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日成의 대학살 이천명 脫北者
6·25 전쟁 당시 함경북도 내무서원(경찰관)으로 복무했던 脫北者 이천명의 고백證言
요 약 ●8·15 광복 후 진주한 소련군, 부녀자들 무차별 性폭행… 지역마다 위안소 두었다 ●6·25 나자 후방지역서 무차별 학살… 지주·자본가·일제시기 관료들과 그 친척들이 대상 ●함경북도 종성군서 고급중학교 학생들이 만든 「서북 청년단」 27명 중 20명 검거… 내무서원들이 집단 사살해 암매장 ●전쟁 후 즉시 주민들에 대한 성분조사 시작… 「정치범 수용소」의 前身인 「주민 수용소」 설치… 끌려온 주민들로 감옥은 터지고 넘쳐났다
차 례
머리말 해방자로 나타난 「소련군」 젊은 여성들 가차없이 잡아가 소련 군인들의 만행 뜻밖에 일어난 6·25 전쟁 소위 「일시적 후퇴」 시기 무자비한 살인 「서북 청년단」 적발사건 代를 이은 비극 치안대장」 하던 사람 일행과 交戰 戰後 주민탄압 시작, 감옥이 넘쳤다 차령역장 정영식의 억울한 사연 여자를 괴롭힌 안전부 예심과장 허동구의 말로 왜 후퇴 않았나? 무엇이 北 주민들에게 6·25를 견디게 했는가 전쟁에 2백만, 굶주림에 3백만이 쓰러져
머리말
나의 이름은 이천명이다. 나이는 69세, 한반도가 갈라져 어언 5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8·15 광복의 기쁨도, 6·25 동란도 다 겪으며 공산독재 옹호기구의 일선에 서 있던 내가 이제는 枯木(고목)이 되어 마지막 인생을 살아보겠노라 이국땅을 방황하고 있다.
배고파 방황하고 있는 몸임에도 마음은 항시 한반도 땅에서 순간도 떠난 적이 없다. 세월이 흐르고 해가 바뀌어 우리 代(대)에 통일이 되는가 싶었는데, 갈라져 여전히 아웅다웅이다.
자칫하면 끔찍했던 6·25 동란도 다시 저지를 것 같은 팽팽한 분위기다. 이번 6월15일 서해 해상 交戰(교전) 사건을 듣고는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말아야 함도 새삼스레 느꼈다. 전쟁이라는 것이 軍(군)은 물론 일반백성들까지 얼마나 무고하게 해치는가를 체험으로 엮어보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바이다.
1999년 7월, 중국땅에서, 이천명.
해방자로 나타난 「소련군」
나는 1930년도에 함경남도 영흥군(지금의 금야군)에서 출생하였다. 광복 전 나는 함경북도 청진시 인곡동 철물공장에서 야장쟁이로 일하였다. 당시 日帝(일제)는 조선에 대한 약탈행위를 심하게 하였다.
「공출」이라 하면서 집집마다 곡식을 감추었다 하여 마당과 뒤울안을 살피었고 마구 뒤져 빼앗아갔다. 조선사람은 밥을 먹지 말라고 하면서, 조밥을 먹으라 하였다. 밥먹는 시간에 경찰들이 마을을 다니면서 주인도 찾지 않고 문을 열고 뛰어들어와서는 쌀밥에 콩을 섞어먹지 않으면 경찰서에 끌고가 귀뺨을 때리며 시국에 맞지 않는 생활을 한다고 떠들어댔다.
상점에는 가짜상품을 내다놓고, 쌀을 개인이 팔다가 들키면 몰수하고 벌금을 안겼다. 게다가 「징용」 「징병」 「보국대」니 하면서 무고한 청·장년들을 일본 본토나 만주로 끌고가, 전쟁 대포밥으로 노동력으로 부려 먹었다. 일제에 대한 원한은 조선 각지에서 하늘과 땅에 사무쳤다.
어른들은 매일 모여앉으면 독일이 세계에서 제일 강대하고 지금 소련을 거의 다 점령했다고들 하였고 일본은 꼭 패망한다고들 하였다.
하루는 일본 경찰들과 조선인 관리 몇명이 부락에 나타나더니 사람들을 다 모아놓았다. 그들은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였으니 최후를 각오해야 한다며, 모두 칼을 몸에 지니고, 맞닥뜨리면 싸울 준비태세를 갖추라고 하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몸에 칼을 준비하기는커녕 무사태평이었다. 며칠이 지나자 일본 사람들은 2열 3열로 줄을 지어 늘어서서 저녁 9시경부터 청진 시내를 벗어나 어디론가 가버렸다.
이틀 후 소련 군대가 청진 앞바다에 포 몇 방을 쏘더니 상륙하였다. 주민들은 「조선독립 만세!」를 부르며 소련 국기와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떨쳐나섰다.
노동자들은 일제가 가면서 부수고 간 공장을 복구하러 나갔고 농민들은 자기 밭에 나가 여물어가는 곡식을 가꾸었다. 고향을 이남에 두고 북한에 온 사람들은 광복이 되자 고향으로 갈 차비를 서둘렀다.
일제 식민치하에서 고통당하며 서로 같이 살다가 헤어지는 슬픔을 달래려 송별연이 벌어졌고 눈물의 헤어짐이 온 강토를 휩쓸었다.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눈물지으며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은 시작과 끝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어른들은 마주앉으면 이제 이남에는 美軍(미군)이 들어온다, 미국은 소련보다 발전하였다고 말하면서도 강토가 갈라질 줄은 누구도 예견 못했다. 다만 소련은 공산주의다, 네 것 내 것 없이 공동으로 일하고 먹고사는 나라다. 그러니 소련이 좋으냐, 미국이 좋으냐 하는 이야기뿐이었다. 소련 군대가 청진시에 주둔하여 소련군 위수사령부를 설치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소련군 병사들은 거리와 골목마다 돌아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물건은 다 집어갔다. 특히 집집을 이곳저곳에서 본격적으로 수색해 나갔다.
젊은 여성들 가차없이 잡아가
젊은 여성들은 가차없이 잡아갔고 여자의 부친이나 남편이 가로막거나 반박하면 구타하고 총으로 쏴 제끼었다. 내가 살던 청진시 인곡동에서도 우리 마을의 열일곱 살 되는 김정옥이와 스물두 살이 돼 시집갈 날짜를 이틀 앞둔 유금숙이를 트럭에 강제로 싣고 갔다.
