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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의 명장이자 병법가, 오기(吳起, BC 440~BC 381, 오자/吳子)

바래미나 2013. 12. 9. 18:09

춘추전국시대의 명장이자 병법가, 오기(吳起, BC 440~BC 381, 오자/吳子)

2 吳起

BC 440~BC 381

춘추전국시대전국시대 명장이자 병법가, 또한 정치가. 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전략전술의 귀재 중 한 명으로 1의 오기도 많았고, 인간적으로는 너무나도 차가운 냉혈한이었지만 병사들의 상처를 친히 입으로 빨아 주었다는 유명한 일화를 생각하면 상당히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는 인물.일생도 꽤나 드라마틱하다.

2.1 젊은 시절

그가 얼마나 오기가 쩔었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어렸을 적 자기보다 더 강한 깡패를 상대로 덤비다가 떡실신을 당했다. 근데 그 다음날 또 쳐들어와서 한판 뜨자고 큰소리쳤고 다시 떡실신당했다. 그러나 이 인간은 이걸로 끝나지 않고 계속 그 깡패를 쫓아다니면서 덤비다가 개발살나길 반복했고, 결국 그 깡패가 끝끝내 지친 나머지 데꿀멍했다는 얘기다.

잉여백수생활을 하는[1]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긴 어머니가 크게 꾸짖자, 팔을 물어뜯으며 피를 흘려 그 피로 어머니께 재상이 되기 전까진 찾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한때 공자 제자인 증삼의 아들 밑에서 수학한 적이 있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공부에만 열중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스승이 묻자 위에서 말한 저 맹세를 이유로 댔기 때문에 쫓겨났다. 효를 중시하는 증삼 문하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 피의 맹세를 했다'는 자체가 탐탁지 않았는데, 하물며 부모 장례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면야...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고우영 열국지에서는 증자 선생이 "저런 독한 놈은 차라리 멍청한 채로 남겨둬야 했는데 공부를 가르쳐줬으니 더 큰 일을 저지를 것이다."면서 한탄한다.

2.2 명장으로서의 면모

결국 유학 대신 병법을 익히고 마침내 나라에서 벼슬을 얻었는데, 마침 나라가 노나라를 쳤다. 그런데 노나라 조정에선 오기의 재능을 알면서도 그 아내가 제나라 출신이라 선뜻 장군으로 쓰기를 꺼려했다. 이 말을 들은 오기는 주저없이 아내의 목을 베고 대장군 자리에 오른 다음 침입한 제나라를 개발살내버린다.[2] 비록 전공은 세웠으나 이 일이 빌미가 되어 노나라에서 쫓겨났고, 나라 문후(文侯)를 만나 장수로 기용된다.[3]

오기는 나라 침공을 막기 위한 요지 서하(西河)로 부임해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했다. 고우영의 만화에선 일개 태수로 좌천시킨 것처럼 묘사하지만, 여기는 진이 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필요했던 요충지였다는 것과, 문후가 죽고나자 사흘을 통곡했다는 것으로 보아 문후가 오기의 재능을 간파하고 요충지에 보내 실력에 맞는 대우를 해줬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그리고 진이 어수선한 틈을 노려 침공을 개시, 다섯 개 성을 빼앗는 전공을 올렸다. 이렇게 오기가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와 대치할 무렵 전적은... 불패였다.[4]

출세길에 오르기 위해 스스로 아내 목을 친 독한 면모나, 여자와 재물을 꺼리지 않았다는 악평[5]이 자자했지만, 의외로 장수로서 병사를 통솔할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병사가 등에 종기가 났다는 말을 듣자 입으로 고름을 빨아준 이야기가 바로 그것. 그 병사의 어머니는 이 이야기를 듣고는 남편도 오기의 그런 행동에 감동받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다 죽었는데, 이젠 아들마저 오기를 위해 싸우다 죽게 생겼다며 오열했다고 한다. 혹자는 오기가 진심으로 병사를 아꼈다기보다, 자신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울 병사를 만들기 위한 용인술이라 본다.[6] 그리고 일반 병졸들과 똑같이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행군을 할 때에는 수레에서 내려 같이 짐을 지고 걸었다고 한다. 위의 제나라와의 전투때도 이런 모습을 보여줘 상대가 당나라 군대라고 오해하게 만들기도 했다. [7]

이 이야기는 군대에서 정훈교육 시간이나 지휘관이 훈화하는 시간 등에 단골로 언급되며, 같은 이야기가 육군 수양록에도 짤막하게 실려 있다. 하지만 그 외의 얘기(아내를 죽였다든지, 어머니 무덤도 찾아가지 않았다든지 하는 이야기들)는 전혀 해 주지 않아서 그냥 병사들에게 자애롭던 훌륭한 장군 정도로 알고 있던 군필자사람들이 나중에 오기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놀라기도 한다.

