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육사 출신의 대한민국 참모총장
채병덕(蔡秉德 1915~1950)
정해구(반민족문제연구소 연구원, 경희대 강사)
채병덕
일본 육사의 조선인 생도
일본군 소좌에서 국방경비대 정위로
군으로 피신한 친일파를 보호
김석원과의 갈등
패전 책임
하동 고개의 죽음
참고문헌
채병덕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시 일본군 소좌(소령)에 올랐고, 1948년에는 34세의 젊은 나이로 참모총장의 자리까지 올라섰던 채병덕, 그러나 그는 곧 이어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해 패전의 책임을 면치 못한 채 부산 방어의 최전선에서 함정에 걸려 인민군의 총격을 받아 사망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6세였으니 길지 않은 인생이었다.
그럼에도 일본 육사 출신으로서 신생 대한민국의 참모총장이 되었던 그의 경력은 우리 역사의 전도(顚倒)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친일의 혐의를 벗기 어려웠을 일본 육사 출신 장교인 그가 해방 직후 단기간 내에 신생 대한민국 군의 참모총장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일본 육사의 조선인 생도
채병덕은 1915년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종로보통학교를 거쳐 평양중학교를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2년 겨울, 평양중학교 4학년이던 채병덕은 일본 육사에 합격하였다. 나중에 채병덕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던 이종찬(李鐘贊) 역시 경성중학교 4학년생으로서 그때 채병덕과 함께 일본 육사에 합격하였다. 당시에 중학교는 5년제였으나 일본 육사는 4학년 학기를 마치면 입학 자격을 부여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이에 응시할 수가 있었다.
1933년 4월 채병덕은 일본 육사에 입학하게 된다. 사실 조선인의 일본 육사 입학은 1912년 신태영(申泰英), 이응준(李應俊) 등이 제26기, 1913년 김석원(金錫源) 등의 제27기 이후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조선인들의 배일 감정이 높았고, 일본인들도 조선인의 일본 육사 입학에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경제 공황의 여파로 조선에서 최고 학부를 나온 사람도 직장을 구하기가 어려웠고, 일본인들 역시 1932년경부터 중학교에 나와 있는 배속장교를 통해 조선인의 일본 육사 입학을 권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채병덕과 이종찬 두 사람의 일본 육사 입학은 거의 2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채병덕은 2학년 때 포병(重砲, <砲兵>)과에, 이종찬은 공병(工兵)과에 배치되었다. 이후 일본 육사에 입학했던 조선인 학생들은 그 영향을 받아 기술 계통의 병과에 다수 지원하였다. 1935년 3월 채병덕은 2년간의 예과 생활을 마치고 사관후보생으로 6개월간 부대 생활을 하게 되었다. 배치된 부대는 규수(九州), 사세보(佐世保) 중포 연대였다. 그곳에서 6개월간의 부대 생활을 마친 그는 10월 본과 과정에 들어갔고 1937년 6월 29일에는 제49기생으로 일본 육사를 졸업하게 된다. 졸업 후 채병덕은 사세보 군항을 지키는 중포 장교로 배치되었다.
1939년과 그 이듬해에는 동경 육군포공학교에서 공부한 후 탁월한 성적을 인정받아 육군 병기학교 교관으로 발탁되었다. 얼마 후 그는 오사카(大阪) 조병창에서 근무하다가, 1944년 소좌(소령)로 승진하여 부평에 신설된 인천조병창 제1공장 책임자로 전임되어 한국에 돌아왔다.
그가 일본 육사에 입학했던 1933년 이후 일본 육사에 입학한 조선인들은 친목 단체로 계림회(鷄林會)를 만들었다. 당시 일본인 생도들은 일요일마다 자신의 출신 현의 모임인 현인회(縣人會)에 나갔는데, 이에 조선인 학생들 역시 일요하숙집을 정하고 그 모임 이름을 계림회라 정했던 것이다. 당시 교육총감부에 근무하고 있던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중좌는 계림회의 일요하숙 비용을 부담하기도 했다. 이 모임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는데, 그 회원은 72명에 이르렀다. 이 숫자는 일본 육사에 유학한 총인원에 절반에 해당한다. 이종찬(李鍾贊), 이용문(李龍文), 김정렬(金貞烈), 유재흥(劉載興), 정일권(丁一權), 이형근(李亨根), 박정희(朴正熙), 이한림(李翰林), 정래혁(丁來赫), 장창국(張昌國), 강문봉(姜文奉) 등 우리가 이름만 들어도 익히 알 수 있는 사람들이 계림회 회원들이었다.