유금숙의 새 신랑될 사람과 부모들이 소련군 위수사령부를 찾아가서 사연을 말하니 자기들은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잃어버린 여자로 통곡소리 높던 집안에 유금숙이가 한 달 후 불쑥 나타났다. 울면서 말하는 유금숙이의 증언에 의해 사실이 밝혀졌다. 소련군은 청진시에서 부령군 쪽으로 나가는 골짜기에 외딴집 몇 채가 있었는데 집주인들은 모두 쫓아버리고, 여기에 열댓 명도 넘는 여자들을 가두어놓았다. 열명 가량이 이 집들을 호위하고 있었는데, 한집에 여자들을 세 명씩 가두어넣고는 소위 「위안소」로 이용하고 있었다.
이들은 여자들에게 소련식으로 흘레브와 빠다를 먹여 여자들은 밥 생각이 나 혼이 났다고 한다. 性(성)에 주린 소련군 군인들은 트럭에 무리로 타고 와서는 섹스를 하였다. 반항하면 때려눕히는지라 여자들은 모두 할 수 없이 순응하였다.
오전에 한 트럭, 오후에 한 트럭씩 근 한 달 동안 수백 명을 치르고 나니, 여자들은 기진할 대로 기진해 버렸다.
요행히 새로 잡아온 여자들이 많아서 「교대」를 시키고는 집으로 가라고 쫓더라는 것이다. 같이 잡혀갔던 김정옥이는 보름 만에 견디다 못해 기절하여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나지 못하고 죽었다 한다.
너무나 강간당해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유금숙은 결혼식을 할 수 없었고, 침대에 누워 일어날 줄 모르는 폐인이 되었다.
소련 군인들의 만행
청진시에 사는 내 고모 되는 32세의 김상옥이라는 여인도 이같은 봉변을 당할 뻔했다. 내 고모는 조선 치마저고리를 항상 단정하게 입고 다니는 외모가 깨끗한 여성이었다. 1945년 10월에 여섯 살 나는 딸애를 데리고 집에 있는데, 마을을 수색하던 소련군 군인 2명이 들이닥쳤다. 다소곳이 고개숙이고 앉아 있는 어여쁜 여성을 보자, 소련군 군인들은 신발을 신은 채로 온돌방 위에 올라서며 징그럽게 웃었다.
다짜고짜로 끌어안으려고 하는 군인들을 보고 고모와 딸애는 질겁하였다. 옆에서 우는 딸애의 귀뺨을 후려쳐 울음을 멈추게 한 군인들은 달라붙어 반항하는 고모의 아래웃옷을 다 벗기고 깔고 앉았다. 이때 밖에 일하러 나갔던 고모부가 술을 마시려고 친구를 데리고 집에 들어섰다.
이 광경을 본 고모부는 들고 있던 술병으로 고모 위에 올라탄 소련 군인의 뒤통수를 내리치고 재차 고모 팔을 붙잡고 있는 다른 군인도 후려갈겼다. 두 군인이 쓰러지자 온 동네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른들은 잘했다고 좋아하는 한편, 빨리 도망치라고 권하였다.
고모 내외는 고향인 함경남도 영흥군으로 피해갔다가 6·25 전쟁기간에 남한으로 나갔다는 소식을 들은 후 나는 아직까지 그들의 생사를 모른다.
이즈음 청진 시민들은 식량이 없어 일제가 패망 당시 5척의 배로 실어가려 하다가 소련군대가 들어오는 바람에 배를 폭파시켜, 바다 밑에 침몰된 배에서 썩은 쌀을 가져다가 먹으면서 살고 있었다.
그래도 광복이 되었다고 사람들은 떠들면서 공장과 주요 설비를 지켰다. 공장에는 자위대가 조직되어 경비를 섰고, 중요한 물자가 저장된 장소에는 자위대원들이 있었다. 주인들인 듯한 쉰 살 되는 남자와 서른 살 정도된 남자가 나와서 소련 군인들에게 목재를 실으면 안된다고, 말이 잘 통하지 않으니, 손짓과 몸짓을 했다. 그런데 소련군 대위는 다짜고짜로 권총을 뽑아들더니, 그 사람들을 보고 차 세워둔 데로 걸으라고 호통쳤다. 권총 앞에 선 이들이 기가 질려 돌아서 두세 발자국 걷는데 권총소리가 터지면서 모두 꼬꾸라졌다.
소련군 대위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권총을 권총갑에 찌르며 씩 웃었다. 나는 너무나 겁이 나 틈을 보다가 냅다 도망쳐 버렸다.
내 부친도 거리에서 이런 봉변을 겪었다. 부친에게는 代(대)를 물려오던 금이 섞인 회중시계가 있었는데, 하루는 거리에서 소련군 병사와 맞닥뜨렸다. 부친의길게 드리운 회중시계를 보자 소련군 병사는 부친을 멈춰 세우더니, 그 시계를 달라고 하였다. 소련 연해주 근방에서 六穴砲(육혈포)를 차고 다니며 독립활동을 하던 부친은 러시아어에 유창해 안된다고 사정하였다. 하지만 막무가내인 소련군 병사는 가슴에 대고 따발총을 쏘는 입시늉을 하더니 공중에 대고 공포 두 발을 갈겼다.
회중시계를 지키려다 목숨을 잃겠다고 생각한 부친은 할 수 없이 시계를 꺼내 주었다. 시계가 금시계라고 설명해주니, 소련군 병사는 너무 좋아 공중에 대고 또 한방 공포를 쏘며 시계 가진 것을 자축한다고 떠벌이고는 가버렸다 한다. 부친은 집에 돌아와 「해방자」라 자처하는 「마우재」들에게 빼앗겼다고 통분해 하였다.
그러면 광복이고 뭐고 大國(대국)에 아부, 굴종해야 하는 약소민족의 슬픔은 언제 가시겠는가고 부르짖었다. 소련군은 2차 세계대전에서 이긴 戰勝國(전승국) 군대이고, 해방자는 틀림없다, 하지만 약소국가를 마구 강탈·강간하니 진정한 해방자는 아니었다.
독일이든, 소련이든 자기의 이해관계와 이익을 위해 세계 곳곳에서 약소국가들을 지배하여 욕심을 채우려는, 다 같은 승냥이 본성을 가진 나라들이라 볼 수밖에 없다.
나는 1948년 부친의 연줄로 열아홉 살에 평양에 있는 평양 내무성 보안간부학교에 들어가 1년 동안 공부와 훈련을 받게 되었다. 이 보안간부학교 교관도 역시 「고문」이라는 명칭을 단 소련군 소좌였다. 그러니 일체 훈련방식은 모두 소련군 식이었다. 광복되었다 하여 완전히 해방된 것이 아니라, 다만 일제로부터 소련으로 북한의 통수권이 넘어갔을 뿐이었다.
