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148 유탄발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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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148 40mm 유탄발사기 <출처: 필자>
개발의 역사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40mm 유탄발사기의 위력은 철저히 검증되었다. M79 유탄발사기는 40mm 유탄의 투발수단으로서 가능성과 한계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M79는 보병분대가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화력을 제공하여 찰리킬러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우선 M79는 30m 이상의 거리에서 신관이 작동하므로 지근거리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게다가 M79는 소총 이외에 별도의 무기체계로 인식되고, 병사는 소총과 유탄발사기 가운데 하나만을 선택해야만 했다. 결국 대안은 소총과 유탄발사장치를 결합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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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79 유탄발사기는 강한 위력으로 사랑받았지만 용도가 너무 제한되었다. <출처: Public Domain>
사실 이러한 개념의 무기체계는 1952년부터 시작된 SPIW(Special Purpose Individual Weapon) 사업을 통하여 이미 개발되고 있었다. 이중탄두탄환과 유탄발사기를 결합하려는 SPIW는 너무도 혁명적이어서 별다른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SPIW가 추구하던 소구경 탄환의 소총 개념이 갈려나와 M16 자동소총이 선정되었고, 유탄의 개념은 M79에서 구현되었다. 이제 둘로 갈려나간 SPIW의 개념이 다시 합쳐져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미 육군 물자사령부(Army Material Command)는 1963년 GLAD(Grenade Launcher Attachment Development, 유탄발사기 부착물 개발) 사업을 계획했다. 그러나 예산을 배정받지 못하자 사업은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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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IW의 개발이 지연되면서 1960년대초 M16 소총이 차기소총으로 선정되었다. <출처: Public Domain>
한편 GLAD와 같은 개념을 이미 연구하고 있던 업체가 있었다. M16을 생산하던 콜트사였다. 콜트는 1963년 6월말까지 시제품을 내놓을 예정으로 개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963년 여름 M16에 예상치 않던 문제점이 발생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콜트의 모든 설계진이 모여들면서 유탄발사기의 개발은 진행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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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트가 개발한 유탄발사기 최초의 모델 <출처: Colt Mfg.>
비록 일정이 지연됐지만 콜트는 이듬해에 CAR-15 시리즈를 소개하면서 기어이 새로운 유탄발사기를 선보였다. 콜트의 설계자인 롭 로이(Robert E. Roy, 1923-2002)는 매우 단순한 디자인의 40mm 유탄발사기를 M16 소총과 결합했다. 이 모델은 당시 육군 참모총장인 휠러(Earle Gilmore Wheeler, 1908-1975) 대장에게도 시연되었다. 당시 육군은 이미 SPIW에 바탕하는 새로운 유탄발사기 설계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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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1 유탄발사기는 애초에 경쟁에서 배제되었다. <출처: Public Domain>
하지만 유탄발사기의 선정책임을 맡은 스프링필드 조병창의 입장은 달랐다. 스프링필드 조병창은 육군본부에 보낸 메모에서 가능하다면 외부의 독립된 설계도 포함하자는 의견을 표명했다. 이에 따라 스프링필드 조병창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X-1 유탄발사기, 포드 자동차/스프링필드가 공동 개발한 SPIW용 유탄발사기에 더하여 콜트의 새로운 유탄발사기도 시험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 중에 X-1 유탄발사기는 설계의 초기단계에서 탈락했고, 이를 대신하여 AAI에서 새롭게 개발한 40mm 유탄발사기가 시제모델로 경쟁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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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필드 조병창과 포드 모터스가 만든 유탄발사기도 검토되었지만 너무도 구조가 복잡했다. <출처: Public Domain>
콜트는 최초의 단순한 디자인에서 설계를 발전시켜 여전히 단순하지만 기능적인 설계를 선보였다. 새로운 모델은 또다른 콜트의 설계자인 칼 루이스(Karl R. Lewis, 1927-)의 주도로 롭 로이와 함께 개발했으며, CGL(Colt Grenade Launcher)-4라는 모델명으로 불렸다. 개발은 전광석화와 같이 진행되어 신형 유탄발사기의 제원을 정하고 설계도를 그린 후에 시제모델을 만들기까지 걸린 기간은 불과 47일이었다. CGL-4는 M16 소총과 매우 기능적으로 결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미 M16을 채용한 육군으로서는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육군은 1965년 3월 시험평가를 위하여 CGL-4를 30정 구매하여 시험평가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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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AI의 SPIW에 장착된 유탄발사기도 고려되었지만 40mm 유탄을 장착할 수 없어 탈락했다. <출처: Public Domain>
