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壬辰倭亂, Japanese invasions of Korea, 1592년~1598년)
1 개요 ¶딱 조선 건국 200년 만인 1592년(조선 선조 25년)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친 일본군(왜군)의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 첫 번째 전쟁을 임진년에 일어난 난리라고 하여 임진왜란이라 부르며, 이후 한동안 전쟁이 잠잠해지자 명-일 간의 평화협상이 열렸으나 1597년에 협상이 결렬되어 일본군은 다시 재침을 시작. 이를 정유재란이라 부른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는 연호를 따서 분로쿠의 역(文禄の役, ぶんろくのえき), 정유재란은 케이초의 역(慶長の役,けいちょうのえき)이라고 불렀고 이후에는 조선정벌 혹은 조선출병이라고 부르며, 애초에 명을 친다는 것을 명분으로 하였으므로 닛뽄반자이틱하게는 대명정벌(大明征伐)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는 오버스러워 보인다.[1] 중국에서는 정식으로는 "만력조선역(萬曆朝鮮役)"이라 하고 항왜원조전쟁(抗倭援朝-)이라고도 한다(항왜원조란 조선을 도와 일본에 대항한다라는 뜻으로, 한국전쟁은 항미원조전쟁이라고 부른다). 신종 만력제 당시 명나라를 멸망의 길로 몰았던 대원정인 만력3정의 하나로 꼽는다. 7년 동안 일어났다 하여 백년전쟁처럼 7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국내게임인 임진록2에서는 영어로 Seven Years War라고 표기했다. 영어권에서는 일반적으로 Japanese invasions of Korea in 1592(1592년 일본의 한국 침공)라고 표기하나 Imjin War라고 표기하는 사례도 간혹 있다. Korean-Japanese Seven Years War라고 표기하는 사례도 소수 있지만 명칭도 길고 서양에서 '7년 전쟁'이라 하면 18세기의 7년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에 거의 쓰이지는 않는다. 이외에도 임진-정유재란을 통틀어 조일전쟁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명나라도 막대한 비용을 들여 참전한 전쟁이기에 동아시아 대전이란 표현을 써야 더 적당하다. 2 개전전야 ¶1592년 전국을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내의 불만 등을 억누르고 대륙을 차지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조선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이견의 여지가 많다. 사실 도요토미는 1585년 7월 간바쿠 취임 직후부터 대륙진출을 언급하였는데 그는 9월 히토츠야나기 스에야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명을 정복하겠다는 언급을 한바 있다. 그 이후로도 도요토미는 전쟁 때마다 자신의 어머니와 일가친척에게 우리는 이제 곧 한양에서 매년 여름을 보내고, 베이징에서 매년 겨울을 보낼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다고... 이런 대륙진출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전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가 여러번 언급을 했다고. 하지만 이런 언동은 초기엔 그저 말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 다만 전국시대를 통일하면서 넘쳐나는 직업군인 등 내부에 축적된 에너지를 외부로 돌릴 필요성은 있었을 것이며, 도요토미의 개인적인 야욕만이 아닌 일본의 통일 직후라는 내부 상황이 작용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후 1587년 6월 하카타에서 쓰시마 도주 소 씨(宗氏) 부자를 만난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을 명령했다. 일본이 통일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 국왕을 불러와 자신을 알현토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기한을 1588년까지로 못박았다. 불응할 경우 조선을 정벌하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쓰시마 도주는 조선으로부터 거부당할 것이 뻔한 선조의 입조(入朝) 대신 인질과 공물을 요구하자고 제안했지만, 도요토미는 선조의 입조를 고집했다. 결국 쓰시마 도주는 가신인 타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파견, 일본 국내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때 일본의 사신은 교섭이 여의치 않으면 병화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암시하였다(1587, 선조 20년). 하지만 조선 신료들은 ‘교화가 미치지 않는 야만국의 사신을 제대로 접대할 수는 없으며 바닷길이 험해 통신사도 보낼 수 없다’라는 답변을 하며 통신사 파견을 거부하였다. 도요토미의 첫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그는 1589년 여름까지 조선 국왕을 입조시키라고 쓰시마를 다시 채근했다. 따라서 1588년 10월과 1589년(선조 22) 6월, 쓰시마에서 두 차례에 사신이 왔다. 1589년 6월엔 신임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는 도요토미의 거듭되는 독촉과 조일 양국 충돌시 겪게될 고통을 우려하여 1589년 6월 하카타 쇼후쿠사(聖福寺)의 승려 겐소(玄蘇)와 함께 직접 조선으로 건너왔다. [2] 그 만남에서 쓰시마 도주는 조선 조정에 통신사를 파견해주도록 다시 간청한 뒤, 바닷길을 자신이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섰다. 조선과 도요토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조선 조정은 조건을 제시했다. 본래 전라도 진도 출신으로 왜구에 투항하여 노략질에 앞장섰던 사을화동(沙乙火同)이란 인물을 잡아 보내면 통신사 파견을 고려하겠다는 것이었다. 쓰시마는 사을화동은 물론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인들까지 송환했다. 그리하여 결국 류성룡과 이덕형의 주장으로 조선은 1589년 9월 일본의 통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늦게나마 일본의 변화된 정세를 탐지하기 위한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통신사는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 등으로 구성되었다. 황윤길은 서인, 김성일은 남인, 허성은 북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황윤길 일행은 1590년 3월 서울을 출발하여 7월에 교토에 도착했다. 하지만 일행은 도요토미를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가 원정에 나아가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1월7일 통신사 일행을 접견했던 자리에서 도요토미가 보인 태도는 방약무인 그 자체였다. 그는 황윤길 일행을 자신의 전국 통일을 축하하려고 온 대등국의 사절이 아니라 속국의 사신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 통신사 일행이 가져온 선조의 국서에 대한 답서를 제때 주지 않는 무례를 저질렀다. 귀국길에 받은 답서의 내용을 본 통신사 일행은 경악했다. 도요토미가 자신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칭했는가 하면 ‘명나라로 건너가 400여 주를 정복하겠다’고 운운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선조를 전하(殿下)가 아닌 각하(閣下), 조선이 보낸 예물을 조공물을 뜻하는 방물(方物), 통신사의 일본 방문(來日)을 입조 등으로 서술했다. 조선을 제후국으로 여기는 듯한 무례한 문구들이었다. 통신사 일행은 격분하여 수정을 요구했지만 일본 쪽은 제대로 고치지 않았다. 이런 일을 겪은 뒤 귀국한 조선 관리들은 일본이 전쟁을 준비중이라는 사실을 간파했으나, 당시 선조 통치하의 조선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극렬한 대립중이었다. 그로 인해 일본이 침략하느냐 아니냐조차 의견이 갈렸으며 결국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동인측의 판단이 맞는 것으로 사료되어 일본은 침략할 가능성이 없다고 결론났다고 배웠을 것이다. 만약 옛날 교과서로 배웠거나 국사를 수능 등의 이유로 대충 배웠다면 말이다.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며 풍신수길의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하였습니다.", 이 당쟁조차 발전적인 토론이 아닌 정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표면 상의 언쟁이었을 뿐, 사실 동인이나 서인이나 앞으로에 대한 대책은 제대로 세우지도 않았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었지만 최근의 연구결과로는 어느 정도 1555년에 일어난 을묘왜변 이후 일본의 침략 위험성을 인식하고서 일반인들의 편견과는 달리 꽤 많은 대책 마련을 했다.황윤길(黃允吉. 정사 正使, 서인)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풍신수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김성일(金誠一. 부사 副使, 동인)[3] 사실 조선 정부는 이미 일본의 침략 준비를 알고 있었고, 그 이전부터 급박하게 전쟁준비에 들어가는데[4] 선조에 의한 이순신의 10계급 특진 사건도 이 사건 이전이다(1590년~91년 2월). 물론 이순신의 커리어를 보면 오를 수 없는 자리는 아니었지만 부임을 하기도 전에 윗자리로 승진하는 식으로 몇달만에 10품이나 올랐다. 해자를 파고 성을 쌓고 무기와 군량미를 준비했는데 너무 가혹하게 전쟁준비를 한다고 각지에서 상소가 빗발치는 등 사실 민심이 흉흉했던 것은 사실이다. 경상감사 김수와 전라감사 이광은 성곽을 전면적으로 보수하고 군비를 적잖이 확충해 백성들의 불만을 크게 샀고(김수는 '전쟁광' 소리까지 들으며 탄핵받았다) 놀랍게도 선조 또한 방군수포의 폐단을 잡으려고 적잖이 노력했다. 다만 확신을 가진 전면적 체계적 대책 마련까지는 아니었던 듯. 