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김수환 추기경

[스크랩] [김수환 추기경 이야기] 제69화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사건

바래미나 2010. 9. 22. 00:57

 

 

1990년대 중반, 북한은 식량 부족으로 인한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 어린 아이까지 굶주리고 있는 참상이 서방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전 세계는 충격을 금치 못했고, 같은 동포끼리의 안타까움은 더욱 컸다. 북한을 돕기 위한 노력이 나라 안으로부터 시작되는 가운데, 교회도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북한 동포 돕기 운동에 나섰다.

"왜 연애하는 사람들이 한편에서 짝사랑하는 사람들이 상대방이 순정을 좀 알아주기를 바라는게 있지 왜... 그러니까 종교는 아편이라고 그러잖아."

비록 대답 없는 메아리라 할지라도 나는 북한 교회에 대한 사랑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남쪽 교회와 마찬가지로 북한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평양교구 신부님들이 월남한 분들 중에서 대부분이 몇 분을 빼놓고... 내가 자원했다면 자원한 것이 그 이유죠."

"많은 분들이 서울대교구 이렇게 하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이 휴전선 이남의 서울교구 이것만으로 생각이 멈춰지고 맙니다...  이렇게 의식을 자꾸 자기 타이르듯이 타이르고 있었죠."

"우리 신자들은 북한을 남북화해라든지 통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눔의 삶으로 이렇게 변화시켜가야 통일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믿습니다."    

1995년 현충일의 이른 아침. 명동성당에 공권력이 투입됐다. 문민정부 들어 비교적 평온한 시기를 보내고 있던 교회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상황이었다.
      
"아침식사 할 때 우리가... 기습해왔고 그건 일종의 기습이야. 아쉽죠. 그것으로서 사람들이 성역이 다 생각하는 것을 깨뜨렸으니까 아쉬운 감이들지. 그렇게 안해도 그렇게 해가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사건은 한국통신의 노사 분규로부터 비롯됐다. 민영화 계획에 따른 노사 간의 갈등이 노조 간부들에 대한 구속 방침으로 확대되면서 영장이 청구된 노조 간부들이 명동성당과 조계사로 피신한다. 정부 측은 즉시 이들을 경찰에 인도할 것을 요청했으나 교회는 일단 이를 거절하고 원만한 사태 수습을 위해 중재에 나서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늘 안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우리편에서 볼때 역시 집단 이기주의라든지 이렇다 하더라도... 그런 뜻이 우리에게 있었던 것 같습니다."

타협안을 찾지 못한 채 대치 상황이 여러 날 계속되자 언론을 중심으로 성역 논쟁이 벌어진다. 법 집행에 있어서 어떠한 예외도 있을 수 없다는 공권력 투입 찬성론과, 그래도 시대의 상징이 되어왔던 교회를 성역으로 보호해야한다는 공권력 투입 반대론이 팽팽한 여론을 형성했다.
      
"엄격히 말하면 치외법권지대라는 게 없지... 이런 것이 하나쯤은 적어도 있는 게 바람직하지 않나."

그러나 마침내 공권력은 투입됐고, 수환은 사회 문제와 관련해서는 처음으로 이례적인 사제평의회를 소집한다. 87년 이후 중단됐던 시국기도회도 다시 열렸다. 마침 삼위일체대축일을 맞은 주일 정오 미사에서 수환은 공권력 투입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예상 외로 교회의 저항이 거세자 정부는 국무총리가 사과 성명을 발표하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하고자 한다. 그러나 서울대교구가 이 사과를 받아들이기로 공식 입장을 정한 뒤에도 일부 신부들은 단식 농성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수환은 농성 사제들에게 교구 결정에 따라줄 것을 요청하고, 사제들이 이 요청을 받아들임으로써 명동성당에 대한 공권력 투입 사태는  일단락 된다.

"나는 하여튼 우리 신부님들이 물론 하루이틀 그런 단식을 한다든지 이건 모르겠는데... 그런 장기단식에는 내가 반대했을 거야."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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