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의 명장이자 병법가, 오기(吳起, BC 440~BC 381, 오자/吳子)
2 吳起 ¶BC 440~BC 381 2.1 젊은 시절 ¶그가 얼마나 오기가 쩔었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어렸을 적 자기보다 더 강한 깡패를 상대로 덤비다가 떡실신을 당했다. 근데 그 다음날 또 쳐들어와서 한판 뜨자고 큰소리쳤고 다시 떡실신당했다. 그러나 이 인간은 이걸로 끝나지 않고 계속 그 깡패를 쫓아다니면서 덤비다가 개발살나길 반복했고, 결국 그 깡패가 끝끝내 지친 나머지 데꿀멍했다는 얘기다. 한때 공자 제자인 증삼의 아들 밑에서 수학한 적이 있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공부에만 열중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스승이 묻자 위에서 말한 저 맹세를 이유로 댔기 때문에 쫓겨났다. 효를 중시하는 증삼 문하에서 '부모와 자식 사이에 피의 맹세를 했다'는 자체가 탐탁지 않았는데, 하물며 부모 장례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면야...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고우영 열국지에서는 증자 선생이 "저런 독한 놈은 차라리 멍청한 채로 남겨둬야 했는데 공부를 가르쳐줬으니 더 큰 일을 저지를 것이다."면서 한탄한다. 2.2 명장으로서의 면모 ¶결국 유학 대신 병법을 익히고 마침내 노나라에서 벼슬을 얻었는데, 마침 제나라가 노나라를 쳤다. 그런데 노나라 조정에선 오기의 재능을 알면서도 그 아내가 제나라 출신이라 선뜻 장군으로 쓰기를 꺼려했다. 이 말을 들은 오기는 주저없이 아내의 목을 베고 대장군 자리에 오른 다음 침입한 제나라를 개발살내버린다.[2] 비록 전공은 세웠으나 이 일이 빌미가 되어 노나라에서 쫓겨났고, 위나라 문후(文侯)를 만나 장수로 기용된다.[3] 오기는 진나라 침공을 막기 위한 요지 서하(西河)로 부임해 성을 쌓고 군사를 조련했다. 고우영의 만화에선 일개 태수로 좌천시킨 것처럼 묘사하지만, 여기는 진이 서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필요했던 요충지였다는 것과, 문후가 죽고나자 사흘을 통곡했다는 것으로 보아 문후가 오기의 재능을 간파하고 요충지에 보내 실력에 맞는 대우를 해줬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그리고 진이 어수선한 틈을 노려 침공을 개시, 다섯 개 성을 빼앗는 전공을 올렸다. 이렇게 오기가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와 대치할 무렵 전적은... 불패였다.[4] 병사가 등에 종기가 났다는 말을 듣자 입으로 고름을 빨아준 이야기가 바로 그것. 그 병사의 어머니는 이 이야기를 듣고는 남편도 오기의 그런 행동에 감동받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싸우다 죽었는데, 이젠 아들마저 오기를 위해 싸우다 죽게 생겼다며 오열했다고 한다. 혹자는 오기가 진심으로 병사를 아꼈다기보다, 자신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울 병사를 만들기 위한 용인술이라 본다.[6] 그리고 일반 병졸들과 똑같이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행군을 할 때에는 수레에서 내려 같이 짐을 지고 걸었다고 한다. 위의 제나라와의 전투때도 이런 모습을 보여줘 상대가 당나라 군대라고 오해하게 만들기도 했다. [7] 이 이야기는 군대에서 정훈교육 시간이나 지휘관이 훈화하는 시간 등에 단골로 언급되며, 같은 이야기가 육군 수양록에도 짤막하게 실려 있다. 하지만 그 외의 얘기(아내를 죽였다든지, 어머니 무덤도 찾아가지 않았다든지 하는 이야기들)는 전혀 해 주지 않아서 그냥 병사들에게 자애롭던 훌륭한 장군 정도로 알고 있던 2.3 위나라를 떠나다 ¶이후 문후가 죽고 무후(武候)가 즉위한다. 오기는 문후의 뒤를 이어 계속 무후도 섬겼다. 하루는 무후가 뱃놀이를 나갔다가 주변 경치를 보며 '강산의 험난한 지세는 위나라의 보물이다'하고 무후는 새로 재상 자리를 만들고 전문[9]을 앉혔다. 오기는 평소 자신의 공이 높다고 자부했기 때문에 내심 불복하고 전문을 찾아가 누가 더 잘났는지 따졌다. 비록 전문이 차분하게 타일러 데꿀멍했지만.
