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명예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
베트남전쟁이 점차 확대되고 있던 1965년 11월, 탐키(Tam Ky)지역에서 작전중이던 미해병들에게 사령부로부터 즉시 퇴각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철수를 시작한 그들이 날아온 헬리콥터에 급히 올라타고 다낭(Da Nang)의 해병기지로 돌아가는 도중 갑자기 긴급통신이 들어왔다. 조종사는 위험에 빠져있는 해병소대와 무선접촉을 시도했다. 미군 헬리콥터 한 대가 적의 대공사격에 맞아 추락해버렸고, 적에게 포위되어 궁지에 몰린 해병들이 공격을 받으면서도 무전기를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철수중이던 그들은 방향을 돌려 추락한 헬리콥터 가까이 착륙했다. 총탄이 빗발치듯 날리는 속에서 적과 사투를 벌이고 있던 해병들은 한 조가 물러서면 다른 조가 엄호사격을 해주며 빠르게 후퇴에 들어갔다. 엄호사격조가 물러날 때면 먼저 퇴각한 조가 다시 그들을 엄호하면서 헬리콥터로 뛰어올라 계속 탑승했다. 그러자 마침내 헬리콥터 조종사가 다급하게 소릴 질렀다.
“모두 다 탈수는 없다!”
어떤 헬리콥터건 수송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해병들을 지휘하던 대위는 조종사에게 못을 박듯 단호하게 말했다.
“우린 전우를 두고 가지 않는다. 모두 다 가지 않으면, 모두 다 남는다!”
게릴라부대인 수많은 베트콩(Viet Cong)들이 빠른 속도로 접근하며 총탄을 퍼부어 대고, 박격포에서 쏜 포탄이 주위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18명 정원에 무장한 병력이 24명이나 타 한계중량을 초과한 헬리콥터는 날아오르지 못한 채 회전날개인 로터만 부서질 것처럼 돌아갔다. 대위의 단호함에 설득당한 조종사는 별 수 없이 최대동력을 얻어내 초과한 무게를 상쇄시키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았다. 이륙하지 못한 헬리콥터는 들판 위를 이리저리 빙빙 돌기만 했다. 20여 명의 목숨이 오로지 자기 손에 달렸다는 생각에 조종사의 얼굴은 처참할 만큼 일그러졌다. 적의 시야에 완전히 노출된 채 떠있는 헬리콥터를 대공포화로부터 피하기 위해 지그재그로 움직이던 조종사는 마침내 간신히 공중으로 띄어 올릴 수 있었다. 그들은 다행히도 다낭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런 행운이 늘 따르는 것은 아니다. `라이프'의 종군사진기자 래리 버로즈가 촬영한 유명한 사진 한 장이 있다. 작전비행을 나갔다가 다낭으로 돌아온 해병 헬리콥터 기장이 부상자들을 내려놓고는 탄약상자에 쓰러지듯 엎드려 통곡하고 있는 모습이다.
해병 장교인 기장은 다른 병사들을 더 구출하지 못한 것을 비관하며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10초만 더 현장에 머물러 있었더라면 그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베트남전쟁에서 헬리콥터 조종사들은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용기가 있었고, 그들이 목숨을 거는 만큼 더 많은 생명을 구해낼 수 있었다. 따라서 헬리콥터 조종사들의 전사 비율은 아주 높았다.
해병대는 최고를 원한다
해병들은 희생을 치르더라도 전우를 적지에 남기지 않는다. 그들은 전쟁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적진으로 뛰어드는 첨병이며, 따라서 해병들에게는 후방이 있을 수 없다. 해병들이 물러난다는 것은 바닷속으로 빠지는 일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유에스 머린 코어(US Marine Corps/USMC)로 불리는 미해병대는 미국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군대다. 전세계 모든 미대사관은 해병들이 경비를 맡고 있으며, 미국 대통령 전용 헬리콥터인 해병 1호기, 머린 원(Marine one)은 조종사도 승무원도 모두 해병대원이다. 해병들에게는 그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내려오는 전통이 담긴 한마디가 있다.
`Once Marine Always Marine.'
한번 해병이면 영원히 해병의 명예와 자부심을 결코 잊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미해병대에는 그들의 좌우명이 있다.
