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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로(KLO)부대장 崔奎峰옹의「인천상륙작전 秘史」

바래미나 2011. 4. 18. 19:44

켈로(KLO)부대장 崔奎峰옹의「인천상륙작전 秘史」



『八尾島 등대를 먼저 점령, 10만 병력과 함정 261척을 인천으로 인도했다』


 1950년 9월15일, 한국전쟁 승리의 轉機(전기)를 마련한 인천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더불어 세계 戰史(전사)에 길이 남을 작전이었다. 그러나 이 역사적인 상륙작전도 지름 2m, 높이 7.9m의 등대 불빛 하나에 의해 시작됐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1950년 8월 말, 인민군은 거의 모든 전투역량을 부산 교두보 확보를 위해 낙동강 전선에 집중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인민군을 한꺼번에 포위ㆍ격멸하기 위해서는 서울의 敵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상륙작전이 필요하다고 결심하고, 작전명 「블루 하트(Blue Heart)」를 실행에 옮긴다. 맥아더의 美 극동군 사령부는 상륙작전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당시 인민군 수중에 있던 八尾島(팔미도) 등대를 탈환, 點燈(점등)해야만 했다.
 
  인천지역은 潮水(조수), 水路(수로), 暗礁(암초) 등 해안조건에서 상륙작전에 많은 취약점이 있었기 때문에 등대의 안내 없이는 야간 상륙은 엄두도 못 낼 상황이었다.
 
  팔미도는 상륙작전에 나설 미국,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유엔군 함정 261척이 통과해야만 하는 전략적 요충이었다. 沙洲(사주)에 의해 연결된 두 개의 섬이 마치 八(여덟 팔) 자처럼 양쪽으로 뻗어 내린 꼬리 같아 八尾島(팔미도)라 불리는 이 섬은 인천항에서 13.5km 남쪽에 떠 있으며, 면적은 0.076k㎡, 섬의 최고점은 58m였다.
 
  맥아더 사령부는 특공대를 조직해 「팔미도 등대 탈환 작전」에 나서기로 했다. 이 작전에는 KLO부대(Korea Liaison Officeㆍ美 극동사령부 한국 연락사무소)가 투입됐다. KLO부대는 1948년 미국이 對北 정보수집 등을 목표로 만든 특수부대로 통상 「켈로부대」라 불렸다. 켈로부대는 고트, 선, 위스키 등 3개 예하부대로 구성돼 있었으며, 부대마다 1000여 명의 요원들이 각지에서 첩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특공대는 한국인 3명과 미국인 3명 등 모두 6명으로 구성됐다. 유진 클라크 美 해군 대위, 클락 혼 美 육군 소령, 존 포스터 美 육군 중위, 桂仁珠(계인주) 육군 대령, 延禎(연정) 해군 소령, 崔奎峰(최규봉) KLO 고트隊(대) 대장 등 6명이었다.
 
 
  영흥도에서 주민들과 敵情 수집
 
  함경도 원산이 고향인 崔奎峰(최규봉ㆍ80)씨는 팔미도 작전에 참가한 KLO부대원 중 유일한 한국인 생존자다. 그는 기자에게 『9월15일 새벽 2시20분 치열한 전투 끝에 우리 KLO 부대원들이 인천 앞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힘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은 시작됐다』고 말하며 감회에 젖었다.
 
  1950년 8월10일, 당시 켈로부대 고트 부대장으로 대구에서 방어전을 펴고 있던 28세의 청년 崔奎峰에게 극비명령이 하달됐다. 『부산으로 가서 해군 정보함 백구호를 타라』 서북청년단 출신인 崔대장은 1945년 12월부터 이 부대를 이끌고 있었다. 덕적도에 도착할 때까지 이유를 몰라 궁금해하던 崔대장은 美 극동군 사령부 소속 클라크 해군 대위로부터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다」는 귀띔을 받는 순간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崔대장의 작전은 8월18일 밤부터 한 달간 계속됐다. 클라크 해군 대위와 함께 한국 해군함정으로 영흥도에 잠입해 정보수집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崔대장은 이곳 주민들의 협조로 해안감시반을 조직, 인천ㆍ서울지역까지도 敵情(적정)을 파악했다. 이 정보 덕분에 인천에 상륙하는 합동기동부대는 세부적인 정보를 가지고 상륙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영흥도에 올라가니 주민들이 먹을 것이 없어 얼굴에 浮黃(부황)이 나 있었습니다. 클라크 대위에게 우선 민간인들도 먹고 우리도 먹어야 하니 쌀 70가마만 가져다 달라고 했어요. 20시간 만에 부산에서 쌀이 올라왔습니다』
 