CGL-4의 시험평가는 공군의 주관하에 래클랜드 공군기지(Lackland AFB)에서 1965년 5월 12일부터 시작되었다. M16은 육군 뿐만 아니라 공군도 함께 도입했기 때문에 시험평가가 공동으로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험을 시작하자마자 문제가 발생했다. 탄피갈퀴의 스프링이 문제를 일으키자 콜트가 서둘러 이를 전량 교체할 때까지 시험이 중단되었다. 발사기 중 하나는 발사과정에서 이물질이 발사기 안에 같이 들어가면서 알루미늄 하우징이 깨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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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와 로이가 미 특허청에 제출한 설계안 <출처: US Patent Office>
이에 따라 시험을 속행하느냐 하우징의 재질을 바꿔 강성을 높이느냐를 결정해야만 했다. CGL-4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던 공군의 주장으로 시험평가는 속행할 것을 주장했으나, 결국 하우징의 재질을 바꾸기로 하고 새로운 발사기가 준비된 1965년 가을부터 시험평가가 이어졌다. 여전히 문제점이 지적되었지만, 당시 보고서에 따르면 충분히 수정될 수 있는 문제로 평가되었다. CGL-4는 5월에 시험평가를 시작하면서 이미 제식명인 XM148을 부여받아 제식무기체계로 채용되는 것이 기정사실처럼 굳어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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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자 중 한명인 롭 로이의 CGL-4 시연장면 <출처: ar15.com>
시험평가의 기간동안 일선, 특히 베트남전선에서는 M79의 교체소요에 대한 요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육군본부와 베트남지원사령부의 의견차이가 일부 있었지만, 사업담당자인 연트(Harold W Yount) 중령은 CGL-4의 손을 들어주었다. 특히 콜트의 유탄발사기에 관심이 높았던 미 공군은 1965년 12월 중순 XM148을 7천정 구매할 것을 결정했다. 사정이 급한 육군도 10,500정을 구매하기로 1966년 1월 3일 결정을 내렸다. 이와 함께 근접교전을 위한 XM576 40mm 유탄도 신속히 개발과 배치가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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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148은 1966년 6월말 미군에 채용이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출처: Public Domain>
그러나 육군은 본격적인 양산에 앞서 XM148 유탄발사기를 조금 더 평가하기로 결정했다. 원래의 시험평가가 워낙 급하게 이뤄진데다가 이 과정에서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콜트는 25정을 추가로 육군으로 보냈는데, 여기에서는 고질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하우징을 알루미늄 포징으로 강화하기로 했다. 이렇게 시험평가가 진행되는 사이, 육군은 6월 29일 XM148 유탄발사기 19,236정의 구매계약을 콜트와 체결했다. 이렇게 XM148은 불과 2년만에 개발과 시험평가를 거쳐 제식채용이 결정되었다.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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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6 소총과 결합된 XM148 유탄발사기 <출처: Public Domain>
XM148은 외양상 M16 소총의 총열 아래에 기다란 원통을 달아놓은 것 같은 단순한 구조지만, 내부구조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유탄을 발사하기 위한 발사관과 약실 잠금장치, 격발장치, 조준장치로 구성된다. 제일 까다로웠던 것이 약실의 잠금과 개방으로, 슬라이드 액션 방식을 채택하여 발사관을 앞쪽으로 밀어내고 탄환을 한발씩 장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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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실이 개방된 상태의 XM148 유탄발사기 <출처: ar15.com>
독특한 것은 발사관 아래 손잡이가 잠금장치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즉 권총손잡이 뒷쪽의 버튼을 누르면 손잡이 자체가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약실의 잠금이 해제되는 방식이었다. 일견 외양상으로는 간단해보이지만 내부에는 스프링과 래치가 얽혀있는데다가, 앞으로 손잡이를 밀어내는 움직임도 자연스럽지 않아 운용이 편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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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시 방아쇠가 젖혀진 상태(좌)와 사격을 위해 방아쇠가 준비된 상태(우)의 모습 <출처: 미 육군>
안전장치는 약실 뒤의 왼쪽에 장착되어 레버식으로 S(safe)-F(fire)를 선택할 수 있었다. 방아쇠는 별도의 방아쇠울이 없이 노출되어, 사격을 하지 않거나 이동시에는 방아쇠를 위로 돌려놓고, 사격시에는 방아쇠를 아래로 내려 권총손잡이를 잡고 발사하는 방식이었다. 문제는 방아쇠가 오른쪽에 있어, 왼손사수의 경우 결코 사격이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조준장치는 호형가늠자로 발사기의 왼쪽에 장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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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148 유탄발사기의 구성: 유탄발사기, 총열덥개, 조준장치 등으로 구성된다. <출처: ar15.com>
그런데 XM148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된 것은 역시 발사관 하우징이었다. 애초에 시험평가에서도 크랙이 발생하는 등 강도가 문제되자 콜트는 하우징의 재질을 고강도 알루미늄 합금으로 바꾸었다. 하우징의 제작을 맡은 하청업체는 카이저 알루미늄(Kaiser Aluminum of Erie, Pennsylvania)이었는데, 이곳은 미 공군의 750파운드 폭탄에 장착되는 신관 부품을 제작하는 업체이기도 했다. 문제는 공군사업 쪽이 훨씬 더 우선순위가 높아, 똑같은 재질을 사용하는 XM148 발사관은 조달이 쉽지 않았다. XM148은 이러한 문제들이 끊이지 않아 결국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할 운명이었다.