뜻밖에 일어난 6·25 전쟁
1949년 가을 평양 내무성 보안간부학교를 졸업한 나는 함경북도 내무부에서 내무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당시 북한에는 지금처럼 보위부나 안전부가 따로 갈라져 있지 않고, 내무소 안에 안전과라는 것을 두고 이 부서가 지금의 보위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나는 안전과에 배치되었는데 군사칭호는 중위였다. 내무서 안전과는 청진 시내의 反(반)정부 움직임이나, 秘(비)조직체 적발은 물론 함경북도 내 각 시·군 내무서들의 활동도 감독하게 되었다. 나는 주로 함경북도 온성군 내무서 안의 안전과 활동을 종합하여 道(도)내무부에 보고하고 사건이 제기되면 내려가 감독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1950년 6월25일 새벽이었다. 뜻밖에 중앙방송은 새벽 5시 국방군이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進攻(진공)하고 있다고 하면서 전쟁이 일어났음을 거듭 선포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무슨 전쟁이겠는가, 그러다가 말겠지」라고 말하는 축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이튿날도 계속 전쟁보도가 나왔다. 북한 경비대가 38선 戰線(전선)지역을 인민군대에게 양도하고, 인민군이 戰線을 넘어 南進(남진)한다는 소식이었다.
전쟁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는 이상벽 방송원의 목소리는 온 북한에 울려퍼졌다. 그때 통일은 눈앞에 왔다고 하며 시민들 모두 나서 춤추던 일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7월에 접어들면서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미군 비행기들이 높게도 뜨고 낮게도 떠서 폭격과 기총사격을 밤낮으로 해댔는데 순식간에 청진시는 불바다가 되었다.
주민들은 당황하였다. 서울이 해방되었다는 것은 거짓이다, 북방도시 청진도 이렇게 얻어맞는데 이긴다는 것이 무슨 소리냐 하는 수군거렸다. 게다가 산 같은 배들이 청진 앞바다에 떠서 청진시에 대고 연신 함포사격을 하여 숱한 주민들이 숨져갔다. 집집마다 통곡소리, 한숨소리 그칠 날이 없게 되었다.
청진 제철소를 비롯한 북방도시 굴지의 기업소들이 폭격과 포격에 부서지고 검은 연기는 하늘을 검게 뒤덮어 버렸다. 시민들은 피할 곳을 마련하느라 모두 방공호 굴 뚫기에 떨쳐나섰다.
청·장년들은 55세까지도 군에 모두 징집당하게 되어 노인들과 연약한 부녀자들만 후방에 남게 되었다. 그런데도 중앙방송에서는 국방군이 계속 남으로 후퇴하며 숱한 인적, 물적 손실을 당하여 일어나지 못할 거라는 식으로 보도했다. 어쨌든 인민군대의 진격이 가는지, 오는지 모르겠지만 북한의 집들과 공장들은 뿌리채 날아가고, 농경지가 형체없이 파괴된 것은 황당한 일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일주일 후부터는 북한군 내무서의 모든 활동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戰時(전시)사업으로 전환되었다.
소위 「일시적 후퇴」 시기
각 시·군·구들의 인민군대 超募(초모)사업을 수행함이 1차적인 과업으로 제기되었다. 17세부터 55세까지 신체검사도 없이 청·장년들을 무조건 뽑아 군대에 보내야 했다. 전쟁 초기 인민군의 서울 南進소식이 발표되었을 때까지만 하여도, 기세충천한 남녀 청장년들은 앞을 다투어 인민군 초모에 궐기하였다. 그런데 청진시가 비행기와 군함의 폭격과 함포세례를 받은 후부터는 「전쟁 공포증」이 돌기 시작했다.
인민군 초모대상자 중에도 도망치거나, 다른 데로 숨어들어가 찾을 수 없는 이가 속출했다. 내무서는 군에서 주관하는 군사동원부와 합작하여 「군 기피자」들을 찾아내기 위한 소동을 벌이게 되었다.
군 기피자들은 잡히면 고스란히 군에 입대시켰지만, 잡히지 않으면 문건에 「군기피자」라는 검은 글씨를 박아넣어 문서고에 보관하였다. 체포시 반항하거나, 도망치면 가차없이 총살해 버렸다.
나도 숱한 기피자들을 찾아다녔다. 소련제 「따발총」을 메고 발이 닳도록 청진시와 그 주변을 다녀보았으나 난리통에 백에 한 명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갓 창설된 북한 내무서들은 경험이 부족했고 戰時에 하는 일들이 모두 생소하고 어려워 마치 낮 도깨비가 나와 풀대들을 이리저리 마구 넘어뜨리는 망둥이처럼 일을 처리했다. 몇 달 후 그렇게 단숨에 먹어버릴 것처럼 이남 지역에 들어갔던 인민군의 진격은 낙동강 지역에서 좌절되고, 미군이 상륙하는 통에 북한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이 책임을 물어 북한군 보위상 최용건은 해임되고, 제1부수상을 하던 김책이 그 자리에 들어앉아 戰線을 지휘했지만 전황은 달라지기는커녕 더 어려워졌다.
인민군은 이남 지역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독안에 들어 막대한 손해를 보며 함흥 이북 지역으로 쫓겨갔다. 북한 역사에서 떠들어대는 「일시적 후퇴」가 시작된 것이다,
1950년대 말 북한의 후퇴 시기는 艱苦(간고)하였다. 겨울 추위는 점점 심해져 눈보라가 기승을 부렸고 굶주림은 전역을 휩쓸었다. 노인, 부녀자들과 전쟁고아들은 집이 없어 바깥에서 얼어죽고 굶어 죽었다. 함흥 이북 지역으로는 더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예견했던 국방군이 함경북도 입구인 경성군까지 밀고 들어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함경북도 내무부에서는 처단 대상자 명단을 작성하게 되었다. 나는 道 내무부의 파견으로 온성군 내무서로 내려가 안전 업무를 맡게 되었다. 온성군 내무서에는 구류장(감옥)에 정치범, 경제범을 비롯한 2백명 가량의 죄수들이 갇혀 있었다.
郡(군) 내무서장 이하 안전과 성원들이 죄수들의 처단 명단을 작성했는데, 성분 위주로 사건을 처리했다.
일제 시기 地主(지주)·자본가·관료들이 죄수들 친척계열에 있었으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무조건 처단 명단에 넣었고, 죄수가 반항심을 가지고 있다 판단되면 또 처단 명단에 넣었다. 이렇게 작성하니 2백명 중 1백40명 가량이 처단자 명단에 등록됐다. 1950년 10월13일 밤 9시30분경 郡 내무서에서는 내무서원들을 총동원하여 온성군 풍인이라는 지방 골짜기로 처단 대상자들을 차에 싣고 달렸다.