예언가 남사고가 곧 전쟁이 일어난다고 예언을 해서 뭔가 오긴 온다는 건 예상했지만,[5] 그게 일반적인 노략질 수준에 그칠 거라고 예상한 것 같다. 일본의 침략 대비를 했다하더라도 그 규모를 오판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 이제까지의 일본의 공격은 몇백, 몇천 정도의 소규모 왜구들이 해안 지방을 노략질한 것 뿐이었는데 한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 나라VS나라 규모로 조선과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생각할 만할 사람이 있었겠는가? ... 사실 임진왜란이 터지기 이전 일본의 중앙정부는 전군을 끌어모아 타국을 칠 정도의 중앙집권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 그랬기에 임란 이전의 일본의 침략은 국가 단위의 대규모 점령전이 아닌 지방영주 등이 후원하는 소규모 침탈전 뿐이었다. 규모가 많다 하더라도 최대 2만. ... 하지만 전국시대를 거친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는 대규모 침략전이 가능했다. 실제 임란에서 히데요시는 10만 명이 훨씬 넘는 병력을 투입한다.[6] 실제로 어떤 선비는 조정의 전쟁 대비로 자기 고을 읍성을 보강하는 데 민폐가 심하다며 "우리 고을 앞에 큰 개천이 있는데 나룻배 없이는 건널 수 없으니 설마 적이 마을에 쳐들어올 수 있겠느냐?"며[7]성 개축을 중단할 것을 청하는 등 식자층 다수가 군비 확장에 극렬 반대했다.[8] 이이의 십만양병설이 유명하지만, 현재로서는 실제로 이이가 이런 주장을 했는가에 대하여 의문이 많다. 실록에는 단 한줄로, 나중에 서인이 정권을 잡은 뒤에 개수한 실록[9]에 "이이가 십만을 양병하자고 했으나 류성룡이 반대하였다"이거 달랑 한 줄이다. 또한 당대의 기록에는 나오지 않고 후대의 이이의 제자들에 의해 제기된 설이다. 게다가 병농일치 징병제인 조선에는 편제상 10만 이상의 군대가 전시에 징집될 수 있었다. 임진왜란 개전 1년 후 조선이 정규군만 16만 이상을 동원한 걸보면 10만 양병설은 어째 이상하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회의적이다. 오히려 이 분야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민덕기 교수는 이이의 발언 시점(1580년대)을 주목하며 이 당시에는 남쪽의 왜구보다 북방의 니탕개를 위시한 여진족의 위협이 더 위협적이었다는 점을 들어 십만양병설이 임진왜란을 겨낭하고 제안한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한편, 히데요시의 막료 이시다 미츠나리는 전국 통일 후 무사들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부하 제장의 여력을 해외에 사용하기 위해서 조선 침공을 계획했다고는 하나 그 가능성에 대해선 의문을 표했는데,[10] 히데요시는 늙은 모친에게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애초에 실패와 패전을 염두에 두고 계획을 짜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면 히데요시의 의도는 정말로 조선과 명을 정복하는 것. 성공하면 일본 내에서 자신에게 반항적인 군벌 따위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국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을 것이다.[11]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히데요시가 조선으로의 출병을 발표했을때 히데츠구 이하의 군대는 오슈진압에 동원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일본의 통일도 다 이루어지지 않았을때 조선 침략을 획책했던것. 통신사가 귀국한 직후인 1591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조선 침략의 기일을 정해 통보했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원정이 성공하면 명나라 땅 가운데 20주를 주겠노라고 약속하기도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1년 규슈의 북단 나고야(名護屋)에 조선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를 건설하는 공사에 돌입한다. 거리나 지형으로 볼 때 조선으로 가는 침략군을 실어 나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는 규슈의 다이묘들에게 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하고 가토 기요마사를 축성 책임자로 삼아 속도전을 벌였다. 1591년 10월에 시작한 공사는 두 달 남짓 만에 끝났다. 그동안 병력과 물자 수송에 필요한 큰 배를 건조하고 승조원들을 차출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작업이 병행되었다. 당시 히데요시의 동원 명령으로 나고야에 결집,후에 조선에 침략한 일본군의 주 병력 편제 및 참전 장수들의 목록. 흔히 세간에는 20만이 침략에 동원됐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6~17만 정도. 호왈해서 부풀렸을 가능성이 짚다. 당시 일본에서 히데요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약 30만 정도였다고 추정하는데 그 중의 절반의 병력이 동원됐다는 것은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에 나름대로 사활을 걸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2]
제 2군 22800명 (선봉 겸 함경도 침략)
제 6군 15700명(전라도 일대 침략)
기타 참전 인원
3.1 전쟁의 시작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4일)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700척 18,700명(경상우수사 원균은 90척, 경상감사 김수는 400척으로 보고)을 이끌고 제일 먼저 침공했다. 일본군의 침공을 미리 파악하지는 못했으나 동래와 부산진에서의 전투는 나름대로 치열했고, 송상현의 경우 그의 죽음에 일본군이 예의를 갖출 정도였다.[16] 그러나 동래와 부산진이 붕괴되고 난 뒤 경상좌수사 박홍이 전선을 자침시키고 도주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군은 말 그대로 도미노 무너지듯이 패퇴하기 시작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의 군대가 모스크바를 향해 전격전 하듯이 일본군은 한양을 향해 레이스를 벌이기 시작했다. 선봉장인 고니시와 가토의 경쟁이 치열했으며, 이 라이벌 구도는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까지 이어진다. 제장들은 고니시와 가토가 조선에서 자기들끼리 전투를 치를 것을 우려하여 그 둘이 같이 선봉을 서는 것을 반대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둘 중 1등한 한 명에게만 포상을 준다는 조건을 걸어 오히려 초고속 정복을 노리고 같이 선봉장을 세운 것이다. 침공지역을 방어하던 조선군은 완전히 초토화 되어 상부에 자세한 보고조차 하지 못한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침공이 시작된 후 나흘 뒤에나 소식이 서울에 알려졌다.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유사시 비상연락망으로 쓰이던 봉화가 전달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기상조건의 악화 때문이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날씨가 흐린 날 봉화를 피우는 실험을 했는데, 기록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도 불을 지핀 건지 어쩐 건지 알 수가 없었다.[17] 조선초기에 조선군의 방위체제는 진관체제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에는 제승방략체제로 전환된 상태였다. 진관체제는 각 지역을 분할해서 소규모 부대가 방위를 담당하는 체제로 빈틈없이 방어가 가능하고 여러 겹의 방어선이 구축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대규모 적에게는 각개격파당할 수 있는 약점이 있었다. 반면, 제승방략체제는 각지의 예비대가 전시에 하나의 전략거점으로 집결하고 이를 지휘할 사령관이 이 집결된 대군을 지휘하는 형태라서 전면전에 강하지만, 이 병력이 괴멸되거나 적이 예비대가 집결하기 전에 고속돌파를 시도하여 성공하면 후방이 바로 노출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리고 제승방략의 이 단점은 임진왜란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실제로 초기에 대구에 수만의 방략군이 매뉴얼대로 집결했으나 경장 이일이 도착하기도 전에 일본군이 내습, 조선군은 제대로 대응도 못하고 와해되었다. 이일 또한 자신이 지휘할 군대를 보기도 전에 일본군과 맞닥드리게 된다. 이일이 자신이 지휘할 부대를 접수하기 위해 데리고 갔던 장기군관들 중 상당수가 탈영할 정도였다. 후에 명군의 도산전투의 과정을 관찰한 조선의 이시언이 후퇴하는 일본군을 향해 "조선군 도망치듯이 한다."라고 자조적으로 뇌까렸던 것처럼, 조선군은 훈련도도 사기도 형편 없이 낮아 전국시대를 거치며 경험치가 쌓일대로 쌓인 일본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다만 조선을 무조건 폄하할수 없는게, 조선은 그야 말로 200년간 태평성대를 누려왔고 일본은 100년 동안 치고 박고 싸운 전국시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군은 오위진법을 기본 전법으로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는 북방기마민족과의 투쟁에 적합하도록 고안된 대기병전술로 철포 보병 위주의 일본군을 상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러나 명나라는 이미 북로남왜의 변으로 왜구들과 지긋지긋하게 부대낀 경험을 바탕으로 척계광이 개발한 대보병전술인 절강전법을 채택하고 있었다.[18] 이후 조선은 대보병전술인 절강전법을 받아들이고 훈련하게 되었다.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 2만 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 1만 1000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의 9,000여 수군 등 총병력은 약 17만이었다.