훗날 전문이 죽고 부마 공숙좌가 그 자리를 이었는데, 오기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공숙자는 오기를 몰아낼 꾀를 내고는 무후를 설득했다. '오기 같은 인재를 붙잡아 두려면 공주를 시집 보내야 한다. 만약 위나라에 뼈를 묻을 각오라면 부마가 될 테고, 다른 꿍꿍이가 있다면 사양할 것이다.' 그리고는 공숙좌는 오기를 부르고는, 일부러 부인(공주)을 자극해서 개작살이 나는 추태를 연출한다. 이 광경을 본 오기는 식겁해서 2.4 오기 가득한 최후 ¶초나라 도왕(悼王)은 오기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재상 자리를 내주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어머니와 피로 했던 약속을 지킨 셈이다. 그러나 오자가 재상이 된 뒤에도 어머니의 묘를 찾아갔다는 기록은 없다. 당시 초나라는 영토에 비해 국력은 약했는데 젊은 시절부터 바라 마지않던 재상 자리에 오른 오기는 나름대로 부국강병책을 펼쳤다. 쉽게 말해서 초나라 왕족과 귀족들이 이름값으로 받아먹던 녹을 몰수해서 국고로 환원시킨 것이다. 정확히는 촌수가 먼 왕족과 귀족들의 특권을 없앤 뒤 탄탄해진 재정 덕분에 초나라는 군사력을 불리며 오기의 지휘하에 강국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졸지에 특권을 빼앗긴 높으신 분들은 이를 갈고 있었다. 결국 도왕이 죽자마자 귀족들이 작당하고 오기를 죽이려고 난을 일으켰다. 죽음을 직감한 오기는 동귀어진의 꾀를 내어 죽은 도왕의 시신 위로 엎드렸다. 그리고 무수히 날아오는 화살에 당시 초나라의 법을 따르자면 왕의 몸에 해를 끼치는 자들은 사형[10]이었고 물론 시신도 해당했다. 꼭 법이 아니더라도 당장 왕위를 계승한 숙왕은 부왕의 시신을 훼손한 무리를 용납할 리가 없지만...결국 초나라 귀족 가문 중 무려 70여 세대[11]가 처형당했다고 한다. 흠좀무[12] 2.5 평가 ¶위무후와 나눈 대화나 초나라 제도의 개혁, 평생 많은 전투를 치뤘지만 불패를 기록한 전적,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도 지혜를 짜내 원수들에게 복수를 하는 등 결코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기량만 따진다면 중국사에 무수한 네임드 장수 가운데도 탑 클래스일 듯.[17] 그러나 사람을 한낱 출세의 도구로 보는 듯한 비정한 행태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높은 평가는 받지 못하고 있다.[18] 노나라에서 위나라로, 위나라에서 초나라로 섬길 군주를 자주 바꿔온 것도 그러한 평가에 한몫한다. 하지만 춘추 전국시대에 자신을 올바르게 평가할 사람을 찾기 위해 군주를 바꿨던건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다.[19] 그런데 정작 정쟁에는 초연한 모습을 보였다. 부마가 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초나라 개혁을 위해 원한을 감수한 것도 그렇고 왕에게 고언을 아끼지 않기도 했다. 특히 뱃놀이를 하던 무후에게 위에서 언급한 말을 했던 얘기도 있고, 무후가 어전회의를 하고나서 오기에게 어전회의중에 내 주장에 이의거는 사람 없었음. 나 천재인듯 이러며 자랑하자 "초 장왕은 그 상황에서 오히려 자신에게 똑똑한 신하가 없으니 안타깝다며 한탄했기에 춘추오패가 될 수 있었다"며 자만하지 말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2.6 오자병법 ¶저서인 《오자병법》은 원래는 48편이었다 하나 《손자병법》에서 잘 다루지 않은 부분도 중요시하며 다뤘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오자병법과 손자병법을 같이 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20] 위 무왕 조조가 병가를 논할 때 손오를 병칭한 예가 자주 있다. 