일본군 소좌에서 국방경비대 정위로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일본군에 참여했던 조선인들은 일본군복을 벗게 되었다. 객관적 기준이나 당시의 분위기로 보아 적어도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는 친일의 혐의를 벗기 어려웠고, 따라서 민족적인 양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스스로 근신해야 될 입장이었다. 그러나 자숙하는 의미에서 1949년에야 다시 군에 참여하는 이종찬을 제외하고는 근신하는 태도를 취했던 친일 장교들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기민하게 움직이던 그들은 재빨리 다가온 재기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에 위협을 느낀 미군정이 서둘러 창설했던 국방경비대에 참여했던 것이다. 즉 반공의 이름으로 친일파들은 면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미군정과 결탁하여 군 내부의 요직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45년 11월 13일 미군정은 국방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내부에 군사국을 설치했다. 2월 말경에는 '뱀부 계획(Bamboo Plan)'에 따라 국방경비대를 설치하기로 했다. 채병덕을 비롯한 계림회 회원들은 미군정의 이러한 계획에 따라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하게 된다. 대다수의 일본군 출신 장교들은 국방경비대 창설 초기에 군에 들어갔고, 이때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1948년 8월 국방경비대가 대한민국 국군으로 개편될 때 군에 들어갔다.
우선 미군정은 간부 요원과 통역관을 양성하기 위해 12월 5일 군사 영어학교를 개교했는데, 이 학교는 1946년 4월 30일 폐교할 때까지 110명의 장교를 배출시켰다. 그러나 110명의 임관자들 중에는 전직 장교로서 특채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전직 장교들은 군사국 고문인 이응준과 군사영어학교 부교장으로 있던 원용덕(元容德)이 추천했다. 주로 일본군 출신은 이응준이, 만주국 출신은 원용덕이 그 추천을 맡았다. 1946년 1월 16일 이들은 전직 경력을 감안, 새로운 계급을 부여받았다. 채병덕은 이때 이형근, 유재흥, 정일권 등과 더불어 정위(正尉;대위) 계급을 부여받았다. 이로써 전직 일본군 소좌 채병덕은 국방경비대 정위로 다시 군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국방경비대는 1946년 1월 15일 당시 경기도 태릉에서 제1연대가 창설된 것을 필두로 각 도마다 조직되었다. 채병덕은 태릉에 있는 제1연대 A중대장으로 부임했다. 2월 8일 제1연대가 대대편성을 완료했을 때 채병덕은 정위에서 참령(소령)으로 진급, 제1대대장에 보직되었다. 그 다음날 일본군 대좌(대령)였던 원용덕이 곧장 정령(대령)으로 임관된 것을 제외한다면, 그는 국방경비대의 최초의 영관(領冠)급 진급자인 셈이다.
그러나 연대 창설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듯하다. 우선 사병들이 하루에도 10여 명씩이나 도망갔고 따라서 소대장들이 매일 거리에 나가 모병을 해서 모자라는 숫자를 채워야 했다. 또한 미 고문관의 간섭과 전횡도 심했다. 몸이 뚱뚱한 채병덕이 여름날 더위를 견디지 못해 사무실에서 팬티만 걸치고 있다가 미 고문관에게 들켜 '비신사적 행위'로 지적되어 징계를 받을 뻔한 일도 있었다 한다.
1946년 5월 23일 제1연대에서 대규모의 하극상 사건이 발생했다. 각 중대의 사병들이 장교들을 배척하고자 하는 대대적인 하극상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문제의 발단은 영등포 보급중대에서 20만 족의 양말이 들어 있는 2개 차량의 보급품을 부정 처분해 먹은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를 계기로, 간부 요원으로 모집된 대원들의 진급 불만, 배척, 우익계 장교에 대한 배척 등등 그 동안 누적되었던 온갖 불만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채병덕 대대장은 이 사건의 감독 책임을 지고 통위부 특별부대 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이 특별부대는 이후 보급, 차량, 병기, 창고 등 각 중대를 통할하는 부대로 후에 후방사령부로 개칭되었다. 그후 채병덕은 통위부 병기부장을 거쳐 1948년 4월 26일 새로이 신설된 제4여단장에 부임하였다.
