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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기전에 적합한 손자병법과 달리 장기전에 적합한 '오자병법'(吳子兵法)에 대한 간략한 고찰|

바래미나 2013. 12. 9. 18:07

단기전에 적합한 손자병법과 달리 장기전에 적합한 '오자병법'(吳子兵法)에 대한 간략한 고찰|

개요

고대 중국의 병법서이자, 무경칠서 중의 하나. 손자병법과 함께 무경칠서의 양대산맥으로 불린 병법서로, 흔히 손자병법과 하나로 묶어 손오병법이라 칭했다. 오의 한자가 吳인지라 명칭이 孫吳가 되는데 강동에 생겨났던 어느 나라가 연상되는 건 일부러 노린 것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손자를 비롯하여 춘추전국시대의 저명한 병법가 중 한명이자 정치가이기도 했던 76전 무패의 먼치킨 오기. 흔히 오자라 불리며, 오나라의 오자서와는 다른 인물이나 일반 사람들에게는 자주 오인당하곤 하는 모양이다.

내용이 거의 그대로 보존되어있는 13편의 손자병법에 비해 다수 유실된 것으로 추정. 한서 예문지에 따르면 오자병법은 48편이라고 하였다. 일설에는 같이 등재된 손자병법이 전부 82편이라고 하는데, 오자병법 48편(혹은 68편)와 손자 13편을 포함하여 기록된 것이라는 얘기도 있는데, 현재는 정확하게는 알수 없다. 현재 오자병법은 현재 도국, 요적, 치병, 논장, 응변, 여사 등의 6편만 남아있을 뿐이다.

내용은 위 문후나 무후와 오기의 대화 내용들. 문후나 무후가 묻고, 이에 오기가 대답하여 이 대답에 의해 생겨난 의문이나 곤란한 상황을 왕이 물으면, 오기가 입에 기름 바른 듯이 대답한다. 이들 내용에 따르면 무경칠서 대부분이 그러하듯 전략, 전술 뿐만 아니라 치국강병을 함께 논했으며, 유실된 부분에서는 권모술수나 계략 등을 함께 논하지 않았을까 추측되고 있다.

손오병법 최고의 전성기 당시에는 중국에서는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을 집집마다 한권씩 배치해놓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으니, 그 명성은 손자병법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할 수 있으나, 시대상 읽어봤으리라 추정되는 조조 본인은 그 자신이 봐온 병법서 중에서 손자병법이 가장 깊다고 발언했다는 점에서는 당대의 평가는 손자병법보다 조금 밀리는게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또한 대화 내용에 따르면 손자병법에 비해 좀 더 명확하게 수단과 방법, 전술을 논하는 편. 그러나 오기 그 자신이 상황에 따라 병법을 달리 쓰는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있을 뿐더러 용병술이 뛰어나다는 것은 알 수 있으나, 오자 그 자신의 용병관이나 전쟁관을 알기에는 남은 내용이 짧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의 차이를 청동기에서 철기, 전차에서 기마로 전환된 것과 연관짓는 주장이 있다.

청동기와 전차가 주력인 시절엔 군사력을 유지하는데 드는 부담이 철기와 기마 시대보다 더 컸고, 주 병력을 구성하고 있는 계층이 농민병이 아니라 왕족과 경, 대부, 사를 비롯한 상위층의 명예전쟁 비슷한 형태였다. 그랬기 때문에 그 시대에 쓰인 손자병법은 가급적 전쟁으로 손해를 입는 것을 최대한 지양하는 모습을 보인 반면, 대량생산이 쉬워진 철기와 기마병이 주력이 된 시대에 쓰인 오자병법은 전투를 통한 상대편의 전투의지와 역량살상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1]

오자병법은 조직내에서 조직원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나오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점술에 관한 것이다. 손자병법에서는 점술은 전쟁의 결과와 무관하므로 가치가 없다고 하였는데, 오자는 반대로 점술을 '잘 이용하면' 조직원들의 사기를 높일 수 있다고 하였다. (양쪽 다 점술을 믿지 않는것은 같으나 활용가치에 대한 평가가 다르다) 냉정한 것 같은 이미지와 달리 오자병법 내용중 상당수는 조직내에서 인화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많다.[2]

심지어 '전장에서 패배한 자는 군법으로 엄히 처형하여 필사적인 각오로 싸우게 만들어라.' 라는 문구가 심심찮게 나오던게 당시 병법서인데 오자 병법에는 '공을 세운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공을 세우지 못한 자를 격려해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 라는 말까지 한다. 위에서 말한 그 냉혈한과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 [3][4]
부국편에서는 5종류의 정예병을 만들면 크게 쓰일거라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종류는 다음과 같다.

특히 1,2 번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정예병으로 만들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거라 주장했다. 그야말로 털끝만큼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목숨을 걸고 싸우게 만드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할 수 있다.

허나 그 짧은 잔재만으로도 그가 굉장히 뛰어난 용병가였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을 정도임은 분명하다 할 수 있겠다.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아이템으로 등장. 고대무장오기가 들고 다닜다.

또한, 충무공 이순신장군도 오자병법의 애독자인것으로 보인다.명량해전 이전 그가 남긴 명언중 "필생즉사 필사즉생"은 이순신장군이 남긴 명언이 아닌, 오자병법에서 나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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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철기 시대가 되면서 보병 중심의 병법을 썼다는 주장도 있다. 청동기 시대에는 전차가 주력이고 보병은 들러리 수준이었지만 철기 시대가 되면서 보병의 비중이 더 커졌고, 그런 시대에 쓰인 오자병법은 병졸들을 다루는 방식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자병법에는 병졸들을 달래는 방법이나 제대하는 군인들을 다루는 방법, 전공이 많은 자와 없는자 양쪽 모두를 격려하는 방법등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 [2] 이에 대해서 오자가 유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있다. 비록 증자에게서 쫓겨나긴 했지만 한때 몸담았으니.. 오기의 일대기에 대해 적은 책에서는 그가 문후를 만나러 갈 때에도 선비들이 입는 옷을 입고 있어서 병법가인지 선비인지 헷갈려했다고 하며 그의 병법서 곳곳에 유교의 영향이 보인다고 하였다.
  • [3] 오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보통 냉혈한이 아니다.
  • [4] 하지만 오기는 일반 병사들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내서 그들의 환심을 산 적도 있으므로 놀랄 일은 아니다. 오기 항목을 다시 보면 오기는 자신의 병사들을 매우 아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