무자비한 살인
이 처단 대상자 명단 속에 있던 사람 중 아직까지 어렴풋이 기억되는 이는 김동식(당시 45세·남양 문화회관 과장), 전철호 당시 57세·남양중학교 교원), 김종만(당시 29세·온성역 조차공) 같은 사람들이다. 내무원들은 죄수들을 모두 차에서 끌어내린 후 골짜기에 일렬로 세워놓았다. 그 다음 미리 대기하고 있던 50여명의 내무원들이, 따발총을 휘둘러 전부 살해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혹시 죽지 않았는가 하여 시체를 뒤져보고 미심쩍으면 또 총질을 해댔다. 순식간에 풍인 골짜기는 피비린내가 꽉 차게 되었다.
다음날 내무원들은 아침 일찍 삽과 곡괭이를 가지고 가 시체들을 전부 묻어버렸다. 또한 면과 리에 퍼져 살고 있는 처단자 명단을 또 작성한 뒤 그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 대상자 명단은 미리 「감시사건 등록자」로 낙인찍힌 이들이었는데 주로 일제 때 지주·자본가·관료들과 그 자식들, 북한 공산사회에 반감을 품고 있다고 감시해 오던 「불만 분자」들이었다.
나는 내무원들과 함께 화물자동차에 앉아 이 체포작전에 동원되었다. 온성면에서 사는 김국철이라는 체포 대상자 집에 도착하였을 때였다. 『주인님 잠깐 봅시다』라고 하자 한 남자가 끌개신을 신고 나왔다. 그 남자를 자동차로 데리고 간 우리는 옆구리에 총을 대며 차에 올려실었다. 그 다음 다른 집으로 또 차를 몰고 가니(이름은 지금 기억되지 않는다) 그집 젊은 마누라가 나와 하는 말이 남편은 점심 식사 후 어디로 다녀오겠다면서 나갔다는 것이다.
이날 오후 우리가 체포한 사람은 대상자 12명 중 9명이였다. 우리 7명 내무서원조는 이미 약속된 장소인 남양에서 풍인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해군 피복공장 뒷산의 구덩이를 파놓은 장소로 이들을 끌고갔다.
차에서 내려세우니 총살하려 한다는 기미를 챈 이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도망쳤다. 그러나 휑한 들판이어서 피할 데가 없는 이들은 모두 총에 맞아 학살되었다. 우리는 이들의 시체를 질질 끌어다가 구덩이 속에 처넣은 후 삽으로 대강 묻어버렸다.
이날 온성군 내무서는 다섯 대의 화물차에 5개조로 나뉘어, 처단행동을 일제히 취하였는데 대상자 68명 중 55명을 체포하여 학살하였다.
이런 살인 만행은 북조선 全(전) 지역에서 일제히 벌어졌다고 내무서장이 내무원들 앞에서 토로하였다. 이날 저녁 郡 내무서장은 우리 처단사업은 성공적이었다고 칭찬하며 술 한잔 마시자고 하여 내무서 안에서 술판놀음을 벌였다. 1950년 10월13~15일까지 북한 함경도 지역 내에서 피비린내나는 살인만행을 벌인 것은, 역사의 오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서북 청년단」 적발사건
내가 파견되어 근무하던 온성군 옆에는 종성군이 있었다. 이 종성군 하삼봉리라는 곳에 고급중학교가 있었는데, 난데없는 사건통보가 내무서에 전달되어 왔다. 17~22세까지의 고급중학교 학생들이 「서북 청년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움직인다는 정보였다.
이 「서북 청년단」은 미군과 국방군이 들어오면 벌일 환영사업과 내무원·군인들을 대상으로 무기를 탈취하여 결정적인 시각에 무장봉기를 일으켜 노동당 간부들을 처단하고 자유세계를 만들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했다.
「서북 청년단」 조직규모는 27명이며 이 조직의 주모자는 학교 학생이 아닌 성이 徐(서)가라는 인물인데 이름은 딱히 기억나지 않는다.
이 조직은 내적으로 이미 태극기를 많이 제작해 냈으며 삐라를 수없이 제조하여 유사시에 살포하려 준비를 끝냈다는 것이다. 규모가 작은 군이어서 온성군 내무서보다 내무원들이 절반밖에 되지 않는 종성군 내무서에서는 온성군 내무서에 긴급지원을 요청해 왔다.
온성군 내무서에서는 20여명의 내무원들이 트럭 2대에 나누어타고 「서북 청년단」 체포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나도 물론 이 작전에 동원되게 되었다.
그러나 종성군 내무서는 국방군이 곧 들이닥칠 것 같아 사건 경위와 내용도 알아보지 않고 통보만을 근거로 처단작전을 펼쳤던 것으로 드러났다.
우리는 종성군 내무서원들과 체포조를 구성한 후 트럭 6대에 분승하여 오후 5시경 일찍 저녁을 먹고 출발하였다. 내무서원들은 총동원 인원이 60명 정도였는데, 그들은 우선 하삼봉리 7백 호 가량 되는 마을을 길목마다 차단해 버렸다.
그 다음 각기 자기 맡은 대상에 따라 체포작전을 벌였다, 체포작전으로 하삼봉리 마을은 순식간에 뒤집힌 듯 복닥소동이 일어났다.
「서북 청년단」의 주모자 徐가라는 사람은 권총을 가지고 있어 내무서원들이 그의 집으로 가서 찾으니 맞총질을 하였다.
접전 끝에 내무서원 한 명이 그의 총에 맞아 즉사하고 徐가도 내무서원들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서북 청년단」 학생들 속에는 여학생도 6명 들어 있었는데 몽땅 체포되었다. 학생복을 단정히 입은 어린 여학생들을 이제 죽인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괴로웠다.
남학생들은 자동차까지 호송해와서는 총으로 뒤통수나 척추를 쳐서 쓰러뜨린 다음 두 팔을 뒤로 비틀어 묶어서 차에 실었다.
학생들의 부모들은 자식들을 데려가지 못한다고 막아나섰다가 내무서원들의 구둣발에 봉변을 당했다. 이들 부모들은 자식들이 내무서로 끌려간다고 생각만 할 뿐 학살된다는 끔찍한 내막을 몰랐다. 체포소동은 저녁 10시경이 되어서야 완전히 끝났다. 학생들 인원을 점검해보니, 24명으로 3명이 비었지만 그들은 찾아내지 못했다.