3.2 정규군의 붕괴와 파천 ¶상황이 그 상황인데도 당시 조선 조정은 삼포왜란 같이 가벼운 왜구들의 준동으로만 파악하고 있었고, 조선 최고의 명장 중 하나라 칭송받던 이일을 내려보내 간단히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일의 군대가 먼저 상주에서 가토에 의해 패배하였고, 당황한 조정은 북방에서 명성을 날린 신립을 보내나, 그 역시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자 조정은 그제서야 사태의 시급함을 깨닫게 된다. 신립의 기병의 수효는 사료에 따라 다르나 5천에서 1만 정도로 보이고, 대략 8천으로 보기도 한다. 이 부대는 창기병 편제가 거의 없는 궁기병 위주였다. 궁장 경기병으로 유명한 몽골군이 병력의 5분의 2는 항시 중기병으로 무장한 것을 생각하면, 조선군 기병의 충격력은 상당히 빈약한 상태였다. 조선의 편제상 창기병은 반드시 일정 비율을 갖추어야 했지만, 세조 대에 조선군의 인사고과가 철저히 궁시 위주로 재편되면서 창검의 운용은 사실상 '잊혀'졌고, 창기병 역시 모조리 궁기병으로 대체됐다. 신립은 전투에 앞서 넓은 들판으로 적을 끌어내어 기병전을 벌이려고 하였으나 패배했다. 신립이 그러한 탄금대를 전장으로 선택한 것에는 당시 신립이 지원받았던 병사들의 기량 문제가 크며,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하고 심지어 행군중에도 탈영할 정도였고, 이러한 병사들을 이끌고 싸우기 위해 신립은 배수진을 선택했다는 주장도 있는 반면에 신립이 기병대를 지휘하며 명성과 경험을 쌓은 점을 고려할 때 신립이 북방유목민과의 전투로 단련된 자신의 경험을 살려 싸울 수 있는 평지를 고르다 보니 전투장소가 탄금대로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탄금대 전투 당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바람에 질척거리는 땅 때문에 기병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어 신립은 지리멸렬하게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신립이 받았던 병사들이 저질이라는 말은 연려실기술에만 나오는 말로, 선조수정실록에는 이들은 한양을 지키던 중앙군과 군적에 올라간 병사들로서, 전마를 지급받은 기병 8천여명으로 구성된 부대였다. 거기에 경기도와 충청도의 정병 8천과 합한 1만 6천의 대병력이었다. 따라서 신립의 과오 덮어주기용이다, 기병은 급조해서 만들어지는 병종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다만 조선전기 중앙군이란 것이 이 수준임을 생각하면 중앙군부터가 제대로 된 군대가 아닌 오합지졸일 가능성이 크다. 신부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이 탄금대 전투가 묘사되어있는데, 조선군이 8만이라는 점은 의구스러우나 반월진으로 돌격한 조선의 기병대가 양익에 조총사격을 받고 후퇴했다가 1-2차례 재공격을 가했으며, 일본군이 붕괴하지 않고 창검 따위로 조직적으로 대응하자 조선군이 붕괴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신립의 공격은 3차에 걸쳐 진행되었으나 1, 2, 3차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조선군은 탄금대에서 대패했으며, 일본측 기록에서는 수급 3천개의 전과를 올렸다. 이후 신립이 북방에서 이끌던 정예병은 일본군에 대한 정보 부족과 이원화된 지휘체계의 혼돈속에서 임진강 전투에서 대부분 소실당하고 만다. 다행히 전부는 아니었고 남아 있던 조선 기병들은 정기룡 등의 지휘를 받으며 대규모는 아니지만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된다.[20][21] 이런 저런 와중에, 동원 가능한 조선 전투병은 대부분 와해되고 나머지는 여기저기서 절망적인 방어전을 펼치는 상황이 되어 결국 선조는 수도 한성을 버리고 북으로 피난을 택한다.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北兵使)였던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20일 만인 5월 3일 서울이 함락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양에 도착했을 때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일본의 전투 방식은 성주가 끝까지 성을 지키고 있다가 성이 함락되면 할복하고 주민들은 새로운 성주에게 복종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인데 조선은 성주라는 놈이 성을 버리고 도망친 반면 그 밑의 백성들은 새로운 성주를 죽이려고 덤볐다. 조선과 일본의 이런 현저히 다른 사고방식에 고니시 유키나가는 굉장히 황당해 했다.[22] 3.3 반격의 시작 ¶그러나 전라도를 중심으로 재야 인사 곽재우, 김덕령, 70세의 고령인 고경명 등이 이끄는 의병이 활발히 일어나고[23](적의 실질적 점령지는 경상도 뿐이었음), 일본으로부터 건너오는 일본군의 물자와 병력을 수송하던 해군을 이순신 장군이 번번히 전멸시켜버리자 전황은 고착된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과 의병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다 아래에서 설명할 권율 장군과 김시민 장군의 활약으로 육로에서 전라도를 잘 버텨냈기 때문에 수군기지도 운용 가능했던 것. 이 과정에서 광해군이 급히 세자로 임명되어 분조를 이끌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보여줘, 광해군의 인기가 상당히 올라갔다. 반면 임해군의 경우 부하였던 국경인이 임해군의 처신[24]에 불만을 가지고 임해군을 넘겼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당시 선조는 분조를 맡긴 자기 아들 광해군마저 경계하는 형상을 보인다.[25] 왕이 몽진하자 도성에 분노한 민중이 들이닥쳐 방화와 약탈이 발생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방화의 주체를 간민과 난민으로 지목하고 있다. 불은 장예원[26]에서 시작해 곧 전체 궁궐을 태워버렸다고 한다.[27] 의주로 피난간 선조는 조선을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가려고 수 차례 요동 총독에게 가서 요청하였으나, 이를 한심하게 느낀 명이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사실상 오지말란 소리다)하고 배를 전부 자기들 쪽으로 가져가 버리자 뜻을 단념했다. 이 때 여진을 이끌고 세력을 넓힐 기회를 노리던 누르하치가 입지를 넓히기 위해 여러 차례 원병을 제안했으나 선조는 이를 거절했다. 임란 당시 동북아의 외교적 중심국가이자 최강국은 명실상부히 명이었고 명의 영향력 하에 있다고는 하나 그리 우호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누르하치의 원병을 받아들이는 것은 의심받기 좋은 일이었기에[28] 고려하기 힘든 정치적 모험이었을 것이다. 3.4 명의 참전과 역할 ¶아무튼 그 사이 조선의 연이은 요청으로 명도 나름대로 심각성을 느끼고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 참전했다. 지정학상으로 광활한 요동에서 일본군을 막기 보다는 영토가 비교적 협소한 조선에서 일본군을 막는 것이 전략적, 전술적으로 자국에 유리하고, 북로남왜의 화로 명에게 큰 위협이 되었던 일본이 한반도를 배후지로 삼아 공격을 가한다면 위기가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참전 초기에는 위세 등등히 등장해 금새 일본군을 몰아낼 줄 알았으나 오히려 일본군이 종전 협상을 요청할 때마다 그걸 들어주느라 시간을 끌어서 전쟁이 7년이나 지속되게 된 큰 이유가 되었다. 조선군이야 어떤 방법을 쓰던 일본을 몰아내고 싶었겠지만, 명군은 일본이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는 입장이였기 때문에 싸우지 않고 공을 세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외교를 담당한게 심유경인 게 문제. 제1차 조승훈의 5천명은 평양성 공격에 실패(7월), 제2차 이여송이 이끄는 4만명이 12월 압록강을 건너 다음해 정월 조선군과 합세하여 최신 대포로 포격해 평양성을 탈환(1593.1.27)하고 남하하다 고양 벽제관(碧蹄館)에서 대패, 개성으로 퇴각한 뒤 전선은 임진강을 경계로 교착상태를 벌인다. 하지만 명군의 참전은 분명히 의의가 있었고, 특별한 케이스인 벽제관 전투 같은 몇몇의 주요 패전을 제외하고는 못 싸운 것이 절대 아니었다. 특히 이여송이 평양을 우수한 화력과 기술력, 전략으로 점령했을 때, 일본군은 정말 심각한 패닉에 빠졌고 조선군의 사기는 고조되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상대가 명군이라서 도망치는 경우도 많았다. 결론적으로 명군은 그럭저럭 제 역할을 해냈으며, 명군의 참전으로 인해 조선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3.5 명군의 악평 이유 ¶이처럼 참전한 만큼의 몫을 톡톡히 해준 명군이지만 후대에 이르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민폐만 끼친 양 묘사되기도 한다. 이는 명군의 입장상 적극적인 전투 참여가 적었고 벽제관 전투에서 패전하여 전선을 고착화시킨 것도 있지만, 명군의 심각한 약탈[30]과 엉망진창인 군기의 역할이 컸다. 애초에 명은 중기 이후로 공적 시스템을 통한 병참을 포기하고 이를 민간에게 맡기는 체제를 구축했다. 