군으로 피신한 친일파를 보호
1948년 8월 16일 채병덕은 제4여단장에서 일약 국방부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이렇게 젊은 나이로 그가 참모총장의 지위에 올라갈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다. 한 기록은 그가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48년 8월 1일 국회로부터 총리 인준을 받은 철기 이범석(鐵驥 李範奭)이 국방장관을 겸하게 되자 철기는 참모총장 인선에 착수하게 되었다. 이범석은 우선 이종찬에게 국방장관을 맡아 달라고 부탁했으나 이종찬은 이를 거절하고 "일부 민족 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있는 채병덕을 시키면 어떻겠느냐?"며 채병덕을 추천했다(《참군인 이종찬 장군》, 30쪽)
또한 그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군의 정상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 때문이었다며 다음과 같은 일화도 언급되고 있다.
미 대사관 관리들과 미 장성들이 "한국에서 제일 뚱뚱하고 둔해 보이는 장성을 하필이면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했는가?"고 의문을 제기하면,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나의 채 장군은 날씬한 장군이 못 가진 기민성을 갖고 있어요 전문적인 군사 지식은 물론 우리나라에 무슨 무기가 필요한가를 잘 알고 있는, 경험으로 뭉쳐진 장군이야. 또 미남 장군들의 시원스런 큰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채 장군의 졸리는 듯한 눈은 꿰뚫어 본단 말이야!(위의 책, 30~40쪽)"
여하튼 그가 선배들을 제치고 젊은 나이로 참모총장이 되었다는 점은 그가 매우 정치적으로 민감했고 권력 핵심으로부터 지원 받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특히 그의 뒤에는 이범석의 강력한 지원이 있었다.
그가 참모총장으로 재임할 당시 국회에서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되고 점차 본격화되었다. 그 가운데 일제 출신의 경찰이 가장 많이 남아 있던 경찰 내부에 동요가 일었고 그들 중 일부가 군의 헌병대로 피신했다. 반민특위가 차마 군은 건드리지 못할 것이란 예상 때문이었다. 2관구청장을 지낸 이익흥(李益興)과, 서울 시내 서장급 간부들인 윤우경(尹宇景), 김정채(金貞彩), 전봉덕(田鳳德) 등이 바로 그들이다. 당시 원용덕 헌병 사령관은 이들을 모두 영관급으로 받아들였다.
한번은 채병덕의 사무실에 반민특위 소속의 김명동(金明東), 김상돈(金相敦) 등의 소장의원들이 몰려와
"군이 친일부역배들의 대피호가 될 수 있소?"하며 따졌다. 채병덕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아니, 군에서 필요해서 불러들인 인재를 골라가며 친일파로 몰아세우는 이유가 뭡니까? 전봉덕, 이익홍 씨 등이 친일파라는 증거 좀 봅시다"하며 언성을 높였다.
당시 상황은 이러한 군 수뇌부도 갈아치워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원용덕, 정일권 등 군 수뇌부도 모두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정부측에 전달함으로써, 군을 정치에서 독립시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이때 일제 출신의 경찰을 받아들인 헌병대는 이후 점차 정치에 깊이 개입하게 된다. 1949년 5월 9일 국방부 참모총장으로 있던 그는 육군 총참모장이 되었다.