`Death Before Dishonor.'
`불명예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뜻으로, 해병들은 스스로의 명예가 더럽혀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해병은 무었보다 최고를 원한다. 따라서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미해병이 되려면 해병신병교육대(MCRD)에서 지옥의 11주를 견뎌내야만 한다. 훈련병들에게 왜 해병에 지원했느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터져나오는 말이 있다.
“The Marine is best!”
해병은 최고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최고가 되려고 해병대에 지원한 것이다. 수년 전 서울에서 백화점 하나가 무너졌을 때, 그 밑에 깔렸다가 정신력 하나로 끝까지 버티었던 청년이 나중 해병으로 지원해 입대하는 모습은 당당해서 보기가 좋았다. 할 수만 있으면 군대를 피하기 위해 비겁자의 길이라도 사양하지 않으려는 철없는 부류와는 너무 달랐던 것이다. 할아버지가 된 나이에도 아직 인기있는 디스크 자키 이종환씨가 라디오에서, 두 아들을 모두 육군에 보냈다가 한 달 간격을 두고 병장으로 막 전역시킨 한 어머니의 얘기를 전화로 듣다 농담을 했다. “그, 돈 좀 쓰시잖고서…” 그렇다, 검은 돈으로 자랑스러운 명예까지 살수야 없지 않는가.
해병대원이 되고 싶었던 밥퍼 목사
청룡부대 포병대에 소속된 한 해병대원이 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미국으로 유학을 간 그는 인격형성에서 아주 중요한 시기를 문화가 전혀 다른 곳에서 살았다. 집단보다는 개인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산 것이다. 6년여의 유학생활을 하고 있던 1996년 11월, 오하이오 주립대학 2학년생으로 항공우주학을 전공하던 그는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넌 한국남자다. 국방의 의무를 감당해야 할 때가 됐으니, 휴학계를 내고 들어와라.”
숱한 유학생들이 병역을 피하려고 이리저리 불법을 동원하는 모습은 주위에서 무수하게 보아왔다. 하지만 그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곧바로 귀국한 그는 이듬해 해병대에 지원했다.
“해병이 된 이유는 강한 남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자기가 비겁자가 아니라는 건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인 셈이다. 조국의 군대가 필요로 하고, 조국의 미래가 필요로 하는 남자는 바로 이런 남자일 것이다. 이 같은 적극적인 자세는 막연히 흐름에 끌려 다니기보다 대체로 주위를 끌고 가는 편이다. 이끌고 가는 것과 이끌려 가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난다. 그도 이젠 전역해 오하이오로 돌아갔지만, 한국 해병의 붉은 명찰을 달았던 기억은 조원채 병장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미해병대 만큼이나 한국 해병대도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용기와 명예로운 전통을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밥퍼 목사'로 통하는 다일공동체의 최일도 목사는 부친이 일찍 돌아가셨다는 이유에서 방위로 소집되었다. 그러나 그는 남자가 그럴 순 없다며 해병대에 지원했다. 하지만 홀어머니는 결사적인 반대를 했고, 그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지금도 아쉬워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현역 출신인 젊은 부목사들이 자기를 이따금 `방위 목사'라 놀리면 속상한다고, 농담처럼 진담처럼 얘기한다.
미해군 상륙강습함, 타라와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패리스 아일랜드에 있는 미해병 신병교육대는 교관들의 교육과 PT(physical training)가 아주 혹독하기로 소문나있다. 이곳의 수중적응훈련은 45kg의 완전중무장을 하고 정해진 코스를 헤엄쳐 건너야 한다. 45kg이면 쌀 반 가마가 넘는 무게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풀 메틀 재킷(Full Metal Jacket)에서는 베트남전쟁에 파병하기 위해 평생 총도 잡아보지 못한 소심한 청년들을 강인한 해병으로 만들어가는 장면이 아주 리얼하게 그려지고 있다. 쌍소리와 구타를 밥먹듯이 해대는 아주 지독한 훈련교관을 통해 킬링 머신이 되어 가는 것이다. 전쟁터에서는 내가 적을 죽이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자신의 날카롭고 민첩한 판단에 따라 적을 먼저 발견하고 먼저 쏘아야 한다. 그것이 살아남는 방법이다. `풀 메틀 재킷'이란 몸체가 구리로 만들어진 총알의 탄두를 가리킨다.