손자병법이 주로 형이상적인 설명이 주를 이룬다면, 오자병법은 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을 하기 때문에 손자병법의 설명이 구체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 오자병법을 읽는 방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와 전차가 주력인 시절엔 군사력을 유지하는데 드는 부담이 철기와 기마 시대보다 더 컸고, 주 병력을 구성하고 있는 계층이 농민병이 아니라 왕족과 경, 대부, 사를 비롯한 상위층의 명예 전쟁 비슷한 형태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 시대에 쓰인 손자병법은 가급적 전쟁으로 손해를 입는 것을 최대한 지양하는 모습을 보인 반면, 대량생산이 쉬워진 철기와 기마병이 주력이 된 시대에 쓰인 오자병법은 전투를 통한 상대편의 전투의지 저해와 전투역량 살상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21] 오자병법은 조직내에서 조직원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나오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점술에 관한 것이다. 손자병법에서는 점술은 전쟁의 결과와 무관하므로 가치가 없다고 하였는데, 오자는 반대로 점술을 '잘 이용하면' 조직원들의 사기를 높일 수 있다고 하였다. (양쪽 다 점술을 믿지 않는것은 같으나 활용가치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 냉정한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오자병법 내용중 상당수는 조직내에서 인화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많다.[22] 심지어 '전장에서 패배한 자는 군법으로 엄히 처형하여 필사적인 각오로 싸우게 만들어라.'라는 문구가 심심찮게 나오던 것이 당시 병법서인데 오자 병법에는 '공을 세운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공을 세우지 못한 자를 격려해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 라는 말까지 한다. 위에서 말한 그 냉혈한과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 부국편에서는 5종류의 정예병을 만들면 크게 쓰일거라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종류는 다음과 같다.
또한 정치의 중요성 역시 언급한다. 일단 왕과의 대화로 내용이 채워지다보니 정치의 중요성에 대한 문답도 언급되며 아군이 우리나라의 정치가 옳고 적국의 정치가 잘못되었다고 믿게 해야 이길 수 있다는 명분 중심의 이론 또한 언급한다. 2.6.1 충무공 이순신과 오자 ¶오자는 이순신 장군과 관계가 깊은데, 명량 해전 직전 이순신 장군의 명연설로 유명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는 구절이 바로 오자에서 인용한 것이다.[23] 그렇지만 오자 원문에 있는 표현과 이순신이 직접 한 말(정확히는 《난중일기》에 이순신이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적어놓은 표현)은 차이가 있다. 이 말의 정확한 출처는 오자 제3편의 <치병(治兵)> 제4장에 나오는 대목. 오자에 나오는 원래 표현은 "무릇 전쟁터란 한번의 실수로 시체가 되는 죽음의 땅이다. 필사적으로 싸우면 살아날 수 있고 요행히 살려고만 하면 죽게 된다.(凡兵戰之場 立屍之地 必死則生 幸生則死)"이다. 또한 저 말 뒤에 한 "왕께서 공이 없는 병사 5만을 출동시키면 신이 군사를 거느려 대응할 것인데, 만약 임금께서 이기지 못하면 제후에게 웃음거리를 사고 천하에서 권력을 잃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죽게 될 적 한 명을 넓은 들에 잠복시키면 천 명의 군사가 쫓되 매우 겁내고 두려워할 테니, 왜 그렇겠습니까? 그것은 갑자기 뛰쳐나와 자신을 해할까봐 그럴 것입니다. 하여, 한 사람이 목숨을 던지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一人投命 足懼千夫). 오늘날 저 두 표현은 그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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