즉, 명의 중앙정부가 직접 군량을 수송하는 것이 아닌 은으로 선금을 내고 민간 상인들에게 군량 수송을 맡기거나 병졸들에게 은을 지급하여 이것으로 알아서 식량을 사먹도록 한 것이다. 이는 명이 은본위 경제체제를 구축한 것과 맞물려서 상당히 효율적으로 돌아갔고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얻었다.[31] 그러나 이러한 명의 병참체계는 조선에서는 활용할 수가 없었다. 조선은 아직 현물경제체제를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2] 즉, 명은 자국 내에서 하던것처럼 은으로 병참을 할 수 없다. 조선에는 그게 가능할 정도로 상업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명은 자국 상인들을 끌어들여 이를 해결하려 했지만 조선까지는 너무 멀었기 때문에 협조를 많이 얻지 못했고 협조한 상인들도 이제까지 하던대로 요동까지만 식량을 수송했다. 명은 조선에게도 식량을 사들일 것과 은광을 개발해 은을 채굴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조선 입장에서 이를 해결하는 것은 무리였다.[33] 여기에 이런 군량 수송을 맡은 명 상인들이 식량을 착복하는 행위가 자행되어 보급문제를 심화하기도 했다.[34] 이러한 문제는 조선에게도 존재했다. 조선의 수송체계는 수운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수운체계 하에서 평안도는 열외였기 때문에(공교롭게도 '명의 사신을 맞이할 때를 위해서' 라는 이유였다) 수운이 제대로 형성된 지역이 아니었고,[35] 따라서 기껏 요동까지 식량을 실어와도 이걸 수운을 통해 전선까지 운반할 능력이 마련되지 않은 것이다. 황해도 일대에서 배를 끌어왔지만 이것도 수량이 부족했다. 결국 육상으로 병참을 대야 했는데... 그 결과 수십만의 조선군 및 백성들이 식량을 나르다 지처서 죽는 상황이 전개되 버린 것이다.[36] 이는 전근대시기 육상보급의 한계라 볼 수 있다.[37] 임진년 17만에 달하는 군대를 동원했던 조선이 이후 동원력이 점점 떨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은 말 그대로 필사적으로 식량을 공출했지만 가능한 상태가 아닌 것이다. 결국 현지보급을 통해 병참을 수행하는 것이 현실적이지만, 이미 임진년 전란을 거치며 관야에 비축한 식량은 남아난 게 없었다는게 또 문제. 약탈없이 현지보급이 이루어지려면 사회지도층 내지는 관야에서 식량을 제공해야 하지만 이미 그런게 남아난 상황이 아니니...여기다 상국이란 이유에서 자존심까지 매우 강했다. 이러니 약탈이 안이루어질리가. 여기에 명군의 군기마저 매우 나빠서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실제로 조선은 명군에 대해 그나마 군기가 살아있던 남병은 약탈이 덜한데 북병은 약탈이 너무 심하다면서 남병 중심으로 지원군이 왔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이 부분은 징비록에서도 수시로 드러나고 있는데, 불랑기와 각종 화전으로 무장한 명나라 남방군은 승률도 높고 조선군과 같이 싸우는 데 적극적이었던 데 반해 정작 이여송이 직접 통솔하는 북방군은 모든 면에서 무능함이 크게 드러나고 있으며, 심지어 남방군 출신들이 전공을 세우는 걸 시기해 전장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억눌러버렸다. 조승훈과 이여송이 대표적인 북군 장수에 해당하며 유정은 남군에 해당한다. 불멸의 이순신에서도 명의 약탈은 조승훈의 북군에 대해 묘사하고 있고 조선에서도 남군을 원군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할 지경이었으니... 이런저런 이유로 명군은 심각한 수준의 약탈을 자행했고, 이것이 명군에 대한 이미지를 극히 나쁘게 하여 후세에는 한것도 없이 짐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실제로 약탈의 정도만 따지면 명군이 일본군보다 더 심했다고도.[38] 3.6 교착 상황과 강화회담 ¶임란 최대의 분수령인 이치 전투에서 권율 장군이 일본군을 격파하고,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을 지켜냄으로써 전라도 방어선을 지켜내자, 일본군도 더이상 진격하기 힘들어져 물러나는 분위기가 되었다. 진주성이 함락되었던 2차 진주성 전투(1593년 6월)는 그 물러나는 가운데 히데요시의 분풀이[39]와 일본군의 세력과시를 위해 벌어진 전투이다.[40] [41] 주로 조선군은 진주대첩때의 두배 정도인 6~7천여 병력으로 방어전에 나섰으나[42]9만명이 넘는 적[43]을 상대로 9일동안이나 항전했으나 황진 등이 어이없게 전사하고 갑작스런 폭우로 성벽 일부가 무너지면서 [44]함락되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학살되었다. 또한, 김덕령, 곽재우, 정문부 등의 의병들과 정기룡 같은 정신차린 관군들이 반격을 시작했고, 사명당이 승군을 조직하며 일본군을 곳곳에서 격파하고 향토의 방위를 책임진다.[45] 이 과정에서 의병중 다수가 경험 부족과 전략적 결함으로 전사하기도 했다. 조헌과 고경명이 그 예. 1593년이 되어 행주 대첩의 승리로 한양을 되찾고 전선이 안정화되자 조선은 의병, 수군 제외하고 13만(!!)대군을 뽑는 기염을 토한다(호구가 아니다 호구가!).[46] 그러나 평화협상이 질질 늘어지고 소강상태가 계속되다 보니 17만5천의 군사는 3만5천 정도로 줄어드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이 있다.
사실상 일본의 승전을 의미하는거나 진배없는 협상이다. 히데요시가 단순히 '정치적 이유'로만 이 전쟁을 벌인 것은 아니라는 것. 특히 굵은 글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얼마나 망상에 젖어 사는 위인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매우 터무니 없는 조건이다. 명나라의 조건은 심유경은 이 개념상실한 요구를 명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알고 더군다나 이 개념상실한 요구를 명이 알았다가는 명나라가 어떤 패닉 상태에 빠질 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측의 반전파와 협의해 거짓으로 본국에 보고하여 명은 봉공안에 의해 1596년 도요토미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칙서와 금인(金印)을 보냈다. 고니시 등은 이를 다시한번 '일본측의 요구를 적극수용'하는 것으로 위조해 도요토미의 허락을 구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나, 어찌된 일인지 위조한 내용대로 글을 읊기로 한 승려 사이쇼 쇼타이(西笑承兌)가[48] 명의 봉공안을 그대로 읽어버렸다. 히데요시는 진노했고 화의는 결렬되었다. 그리고 이듬해(1597) 정유년, 일본군은 재차 침입하게 되었다.[49] 3.7 정유재란과 전쟁의 종결 ¶정유재란에서 일본은 총병력 14만(특히 수군이 강화되었다)의 군세로 다시 조선을 침공했다. 조선에서도 하삼도를 청야하며 명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수군을 보내 배후를 차단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그 때 일어난 것이 칠천량 해전(…). 자세한 건 해당 항목과 원균 참고. 조선 수군이 없어지자 일본군은 바람같이 진격해서 한 달만에 남원과 전주를 함락시키고 좌군은 전라도 전체를 점령하기 위해 남하하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상한다. 정유재란 당시의 군편성 이 때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코 베기가 시작됐는데, 남원성 전투 전후로 일본군 장수들이 바친 코 숫자가 삼천오백개가 넘는다. 자세한 건 귀무덤 참조. 장수들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죽이지는 않고 코를 베기도 했고, 할당량(?)을 채운 후에는 식량을 주고 안전을 약속하는 등 백성들에게 미화적인 모습을 보인다. 난중잡록을 보면 이것 때문에 항복한 백성들이 상당히 많았다고. 더불어 조선의 백성들이나 관리들을 많이 잡아갔는데, 전리품의 목적 외에도 그만큼 일본 서부도 인구가 많이 줄었기 때문.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 14,700명 제2군 가토 키요마사 10,000명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 10,000명 제4군 나베시마 나오시게 12,000명 제5군 시마즈 요시히로 10,000명 제6군 쵸소카베 모토치카 13,300명 제7군 하치스카 이에마사 11,100명 제8군 모리 히데모토,우키타 히데이에 40,000명 조선군은 흩어지거나 산성에 틀어박혀서 고립되었고, 명군은 남원, 전주, 충주 등에 분산돼 있다가 각개격파 당하거나 도망쳤다. 이렇게 순조로운 진군이 가능했던 것은 임진왜란과는 다르게 강으로 보급이 가능했기 때문. 이에 맞설 명군은 오천 안팎으로 적이 경기도를 노리는 상황까지 가자 명군은 기병 사천을 출격시키는데 이것이 직산 전투이다. 이 때 명군이 적을 크게 격퇴했다고 하는데 실록을 보면 그 이후에도 일본군이 직산 근처에 남아 있거나 오히려 진격해 와서 조정이 혼란에 빠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50] 아무튼 직산 전투가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시킨 것은 확실하며 9월 중순에 적이 갑작스럽게 후퇴하자 조정은 유인이 아니냐며 다시 혼란해 할 정도였다. 