이들을 트럭에 싣고 가던 도중 이윤식이라는 21세난 학생이 자동차에서 뛰어내려 도주하였다.
밤이 너무도 어두워 추격을 못하고 우리는 열댓 방의 총질을 하였다. 트럭은 종성군 동포리라는 곳에 가서 멈추어섰다. 동포리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과 국경을 이룬 지역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내무서원들이 이미 전에 파놓은 구덩이와 30m쯤 떨어진 곳에 학생들을 내려놓고 트럭의 전조등 불빛을 학생들에게 들이댔다.
깨끗한 학생복을 차려입고 나란히 선 씩씩하고 젊음이 넘치는 학생들의 천진한 모습과 옆에 서 있는 6명 여학생들의 아리따운 모습은 눈뿌리 따갑게 안겨들어 제발 죽이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쐈!」하는 종성군 내무서장의 구령소리와 함께 20여명 내무원들의 기관총에서 불줄기가 뿜어나갔다. 비명소리와 총소리가 한데 어울려 돌아가는 살인 마당에서 머리채를 흩날리며 기우뚱거리다가 쓰러지는 여학생들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런 백정질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은 추악한 마귀같이 생각되었다. 손은 후들후들 떨려 담뱃불도 제대로 붙일 수 없었다.
그 다음에는 학생들을 끌어다가 구덩이에 처넣고 대충 매장해 버렸다. 어떻게 郡 내무서까지 트럭을 타고 왔는지 기억이 전혀 없다. 내무서로 돌아오자 내무서에서는 준비했던 술판을 펼쳤다. 나는 이날 스물한 살 나이가 될 때까지 처음으로 술을 잔뜩 마셨다.
나 같은 나이 또래 학생들에게 죽음을 준 것이, 내가 사랑하고 싶은 아름다운 여학생들을 죽인 것은 현실이 아니라 악몽인 듯 싶었다.
代를 이은 비극
그때 「서북 청년단」 학생들 속에는 일찍이 장가를 가 딸을 하나 남긴 학생도 있었다. 그 학생의 딸은 그 뒤 함경북도 회령시 기관차구 객차대 차장으로 일했는데, 아버지가 전쟁시기 「서북 청년단」에 가담했다가 처단되었다는 이유로 스물여덟 살이 되도록 시집갈 대상자가 없어 시집을 못가고 있었다.
인물도 환한 그 처녀는 아버지 때문에 사회에서 버림받는 것이 분하여 1978년 중국으로 脫北(탈북)하려다가 붙잡혔다. 그 처녀는 회령시 철도 종업원 수백명이 모인 앞에서 공개 공판장소에 나서게 되었다. 함경북도 보위부는 그 처녀에게 「자기 죄과」를 강제적으로 발표하게 한 다음 끌고 갔는데, 아마 청진시 수성 정치범 수용소 아니면 종성군 정치범 수용소에 넣어 버렸을 것이다.
훗날 한반도가 통일되면, 한국은 6·25전쟁시기 쓰러진 「서북 청년단」 애어린 청춘들의 열사기념비를 함경북도 종성군 동포리에 크게 세워, 반드시 이들을 추모하고 恨(한)을 풀어주어야 할 것이다.
「서북 청년단」 사건과 비슷한 사건은 1950년 11월 말 함경북도 경흥군 (지금의 은덕군)에서도 벌어졌다. 경흥군에 살던 16명은 「대한 독립단」을 조직하여 한국방송을 들으며, 태극기를 만들어 미군과 국방군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이들은 대부분 일제 때·지주·자본가·관료들의 가족들이나 친척들이었다. 이 사실을 알아낸 경흥군 내무서에서는 이들 모두를 체포하여, 경흥군 오봉리에 있는 폐광지로 끌고 갔다.
깊이가 40m 남짓한 곳에 이들을 모두 몽둥이로 때려 질식시켜 처넣은 내무서원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87년 탄광을 개발하다가 굴을 뚫는 굴진공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사람 뼈다귀를 발견하였다.
통보받은 郡 안전부에서 나와 사건현장을 조사해 보니, 6·25 전쟁 때 자기들이 한 짓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하여 애써 굴을 뚫은 이 소형탄광 개발을 중지시켰다. 이같은 크고 작은 사건은 6·25 전쟁 시기 함경북도 내에만도 수없이 많이 일어났다. 무리로 살인하는 학살만행이 벌어졌으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난다.
「치안대장」 하던 사람 일행과 交戰
북한군의 일시적 후퇴가 끝나자, 전선은 38도선 부근에 고착되었다.
북한군은 진지방어전에 매달려 가는 곳마다 갱도를 부설해 더는 38선 이북을 내주지 않으려 최후발악을 하였다. 이 시기 북한 내무서의 기본임무는 일시적 후퇴 시기에 한국에 복무한 「치안대」 연루자들과, 패잔병들을 숙청하는 것이었다.
1951년 4월5일경 오후에 함경북도 내무부에 사건이 전달되어 왔다. 신고는 한 주민이 전해온 것인데 후퇴 시기 함흥 지구에서 「치안대장」을 하던 모 사나이와 정체 모를 남자 몇 명이 청진시 앞바다에 있는 항구에서 어물쩡거리는 것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수산사업소의 어선들을 가로채 월남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수산사업소 책임자들에게 알아보니 도난당한 배는 한 척도 없다는 것이었다.
즉시 우리 안전과 성원 8명은 트럭을 타고 수산사업소에 도착하였다. 때는 이미 어슬어슬 날이 어두워질 때였다. 우리는 오늘 밤에 정체 모를 그 사나이들이 부두에 정박해 놓은 어선들에 달려들 것이라 생각하고 매복진을 폈다. 지루한 시간이 흘러 밤 12시경이 되었을 때였다.
『저벅, 저벅』 하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더니 검은 그림자들이 부두에 다가섰다. 5명의 사나이들은 사방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발동선을 단 자그마한 어선에 가 멈춰서는 것이었다. 순간 우리 내무서원들은 『서라, 쏜다』 하는 위협소리를 지르며 권총과 기관단총을 겨누고 벌떡 일어섰다. 우리와 그들의 거리는 15m쯤 되었다. 뜻밖의 봉변에 얼이 나갔던 사나이들은 저항하지 않는 것 같더니, 무슨 나지막한 구령소리와 함께 모두 그 자리에 납작 엎드렸다. 『땅, 땅』 하는 권총소리가 연이어 터졌다.