미해병대에는 세 가지 전투조직이 있다. 가장 최소의 작전부대는 MEU(Marine Expeditionary Unit)라고 불리는 해병원정대다. 해병원정대는 가장 순발력이 뛰어난 부대이며, 주로 한정적인 위기에 대응하거나 지원이 필요없는 단기작전에 신속하게 동원된다. 따라서 해병원정대는 해상의 항공모함이나 상륙강습함에 전진배치되어 있고, 아군 구조작전에 가장 자주 투입되는 부대이며 대령이 지휘를 맡는다. 해상근무를 하는 해병들은 한 달이나 두 달은 기본이고, 작전이 시작되면 6개월씩도 가족 곁을 떠나있어야 한다. 이 때문에 해병들은 오랫동안 집을 비워야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말한다. 미해병대의 그 다음 조직은 해병원정여단인 MEB(Marine Expeditionary Brigade)다. 해병원정여단은 저강도와 고강도 전투부대로 편성되어 있으며, 장기간 해상에 주둔할 수 있는 부대다. 미해병대 최대의 규모는 해병원정군인 MEF(Marine Expeditionary)다. 해병원정군은 여러 강도의 전쟁을 수행한다. 말하자면 지리적인 환경을 초월해 광범위한 작전으로 적을 타격하는 미해병대 최대의 정예부대다.
1991년 걸프전에 참전한 해병들이 바로 제1해병원정군(1st MEF) 소속의 제1해병사단과 제2해병사단이었다. 미해군의 4만 톤급인 거대한 상륙강습함 타라와(USS Tarawa)호에는 해병원정대 1개 대대인 1,900명의 병력이 늘 타고 있다. 그들과 함께 실려있는 전투장비는, 전차 20대와 장갑차 60대, 트럭과 지프 60대, 그리고 155mm 곡사포 10문에다 2백 톤짜리 상륙주정이 4대나 된다. 이들은 언제든 명령만 떨어지면 즉각 상륙작전을 전개하며 전투에 돌입한다. 타라와호에는 항공모함처럼 비행갑판이 있고, 해병대 전용인 수직이착륙의 AV-8 해리어 전투기 6대와 공격용 헬리콥터인 4대의 시-코브라를 포함해 모두 22대의 헬리콥터를 탑재하고 있다. 전투기와 공격용 무장헬리콥터는 타격대 역할을 맡아 상륙부대가 해안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공중에서 엄호를 한다. 그런 만큼 1944년 6월 6일, 프랑스 노르망디의 오마하 해안에 상륙하던 미군들이 1분에 1,200발을 발사하는 독일군의 강력한 기관총 MG-42에 수없이 희생당하던 비극이 쉽게 재연되지는 않을 것 같다.
해병에게 패전이란 있을 수 없다
해병대원들의 8각 모자는 패전을 모르는 미해병의 정신이 살아있는 상징이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의 수중에 있던 유황도(Iwo Jima)는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 위해 미군이 반드시 확보해야 할 교두보였으나, 섬 전체가 4백여 개의 토치카로 뒤덮여 있어 태평양 지역에서 가장 공략하기 힘든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공격에 들어간 미군 제5해병사단은 3만 명의 병력과 880척의 LST를 동원해 상륙작전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철벽같은 수비에 걸리고 말았다. 미해병대는 물러났다가 다시 공격해 들어가기를 일곱 차례나 거듭했지만, 악착같은 일본군의 집중포화로 수많은 희생자만 낸 채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집념을 불태운 제5해병사단은 마침내 여덟 번째의 공격을 벌인 끝에 기어코 유황도를 점령하고 말았으며, 그곳 정상에 성조기를 꽂을 수 있었다. 유황도에서 해병들은 6,800명이나 전사했으며, 미해병대는 이 때의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8각모의 전통을 시작했다.