일본군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후퇴했는지는 논란거리지만, 대체적으로 직산 전투로 인해 명군이 정면으로 맞설 움직임을 보였고, 히데요시의 명령에서 한양을 무조건 공격할 필요는 없다고 한 것 등으로 짐작된다.[51] 당시 종군승이었던 케이넨의 일기에는 한양을 치기 위한 회의를 했다, 한양으로 가는 길이 즐겁다 같은 말이 나오고 9월 중순부터 "항구"로 가기 위한 후퇴를 하는 모습도 나온다. 즉 이 때 일본군의 후퇴에는 해상으로의 보급이라는 이유가 있었고, 보급만 잘 된다면 한양을 노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그러니까 그노무 보급만 잘 된다면. 이 때 벌어진 세기의 전투가 바로 그 이름도 아름다운 명량 해전. 이걸로 서해로의 보급 가능성은 완전히 끊기고 일본 수군은 무안까지 살짝 진출했다가 후퇴한다. 육군도 보급 가능성이 완전히 끝났으니 그대로 후퇴. 4 임진왜란의 이해 ¶이 일련의 사태를 이해하려면 몇가지 지식이 필요한데... 1. 당시 일본의 정부 체제는 조선이나 명나라 같은 중앙집권식이 아닌, 힘 있는 영주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린 연합 성격이 강하며, 그중 제일 강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군사력 역시 통합체제로 동원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각자 자신의 영주와 직속 상관에게만 충성했으며, 협력과 협조보다는 서로 반목하는데 더 능했을 정도다. 그로 인해 조선정벌에 나선 병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속병력들로 대략 20만 내외로 추산되며, 그나마도 이 20만조차 1군과 2군으로 나뉘어 서로 협력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는 개무시당하고, 1군 선봉이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2군 선봉이던 가토 기요마사의 반목은 매우 극심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결국 편을 갈라 전쟁을 하는 지경에 이른다(가토 기요마사 등은 서군 실세가 이시다 미츠나리라는 이유로 동군에 참가. 실제 서군의 대장은 흔히 알고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아니라 모리 데루모토였다. 그러나 실세가 이시다 미츠나리인 이유는 모리 데루모토는 말 그대로 바지 사장이기 때문. 자세한 내막은 관련 인물들을 볼 것).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그 이후 벌어질 파워 싸움을 예측하고 전 병력을 물린 덕에 조선은 살아난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과적으로 자기 살을 깎아먹은 탓에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를 만들어준 꼴이 돼버린다. 2. 명나라는 조선을 돕느라 막대한 전비와 군사력을 동원해 이후 멸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멸망까지는 몇 십년이 걸렸다. 물론 원인 중에 하나이긴 하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정부와 용감하고 굳센 의병이라는 널리 퍼진 통념과도 달리 전쟁은 어디까지나 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정부가 주도했다고는 해도 가장 치열했던 호남과 영남 전투에서는 의병들이 전력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로 많은 활약을 보였는데, 비정규군이 주요전력 중 하나로 활약했다는 상황만으로도 이미 개그다. 이들의 역량을 체제 안으로 결집시키지 못했다는 점에서도 비판의 여지가 있으며 무엇보다 개전초 정부의 대응은 그야말로 변명의 여지가 없는 무능의 결정체였다.
5 전후 ¶임진왜란은 분명 조선이 승리한 전쟁이다.링크 침략군을 모조리 몰아냈으니까. 더구나 초기를 제외하고는 왜란의 전투 범위가 개전 초 1~2년을 제외하고는 경상도 남해안에서 벌어진 국지전에 그쳤다.[53] 하지만 피해도 (당연히 전장이 된) 조선이 가장 컸고, 이후 조선은 인구수와 농지가 대폭 감소한다. 농지가 무려 66%나 감소했으니 상당히 치명적이다. 이 전쟁 최대의 수혜자는 어부지리를 얻은 후금(뒷날의 청)의 누르하치와 도요토미 정권을 없애고 260년의 에도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 20세기까지도 조선시대를 임란을 기점으로 전/후기로 나누었던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의 한국사학계는 사림이 중앙 정치를 주도했던 16~17세기를 하나의 시기로 간주, 조선 시대를 전/후기의 양분하기보다는 전/중/후기로 나누어 보는 시기구분론을 채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왜냐하면 이 중기에 임진왜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변화가 그다지 없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중심으로 조선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전후로 나누는 대신 관학파/사림파/일당독재의 3단계로 구분하는 구분법을 주장하였고, 현재 국사교과서도 이를 따르고 있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에 의한 전체적인 국력소모도 명과 조선에 비교해서 별로 없었고, 그냥 히데요시 집권기의 분탕질 정도로 생각하기에 임진왜란, 그러니깐 케이쵸의 역을 제대로 알고있는 사람이 드물다. 일본 전국시대를 다룬 작품에서도 이 부분은 이순신만 짧게 언급하고 히데요시의 삽질이라는 것만 언급하고 넘어간다. 또 전후 10만여명이 포로로 끌려갔으며, 약탈된 문화재도 상당수 있다. 특히 일본의 도자기 공업이 급성장하여 세계 도자기 시장에서 중국을 밀어내고 1위를 석권했으며, 유럽과 아라비아에서 큰 위세를 떨쳤다. 곧바로 명청 교체기가 도래하면서 유럽인들은 더 이상 전란으로 혼란한 중국에서 도자기를 수입할 수 없었다. 때문에 대체 공급처를 필사적으로 찾았고 여기에 일본의 이해가 맞아 떨어져 일본 도자기가 유럽에 수출되게 된다. 일본은 임진왜란으로 확실히 이득을 봤다. 돈도 벌고 혹도 떼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중일 동아시아 3국 모두에게 큰 영향을 끼친 국제 전쟁. 조선은 "쇄환사"라하여 포로 귀환에 힘썼으며, 이 과정에서 사명당이 활약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바로 직후에는 성사되지 않고 쓰시마를 통해 제한적으로 돌려받다, 1607년 기유약조 이후 조선과의 관계 정상화에 힘쓴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본격적인 포로송환이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1655년 효종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일본 영주들은 미녀나 장인의 경우 쇄환사가 일본에서 조선백성들을 찾기 위해 찾아오면 고의로 이들을 감추고 조선포로들에게도 이 사실을 숨겼다.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들은 아직도 고향을 그리며 바다를 향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지키고 있다. 또한 메이지 유신 전까지도 조선식 성씨를 썼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으로 잡혀간 포로들 중에는 조선에 돌아오기 싫어했고 일본에 정착하며 살고싶어 한 사람들도 있었다. 링크 실제로 고향을 그리워한 사람도 있었지만 반대로 돌아가길 거부한 사람들도 있었다. 6 일본에서의 평가 ¶일본에서 임진왜란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징비록이다. 에도 시대에 유학이 번성하면서 징비록도 일본에 건너갔는데[54] 현재까지 일본인들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일본에서 임진왜란에 대한 연구가 더 잘 돼 있다는 떡밥이 간혹 투척되는데 넘어가지 말 것. 물론 일본 장수들의 상황은 더 자세하고 정확하겠지만, 임진왜란 전개에 관해서는 거의 이 책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이순신과 히데요시 등을 보면 알 수 있듯 임진왜란을 히데요시와 이순신의 전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며 그를 높게 보든 낮춰서 보든간에 가장 큰 비중을 둔다. 사실상 이순신 외에는 명과 싸우러 가서 명의 원군과 싸웠다는 서술이 많다. 조선군이 명의 지휘를 받긴 했지만 그래도 지나치리만큼 무시하는 것. 당장 전국시대 관련 드라마만 봐도 명과 싸우러 간다고 하지 조선과 싸우러 간다는 말은 하나도 없다. 물론 잘 연구한 서적들에서는 오류가 보이긴 해도 전쟁 양상을 잘 그려내긴 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렇게 유명한 전국시대에서 임진왜란은 흑역사급. 기껏 얘기를 할 경우에 하는 말은 '필요 없는 전쟁이었다' 정도. 창작물에서도 "히데요시가 명을 치려다가 조선과 전쟁을 했다. 근데 졌다. 끝" 정도. 이해가 가긴 하는 게 조금만 잘못해도 한국에서 크게 욕을 들을 수 있으니 의도적으로 빼는 것도 있을 것이고[55] 크고 아름다운 영웅들의 일대기를 그리는데 자세하게 하기도 힘들었을 듯. 최소한 미화는 하지 않으니 다행이긴 하다. 