여담으로 문후는 악양이란 장수도 등용했는데, 중산국 정벌 때 그곳에서 벼슬 살던 아들이 고기국이 되자, 거리낌 없이 국을 마셔버리고 공격을 계속한 일화로 유명하다. 훗날 제나라 전역을 유린한 나라 명장 악의가 바로 악양의 손자다. 독하기론 악양도 오기 못잖았던 셈인데, 악양은 중산국 정벌 후로 다시 중용되지 않았지만 오기는 위나라에서 꽤 오래 활동했다.

2.3 위나라를 떠나다

이후 문후가 죽고 무후(武候)가 즉위한다. 오기는 문후의 뒤를 이어 계속 무후도 섬겼다.

하루는 무후가 뱃놀이를 나갔다가 주변 경치를 보며 '강산의 험난한 지세는 위나라의 보물이다'하고 자뻑감탄했다. 그러자 오기는 '나라 나라도 험난한 터에 나라를 세웠으나 결국 왕이 덕이 없어서 망했다. 지형에 의지하지 말고 왕은 덕을 닦으시라'하고 간언했다.[8] 무후는 오기에게 계속 서하를 맡겼다.
무후는 새로 재상 자리를 만들고 전문[9]을 앉혔다. 오기는 평소 자신의 공이 높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내심 불복하고 전문을 찾아가 누가 더 잘났는지 따졌다. 비록 전문이 차분하게 타일러 데꿀멍했지만.

오기가 "성을 빼앗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 있어 공이 낫소 내가 낫소?" 하니 전문은 "공이 더 낫소"하였다. 그리고 전문이 다시 묻기를 "왕이 어려 민심이 왕에게 없고 왕은 신하를 믿지 못하오. 왕 사이와 신하와 백성을 잘 다스리는 데 공이 낫소, 내가 낫소?"하였다. 그러자 오기는 조금 망설이더니 "공이 낫소."하며 물러났다.

훗날 전문이 죽고 부마 공숙좌가 그 자리를 이었는데, 오기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공숙자는 오기를 몰아낼 꾀를 내고는 무후를 설득했다. '오기 같은 인재를 붙잡아 두려면 공주를 시집 보내야 한다. 만약 위나라에 뼈를 묻을 각오라면 부마가 될 테고, 다른 꿍꿍이가 있다면 사양할 것이다.' 그리고는 공숙좌는 오기를 부르고는, 일부러 부인(공주)을 자극해서 개작살이 나는 추태를 연출한다. 이 광경을 본 오기는 식겁해서 공주 좆까부마 자리를 사양했고, 무후는 오기를 의심하게 되었다. 결국 오기는 나라로 떠나게 된다.

2.4 오기 가득한 최후

초나라 도왕(悼王)은 오기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재상 자리를 내주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어머니와 피로 했던 약속을 지킨 셈이다. 그러나 오자가 재상이 된 뒤에도 어머니의 묘를 찾아갔다는 기록은 없다.

당시 초나라는 영토에 비해 국력은 약했는데 젊은 시절부터 바라 마지않던 재상 자리에 오른 오기는 나름대로 부국강병책을 펼쳤다. 쉽게 말해서 초나라 왕족과 귀족들이 이름값으로 받아먹던 녹을 몰수해서 국고로 환원시킨 것이다. 정확히는 촌수가 먼 왕족과 귀족들의 특권을 없앤 뒤 탄탄해진 재정 덕분에 초나라는 군사력을 불리며 오기의 지휘하에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졸지에 특권을 빼앗긴 높으신 분들은 이를 갈고 있었다.

결국 도왕이 죽자마자 귀족들이 작당하고 오기를 죽이려고 난을 일으켰다. 죽음을 직감한 오기는 동귀어진의 꾀를 내어 죽은 도왕의 시신 위로 엎드렸다. 그리고 무수히 날아오는 화살에 고슴도치 맞아 죽었다. 문제는 왕의 시신도 고슴도치가 돼버렸다는 점이다..