서로의 맞불질이 시작되었다, 나의 옆에서 기관총을 휘두르던 내무서원 한 명이 앞으로 푹 고꾸라지는 것이 보였다. 내가 권총을 들고 사나이들이 엎드려 있는 쪽에 연속 발사하는데 갑자기 오른쪽 어깨가 쇠몽둥이에 얻어맞는 듯한 감이 들더니 손에 쥔 권총을 떨어드림과 동시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 다음은 정신을 잃었는데 생각나지 않았다. 병원으로 후송된 침상에서 들으니 우리 쪽은 내무서원이 한 명 죽고 내가 부상당했다는 것이다.
체포하려 했던 그 사나이들은 5명 중 2명이 총에 맞아 사살되고, 3명은 도망을 쳤다 한다. 이렇게 되어 나는 전쟁이 일어난 지 1년도 안되어 어깨에 관통상을 입고 함경북도 주을군에 있는 戰傷者 병원에 후송되었다.
오른쪽 어깨뼈가 부스러져, 오른쪽 팔을 거의 움직일 수 없게 된 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2년 동안 계속 戰傷者(전상자) 병원에 입원하여 휴전을 맞게 되었다. 전상자 병원 침상에서 나는 별의별 생각을 다 해보았다.
그때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다행이란 생각도 했다. 하지만 피비린 학살만행에 참가했던 생각이 떠올라 나 같은 건 죽어도 응당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죄의식은 항상 나를 지배해 일생을 괴롭혔다.
전쟁이 끝난 1953년 8월에 나는 요행 오른팔을 쓸 수 있게 되어, 함경북도 청진지구 철도 내무서에 再(재) 배치받아 근무하게 되었다.
6·25 전쟁은 역사상 유례없는 인적, 물적 자원을 손실시켰다. 전쟁을 끝내고 보니 주민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백성들은 무리로 죽고 집도 흔적없이 사라져 어디에서 살라느냐, 공장도 농촌도 다 파괴되어 무엇을 하겠느냐, 부모 형제 다 잃고 어떻게 살겠느냐,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부모 잃은 고아들은 떠돌아 다니며 방랑의 길에 올랐고, 부모, 처자가 살았다 하여도 기관차도 객차도 다 파괴된 상태이니 찾아갈 길도 막혔다.
자식들을 공부시키려 해도 학교는 다 무너지고 병원도 다 파괴되었다.
전쟁은 과연 누구를 위했기에 이런 죽음과 고통을 백성들이 다 안게 되었는지, 전쟁에서 이긴다면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새 물건이 산처럼 쌓이는가, 그렇지도 않았다. 손에 쥐고 있던 물건마저도 다 두드려 부숴놓았다.
전쟁은 술주정뱅이 미치광이가 술취해 자기 집안 물건을 마구 두드려 엎는 망둥이 같은 짓만 하게 만들어 놓았다. 북한은 6·25 전쟁을 승리한 전쟁이라고 하는데 속여도 분수가 있다. 전쟁은 停戰(정전)으로 끝났지, 항복받은 것도 아니었으며, 38도선이 제주도 끝의 일본 쪽에 가 붙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조국해방전쟁 승리 기념관」이라는 것을 평양 한복판에 덩실하게 앉혀놓고 망신스럽게 동족끼리 싸움하던 자랑을 한다. 전쟁은 명실공히 공산독재를 남한까지 펴보려는 북한 독재자들의 정치적 야심의 産物(산물)이었고, 백성들을 내몰아 자기 정권 유지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북한 내무성은 전쟁이 끝나자 제꺽 그 이름을 북한 사회안전성이라고 탈바꿈하였다. 하여 내가 근무하게 된 청진 철도내무서도 청진지구 철도 안전부로 명명되었다.
戰後 주민탄압 시작, 감옥이 넘쳤다
북한 주민들이 전쟁 3년간 겪은 고생도 채 가라앉기도 전에, 金日成은 주민들을 또 다시 괴롭히기 시작했다.
전쟁 시기 단련됐다는 軍 제대군인들로 사회안전성 대열을 再정비 보강한 안전성은 당국의 지시에 따라 주민들의 생활을 파기 시작했다.
전쟁 시기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였느냐, 증인을 세워라, 월남한 남편의 행처를 아느냐, 친척이 「치안대」질을 하며 사람을 어떻게 죽였느냐, 軍 「기피」를 하고 어디에 가 있었느냐. 전쟁시기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모두 안전부에 와서 자수하라고 포고령을 연신 내렸다.
사회안전성 감옥은 배로 불어났으나 잡아들인 주민들로 차고넘쳐 수용자들을 다 수감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새로 당국이 착상한 것이 오늘의 「정치범 수용소」의 前身(전신)인 「주민 수용소」였다.
각도에 몇 개씩 넓은 부락 하나를 통째로 내고 그 안에 북한 당국이 구별해낸 북한 주민들이 갇히게 되었다. 때리고 심문하고, 확인하고, 심판하고, 총살하는 놀음이 전쟁이 끝난 후 2~3년 어간에 멈출 줄 몰랐다.
총소리 터지던 전쟁이 끝나니 암암리의 심문전쟁, 처형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주민들은 집·공장·일터를 잃은 것도 괴로운데, 더 괴로운 당국의 박해와 폭압이 뒤따른 것이다. 마구 쏘고, 붙잡고, 도망치고, 강요하는 전쟁의 난리통에 주민들이 살아온 경력과 그 행동은 가지각색일 수밖에 없었다.
전쟁 기간 중의 이 가지각색의 사회경력과 움직임이 현재 북한이 독재를 펴나가는 데 사람 가림을 하는 「성분 관계」라는 것을 정해놓게 되었다. 이 성분 관계에 따라 북한주민들은 6·25 전쟁이 끝난 뒤 오늘 현재까지도 차별대우와 버림을 받으며 인간 최하층의 고통 속에 살게 되었다.
정치적 야심과 야욕의 팽창으로 전쟁은 독일, 일본, 한국… 모두 겪었으나 오늘까지 주민들이 그 후유증에 시달리는 나라는 북한밖에 없으니 문제다. 문제는 제도자체가 백성들을 못살게 굴고, 그 위에 올라앉아 자기 야욕만 채우려는 독재자들의 사고방식에 전적으로 있다고밖에 달리 볼 수 없다.
차령역장 정영식의 억울한 사연
내가 근무하던 청진지구 철도 안전부도 전쟁이 끝난 뒤 숱한 주민들을 괴롭히고 애매하게 처형하였다. 함경북도 고무산에서 무산으로 가는 도중에는 차령역이 있다. 이 역 역장은 국방군이 이 지구를 점령하였을 때 역장을 계속하였고, 동생이 월남했다는 이유로 청진지구 철도 안전부 감시를 받게 되었다.