  崔대장은 우선 주민들에게 쌀 배급을 시작했다. 쌀 배급을 받은 주민들은 고마웠는지 국군 정보원 역할을 자원하고 나섰다. 이들은 야간에 사진기를 들고 인천도립병원이나 월미도, 아산만 일대에 잠입해 敵情을 살펴 주었다.
 
  崔대장은 하루에도 몇 m씩 높낮이가 바뀌는 인천항의 水深(수심)과 복잡한 섬 사이의 정확한 海圖(해도) 그리기에 한 달여 동안 투입됐다. 맥아더는 상륙지점을 敵이 예측하지 못하도록 원산, 군산 등에 空襲(공습)이나 항공모함을 배치하는 등 교란작전에 한창이었다.
 
  崔대장은 거의 매일 미군 장교와 함께 水深(수심)을 재는 한편, 인민군들이 부설했을지도 모르는 機雷(기뢰)를 찾느라 골몰했다.
 
  『쇠에 줄을 매달아 바다 속에 늘어뜨리면 뻘(개흙)이 줄까지 묻어 올라와요. 그럼 그것으로 미뤄 뻘의 깊이와 수심을 쟀습니다. 그 결과, 9월15일이 50년 만에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적은 날로 파악됐고, 그날을 D데이로 잡은 겁니다』
 
  9월12일경, 미국 소해함 두 척이 월미도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척이 바다를 이리저리 휘저으며 한동안 무엇인가 작업을 하더니 갑자기 기관포를 바다 속으로 발사하기 시작했다.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수십m의 하얀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소해함에 의해 탐지된 機雷(기뢰) 세 발이 폭발한 것이었다. 보름 가까이 기뢰를 옆에 두고 수심 측정 작업을 했던 崔대장은 등줄기가 오싹했다고 한다.
 
 
  3시간 가량 나사못 찾아 헤매
 
  9월10일, 崔대장에게 드디어 팔미도 등대를 확보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날밤 소음총으로 무장한 그와 켈로대원 25명은 영흥도를 떠나 발동선을 타고 들어가 팔미도를 기습했다. 인민군들의 저항이 완강했지만 교전 끝에 인민군 8명 중 5명을 사살하고 등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상륙작전 개시 전까지 5일 동안 崔대장 측과 인민군 사이에는 등대를 뺏고 빼앗기는 전투가 계속됐다.
 
  팔미도 등대를 보니 무슨 연유에서인지 인민군은 이 등대를 전혀 쓰지 못하고 있었다. 조사해 보니 반사경의 전선이 끊어졌을 뿐 등대는 멀쩡하였다. 그들은 東京(도쿄) 유엔군 총사령부에 『필요하다면 등대를 켜 놓겠다』고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등대의 불을 켜라는 명령은 떨어지지 않았다.
 
  D-1일인 14일 오후 7시30분, 崔대장은 「15일 0시40분을 기해 불을 켜라」는 최후명령에 따라 등대 탈환전에 나섰다.
 
  6명의 대원들은 대검, 수류탄 두 발, 권총 등 경무장만 한 채 木船(목선)을 이용해 해안가에 배를 댔다. 배에서 내리는데 바닷물에 발이 빠져 「철벅철벅」하고 소리가 났다. 이날은 어찌된 일인지 인민군들의 저항이 느껴지지 않았다. 인민군 경비병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60m가 채 안 되는 정상까지 기어오르다시피 올랐다. 頂上에 다다랐을까. 막사(등대지기 숙소)에서 경계를 하던 인민군으로 보이는 시커먼 그림자가 등대 뒤에 있는 벼랑 쪽으로 「휙」하고 사라졌다. 곧이어 「첨벙첨벙」 소리가 났다. 소리로 보아 두 명의 인민군이 대원들의 기습에 놀라 바다에 몸을 던진 것이었다.
 