가토가 호랑이 잡았다, 고바야가와가 벽제관에서 명군을 조졌다, 시마즈가 사천에서 명군을 조졌다, 7.1 조선의 전후 ¶왜란이 일어난지 7년 동안 조선은 전국을 다 합쳐서 막대한 인명피해와 물자피해 등을 보았으며 전쟁동안 일본군들이 상륙하여 전국 각지를 공격하며 조선 병사들을 몰살시키고 양민들도 학살하였으며 농토와 농촌 지역도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어서 임금의 수라상에 쌀밥을 올리지 못할 정도로 쓰라린 피해를 입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대거 참전을 하였던 영향으로 젊은이들의 피해가 컸으며 미처 피난가지 못한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처녀와 부녀자들도 잇딴 피해를 입었고 일부 여자들은 일본군이 자신을 노렸을 때 몸에 지녔던 은장도로 자결하기도 하였고 일부는 성추행까지 당하는 등 정신적인 피해도 입었다. 문화재도 대거 피해를 입어서 경복궁이 일본군에 의해 방화로 없어졌고 그 밖에 일부 사찰과 가옥들도 불에 타 없어졌으며 이 중 일부 문화재는 일본군이 약탈하여 일본 열도로 반출되어 버렸고 일부는 파손되었거나 완전히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없어지기도 하였다. 농업 및 산업의 기반도 대거 파괴가 되어서 농어촌은 농사를 짓지도 못하거나 출항을 하지 못하는 수준에 이르렀으며 쇠붙이도 모두 무기 및 무장용으로 소모되어 버리는 바람에 남아있는 것도 없었다. 7.2 명과 일본 ¶명나라는 조선에 대군을 파병한 이후로 쇠퇴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조선과 왜에 집중하느라 여진족을 방치한 탓에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청 왕조가 성립되어 심각한 위협을 주게 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중국 왕조 말기의 전형적인 국내의 농민 반란이 겹쳐서 일어나서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명나라는 이자성의 반군에게 북경이 함락당하고 숭정제가 자살하였으며, 연달아 일어난 후금의 침략으로 완전히 멸망의 길을 걷고 만다. 다만 임진왜란 탓에 명나라가 망했다라는 직접적 인과관계는 좀 과장이 있다는 건 고려할 것.[56] 일본은 7년에 걸쳐 침략을 반복했으나 결국 막대한 사상자와 물자만 써버리고 당장은 별다른 이득을 얻지 못했다. 물론 약탈해온 문화재, 도공들로 나중에 이득을 얻게 되지만, 당시에는 결국 땅 한 뼘 얻지 못하고 물러났으니……. 이로서 침략을 주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위신이 심각하게 떨어졌으며,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물자를 헛되이 써버린 탓에 큰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생물학적 수명도 끝나버렸고, 히데요시가 억누르고 있었던 전국시대 말기의 라이벌들, 특히 파병을 회피하면서 세력을 온존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8 이것저것 ¶일본군의 1군부터 9군까지, 사단장급 인물중에 죽은 사람은 거제도에서 병사한 하시바 히데카쓰[57]밖에 없고, 안타깝게도 나머지는 모두 돌아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6군 대장으로 참여한 고바야카와 다카카케는 휴전 중 일본으로 귀국 후 병사했다).[58][59] 흔히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3대 대첩으로 권율의 행주 대첩, 김시민의 제1차 진주성 전투, 이순신의 한산도 해전을 뽑는다. 일본쪽 연구로는 일본군이 패배한 최대의 계기가 권율 장군의 이치 전투라고 꼽는다. 이치 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해서, 한성 남쪽에서 행주 전투도 벌어질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물론 일본군이 수적인 피해는 행주 전투에서 더 입기는 했다. 언어면에서는 반치음이 이쯤해서 소멸되며, 사람들이 하루에 얼마나 쓰는지도 모를만큼 많이 쓰는 주격 조사 '-가'도 이쯤해서 유입되었다(같은 역할인 '-ㅣ'는 체언에 받침이 있을 때만 쓰이게 된다)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으나 적자면 헤아릴 수가 없으니 각설하고, 고등학교 1학년 과정 국어와 국사를 공부하면 많은 내용을 알 수 있다.[60]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이 점령한 조선 지역에서 양반 출신으로 추측되는 여자아이를 줏어다 자신의 양녀로 삼고 키웠는데 그녀가 줄리아 오다이다. 그녀는 고니시 유키나가로부터 천주교를 교육받으며 줄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면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당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 아이를 데려다 키웠다. 그녀는 자라면서 굉장한 미인으로 성장했는데 이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무척이나 아끼고 좋아했다. 하지만 당시 천주교를 탄압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줄리아 오다에게 천주교를 그만 믿을 것을 권유하지만 줄리아 오다는 이를 거부하고 끝가지 천주교에 대한 신앙을 지켰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줄리아 오다를 유배보냈는데 줄리아 오다는 유배지에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빵이라는 단어가 국내에 들어오게 된 것도 임진왜란 당시이다. 당시 포르투갈어 pao가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때 조선군에 흑인 군인이 고용되어 참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뭔가 강력해 보이는 흑인의 외모와는 달리 별 활약은 없었다.[61] 이 전쟁으로 인하여 고추와 담배가 국내에 들어왔다. 조선 시대 이후의 곰방대는 결국 임진왜란 이후에 존재하는 것이며 지금의 배추절이 김치, 통칭 묵은지 역시 임진왜란 이후부터 먹기 시작했는데 그 전의 조선의 김치는 동치미였다. 워해머 브랜드를 달고 나오는 미니어쳐 게임중 하나인 '워해머 히스토리컬' 시리즈 종족 중에 사무라이 시리즈가 있는데, 그 사무라이의 적 테마인 '일본과 그 적들'에서 등장하게 된 진영중의 하나가 흥미롭게도 '조선군'이다. 제작자는 모델러로 유명한 앨런 페리가 맡았다. 보통 사극에서 나타나는 모습에 따라서 포졸 복장의 안습한 조선군 모델이 출시되었는데, 마침 한국의 미니어쳐 게임 플레이어 한 명이 그 소식을 듣고 모델을 보고서는 조언을 하며 여러가지 자료를 제작자들에게 넘겨 주며 이글루스에서도 이슈화 되었다. 덕분에 제대로 된 완성품이 등장했다. 자칫 알려지지 못할 뻔한 이야기였지만, 좋게 되어가는 듯해서 다행. 주소는 여기. 현재는 쌍검기마병(앨런 페리는 '쌍검기마병을 실제 편제에 포함한 군대가 있었다니 하악하악'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면서 크게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쌍검이 조선 기병의 보편적인 무기가 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궁병, 신기전(화거라는 이름으로 등장), 심지어 의병이나 승병 등 질 좋은 주석 모델이 계속 출시 중. 최고의 모델러 중 한 사람인 페리가 만든 만큼 퀄리티가 하늘을 찌른다. 한국에선 홍대의 오크타운에서 구매할 수 있다. 진열되어 있지는 않으므로 카운터에 문의할 것. 디씨 합필겔에 필수요소와 합성되어 패러디 되었다.# 일본의 임진왜란 관련 저작을 여러권 본 사람이 말하기를 그 어느 책도 임진왜란을 잘했다고 한 책이 없으며 언제나 무익하고 허무하다고 평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은 적어도 한줄은 있고 비중이 높아지면 적의 장군이 아니라 "주인공"http://blog.naver.com/halmi/40011769894. 참고로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보드게임도 있다. 일본의 워게임 전문잡지 게임저널 31호로 일본 아마존에 재고가 있으니 일본어가 가능하고 이 게임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구입을 고려해보는 것도 좋겠다. 다만 4만원 가까운 가격은 부담스럽다.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 'ゲームジャーナル31号'으로 검색하면 구성 및 다양한 이미지들을 볼 수 있다. 31호 다운로드 주소가 있긴 하나 잡지를 구매해야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8.1 임진왜란? 임진전쟁? ¶사실 이것은 2012년부터 고등교과목으로 새로 신설되는 "동아시아사"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동아시아사는 한국사 위주의 관점에서 벗어나 새롭게 동아시아 관계를 들여다보자라는 취지로 한일관계사 전문 강원대 손승철 교수와 한국중세사 전문 한신대 안병우 교수가 집필한 교과서다. 문제는 이 교과서가 취지는 좋다지만, 과연 이 교과서의 좋은 취지가 얼마나 실효를 거둘지는 미지수다. 임진왜란을 임진전쟁으로 표기한것은 학술적으로 통일된 용어를 사용하기 위함이었다지만 과연 임진전쟁이란 용어가 학술적으로는 맞더라도 실체적 진실을 제대로 담는 용어인지는 미지수다. 결국 임진전쟁이라는 용어는 자칫 잘못하면 일본의 책임으로 일어난 전쟁을 조선-일본간에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 전쟁으로 호도시킬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게다가 일왕이라는 표현을 천황으로 쓴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물론 이 교과서가 국사를 당장 대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인터넷상의 논쟁은 너무 과한 측면이 없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새로운 교과목이 나온것이지 국사를 폐지하고 동아시아사로 대체한것도 아닌데다가, 동아시아사는 통사로서 전 시대를 다루기 보다는 조선시대 위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교수는 앞으로 한국사 교과서와 동아시아사 교과서의 차이나는 용어의 통일이 과제다라고 언급해 임진전쟁이나 천황같은 용어들을 국사 교과서에서도 채용하게 하려는 목적이 있음을 드러낸건 문제의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9 관련 작품 ¶