당시 초나라의 법을 따르자면 왕의 몸에 해를 끼치는 자들은 사형[10]이었고 물론 시신도 해당했다. 꼭 법이 아니더라도 당장 왕위를 계승한 숙왕은 부왕의 시신을 훼손한 무리를 용납할 리가 없지만...결국 초나라 귀족 가문 중 무려 70여 세대[11]가 처형당했다고 한다. 흠좀무[12]

이 계략은 일찍이 초나라 성왕이 아들 상신의 반란[13]으로 죽게 되자 청웅탕[14][15]을 먹고 죽겠다 한 것과 나라 민왕을 이용해 제나라 국력을 갉아먹던 소진[16]이 누군가에게 암살당해 죽어가면서 자신을 역적이라 발표하고 저자거리에 효수하게 하여 범인을 잡은 것과 함께 춘추전국시대의 가장 유명한 권모술수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2.5 평가

위무후와 나눈 대화나 초나라 제도의 개혁, 평생 많은 전투를 치뤘지만 불패를 기록한 전적,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도 지혜를 짜내 원수들에게 복수를 하는 등 결코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량만 따진다면 중국사에 무수한 네임드 장수 가운데도 탑 클래스일 듯.[17]

그러나 사람을 한낱 출세의 도구로 보는 듯한 비정한 행태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높은 평가는 받지 못하고 있다.[18] 노나라에서 위나라로, 위나라에서 초나라로 섬길 군주를 자주 바꿔온 것도 그러한 평가에 한몫한다. 하지만 춘추 전국시대에 자신을 올바르게 평가할 사람을 찾기 위해 군주를 바꿨던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19]

그런데 정작 정쟁에는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부마가 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초나라 개혁을 위해 원한을 감수한 것도 그렇고 왕에게 고언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특히 뱃놀이를 하던 무후에게 위에서 언급한 말을 했던 얘기도 있고, 무후가 어전회의를 하고나서 오기에게 어전회의중에 내 주장에 이의거는 사람 없었음. 나 천재인듯 이러며 자랑하자 "초 장왕은 그 상황에서 오히려 자신에게 똑똑한 신하가 없으니 안타깝다며 한탄했기에 춘추오패가 될 수 있었다"며 자만하지 말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최훈삼국전투기에서 한컷 나오면서 패러디 되었다. 오자마녀 도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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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일러스트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등장, 통솔,지력,정치는 90대, 무력, 매력은 60대이다. 즉 무력, 매력은 제외하면 90대인 S급 고대무장. 전형적인 야전사령관형 무장이지만 잔혹한 행적이나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던 경력을 반영한 것인지 매력은 60대.

삼국지 11에서는 특기는 귀모 친애무장은 조조이다.

삼국지 12의 전법은 신화계. 능력치는 무력이 66이라서 그래서 총합이 조조, 악의, 오다 노부나가에 비해서 낮다. 물론 이들보다 지력이 휠씬 높다. 친애무장은 조조가 빠지고, 고증으로 초도왕과 친애무장이다.

2.6 오자병법

저서인 《오자병법》은 원래는 48편이었다 하나 무려!, 현재 전해지는 것은 6편 뿐이다. 현재 전해지는 《오자병법》의 내용은 문후와 무후와의 대화 내용을 담은 것이라 한다.

손자병법》에서 잘 다루지 않은 부분도 중요시하며 다뤘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오자병법과 손자병법을 같이 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20] 위 무왕 조조가 병가를 논할 때 손오를 병칭한 예가 자주 있다.
손자병법이 주로 형이상적인 설명이 주를 이룬다면, 오자병법은 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을 하기 때문에 손자병법의 설명이 구체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오자병법을 읽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의 차이를 청동기에서 철기, 전차에서 기마로 전환된 것과 연관짓는 주장이 있다.