종군기자 로젠탈이 포연이 자욱한 유황도 정상에 성조기를 세우는 해병들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은 너무도 유명하다. 해병들은 언제나 선두였고, 그들에게 패전이란 있을 수 없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미공군은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위해 유오오섬의 일본군 비행장을 필요로 했다. 1945년 2월, 유오오섬에 상륙을 개시한 미해병대는 일본군과 처절한 혈투를 벌여 4,500명이 전사했지만 결국은 그곳을 점령해냈다. 그러나 점령하고 나서도 필사적인 저항을 하는 일본군 지하요새를 소탕하기 위해 해병폭파반은 한 달 동안이나 동굴을 모조리 찾아다니며 폭파해야 했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길고도 끔찍한 전투였다. 이 작전에 종군한 `라이프'의 종군기자 유진 스미스는 자신이 촬영한 사진에 소름끼치는 설명을 붙였다.
`유오오섬에는 온통 사람의 뼈만 흩어져 있다.'
해병들의 희생으로, 공군은 1945년 3월부터 유오오와 사이판을 전진기지로 삼아 B-24와 B-29 폭격기로 일본 공습을 시작할 수 있었다. 태평양전쟁에서 미국 해병대는 패전을 용납할 수 없는 명성만큼이나 용감했고, 모두 2만 명의 해병대원이 전사했다.
5파운드짜리 목숨
어느 나라든 해병들의 군인정신은 일반 보병들에 비해 남다른 데가 있으며, 한국 해병들도 조국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일이라면 미해병대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한국전쟁에서 한국의 해병들은 더없이 용감했다. 양구군 해안면의 해안분지 남서쪽에 있는 도솔산과 대우산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산악지역은 전략적 요충지였고, 이 지역에는 북한군 제5군단의 정예부대인 12사단과 32사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1951년 5월,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군의 춘계공세를 격퇴한 직후 미해병대 제5연대가 도솔산 탈환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6월 4일, 미해병대와 임무를 교대한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암석지대의 압도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고 있는 데다 중화기와 수류탄으로 무장한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쳤다. 적지 않은 피해를 당한 1연대는 즉시 주간공격을 야간공격으로 전환해 돌격작전을 감행했고, 거의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적의 진지를 향해 17일 동안 결사적인 혈전을 벌여 끝내는 24개의 목표를 모두 점령했다. 6월 20일, 북한군 2개 사단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퇴각했으며, '도솔산지구 전투'에서 1연대는 피로 물든 사투로 승리해 교착상태에 빠진 아군 전선의 활로를 개척해냈다.
미군이 펀치볼(Punch Bowl)이라고 명명한 양구 북쪽 해안분지는, 한국 해병 1연대와 미해병 1사단이 1951년 8월부터 9월까지 북한군과 3주간에 걸친 피의 공방전을 벌인 곳이다. 펀치볼 지역에는 전술적으로 중요한 김일성 고지와 모택동 고지가 있고, 이곳 능선 일대에는 셀 수도 없는 엄청난 숫자의 지뢰가 매설되어 있어 한·미 해병대가 공격에 나섰지만 실패만 거듭했다. 그러자 선두에 나선 1연대의 한국 해병대원들이 폭발하는 지뢰와 자신의 목숨을 바꾸어가면서 길을 열었다. 가족과 형제와 사랑하는 사람의 안녕을 위해 비록 하나뿐인 목숨인들 아까웠을 것인가. 마침내 그들의 희생을 통해 길이 열리자, 다시 공격에 나선 한·미 해병들은 4일 동안 고지를 뺏고 다시 빼앗기는 치열한 격전 속에서 점령에 성공할 수 있었다. 펀치볼 전투는 미해병들에도 아주 끔찍하고 처절한 경험이었다. 그 뒤로 `5파운드짜리 목숨'이란 말이 미군들 사이에서 유행했는데, 그 이유는 당시 대인지뢰의 폭발압력이 5파운드였기 때문이다.
