬하는 전선에 우뚝 선 그의 용자는 거듭되는 후퇴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된 병사들의 전의를 고무시키기에 충분했다.

안전을 우려한 미 고문관이 좀 더 후방에서 부대를 지휘하도록 건의했으나, 그는 "김석원이를 죽일 포탄을 아직 만들지는 못했소. 병사들이 쓰러지고 있는데 나만 안전한 곳에 있을 수 없소"라고 하면서 그의 건의를 거절하곤 했다. 때로는 적의 압력에 못이겨 병사들이 동요하게 되면, "사단장이 여기 있다. 후퇴하면 어대로 갈 것인가? 그대들은 부모형제를 저 버릴 것인가, 용사들이여 나와 함께 싸우자!"라고 하자 슬금슬금 물러서던 병사들이 되돌아서곤 했다. 그는 전황이 악화됨에 따라 사단에 배속되어 이미 전선에 새로 투입된 제20연대장을 한사코 불러들여 정식신고를 받으면서, 명령없이 철수한 경우에는 군법으로 엄단하겠다는 그의 확고한 의지를 천명하기도 했다. 그는 공격기세를 유지한 적의 추격에 쫒겨 철수만을 거듭하고 있던 부대에 급히 부임했었지만 확고한 그의 의지를 확립하고 절망적인 위기에 처하여서도 태연자약한 자세로 부대를 지휘했다.

육군본부에서는 한.미간의 전선조정을 위하여 수도사단이 적 제2사단의 진출을 3일 동안만 진천에서 저지해 줄 것을 희망했지만, 7일 동안이나 이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격전 중의 부임이라는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지휘관으로서의 그의 진가를 훌륭히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적 제2사단장 최현은 파죽지세로 밀어부치던 그들의 진격이 진천에서 저지되자 "그 놈과 또 만나 이꼴이 됐군, 그 놈은 교묘히 병사들을 휘어잡는단 말이야"라고 독백했다고 한다. 최현은 6.25전에 개성 송악산 전투에서도 당시 제1사단장이었던 김석원 장군과 맞붙어 곤욕을 치른 경험을 갖고 있던 터였다.

5. 김석원 장군의 일대기
(출처 : 이은팔씨의 "6.25전쟁 50년을 돌아본다."라는 논문에서 발췌)
김석원은 지용(智勇)을 겸비한 군인으로서 한신에게 용기와 슬기를 일깨워 주었다고 한다. 김석원(金錫源)은 1893년 9월 29일, 서울 계동 은행나무집에서 태어나서 3세 때 재동으로 이사했다. 그는 성장하면서 전쟁놀이를 무척이나 좋아했고 아이들 사이에서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한다. 김석원의 할머니는 어린 손자를 데리고 용마산(龍馬山)에 자주 올랐다. 거기에는 김석원의 할아버지 묘소가 있었다. 산을 오르내리는 길에서 그의 할머니는 종종 ‘너는 커서 훌륭한 사람이 돼야한다. 장군이 돼야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면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일화를 들려주곤 했다.

김석원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대한제국 말기에 3년여 동안 한문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1902년 그가 10세가 되던 해에 재동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교에서는 공부도 잘 했지만 달리기에 남달리 뛰어나 학교 대표선수로 뽑혔으며, 서울시 초등학교 달리기 대회에 나가 우승하기도 했다. 재동 초등학교 한 학년 위 상급반에는 변영태와 신태영 학생도 있었다. 언젠가는 한국훈련원에 가서 노백린(일본 육사 11기,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 역임) 장군의 말탄 멋진 모습을 보고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1906년 평양에 있는 광성학당(광성고보의 전신)에 입학하여 이준 열사를 만났는데, 이 열사는 김석원을 총애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 의에 살고 의에 죽어야 한다’는 말을 해 주었다. 김석원은 이 열사의 말에 감동하였고, 이를 가슴 속 깊이 새겨 두었다가 뒷날 그의 좌우명으로 삼았음은 물론이며, 성남중고등학교를 세워 교훈을 ‘의에 살고 의에 죽자’로 정해 후진양성에 정진했다.

김석원은 1908년, 대한제국 무관학교에 응시하여 합격함으로써 군인의 길을 걷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이 무관학교는 우리나라의 무관을 양성하는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대한제국의 군대가 1907년 일제에 의해 해산되었고, 1910년에는 무관학교마저 강제로 폐교당했다. 이로 말미암아 김석원은 인생행로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학업을 포기하느냐? 동경에 있는 유년학교로 진학을 하느냐? 하는 기로에서 고민하게 된 것이다. 이는 운명의 장난이 아니었다. 결국 후자를 택해 유년학교로 유학할 비장의 각오를 다지게 되었다. 일본은 비록 원수의 나라지만 거기에 가서 선진 과학의 문물을 배워 옴으로써 장차 기울어져가는 나라에 무엇이든 이바지하고자 함이 김석원의 마음속에 다짐한 결심이었고, 그가 결단을 내린 용기였다. 뒷날 김석원은 ‘내가 그 때 한국 무관학교 폐교와 함께 조국을 떠나지만 않았던들, 나는 오랜 세월을 일본군인이 되어 이유야 어찌 됐든 간에 우리 민족에게 송구스러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라고 자주 후회의 말을 했다.

1909년 겨울, 김석원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가족 어른들과 눈물로 작별을 하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갔다. 그해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암살한 날이다. 동경 유년학교 입학식 날 한국에서 건너간 동기생 모두는 목놓아 통곡하였다. 약소국가의 서러움을 되씹으며 …….