청동기와 전차가 주력인 시절엔 군사력을 유지하는데 드는 부담이 철기와 기마 시대보다 더 컸고, 주 병력을 구성하고 있는 계층이 농민병이 아니라 왕족과 경, 대부, 사를 비롯한 상위층의 명예 전쟁 비슷한 형태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 시대에 쓰인 손자병법은 가급적 전쟁으로 손해를 입는 것을 최대한 지양하는 모습을 보인 반면, 대량생산이 쉬워진 철기와 기마병이 주력이 된 시대에 쓰인 오자병법은 전투를 통한 상대편의 전투의지 저해와 전투역량 살상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21]

오자병법은 조직내에서 조직원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나오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점술에 관한 것이다. 손자병법에서는 점술은 전쟁의 결과와 무관하므로 가치가 없다고 하였는데, 오자는 반대로 점술을 '잘 이용하면' 조직원들의 사기를 높일 수 있다고 하였다. (양쪽 다 점술을 믿지 않는것은 같으나 활용가치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 냉정한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오자병법 내용중 상당수는 조직내에서 인화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많다.[22]

심지어 '전장에서 패배한 자는 군법으로 엄히 처형하여 필사적인 각오로 싸우게 만들어라.'라는 문구가 심심찮게 나오던 것이 당시 병법서인데 오자 병법에는 '공을 세운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공을 세우지 못한 자를 격려해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 라는 말까지 한다. 위에서 말한 그 냉혈한과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
부국편에서는 5종류의 정예병을 만들면 크게 쓰일거라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종류는 다음과 같다.

특히 1,2 번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정예병으로 만들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거라 주장했다. 그야말로 털끝만큼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목숨을 걸고 싸우게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훗날 이르길 장수의 명령에 불길로 직행하는 자들이라고 한다.

또한 정치의 중요성 역시 언급한다. 일단 왕과의 대화로 내용이 채워지다보니 정치의 중요성에 대한 문답도 언급되며 아군이 우리나라의 정치가 옳고 적국의 정치가 잘못되었다고 믿게 해야 이길 수 있다는 명분 중심의 이론 또한 언급한다.

2.6.1 충무공 이순신과 오자

오자는 이순신 장군과 관계가 깊은데, 명량 해전 직전 이순신 장군의 명연설로 유명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는 구절이 바로 오자에서 인용한 것이다.[23] 그렇지만 오자 원문에 있는 표현과 이순신이 직접 한 말(정확히는 《난중일기》에 이순신이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적어놓은 표현)은 차이가 있다. 이 말의 정확한 출처는 오자 제3편의 <치병(治兵)> 제4장에 나오는 대목. 오자에 나오는 원래 표현은 "무릇 전쟁터란 한번의 실수로 시체가 되는 죽음의 땅이다. 필사적으로 싸우면 살아날 수 있고 요행히 살려고만 하면 죽게 된다.(凡兵戰之場 立屍之地 必死則生 幸生則死)"이다.

또한 저 말 뒤에 한 그러나 필생즉사 필사즉생에 묻혀 거의 아는 사람이 없는 '한 사람이 길을 막으면 능히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 일부당경 족구천부)'도 오자의 말을 이순신 장군이 어레인지한 표현. 이 말은 오자의 6번째 장인 <여사(勵士)>편에 나오는 말로 오자에 나오는 원래 표현은 일인투명 족구천부(一人投命 足懼千夫). 위무후가 오기에게 형벌과 상에 대해 물었을 때 오기가 다음과 같이 답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명량 해전 때의 유명한 두 표현이 오자가 출처였다는 것은 이순신 장군 역시 오자를 탐독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왕께서 공이 없는 병사 5만을 출동시키면 신이 군사를 거느려 대응할 것인데, 만약 임금께서 이기지 못하면 제후에게 웃음거리를 사고 천하에서 권력을 잃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죽게 될 적 한 명을 넓은 들에 잠복시키면 천 명의 군사가 쫓되 매우 겁내고 두려워할 테니, 왜 그렇겠습니까? 그것은 갑자기 뛰쳐나와 자신을 해할까봐 그럴 것입니다. 하여, 한 사람이 목숨을 던지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一人投命 足懼千夫).