김석원과의 갈등
1947년 5월 22일 미소 군정 당국의 합의에 의해 시작된 남북간의 물자 교류는 1949년 3월 31일까지 약 2년 동안 이루어졌다. 남에서 북으로 가는 물자는 의약품, 전기 제품, 생고무, 면직물, 자동차 부품 등이었고 북에서 남으로 오는 물자는 명태, 오징어, 카바이드 등이었다. 교역은 38선상의 토성(土城), 대원리(大院里), 양문리(梁文里) 등에서 물물교역 형태로 이루어졌다. 남북 교역은 막대한 이득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에 육군 본보의 교역증을 얻는 것은 그 자체가 커다란 이권이 되었다. 1949년 1월, 제1사단장에 부임한 김석원 대령은 북으로 올라가는 물자가 북한의 전력을 증가시킴으로써 적을 이롭게 한다는 생각에서 자신의 관할구역 내의 남북 교역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북에서 보낸 20여 차 분의 명태를 압수했다. 그러던 중 1949년 5월 3일 개성 부근의 송악산에서 남북간에 대대급까지 투입되는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로 남측은 대대장을 비롯하여 39명의 전사자가 발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른바 송악산 5ㆍ4전투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석원은 압수된 명태를 예하 장병들의 부식으로 사용하는 한편, 일부는 남대문 시장에 내다 팔아 그 수입으로 음료수, 과일, 과자 등을 구입하였고, 일부는 전투 지원으로 동원된 주민들에게 그 보수로 나누어주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는 사이에 명태를 압수당한 물건 주인은 여기 저기 요로에 진정하게 되었다. 이에 채병덕은 조사단을 파견하여 압수 물자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 줄 것을 요구했으나 김석원은 이를 거부했다. 그 과정에서 채병덕은 김석원이 불법으로 물자를 압수, 처분하였다고 주장했던 반면, 김석원은 채병덕이 이적 행위가 되는 남북 교역을 통해 이득을 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두 사람 모두 일본 육사 출신으로서 김석원이 20여 년의 차가 나는 대선배였지만 당시의 지위는 정반대였기 때문에 여기에는 양자의 자존심도 작용하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사이의 갈등은 나중에 경무대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9월 어느 날, 이승만 대통령은 신성모(申性模) 국방장관, 채병덕 총참모장, 김석원 사단장(당시 계급은 사단장이었다)을 경무대로 불러 화해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김석원이 여전히 반발하는 바람에 화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이 대통령은 10월 두 사람의 군복을 벗겼다.
이로써 해방 후 군에 들어와 군의 최고 지위에 까지 올라갔던 채병덕은 일시 군복을 벗게 되었다. 그러나 채병덕은 얼마 후 다시 현역으로 복귀, 병기행정본부장을 거쳐 1950년 4월 말 다시 육군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
패전 책임
한국전쟁 발발을 전후한 시기에 총참모장으로 있었던 채병덕은 전쟁 초기의 패전과 관련, 여러 가지 점에서 그 책임론이 거론되고 있다.
우선 전쟁 발발에 대한 지나치게 난관하고 있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이를테면 《한국전쟁사》1은 한국전쟁 직전인 6월 10일로 취해진 일선 사단장들의 인사 이동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점을 제기하고 있다. 위기를 앞두고 일선 지휘관들을 교체했다는 것이다. 또한 전쟁 발발 전날인 6월 24일 육군 정보국은 북한의 남침 징후를 보고했으나, 채병덕은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한 25일에도 그는 사태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북한군의 공격이 전면 공격이라는 사실도 오전 10시경이 되어서야 파악하게 되었고, 같은 날 오후에 열린 국무회의에서도 북한이 노리는 점이 이주하(李周河)와 김상룡(金三龍)의 석방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전쟁 발발 직후 서울 사수를 고집하며 의정부 방면에서 꾀했던 채병덕의 반격 시도가 논란이 되고 있다. 26일과 27일 채병덕은 서울 사수를 위해 의정부에서 군을 투입, 반격을 꾀했다. 그러나 병력이 집중적이지 못하고 분할적으로 투입되는 가운데 의정부 반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것은 전쟁의 초기 패인의 한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형근과 같은 일부 군 인사들은 인민군의 기습을 받아 일단 방어선이 무너진 현실을 감안, 한강이라는 천연의 장애물을 이용하여 한강 이남에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어야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마지막 지적되는 문제는 한강교 폭파 문제였다. 29일 새벽 2시 반경 한강교가 폭파되었다. 그와 동시에 다리 위에 있던 수십 대의 차량이 폭파되었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폭사했다. 이로 인해 많은 병력과 장비가 후퇴하지 못했고 시민들이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해 인민군 치하에 남게 되었다. 한강교 조기 폭파 여부는 이후에 문제가 되었다. 당시의 전황으로 볼 때 6~8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강교를 조기 폭파한 것이 아니냐는 혐의 때문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공병감 최창식(崔昌植) 대령이 '적전비행죄'로 사형 당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최 대령은 명령만은 집행했을 뿐 누가 조기 폭파를 명령했는가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거기에 대해서는 채 총장이 지시를 내렸다는 주장이 설득력있게 제기되고 있다.