김석원이 한국을 떠날 때 그의 조모는 어떤 스님으로 부터 받은 ‘산신령상 부적’을 손자의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김석원은 이 부적을 소중히 간직하고 다녔으며, 어려운 일에 봉착하거나 일본 사람들로부터 억울하게 당할 적마다 이 산신령상을 꺼내 합장기도 하면서 울분을 달래었다. ‘일본 사람보다 공부도 잘해야 하고, 군사훈련도 잘 해야 하며, 총쏘기도 잘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다짐이었다.
김석원은 유년학교 4년을 마치고, 1913년 일본 육사 27기로 입교하여 1917년 소위로 임관했다. 26기에는 이응준, 홍사익 선배가 있었고, 영친왕 이은은 29기이며, 이종찬, 채병덕은 49기이고, 박정희, 이한림은 54기에 해당된다.
김석원은 1918년 진명여고를 졸업한 규수 서달순(徐達順)양과 결혼했고, 슬하에 3형제를 두었다. 그의 차남 영수(泳秀)는 박정희와 일본육사 동기생이다. 김석원은 소위 월급 42원 80전을 받았으며, 그 중에서 매달 20원을 떼어 할머니 앞으로 송금하였다.
김석원이 중위로 진급되자 일본 군사령관은 김석원이 비록 한국 태생이지만 무척 아끼고 돌봐 주었으며, 한국에 주둔한 용산 소재 78연대로 전속시켜 주었다. 그는 그때 박영효도 소개해 주었다. 박영효는 친일개화혁신독립단 지도자였고 고종황제의 부마이기도 하다. 박영효는 동대문 밖에서 살았는데 그 집은 전에 손병희가 살던 집으로 대지가 1천 평이 넘는 저택이었다. 김석원은 박영효의 집을 내집 안방 드나들 듯 자주 찾아가 인사도 드리고 지도도 받았다. 박영효는 비록 친일파이기는 하였으나 김석원에게 애국사상을 가르쳤고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늘 일본인들을 저주했고, 욕도 했으며, 미워하면서 살아갔다. 박영효는 말년에 제주도로 유배돼 거기서 감귤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한다.
김석원은 박영효를 친부모처럼, 스승처럼 존경했고 흠모했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삼형제 이름을 박영효(朴泳孝)의 영(泳)자를 빌어다 큰 아들은 영철(泳哲), 두째 아들은 영수(泳秀), 셋째 아들은 영국(泳國)이라 이름 지었으니 박영효를 얼마나 따르고 존경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김석원은 위관 시절에는 승진이 다소 늦었으나 좌관(佐官:영관) 시절에는 승진이 빨라 1934년에 소좌, 1940년에 중좌, 1944년에 대좌로 승진하였다. 그는 비록 일본군에 있었지만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만주지방으로 출동해 마점산군과 싸워 혁혁한 전과를 올림으로써 거금 700원의 승전상금을 받기도 하였다. 이 돈은 뒷날 원석학원창설의 기본금이 되기도 했고 교육의 불모지인 이태원에서 이태원 초등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가 중좌 때는 김석원 대대가 중일전쟁 초 중국군 1개 사단을 섬멸하는 신화를 남기기도 했다. 이에 대한 일화로써 8·15해방 뒤 이승만 대통령과 장개석 총통이 진해 별장에서 회담하면서 이 박사가 말하기를 “건군 초기의 우리나라에는 지휘관이 부족해서 걱정입니다.”라고 하자, 장총통이 답하기를 “아! 한국에는 김석원 이라는 용감한 군인이 있질 않소.”하더라는 얘기는 그만큼 장개석도 김석원을 용장으로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김석원의 대대가 중국군 1개 사단을 섬멸시킬 때 일본인 종군기자가 원고를 손에 쥐고 전사하자 다른 사람이 이 원고를 일본과 중국의 신문에 보내 대서특필하게 됨으로써 김석원 중좌는 한·일·중에 널리 알려져 일약 유명한 전쟁영웅 스타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일로 하여 그는 조국이 광복되는 그날까지 일본군에서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지냈다. 김석원은 조국이 해방되자 그해 8월 말 성남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육영사업에 몰두했다. 성남중고등학교의 재단은 원석학원이다. 독지가로서, 광산가로서 이름있는 원윤수가 거금을 투척하고 김석원이 자기 생애에 절약해 모았던 적은 기금을 합해 윤원수의 ‘원(元)’자와 김석원의 ‘석(錫)’자를 따서 원석(元錫)학원이라 이름한 것이다.
김석원은 일본군인이 된 것을 반성하는 뜻에서 건군대열에는 여러 사람의 선·후배가 권유했어도 참여하지 않다가 6·25 직전에 특임으로 임관하여 1사단장으로 송악산 전투에서 육탄 10용사의 신화를 남기고 일명 ‘북어사건’으로 군을 떠났었다. 6·25가 터지자 그는 학도의용군을 모집하다가 다시 군복을 입고 수도사단장, 3사단장, 전시검열단장을 지냈다. 그는 1956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였다. 그 뒤 그는 오직 육영사업에 몸과 마음을 바치다가 1978년 8월 6일 향년 85세를 일기로 작고하였다.
그는 훌륭한 군인이었고 용기있는 군인으로서 후배들에게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는 훌륭한 교육자였으며 교육의 선각자로서 이 땅의 교육계에 수많은 화두를 던져 일깨워 준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