1954년 6월, 「노획물」을 찾아 전과를 올리지 못해 급급해하던 철도 안전부는, 차령역장 정영식에 대한 조사사업에 달라붙었다. 주민들을 만나 조사도 하고 본인도 심문했으나, 역장은 국방군 점령 당시 죄되는 일을 한 것이 한 가지도 없었고, 현재까지도 맡은 일만 성실해 해나가는 사람이었다. 조사 나갔던 나와 장문백이라는 안전원은 아무 단서도 쥐지 못하고 안전부에 돌아와 부장에게 보고했다.
겸사하여 양봉업을 하는 그가 3t이 넘는 꿀을 보유하고 있어, 우리가 가니 반가이 맞이하며 꿀 1백㎏을 주어서 가져왔다고 내놓았다. 꿀을 보자 만족한 안전부장 은 이 사건을 덮어두기로 일단락지었다.
그런데 한 달 후 사회안전성 副相(부상)을 하던 조사송이 함북도 지구를 시찰하게 되었다. 청진지구 철도 안전부장 김영활은 조사송에게 아첨할 기회를 노리던 찰나라, 차령역장의 꿀을 가로챌 계교를 꾸몄다.
그는 나와 장문백을 부르더니, 한달 전에 조사한 문건을 가져오라 해놓고는, 전쟁 시기 그가 하지도 않은 국방군 도운 죄를 몇 가지 만들게 하였다. 우리가 후에 非(비)사실적인 그 책임을 어떻게 지겠는가 라면서 거부하니, 그는 자기가 다 책임진다면서 강권으로 우리가 문서를 작성하도록 요구했다.
그 다음날 김영활은 직접 안전부 트럭을 끌고가, 역장을 체포하고는 그의 사유재산 꿀 3t을 모두 회수하여 안전부에 가져왔다. 2t의 꿀은 곧장 사회안전성 조사송 副相에게 전달되었고, 그는 副相에게서 사업을 모범적으로 한다는 평가로 미국제 손목시계를 선물로 받고 입이 함박만큼 째져 돌아갔다. 한편 차령역장은 철도안전부 구류장에서 갖은 고문을 당했으나 안한 것을 했다고 할 수 없어 저항하자, 김영활이가 직접 나서 까무러친 그의 손에 인즙을 묻혀 지장을 받아냈다.
그후 차령역장은 「反국가죄」를 뒤집어쓰고, 주민 수용소에 끌려가 일생을 그 안에서 보내게 되었다.
여자를 괴롭힌 안전부 예심과장 허동구의 말로
1955년 7월 청진역에서는 친척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온 조선족 여자 서월녀(당시 28세)를 「국제 간첩」이라고 체포하여 청진지구 철도 안전부에 끌고 왔다. 넉 달 동안 예심하였으나 서월녀가, 중국 대도시들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한 것 외에는 아무 단서도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하나(국제간첩)를 잡아내 성과를 이루려던 안전부 예심과장 허동구는 매일 두세 번씩 그녀를 끌어내 심문하던 나머지 기진맥진해졌다.
예심과정에서 서월녀의 애교스러운 인물에 반한 허동구는 서월녀에게 자기 말을 들으면 중국으로 다시 보내준다면서 자기 사무실에서 매일 대낮에 섹스행위를 하였다. 근 한 달 동안의 성교 끝에 아무 죄도 없다는 문서를 작성한 허동구의 보증으로 서월녀는 다섯 달 만에 중국 도문 공안당국에 넘겨졌다. 그후 임신한 서월녀가 중국 공안당국을 통해 함경북도 안전국에 항의를 해왔으나 청진 철도지구 안전부장과 단짝이던 허동구는 요행 「빽」으로 책임을 모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허동구는 후에 여자 때문에 끝내 망신하고 제대하게 되었다.
청진시 인곡동에서 철도역에 나와 술을 팔며 매음하는 순녀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허동구는 이 여자를 건드릴 목적으로 체포하였다.
체포하여 예심하니 순녀는 국방군 강점당시에도 점령군을 대상으로 매음했던 자기 경력을 고스란히 이야기하였다. 순녀를 자기 소유물로 만들 생각이던 허동구는 이 사실을 덮어두고 그를 석방시킨 후 첩으로 삼고 몇 달 동안 그의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곤 하였다.
그런데 청진지구 경무부에게 근무하던 한 인민軍官(군관)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순녀는 그 인민군 軍官과도 성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허동구가 초저녁에 찾아가 순녀네 집 문을 잡아당기니 집안에서는 한창 성교중이었다. 밸이 난 허동구는 그 인민군 군관과 다툼질하던 끝에 권총을 뽑아들었다. 그 인민군 군관도 권총을 뽑아들었으나 먼저 발사한 허동구의 권총 탄알에 그 인민군 군관은 쓰러졌다.
왜 후퇴 않았나?
치료 끝에 그 인민군 군관은 요행 살아났고, 감옥에 들어갔던 허동구는 「빽」으로 겨우 풀려 나와 안전복을 벗고, 탄광으로 쫓겨가게 되었다.
청진지구 철도안전부는 일시적 후퇴시기, 국방군에게 복무하였다는 죄명으로 청진, 부령, 나진, 회령, 고무산, 무산역들과 그 철도 가족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다가 검거하였다. 왜 후퇴하지 않고 그냥 철도에서 일했느냐, 따지고 묻는 심문 속에 많은 애매한 철도 종업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청진지구 철도안전부가 교수형을 집행하던 장소는 청진시 인곡동 부근이다. 여기에서 「敵(적) 기관」에 복무했다는 증거가 드러나면, 가차없이 교수형을 집행해 1953년과 1954년 이 두 해에는 매달린 시체들을 언제나 볼 수 있었다.
무산의 한 철도역 조차공은 국방군 임시 지휘부에 가 불을 때주고, 잔심부름을 하였다는 이유로 붙잡혀와 5일 만에 교수형을 당했다. 부령역 역장의 마누라는 역장인 남편이 집에 알리지 못하고 갑자기 후퇴대열에 섞여 중국 쪽으로 피난간 것을 모르고 있었다.
돌아올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데 국방군이 들이닥쳐, 그 여자는 국방군 장교들의 밥과 빨래를 해주는 식모로 일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발견한 청진지구 철도안전부는 그 여자를 체포하여 3일 만에 교수형에 처했다.
그의 어린 자식들은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고아가 되어 길거리를 헤매다가 행방불명되었다.