  이때가 9월14일 23시30분, 등대를 점령하였으나 대원들은 등대를 점화시킬 수 없었다. 점등장치의 나사못이 빠져 등대에 불을 붙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원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3시간 가량 나사못을 찾아헤매다 포기하고 기진맥진해 엎드려 있었다. 이때 등대 바닥에서 崔대장의 손에 「선뜻한」 느낌의 금속이 잡혔다. 바로 나사못이었다. 특공대는 드디어 등대의 불을 밝히는 데 성공했고, 아군이 점령했음을 알리기 위해 등대 鐵材(철재) 난간에 星條旗(성조기)를 게양했다.
 
  팔미도의 등대를 애타게 바라보던 연합군 함대의 눈에 불이 훤히 밝혀진 건 정해진 시각보다 1시간40분 늦은 새벽 2시20분. 초조하게 기다리던 맥아더 사령관은 등댓불과 성조기를 확인하자, 연합국 함대에게 인천 앞바다로 진격명령을 내렸다. 이를 신호로 7개국의 연합함대 261척은 등대를 길잡이 삼아 팔미도 해역에 집결했고, 곧바로 인천상륙작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극심한 간만의 差(차) 등 여러 악조건으로 성공 확률이 거의 없다던 이 운명적 작전에 10만 병력과 대함대가 무사히 인천에 상륙할 수 있도록 팔미도 등대가 바닷길을 이끈 것이다. 등대에 환한 불을 밝혔던 한국인 켈로 부대원들과 클라크 대위 등은 작전 성공의 숨은 공로자였다.
 
  한편, 9월14일 팔미도 등대 탈환 작전에 나선 6명의 대원을 제외한 영흥도 잔류 대원 20여 명은 이날 밤 11시경 대부도에 주둔하고 있던 인민군 1개 대대의 습격을 받아 전멸당했다고 한다. 崔대장은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작전에 나섰던 대원들만 살아남았던 것』이라고 했다.
 
 
  『작전에 사용했던 星條旗를 달라』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이들은 9월15일 오전 10시경 발동선을 이용해 지휘함인 마운트 맥킨리艦으로 갔다. 윌러비 정보국장(소장)이 붉은 紬緞(주단)이 깔린 40~50평의 맥아더 방으로 대원들을 안내했다. 일렬로 늘어선 대원들은 맥아더에게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쳤음을 신고했다. 맥아더는 『정말 수고가 많았다』는 말로 악수를 대신했다.
 
  『방은 아무런 장식도 없었고 피아노와 책상, 소파가 전부였습니다. 깔끔?舊嗤? 호화스럽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윌러비 국장은 특공대원들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崔대장은 『작전에 사용한 성조기를 달라』고 했다. 윌러비 국장은 즉답을 피하고 맥아더 방에 들어가 뭔가를 숙의한 후 『오케이!』라고 허락했다. 이 특공대들 6명 중, 5명에게는 美 은성 무공훈장이 수여되었고, 崔대장에게는 등대에 게양했던 星條旗가 포상으로 주어졌다. 桂仁珠 대령과 延禎 소령은 원대복귀 명령이 내려졌다.
 
  클라크 대위를 비롯해 특공대원들은 비상식량(레이션)을 받고 이날 오후 인천에 들어갔다. 해병대에서 지프를 지원받아 인천시내를 한 바퀴 순찰하고 다시 월미도 해안가로 나온 시각은 오후 3시30분경. 갑자기 클라크 대위가 崔대장의 옆구리를 쩔렀다. 대형 상륙주정(LCVP) 세 대가 해안에 다가오더니 그중 한 대가 월미도 해안에 接岸(접안)하고 艦首(함수)부분에 있는 램프(Ramp)를 열었다.
 