10.4 전투 전개과정 ¶
10.6 기타 ¶---- [1] 이를 두고 '임진왜란은 분로쿠, 케이초 텐노 시절에 일어났다'라는 헛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둘 다 코요제이 텐노(後陽成天皇) 시절의 연호다. 일본에서 '한 임금에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는' 일세일원제가 확립된 건 메이지 이후이니 착각하지 말기를.[2] 소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며, 대표적인 반전파였다. 종전 후 조일 외교관계를 완화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물론 소가 천사표라서(…) 그런 건 아니고, 쓰시마의 이익을 위해서란 점이 더 크다.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쓰시마 입장에선 양국이 친선을 도모하는 것이 더 유리하기 때문. [3] 김성일이 말을 마치자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황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라고 하니, 김성일이 말하기를,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591년 3월 1일 기사이다. 이 대사가 후에 김성일과 류성룡의 실책을 덮어주기 위해 가필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여하간 정사는 정사이다. 여하간 이 말 덕분에 퇴계 이황의 수제자였던 김성일은 두고두고 까이고 심지어 수제자마저 류성룡으로 취급되게 되었다(…). 결국 훗날 후손들끼리 둘다 수제자라는 식으로 합의를 보았다 카더라. 후에 김성일의 죽음(병사를 일으키고 장수를 독려하다가 병사했다)과 그의 전시 행동으로 좀 덜 까인다. [4] 당장에 두번째로 함락된 성인 동래성 부사 송상현은 부임하자 재빨리 만반의 준비를 위해 동래성 주변의 숲에 매복할 작전을 준비하든 등 일본군의 공격을 대비하고 있었다. 물론, 인해전술로 인해 머리좋게 작전을 짜도 소용이 없었지만(...) [5] 이긍익의《연려실기술》을 보면 당시 분위기는 전쟁이 날 것 같다는 이야기가 백성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었던 것 같다. 심지어 몇몇 명문가의 자제들이 술판을 벌여놓고 해괴한 노래를 지어 부르며 춤을 췄다는 이야기까지 전한다. 또한 건원릉(태조 이성계의 능)에서 곡소리가 들려왔다는 기록도 있다. [6]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중앙정부의 동원력도 사실은 한계선이 있었다. (봉건제의 틀을 벗어나진 못했으니...) 온 일본의 전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면 그 규모가 20만이 족히 넘을 수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 [7] 《징비록》에 나오는 일화다. 그 고을은 놀랍게도 징비록의 저자 류성룡의 향리인 안동이었으며, 고향 어르신이 당시 정승이었던 류성룡에게 직접 따진 사례를 회고록에 적은 것이었다. 이를 두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도 침략을 해왔는데, 고작 개천 가지고 안심하다니 어리석은 생각이다'라고 깟다. [8] 아마 조선이 대비를 안하다 털렸다는 설은 조선은 무조건 무능하다는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비를 하고도 결과적으로 초반에 털렸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으니 어쩌면 이쪽이 더 무능한 거 아닌가…싶기도 하지만 그건 당시 일본의 전투 방식에 대한 인식(무조건 거점 점령, 점령지엔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 두는 방식)과 조선의 전투 방식의 대한 인식이 크게 다른 것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니 무능하다고 하기는 힘들다. [9] 서인 정권 때 개수된 실록을 보면 류성룡을 까는 내용이 많다. [10] 고니시 유키나가 등도 마찬가지. 대표적인 반전파. [11] 성공했다면 그대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중요한건,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였단거지만. [12] 최관ㆍ김시덕 공제,<임진왜란 관련 일본 문헌 해제 : 근세편> 및 국립진주박물관,장원철-오만 역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발췌. [13] 기록마다 병력 수가 차이가 난다. 16700명이라는 기록도 있고 18700명이란 기록도 있다. 추후에 징발된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 [14] 소 요시토시가 무리하게 병력을 이끌고가는 바람에 가뜩이나 인구가 적었던 쓰시마는 사람들 씨가 말랐다고 한다. 현재도 쓰시마의 인구는 4~5만을 겨우 웃돈다. [15] 히데요시의 명으로 주요 성곽의 수호 등과 제2차 진주 성 전투에 참가하여 고토 모토쓰구(後藤基次)가 개발한 귀갑차의 설계에도 참여했으나,이시다 미쓰나리와의 불화로 귀국했다. [16] 심지어 정발은 죽은 뒤 일본인들이 '흑의장군'이라 부르며 칭송했다. 한편 송상현은 피하라는 일본군의 권유에도 분전끝에 전사, 배꼽 밑에 콩알만한 검은 점으로 시신을 확인, 고니시는 송상현을 죽인 병사의 목을 베었다. 또, 고향으로 시신 운구시 일본군이 길을 비켜주었다. [17] 사실 이때가 아니더라도 조선의 봉화 체계는 외침시에 제대로 작동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는 조선 정부가 무능한 탓이라기보다는 봉수제 자체의 한계로 인한 것이었다. http://www.koreanhistory.org/webzine/read.php?pid=18&id=421 [18] 그리고 임진왜란에 파병된 명군의 주축은 바로 왜구와 싸움에 익숙한 남방군이었다. 물론 왜구와 일본 정규군은 달랐다. [19] 일단 당시에 조총의 내수성을 높이기 위해, 조총의 점화구에 작은 우산을 달아 어느 정도 비를 막는 기술이 일본에 있긴 했다. 문제는 해봤자 별 도움이 안되었지만. [20] 그러나 정기룡의 전공은 그의 행장에만 기록된 바 근거가 부족하다. 정기룡 항목 참조. [21] 여진을 상대했던 함경도 병력 등은 잔존한 모양이나 후에 진군한 가토의 군대에게 괴멸당한다. 해정창 전투 같은 경우는 일본군이 조선의 지형을 이용해 함북 기병을 물리치기도 했다. [22] 선조가 달아났다는 보고를 들은 히데요시가 "항복하면 조선영주를 시킬려고 했는데..."라고 했다고 한다. [23]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민초들만의 힘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의 이해'에 기술. [24] 취미삼아 양민을 죽이고 첩을 빼앗기 위해 정승을 암살하는 지경으로 껍데기는 왕자인데 내용물은 김길태이니 누가 좋아하겠나. [25] 여러 번 양위파동을 일으켜 전시 행정부를 혼란시켰다. 사실 명에서도 선조 대신 광해군으로 갈아치울 움직임이 있긴 했다. 그런데 전쟁끝나고는 명에서 만력제의 후임 문제로 인해 자칫 광해군은 세자로 인정되지 못 할 뻔했다. [26] 누구누구가 노비 임을 증명하는 문서들이 이 곳에 보관되어 있으므로 제일 먼저 방화됐다고 전해진다. [27] 이 부분은 최근 일본에서 발견된 당시 한양에 도착한 일본 군 병사의 것으로 보이는 기록에 궁궐 양식의 아름다움에 대한 극찬과 궁궐 전개도, 심지어 기와의 색까지 세심하게 기록되어 있어 부정하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이를 보면 적어도 일본군이 한양에 입성한 시기까지는 궁궐이 불타지 않았으므로 그 시간차이를 생각할 때 일본군이 다시 밀려서 한양을 빠져나갈 때 불태우지 않았는가 하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실록에도 저자간에 떠도는 소문이 그렇다더라 식으로 적혀있다. 이 때문에 이 기록이 지배층에 대한 피지배층의 불신과 이를 의식한 지배층의 피지배층에 대한 적의에 가까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어 사회상 분석에는 유용하지만 진실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많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28] 조선은 이시기 일본과 밀약을 맺고 명을 치려 했다는 의심도 받고 있었다. 