오늘날 저 두 표현은 그저 간지 정신력이나 근성만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자주 오용되곤 하는 표현들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저 두 표현의 원 출처는 병법이다. 이순신 장군도 분명히 '병법에 이르기를'이라고 말하고 있다.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군대 운영방식과 군사이론을 설명하고 있는 병법에서 정신력이나 근성만을 주장할 리가 없다. 저 표현들을 뽀대난다거나 정신력 강조용으로 쓰기 전에 오자에 나온 원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필사즉생 행생즉사'도 흔히 '전장에서는 닥치고 목숨 걸고 싸우라'는 의미로만 알려져 있는데 이 표현의 진정한 의미는 한 번 작전을 세운 후에 그 작전 때문에 죽지는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은 하지 말고 주저없이 작전을 실행하라는 의미가 진짜 의미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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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혹은 벼슬을 구하려고 천금을 날리는 바람에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자, 홧김에 30여명을 살해했다고도 한다.
  • [2] 오기는 자신이 출세하기 위해서는 아내를 죽여야 함을 깨닫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장군으로 승진한다고 하였다. 같이 고생한 나날이 오래되었던 터라 그의 아내도 기뻐하였다. "정말 내가 장군이 되면 좋겠소?" 하고 묻자 아내는 당연하지 않느냐고 하였다. 그러자 오기의 얼굴이 일순 싸늘해 지며 "그렇다면 어쩔 수 없소."하며 아내를 죽였다. 그리고는 제나라 군대에서 사신이 오자 '처가의 나라인지라 싸우기는 껄끄러우니 적당히 협정하고 끝내자' 라며 안심시키고 기습하여 제나라 군대를 쓸어버린다.
  • [3] 이 부분이 바로 오자병법의 도입부. '난 평화를 사랑해서 댁 필요없는데?'라고 츤츤거리는 문후가 나오지만 오자가 '가죽 모아다가 갑옷 만드는데 쓰고, 대장간마다 병장기 만드느라 바쁜거 다 봤으니 거짓말 마시죠?' 라고 하자 바로 버로우.
  • [4] 2선급 예비병-공을 세우지 못한 병사들-으로 급조된 5만의 부대로 50만의 진나라 군대를 개발살내기도 했다. 수십만이 동원된 큰 전투만 76회 치뤘고, 그중 64회를 승리로 이끌었다. 나머지 12회는 무승부. 단, 이때의 진나라는 상앙의 개혁이 있기 전이었기 때문에 전국칠웅중 다른 6나라들이 벌벌 떨 정도로 무서운 나라는 아니었다.
  • [5] 하지만 위나라에서 밀려난 이유는 왕실과 인척이 되기위한 혼인을 거부했기 때문.
  • [6] 요즘 군대에서조차 보기 힘든 일인데, 그때 당시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그들이 받은 감동은 엄청났을 것이다.
  • [7] 군참에 병사가 우물을 다 파기 전까지는 장수은 목 마르다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잇는데 실로 젖절한 통솔자엿다. 이것이 바로 상승의 원동력. 오오 상승 카이난
  • [8] 거기서 끝났으면 좋았을텐데 오기는 거기다 더해서 '덕을 쌓지 못한다면 이 배에 있는 사람들이 언제 왕의 적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라는 말까지 더하는 바람에 사이가 틀어지고 만다.
  • [9] 田文. 맹상군의 이름과 한자까지 같아서 맹상군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다른 사람이다. 맹상군은 제나라 사람이고 이 사람은 위나라의 대신으로 위나라 문후의 스승이었던 전자방(田子方)의 아들이다. 여씨춘추에는 상문(商文)이라고 적혀 있다.
  • [10] 예전에 오자서가 초나라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에 채찍질을 한 사건 때문이었다. 참고로 도왕은 평왕의 5대손이다.
  • [11] 고우영의 십팔사략에선 약 500여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화살들에 각 집안의 문양이 박힌 화살을 쏴댄 것(오기를 누가 먼저 죽이느냐에 따라 이후로 되찾을 종부세 국고금을 더 가지자고 공로를 차지하고자 서로 누가 쐈는지 알게할 화살을 쏜 것)이 목을 매게 된 셈이다.
  • [12] 혹자는 '오자는 결국 마지막 싸움에서도 무승부를 기록했다'라고 하기도. 날아간 모가지 숫자만 보고 따지면 무승부는커녕 아예 대승이다.