  까만 선글라스에 파이프를 손에 든 장군, 맥아더였다. 개펄에 서너 발자욱을 내딛은 그는 곧바로 대기 중인 지프에 올라 현장을 떠났다. 그는 발목까지 젖은 군복을 털고 펄이 달라붙은 단화를 지프 앞좌석 오른편에 있는 지지대에 걸쳤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은 소문과는 달리 요란하지 않았고 조용했다. 상륙 당시 그의 주변에는 열댓 명 정도의 참모와 병사, 그리고 軍 전속 사진사들뿐이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의 부관이 맥아더 주변에 다가오는 키 큰 미군들을 사정없이 발로 걷어차고 키 작은 미군들만 들여보내더라는 것이었다.
 
  『맥아더의 키가 175cm 정도로 예상보다 작은 데 놀랐습니다. 사진사들이 먼저 대기하고 있다가 해변에 누워서 맥아더를 향해 사진을 찍더군요. 화려한 멋쟁이 맥아더가 키 크고 멋진 모습으로 나오려고 연출한 것 같았어요』
 
 
  星條旗 받고 눈시울 붉힌 맥아더
 
  휴전 이후, 崔대장은 「팔미도 성조기」를 팔라는 요청에 시달리기도 했다. 미국인 기자 두 명이 찾아와 10만 달러를 줄 테니 팔라고 했다는 것. 주한 美대사관 측에서도 崔대장이 성조기를 아이젠하워 행정부에 기증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고, 만약 맥아더 측에 전달한다면 훈장을 주지 않을 것이란 말까지 했다고 한다. 이 와중에 그는 美대사관 측에 의해 반도호텔에 감금돼 조사를 받기도 했다.
 
  『美대사관에서도 美 육군성에 「팔미도 성조기」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팔미도 성조기」를 갖고 있다고 하니까 성조기의 眞僞(진위)를 가리려고 했어요. 밤샘 조사를 하더니 새벽 무렵 대사관 직원이 본부의 연락을 받고는 「미안하다」며 정중히 사과를 하는 거예요. 알고 보니 제가 소장하고 있는 성조기 밑에 당시 팔미도 등대 탈환 작전의 작전명령 번호가 있었다는 겁니다. 대사관에서 본국에 확인해 보고 眞品이라는 것을 확인했던 거죠』
 
  崔대장은 野人(야인)이었던 맥아더에게 성조기를 전달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우리나라를 살린 이는 맥아더인데 아이젠하워에게 성조기를 줄 이유가 없었습니다』
 
  팔미도 성조기는 1955년 崔奎峰 대장의 기증으로 맥아더에게 전달됐다. 맥아더는 崔대장이 보낸 성조기를 받아들고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성조기는 현재 미국 버지니아州 노포크市에 있는 맥아더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맥아더는 이때의 감격을 1956년 崔대장에게 보낸 사진과 편지를 통해 『당신이 전우로서 인천상륙작전에서 보여 준 용감한 기백을 잊지 못한다』고 표현했다. 崔대장이 받은 맥아더 장군의 사진과 감사장은 인천 송도에 있는 인천상륙작전기념관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등에 전시돼 있다.
 
  켈로대원들은 6ㆍ25 남침 53주년을 맞아 팔미도 등대가 간직한 역사적 의의와 특공대원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99년 9월14일 팔미도 등대 옆에 「팔미도 등대 탈환 기념비」를 세워 이를 기념하고 있다.
 
  「8240 KLO전우회」는 미군 24군단 정보부대 출신들의 모임이다. 崔奎峰(최규봉) 회장, 李昌健(이창건ㆍ국제원자력학회 회장) 부회장, 李光杓(이광표ㆍ前 문화공보부 장관) 부회장, 崔弼立(최필립ㆍ前 리비아 대사) 부회장 등 400여 명 정도인데 대부분 일흔이 넘었다.
 
  한국전쟁 당시 군번도 계급도 없이 敵地(적지)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다 숨져 간 유격대원 1500位(위)에 대한 위패가 1996년 5월15일 대전 국립묘지 현충탑에 봉안되기도 했다.
 
  국방부는 1993년 초 켈로부대의 존재를 인정해 지휘관급 150여 명에게 정식 군번을 부여했다고 한다. 『목숨을 내놓고 고생했는데 명예라도 남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崔대장은 말한다.●


출처 : 월간조선 2003년 0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