베트남전쟁에서 남베트남의 군인들은 적에게 밀려 상황이 불리해지면 숱한 탄약과 무기까지 팽개친 채 드리쿼터에 올라타고 민간인들보다 더 재빨리 도망갔다. 그러나 베트남에서도 한국 해병들은 더없이 용감했다. 해병 제2여단사령부의 전술 책임 지역인 베트남 서부의 산악지역에는 북베트남 정규군 제2사단과 베트콩 제1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해상 통로를 이용해 병력과 장비를 침투시킨 후 여단 책임지역을 횡단해 서부 산악지대로 수송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1967년 7월 15일, 미해군 함정은 북베트남군의 철제 수송선을 추격하고 있었고, 미해병대 제3상륙군사령부로부터 이 정보를 입수한 해병 제2여단은 휘하의 1대대를 파견해 자신들의 지역으로 도주해 접근하는 적의 수송선을 포착했다. 그들은 즉시 작전에 들어가 집중포격을 시작했고 얼마 후 보급품을 싣고있던 길이 120피트의 철제 수송선은 포탄에 명중되어 격침되었다.
해병들은 고무보트를 이용해 수중인양작업을 벌였고 중국제 자동소총 AK-47 1,173정과 미사일 25발, 대공기관총 2정, 그리고 고성능폭약인 TNT 200 파운드와 6트럭 분의 실탄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작전의 이름은 `용머리 2호'였으며, 당시 베트남전쟁 사상 최초로 대량의 무기를 노획한 전과로 기록되어 있다.
작전에 참가했던 해병 제2여단 1대대 2중대는, 적의 주둔지인 산악지역에서 무기를 인수하기 위해 해안으로 집결했던 병력이 다시 돌아갈 것으로 보았다. 그들은 적이 통로로 이용해온 `테로이' 마을 주변으로 이동한 뒤 매복작전에 들어갔다. 수송선을 격침시킨지 4일 후인 7월 19일 밤 10시, 제2중대의 3소대 1분대의 해병들은 어두움을 이용해 은밀하게 매복지점을 통과하는 베트콩 1개 중대를 발견했다. 마침내 기회를 노리던 1분대의 분대장 김학영 하사가 공격을 명령하는 순간 매설해놓은 클레이모어(Claymore)를 터뜨리면서 M-16 자동소총이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했다. 매복에 걸린 베트콩들도 즉각 사격하면서 교전에 들어갔으나 50분간 계속된 치열한 총격전 끝에 그들은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도주해갔다. 이날 벌어진 교전에서 소수였던 1분대의 해병들은 32명의 적을 사살했고 4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개인화기 20정과 공용화기 1정을 노획했다. 이들 해병들은 소수였지만 최소의 피해로 최대의 전과를 올렸고 분대원 전원은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었다. `테로이 매복작전'에서 적절한 판단과 공격으로 지휘력을 인정받은 분대장 김 하사는 다낭의 미해병사령부로 불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미국 부통령 험프리로부터 미국 은성 무공훈장을 수여받으며 “당신은 전쟁영웅이지만, 아주 대단한 지휘자요”라는 찬사를 들었다.
베트남에서 최악의 상황으로 몰린 경우에도 한국 해병들은 지독했다. 적에게 포위당하고 말아 실탄마저 바닥난 대원들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자동소총을 적에게 넘겨주지 않으려고 모두 분해한 다음 숲 속에 던져 흩어버렸다.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마지막 남은 수류탄으로 다수의 적을 황천길로 같이 끌고 가거나, 대검을 빼들어 결사적인 항전으로 최후를 끝내기도 했다. 그들의 지독한 군인 정신에 미해병들은 고개를 내저을 정도였다.
명예 하나를 위해 산다
새해에는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는 부대들이 있고, 그들 중 하나는 프랑스에 있다. 바로 외인부대인 레종 에뜨랑제(Legion Etrangere)다. 프랑스 특수부대인 외인부대는 소규모이며 숱한 나라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군대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위해 싸운다. 비록 그들은 자신의 조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모험과 돈을 위해 그곳에 지원했고 외인부대의 군복을 입고 있지만, 결코 돈에 팔려 다니는 용병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목숨을 걸고 지켜내야 할 명예가 있는 것이다. 만일 애국심 하나로 국가를 방위하는 군인에게 지켜내야 할 명예가 없다면 군복을 입고 있어야할 이유가 있겠는가. `불명예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는 해병들과, 패전을 용납할 수 없는 그들의 전사를 돌아보며 명료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다. 군인은 오직 명예 하나를 위해 사는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