  • [13] 원래 성왕은 포악하고 잔인하다는 상신을 태자로 삼지 말라는 신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상신을 태자로 삼았었다. 하지만 뒤늦게 후회하고 상신을 내쫒고 다른 아들 직을 태자로 삼으려고 했는데 상신은 고모 강미를 분기시키고 진상을 알아낸 다음 반란을 일으켰다.
  • [14] 곰 발바닥 요리를 말하는데 진흙에 싸서 굽고 약재에 한번 삶고 다시 진흙에 굽고 하는 식으로 3일은 굽고 쪄야 한다. 성왕은 반란을 일으킨 상신에게 곰발바닥을 먹고 죽게 해달라고 했지만 이것은 상신을 제압할 근왕 세력이 도달할 시간을 벌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간파한 상신은 성왕에게 죽음을 강요해 결국 성왕은 목을 매어 눈을 부릅뜨고 죽었다. 상신은 목왕으로 즉위했고 목왕은 성왕이 정사를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영왕(靈王)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눈을 감지 못하자 성왕을 추증하자 눈을 감았다고 한다. 이 영왕이라는 시호는 성왕의 고손자 비위가 형제였던 공자 기질(평왕)에게 쫒겨나 자살한 다음 받게 된다. 참고로 일찍이 성왕은 나라에 갔을때 정나라 문공에게 시집갔던 여동생 문미가 문공과 함께 딸들을 데리고 왕림했다. 문공은 정성을 다해 성왕을 대접했는데 초나라에 돌아갈때 문미의 두 딸, 즉 조카들을 데리고 가 버렸다.자매덮밥 이에 정나라의 한 대부는 성왕이 배은망덕하다면서 패권도 누리지 못하고 제명대로 살지 못할 거라고 했었다.
  • [15] 참고로 상신은 이후 초 복왕이 되었고, 그 아들은 바로 춘추 오패중 하나, 초 장왕이다.
  • [16] 소진은 나라 역왕의 어머니와 간통했는데 역왕은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두려워진 소진은 빠져나갈 목적으로 제나라에 자신을 보내주면 제나라 국력을 갉아먹어서 멸망시키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역왕이 허락하여 소진은 제나라에 가서 대륙판 도림이 되어 민왕에게 사치와 대규모 토목공사를 장려했다.
  • [17] 하지만 <이위공문대>에서 이정은 전술면에서 "손무가 짱임. 오기는 그만큼 안됨."이라며 그를 디스한다.
  • [18] 사마천이나 고우영, 정비석도 오자를 깠다. 어지간해서는 사견을 잘 안넣는 사마천도 그의 일화의 후에 그 비정함 때문에 몸을 망치니 슬픈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심지어 정비석은 자기 소설에서 오자가 손자한테 병법 배우러 왔다가 퇴짜맞는 장면을 넣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소설 손자병법에서 손자가 종기난 병사의 고름을 빨아주는건 실제로는 오자의 일화다.
  • [19] 90년대 어느 부대에서 한국군 정신교육 시간에 오기의 이런 일화를 소개하던 중에 한 사병이 "오기는 이득을 위하여 이 나라 저 나라로 갔고 출세를 위하여 아내를 손수 목베어죽였습니다. 그런 자의 일화를 정신교육에 쓰자는 건 그다지 안 좋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자 소대장이 심각하게 새겨듣더니 상부에 의견으로 보고한 실화도 있다.
  • [20] 오죽하면 사마천이 "군사문제로 이빨 까는 놈들 집집마다 손자 오자 다 갖춰놓았으니, 자세한 건 이하생략"이라고 할 정도. 한비자 역시 집집마다 손오병법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 [21] 철기 시대가 되면서 보병 중심의 병법을 썼다는 주장도 있다. 청동기 시대에는 전차가 주력이고 보병은 들러리 수준이었지만 철기 시대가 되면서 보병의 비중이 더 커졌고, 그런 시대에 쓰인 오자병법은 병졸들을 다루는 방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자병법에는 병졸들을 달래는 방법이나 제대하는 군인들을 다루는 방법, 전공이 많은 자와 없는자 양쪽 모두를 격려하는 방법등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 [22] 이에 대해서 오자가 유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비록 증자에게서 쫓겨나긴 했지만 한때 몸담았으니.. 오기의 일대기에 대해 적은 책에서는 그가 문후를 만나러 갈 때에도 선비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어서 병법가인지 선비인지 헷갈려했다고 하며 그의 병법서 곳곳에 유교의 영향이 보인다고 하였다.
  • [23] 하지만 오기의 인지도가 손무에 비해 낮아서 이순신 장군의 저 말이 병법서에서 인용했다는건 알면서도 오자병법에서 인용한 것이라는건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심지어 손자병법에 나온 말로 잘못 아는 사람도 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