기억하자면 끝이 없고, 글로 적자면 산더미를 쌓아야 할 것이 전쟁의 여파로 빚어진 결과이다. 이 「전쟁 후유증」으로 북한에는 지금까지 월남자 가족, 치안대 가족, 지주·자본가 가족, 敵기관 복무가족, 그 친척 하며 꼽지 못할 정도로 많은 피해자들이 생겼다. 「불순자 가족」들의 주민들은 예외없이 공산독재의 차별대우와 버림을 받으며, 사회 최하층 신분을 가지고 한숨 속에 생존을 이어가고 있다. 북한은 그 옛날 귀족, 양반, 백성의 신분이 제도를 유지하는 데 가장 알맞춤해 보였던 것 같다. 그러니 그 본을 따 현재까지, 「핵심계층」 「동요계층」 「불순계층」을 주민등록에 구분해 놓고 폭압을 펴며 숨을 못쉬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무엇이 北 주민들에게 6·25를 견디게 했는가
6·25 전쟁과 오늘을 생각하면 느끼는 바가 크다.
1945년 광복이 되어 농민들은 사유재산이 인정되고, 자기 땅을 가꾸며 삶의 보람을 찾았다. 또 주민들은 공장은 국유화되었지만 부서진 것을 복구하고 돌려, 자기 財富(재부)를 창조해 쓰는 주인이 되어 보았다.
일제 식민치하에서 맛볼 수 없었던 자기의 것에 대한 열망을 이루어 보았다. 이 자아의식이 북한이 6·25 전쟁을 그만큼이라도 견디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자기 땅을 빼앗고 자기 공장을 빼앗으려 한다니, 기를 쓰고 지키려는 자긍심이 전쟁터에서 발휘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피흘리며 목숨 바쳐 지켜냈던 그 땅, 그 공장, 그 제도가 싸움에 나섰던 북한 백성들의 소유로 되었던가, 결코 아니었다. 온 북한 백성들은 그후 누구 때문에 누구를 위해 싸웠는가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나누어 주었던 땅을 다 빼앗아 거두어 들여서는 국가가 독차지하고 주민들은 집체 농사에 내몰았다. 공장 기업소는 생산물을 자기들이 아니라 국가가 독점하고 빼돌렸다. 財富가 쌓이는 것이 아니라 겨우겨우 생명을 유지하게 나누어주는 식량분배와 간장, 된장밖에 사먹을 수 없는 얇은 노임 봉투가 전부였다. 그렇게 피땀흘려 건설하고 생산한 모든 것은 독재자들의 우상화와 숭배용으로 무더기로 들어갔다.
게다가 있지도 않은 「전쟁위협」을 매일 떠들어대며 맞지도 않는 국방비 지출에 모든 것을 쏟아 넣었다. 주민들이 마치 전쟁하러 태어난 용사들 같다. 어디로 끌고가는지 끌고끌고 가더니, 몇 년 전부터는 드디어 식량난, 경제난이 소용돌이치는 구석에 나라를 끌어다 세웠다.
전쟁에 2백만, 굶주림에 3백만이 쓰러져
전쟁시기에는 2백만명 이하의 인명피해를 보았는데 굶어 죽음에 3백만 명 가량의 인구를 걷어 넣었다. 인구뿐 아니라 자원도 다 걷어넣고 없어 주변국들 보고 달래도 주지 않아 각 지방 시·군마다 가동하던 공장·기업소들이 다 멈추어섰다. 듣자 하니 한국방송에서는 북한의 공장 기업소들이 40~50%밖에 가동 못한다고 소개하였는데 심히 잘못된 誤診(오진)이다.
함경북도 내 회령시, 온성군, 새별군을 들추어봐도 지방공장이 돌아가는 것은 한 개도 없다. 청진시의 큰 제철소나, 제강소, 기계공장, 조선소, 수산사업소도 가동률은 20%도 되지 못한다. 공업의 생명선이라 하는 전기 생산도 하늘 탓에 따라 12개의 수력터빈 중 몇 개만 겨우 돌아간다.
전기가 없으니 열차도 매일 다니던 것을 5일에 한 번씩 가동시키고 주민들 가정에는 거의 전기를 보내지 않아 캄캄 칠흑야밤이다.
다른 소문이나 말은 다 스쳐지나도 밤을 자고나면 온 가족이 굶어죽었다느니, 아빠 엄마 누나 동생 중 누가 누가 죽었다는 소리만은 그저 스쳐 지날 수 없다. 전쟁이 끝나면 쌀밥에 돼지고기국을 먹이고 고래등같이 덩실한 기와집에서 살게 해 준다던 金日成의 약속은 오래 전에 다 깨져버렸다. 전쟁을 견뎌내고 독재를 지켜주었던 그 주민들이 무참히 죽는 것을 북한 당국은 아예 보는 척 마는 척한다.
할 수 없이 주민들은 가정마다 옥수수 한 숟가락씩 모아, 옥수수떡이나마 해놓고 죽은 사람에게 맹물을 따라부어 앞뒤에서 폭탄과 총알이 튀는 속에서도 피하지 않았던 고향땅을 오늘 더는 지킬 수 없어 수십만명의 주민들이 脫北길에 올랐다.
그렇다면 매일 자랑하는 북한의 말대로 「강성대국」인가, 「지상낙원」인가, 「제일 살기 좋은 나라」인가 물어보고 싶지도 않다.
또 북한은 6·25 전쟁을 오늘 다시 바랄 수 있을 것인가, 말하기 전에 물어보고 싶다. 사유재산이 인정돼 제 것이 있었던 북한 주민들이 오늘은 무엇을 바라고 그 전처럼 전쟁마당에 나선단 말인가. 굶어 죽은 부모 형제들의 젯상에 차려놓을 쌀을 한국에서 뺏어보자고 강도들처럼 목숨을 바치려 하겠는가. 뱃가죽이 등 뒤에 붙은 군인들이 판가리하는 씨름 결승전에서 과연 이길 수 있단 말인가. 다 나쁜 놈으로 취급해 놓아 70% 이상의 「불만계층」 주민을 가진 북한 당국은 주민들이 다 제 편이라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북한 주민들은 6·25 전쟁 당시의 그 주민들이 아니며, 너무 때려 멍이 들고 한많은 백성들 무리다. 거대한 용같이 태질하며 트림하는 주변국들에 둘러싸여, 길들이지 못하고 허약해진 우물 안의 개구리들이 요동질했자 마지막 숨만 쉬는 운명밖에 안될 것이다. 헤어 나오려면 오직 하나, 옆에서 요동치는 한국의 손을 붙잡고 같이 나가 쇠약해진 국력을 보강해 한민족을 살리는 길밖에 없다. 이제라도 진정으로 민족을 살리고, 염원을 풀어주려거든 다른 짓 꾀하지 말고 개방, 합작, 통일의 길로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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