운용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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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148은 특수부대부터 지급되었으며 초기에는 호평을 받았다. <출처: Public Domain>
XM148은 1966년 12월 15일 우선 1,764정이 베트남으로 보내졌다. 초도의 물량은 실전평가를 겸하는 것이었으므로, 가장 활용을 많이 하는 특수부대들을 위주로 지급되었다. 특히 총기를 지급받은 MACV-SOG, 그린베레나 실팀 등으로부터 호평이 쏟아졌다. 애초에 M16소총에 장착되도록 되어 있었으나 부대원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XM177과 결합하기도 했다. 또한 일부는 호주 SAS연대로 보내져서 M16 이외에 L1A1 소총이나 심지어는 L34A1 스털링 소음기관단총에 결합되어 활용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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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148로 무장한 호주 SASR 대원들. M16과 XM148의 조합 이외에 L1A1 소총에 XM148을 결합한 모습(좌로부터 두번째)도 보인다. <출처: Public Domain>
한편 콜트는 XM148이 생산에 박차를 가하여 1967년 1월말에 이르러서는 무려 10,862정이나 제작을 마쳤다. 배치 초기의 실전평가는 좋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문제들이 속출했다. 우선 조준장치가 제일 큰 문제로 조준점이 쉽게 틀어지거나 고장나기 일쑤였다. 장전을 위한 동작이 부자연스럽고 방아쇠의 조작도 까다로울 뿐만 아니라 장전을 위해 발사관을 밀고 당기는데 상당한 힘이 필요하여 실제 전투에서도 문제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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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호평과는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XM148은 내구성과 신뢰성에 문제를 보였다. <출처: Public Domain>
문제가 빈발하자 육군은 1967년 4월 현장점검팀을 보내어 총기의 문제들을 검토했지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결국 6월에 이르자 XM148은 베트남전 환경에 적절하지 않은 무기체계로 판명이 나버렸다. 이 시기 육군은 XM148 34,076정을 사기로 콜트와의 계약을 체결했으며, 이미 27,400정은 납품이 완료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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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M148은 결국 베트남전선에 배치된 지 6개월도 안되어 퇴출이 결정되어 버렸다. <출처: Public Domain>
육군은 과감히 XM148을 더 이상 베트남 전선에서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대안을 찾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67년 여름 GLAD(Grenade Launcher Attachment Development) 사업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GLAD 사업에는 수많은 업체들이 다양한 설계와 시제품을 제시했고, 콜트도 설계를 완전히 변경한 CGL-5 모델을 제시했다. 그러나 결국 AAI가 제안한 XM203이 승자가 되었으며, 이에 따라 XM148은 짧은 운명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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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트가 XM148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제안한 CGL-5는 결국 선정되지 못했다. <출처: Colt Mfg.>
제원
작동방식 : 슬라이드 단발장전
구경 : 40×46 mm 유탄
전체길이 : 419 mm
총열길이 : 254 mm (10인치)
중량 : 1.36 kg
총구초속 : 247 ft/s (74.5 m/s)
최대사거리 : 400 m
저자소개
양욱 | Defense Analy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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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재인 '무기백과사전'의 총괄 에디터이다. 중동지역에서 군부대 교관을 역임했고, 민간군사기업을 경영했다. 현재 한남대 국방전략대학원과 신안산대 경호경찰행정학과의 겸임교수로 군사전략과 대테러실무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각 군의 정책자문위원과 정부의 평가위원으로 국방 및 안보정책에 관해 자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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