요컨대, 갑작스런 전쟁 발발로 인해 채병덕 총장은 며칠을 뜬 눈으로 새우면서 이에 극력 대처했지만, 최고 지휘자로서 적절한 역할을 제대로 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급박하고 혼란스러운 상황 자체가 정상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도록 한 것도 사실이지만, 아마도 그렇게 된 데에는 병기장교 출신으로서 전투 경험이 없었던 점도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6월 30일 그는 총참모장직에서 경질되어 하루아침에 '경남지구 편성군 사령관'이라는 보잘것없는 직책으로 전보되었다.
하동 고개의 죽음
7월 23일 채병덕은 신성모 국방장관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는다.
귀하는 서울을 잃고 중대한 패전을 당했다. 책임은 중하고 크다. 그런데 지금 적은 전남에서 경남으로 지향하고 있다. 이 적을 막지 않으면 전 전선이 붕괴될 것이다. 귀하는 패주중인 소재 부대를 지휘해서 적을 격퇴하라. 귀하는 서두에 서서 독전(督戰)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죽어서 잘못을 사죄하라는 힐문장(詰問狀)과 같은 편지였다. 패전의 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그는 이 편지를 보고 비장한 생각을 했던 듯하다. 이러한 생각에서 그는 막 태어난 막내아들의 이름을 영웅(英雄)의 '英'자와 38선 이북으로의 진격(進擊)의 '進'자를 따서 '영진(英進)'이라 지었다.
여하튼 다시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잇게 된 그는 고무되어 있었다. 전라도에서 분전중인 여러 부대와 부산 지구에 산재해 있는 장병들을 지휘해서 동으로 진출중인 적을 막으라는 지시를 받은 그는 부산, 마산의 병원을 돌며 경상 환자들과 현지 청년들을 소집하여 개 대대를 편성했다. 그러나 이들이 지닌 무기는 고작 소총뿐이었다. 그때 이미 방호산(方虎山)이 지휘하는 인민군 6사단은 이미 호남을 휩쓸고 경남을 향하고 있었다. 자신이 편성한 부대를 진주에 배치시킨 그는 마침 하동으로 진출하는 미 제29연대 3대대와 동행하기를 원했다. 채병덕의 이러한 바람은 그가 못토 대대장의 '고문'으로 길 안내와 통역을 하는 조건으로 허락받을 수 있었다.
7월 27일 아침, 3대대는 하동 고개와 그 양쪽 고개를 점령했다. 그러나 인민군 6사단은 이미 하동을 점령하고 하동 고개 주변에 그 주력을 포진시킨 채 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민군의 매복 작전에 걸려든 것이다. 오전 9시 30분경, 3대대 앞 약 500m전방에서 150여명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국군과 미군 작업복을 입고 있던 이들은 아군과 잘 식별되지 않았다. 이들이 약 100m 앞까지 전진했을 때 채병덕이 소리쳤다. "적이가, 아군이가?" 그 말과 동시에 주위 고지로부터 박격포, 기관총, 소총이 일제히 발사되었다. 턱에서 머리를 관통당한 채병덕은 '한 줄기 굵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즉사한 거시다. 당시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패트(fat) 채', 이것이 그의 별명이었다. 신장 167cm에 110kg이나 나가는 뚱뚱한 몸매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그가 유능했다고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그가 남겨 놓은 이미지는 뚱뚱한 몸매에 정치에 관심이 많았고 정치성이 두드러진 장군이었다는 점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정다감하고 솔직하고 포용력있는 성격도 거론된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중요하게 판단할 것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채병덕이 아니라, 그를 통하여 반영되고 있는 그 시대의 역설적인 역사이다. 일본군 소좌까지 지냈던 사람이 해방된 지 몇 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동안에―――그것도 정치적인 후원에 의해 군의 최고 지위인 참모총장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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