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전사에 길이 남는 F-86과 MiG-15의 라이벌 관계를 시작으로 냉전 이후 전투기 분야에서 미국과 소련의 경쟁은 치열했다. 비교적 비행 성능이 중시되던 제3세대 전투기 시대까지 소련은 그럭저럭 뛰어난 대항마를 즉시 선보여왔다. 하지만 보다 진보된 레이더, 항전장비, 플라이 바이 와이어(FBW, fly-by-wire) 등을 이용하는 제4세대 전투기 시대에 들어서면서 상대적으로 해당 분야의 기술력이 뒤진 소련은 초조해졌다.
특히 1960년대 후반,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전훈을 바탕으로 20세기 말까지 주력으로 사용할 ‘차세대 전투기 계획(F-X)’을 수립하고 프로젝트를 시작하자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다. 각종 정보를 수집한 결과 미국이 한창 개발 중인 F-14, F-15는 뛰어난 BVR(Beyond Visual Range: 가시권 밖) 교전 능력은 물론 근접전에서도 기존의 소련 전투기들을 압도하는 성능을 보유할 것으로 분석되었다.
당연히 이와 대등한 성능의 신예 전투기가 필요했다. 거대한 국토를 염두에 두고 기존 전투기처럼 지상 관제 시스템의 지시에 따라 전투를 치를 수 있으면서도 경우에 따라 단독으로 장거리 요격 작전도 가능한 다목적 전투기가 목표였다. 소련의 기존 전투기들이 미국의 폭격기 요격에 특화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새로운 신예기는 뛰어난 제공 전투 능력도 보유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미국의 진행 상황에 맞서 획득 기간을 최대한 단축하기 위해 레이더, 컴퓨터처럼 개발에 시간을 많이 걸리는 장비는 추후에 장착하거나 개량하는 것을 전제로 일단 기체 개발부터 착수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신예기는 탄생과 동시에 곧바로 개량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만큼 소련은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일반적인 무기의 개발 및 배치 과정을 보면 이는 흔한 일이며 사실 그런 점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신속한 이륙을 자랑하는 MiG-29 <출처: 유튜브>
- 소련의 대응
당국의 지시를 받고 TsAGI(중앙유체역학연구소)는 개념 연구에 들어갔지만, 당시 기술력으로는 단일 기체로 요구 조건을 모두 충족하기가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결국 기동력이 좋은 경전투기 개발은 미그 설계국이 담당했고, 그렇게 탄생한 걸작이 바로 MiG-29 펄크럼(Fulcrum)이다. 여담으로 이때 수호이 설계국이 개발한 중전투기가 Su-27이다. 이들은 TsAGI의 연구를 바탕으로 제작되어서 크기만 다를 뿐 외형이 상당히 유사하다.
결과적으로 제공전투기인 F-15에 맞서는 Su-27 그리고 다목적 경량전투기인 F-16에 필적하는 MiG-29로 자연스럽게 구도가 정리되었다. 하지만 소련이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처음부터 이원화의 길을 밟게 된 것과 달리, 미국은 F-15의 엄청난 도입 가격에 놀라 저렴한 전투기를 다수 도입해 수적 부족분을 보완하려 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F-16이다. 어쨌든 본의 아니게 처음부터 다층적인 라이벌 체계가 굳어져버렸다.
MiG-29는 목표물까지 신속히 다가가 공격을 가하는 기존 소련제 전투기의 장점을 더욱 강화하면서 공대공 전투 능력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개발 초점이 맞추어졌다. 초도비행은 1977년 10월에 실시되었고 이후 지속적인 개량 끝에 1982년부터 양산이 시작되었다. 구형인 MiG-21, Su-15는 물론이고 야심만만하게 도입했지만 운용 결과가 기대에 못 미친 MiG-23, Su-17을 대체하는 것이 우선 목표였다.
- 베카 계곡 공중전의 충격
특히 본격 양산 직전인 1982년 6월 9일부터 시리아와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대규모로 공중전을 벌인 베카(Beqaa) 계곡 항공전의 결과는 소련을 더욱 조바심 나게 만들었다. 격추비 86 대 1이라는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승리로 막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조기경보기의 통제를 받는 이스라엘군의 F-15, F-16은 시리아군의 MiG-21, MiG-23, MiG-25를 학살에 가까울 정도로 철저하게 유린했다. 항공전사에 이런 사례는 없었다.
한마디로 전혀 다른 기법으로 전투를 벌이는 제4세대 전투기와 그 이하 세대 전투기들의 능력 차이가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이 결과는 두고두고 많은 말을 만들어냈다. 지난 1~3차 중동전쟁처럼 시리아군의 훈련 부족 등이 원인으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이제는 전투기의 확실한 질적 우세 없이 공중전에서 이길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점에 모든 전문가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양으로써 질적 열세를 극복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MiG-29와 F/A-18의 도그파이트 훈련 동영상 <출처: 유튜브>
놀란 소련은 아직 상위 주력기인 Su-27의 양산이 이루어지기 전이어서 일단 MiG-29의 투입을 서둘러야 했다. 이에 따라 1983년부터 국경 일대의 전방 부대에서 운용 중인 구식기 대체를 시작으로 MiG-29의 배치가 급속히 이루어졌다. 1986년 7월, 핀란드에 시범 비행대가 방문하여 서방 언론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고, 냉전 말기인 1988년 영국 판보로(Farnborough) 에어쇼에 참가하면서 MiG-29의 정체가 완전히 공개되었다.
- MiG-35의 등장
하지만 미국은 개발 당시부터 MiG-29의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고 이미 F-16 같은 든든한 대항마가 존재하여 MiG-15, MiG-25의 등장 당시 같은 충격은 없었다. 1990년 독일 통일 후 동독군이 운용하던 MiG-29를 획득한 후 모의 교전을 벌인 결과, 근접전 능력은 소문대로 뛰어나지만 BVR 교전에서 실망스런 결과를 나타내 전반적으로 크게 우려할 만한 성능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소련 및 러시아에 공급된 MiG-29는 1992년에 생산이 완료되었지만 대외 수출용은 여전히 인기가 많아 꾸준히 제작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처럼 30년이 넘게 생산이 이루어지다 보니 MiG-29는 다양한 파생형을 가진 전투기로도 유명하다. 해외 판매를 위해 장기간 생산되면서 세부형이나 파생형이 많은 것 또한 마치 약속이나 것처럼 라이벌인 F-16과 비슷하다.
세부형 중 MiG-29M2를 기반으로 하는 최신작은 MiG-35라는 별개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재설계에 가까울 정도로 대대적으로 기체 개량이 이루어지고 능동전자주사(AESA, Active Electronically Scanned Array) 레이더 등을 장착하여 4.5세대 전투기로 구분된다. 지난 2007년 초도비행에 성공했음에도 판매에 애를 먹었으나 이집트가 24대를 구매해 2017년부터 기체 인도가 이루어지고 있고 러시아도 2018년부터 170대를 순차 도입할 예정으로 알려져 있다.
MAKS 2015 에어쇼에서 데모 비행 중인 MiG-35 동영상 <출처: 유튜브>
* MiG-29의 특징 및 운용 현황, 제원은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저자 소개
남도현 | 군사저술가 『히틀러의 장군들』, 『전쟁, 그리고』, 『2차대전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순간들』, 『끝나지 않은 전쟁 6·25』 등의 군사 관련 서적을 저술한 군사 저술가.국방부 정책 블로그, 군사월간지 《국방과 기술》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현재 무역대행 회사인 DHT AGENCY를 경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