이로인해 원병 요청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29] 왕자들을 맞이하는데 음식과 물목이 부족하다며 행패를 부리다... [30] 여기에 부녀자 겁탈은 서비스로 들어간다(...) [31] 출처 :「쾌락의 혼돈」, 티머시 브룩 저,「명청시대 사회경제사」, 오금성 저 [32] 이는 명의 영향도 상당히 있다. 명은 주변국들에게서 은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고, 스페인(필리핀을 통해 접촉)과 일본처럼 막대한 은을 산출하는 국가가 아니라면 은본위 경제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조선 후기 화폐경제때도 은이 아닌 다른것을 화폐로 삼은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33] 명군 참장 낙성지 등이 은광개발을 건의했으나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조선은 중국의 금은을 공물로 바치는 데 국가부담이 매우 커서 세종 때 완화되기 전까지 엄청난 고생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란 이후 명의 사신들은 무지막지하게 한국의 귀금속을 뇌물로 긁어갔다. 호란 이후 청나라도 귀금속을 좀 요구했지만, 임란 이후 명이 긁어간 수준하고는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 [34] 출처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한명기 교수 저 [35] 조선 북방에서 사용한 조운선인 북조선은 일반 조운선보다 크기는 컸지만, 조선 북부지역에서 걷은 세곡은 모두 함흥 별굴까지만 갔고 한양까지 가지 않았다. 당연히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으니 해상운송의 발전이 그만큼 떨어질 수 밖에 없다. [36] 출처 :「다시보는 임진전쟁사」, etc... [37] 출처 : :「보급전의 역사」 [38] "왜구가 얼레 빗 [39] 김시민에 대한 [40] 김시민이 이미 전사한 줄을 모르고 있던 히데요시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은 꼭 베어오라는 특명을 내린다. 그런데 당시 진주목사인 찌질이 서예원이 울고 불고 난리치다가 잡혀 죽자 다테 마사무네는 그 목을 베어다가 김시민의 목이라고 소개하며 히데요시에게 갖다 줬다. [41] 위에 적은 것과 달리 서예원이 명장은 아니어도 용맹한 장수였다는 주장도 있다. 즉 위에 적은 것처럼 겁쟁이에 찌질이라 울보불고하지 않고 용맹하게 맞섰다는 것. 진주성으로 부임하기 전에 몇차례 전공을 세웠다던가 2차 진주성 싸움에 앞서 (필사의 각오로 싸우기 위해)온 가족을 진주성으로 불렀단 기록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근데 이건 김천일의 후손과 서예원의 후손들이 서로자기 조상 자랑하고 상대방 조상 욕하는 내용이라 진실은 알 수 없다. 좀 더 연구가 되면 확실한 결론이 나올 듯 [42] 진주성 방어에 나선 병력이 얼마인지 제대로 파악이 안되고 있다. 입성자와 전사자 관련기록을 비교대조해 보면 입성해 방어전에 들어갔단 이야기가 없는 부대가 전사자 수효에 다수 포함되고 막 그렇다. [43] 진주성 공격 시기의 일본 육군은 초기 병력의 40% 가까이를 상실해 약 10만여 정도 남긴 했는데 이때 참전 영주들 관련 기록을 보면 영지에 충원병력 보내라고 막 닥달하고 있어서 총 규모도 제대로 파악이 안된다. [44] 일본의 '회본태합기'에는 비가 올 때 귀갑차를 사용해 성에 접근해 성을 무너뜨렸다고 하고 있다. [45] 조선시대 사료나 하멜표류기들을 보면, 향토방위는 승병들의 고유의무였다. 추측건데 징병제 국가였던 조선에서 남정네들이 군대에 소집되었을 때 남자들이 믿고 마을을 맡기기에는 승병이 적합하지 않았을까? 어쨌건 마찬가지로 보부상들은 전시에는 척후병으로 징집되도록 되어 있었다. [46] 의병과 수군을 합치면 17만 5천이다. 사람들의 통념과 달리 임진왜란의 주력은 정규군이었다. 의병은 보조적 역할을 맡다가 결국 정규군에 편입되었는데, 병농일치 징병제 국가인 조선의 시스템을 고려하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47] 이 전쟁의 공식적인 사죄는 오히려 이 전쟁에 불참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했다. 물론 이 사과를 딱히 이에야스가 평화주의자라서 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48] 대개 전국시대의 무장들은 문맹이었다. 그래서 그 점을 이용한 고니시는 사전에 심유경과 짜고 사이쇼 쇼타이를 시켜 위조된 내용을 말하라고 했으나... 참고로 이 사람이 게임 임진록2에 일본 영웅으로 등장하는 그 '세이쇼오'다. 참고로 이 인간은 진구황후 전설에 푹 빠져 산 인간으로 도요토미의 조선 정벌을 부추긴 장본인이기도 한데...고니시가 무슨 생각으로 이 인간을 믿은 건지 이해불가. [49] 심유경은 이후 일본으로 귀화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주하다가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잡혀 국제사기죄로 압송되어 목이 잘린다. 고니시도 개죽음 당할 뻔 했으나 이시다 미츠나리의 만류로 다시 전장에 복귀했다. [50] 양호가 서울을 떠나자 도망가는 거 아니냐며 선조가 가서 붙잡고,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이건 피난 가는 게 아니다고 설명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양호는 서울을 무조건 지키겠다며 확실하게 약속하기도 하는 등 개판이다. [51] 히데요시의 명령에 대해서 다소 논란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굳이 한양을 공격하지 않아도 되는것처럼 말했지만, 실제로는 한양공격을 강하게 지시하고 있었다. [52] 엄밀히 말하자면 패한 건 아니다. 울산성 함락 및 전멸의 위기 직전에 일본의 구원군이 포위망을 돌파하여 고전하긴 했어도 결국 일본군이 승리했다. 구원군이 좀만 늦었으면 가토 기요마사 포함 울산성의 일본군이 모두 전멸했겠지만…. [53] 일본군은 이후 남원 이북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54] 숙종 때 일본에 통신사의 일행으로 간 신유한의 '해유록'에서 신유한은 징비록이나 강항의 간양록같은 조선의 임진왜란 관련 책들이 일본에 출판된 것을 보고 국가 기밀이 담긴 책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걸 보니 우리나라의 기강이 말이 아니다라고 한탄하였다. [55] 만화 일기당천 노부나가에서는 세계를 정복하면서 조선만은 쑥 빼버렸다. 일본인의 경향 중에 이렇게 문제되는 부분은 아예 덮어 두고 얘기 자체를 꺼내지 않는 게 있으니. [56] 단적으로 "만력 3정"이 만력제 무덤 건설비보다 저렴했다... [57] 도요토미 히데쓰구의 동생,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양자였다. [58] 고바야카와 다카카케는 행주 대첩에서 권율인지 아니면 그 휘하의 병사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한 쪽 눈을 저격 당했다고 하는데 이게 사실일 가능성은 매우 낮다 [59] 안구는 시신경이 잔뜩 몰려있는 곳으로 여기에 화살이나 총알같은 물체가 박히거나 관통하는 경우 100%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60] 국어학계에서는 정철 어머니의 서간문에서 '가'를 발견하고, 이것이 후대의 주격조사 '가'의 전신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여기에서의 '가'는 동사 '가다'의 어간인 '가-'와 명확한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회의론자들 또한 많다. 일부 책에서 인선왕후가 보낸 서간문에도 주격조사 '가'가 발견되었고 1550년대의 일이라고 말하지만 역사상 인선왕후는 효종의 비이고 최소 1650년대의 일이다. 위에서 말하는 인선왕후는 인종의 비인 인성왕후'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주격조사 '가'가 나타났다는 구절을 보면 조금 재미있는 것이 정철의 어머니의 서간문에는 '찬 구들에서 자니, 배가 세니러서(꼿꼿이 일어나서, 여기에서는 폭풍같은 설사가 일어나서…) 자주 (화장실에) 다니니'라는 구절이고 인선왕후 어필에서는 '두드러기가 불의예 도다 오르니'라는 구절로 모두 영 좋지 않은 상황에서 쓰였다는 것. [61] 명과 교역하던 포르투갈의 해군에서 용병으로 일하는걸 참전시킨 것. 이들을 그린 그림이 남아 있다. 해군 잠수병으로 일했다고. 실록에도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 실록 선조실록 선조 31년 5월 26일. [62] 또한 거제도에서 병사한 왜장(일본 장수) 하시바 히데카츠(羽柴秀勝)를 히데요시의 양자이며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인 동명이인과 오인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전쟁에 참여한 하시바는 히데요시 누나의 아들. 우에노 쥬리가 주연한 고우 공주의 남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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