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조선[朝鮮]과 대한[大韓]제국

일본의 장수들

바래미나 2013. 3. 26. 04:04

일본의 장수들|


고니시 유기나가(小西行長)
고니시 유기나가(1558~1600)는 오오사가 옆에 있는 무역도시 사가이 출신으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며 약품무역을 하는 거상의 아들이었는데, 당시 조선산 인삼과 약품을 포함한 조선 무역을 독점하고 있는 대마도 도주 요시도시가 그의 사위였다.
풍신수길의 부하가 되어 일본 통일전쟁 때 군수물자의 보급업무를 잘 수행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고, 우도에 있는 우도성의 성주가 되었다.
풍신수길이 조선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려 하자, 사위 소오 요시도시와 풍신수길에게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이시다 미쓰나리 등과 협력하여 전쟁을 방지하려고 노력하였으나 허사가 되고, 결국 전쟁은 터지고 말았다.
일설에는 사위와 같이 조선을 여러번 다녀와서 조선 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풍신수길을 사주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가토 기요마사가 여러번 그러한 말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기록은 없는 것 같다.
임진왜란때는 제 1군의 장수로 18,700명의 지휘관이 되어 참전하였다. 이때 풍신수길은 휘하 영주들을 견제시키기 위하여 유기나가에게 가토 기요마사와 공동 선봉장이 되어 추첨을 하여 1일 교대로 전투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592년 4월 14일 첨사 정발이 사수한 부산진성과 첨사 윤흥신의 결사 수비한 다대포진성을 함락시켰다. 다음날인 4월 15일에는 동래부사 송상현이 결사 항전한 동래성을 공격하기 전에 싸우지 않고 이기고자라는 나무판자를 성 앞에 세우니, 송상현이 <싸워서 죽기는 쉽다.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라고 쓴 나무판자 대답을 해서 공방전이 시작되어 함락시켰다.
계속 북상하여 충주에서 공동 선봉장인 가토는 좌로, 고니시는 우로 각각 다른 다른 길로 진격하여 한성 입성의 다툼을 하였다.
고니시는 조선의 지리를 잘 아는 포로를 시켜서 가토 부대가 서울에 입성하려면 반드시 지나야 할 한성에 있는 나룻배를 전부 떠내려 보내 가토 부대의 도하작전을 지연시키고, 1592년 6월 5일 동대문을 지나 제1차로 서울에 입성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고니시 부대의 입성 전에 조선 민중들의 양반, 왕족들에 대한 반감으로 여러 곳에 방화하여 이미 서울은 거의 불타버리고 말았다.
북상하여 6월 14일에 대동강을 도하, 평양에 입성하였다. 그리고 1592년 7월 18일 조승훈이 지휘하는 명군과 싸워 격퇴하였다.
겨울이 되자 얼어붙은 압록강을 걸어서 건너온 명나라 이여송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와, 서산대사가 지휘하는 승군을 포함한 조선 의병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다. 고니시는 봉산에 있는 오오도모 요시노리, 백천에 있는 구로다 나가마사, 우봉에 있는 고바야가와 히데가네, 개성에 있는 고바야가와 다가가게, 한성에 있는 우기다 히데이에에게 구원을 청했다. 오오도모 부대가 평양에 척후병을 보냈다. 그러나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는 명군만 보이고 고니시 부대는 전멸한 것 같았다. 그래서 며칠 있으면 자기들도 위험하겠다고 생각하여 무조건 후퇴해 버렸다. 한성에 있는 우기다 부대는 평양까지 가려면 5일이 걸리고, 도중에 또 큰 강도 있고 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고민하며 시일만 보내고 있었다. 평양에 부상자, 병자를 놓아두고 고니시가 후퇴하여 황해도 봉산에 도착하자, 오오도모 요시노리의 부대는 한명도 없었다. 이 보고를 받은 풍신수길은 오오도모의 영지를 몰수하는 가혹한 벌을 내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가토 기요마사는 평양의 고니시를 돕지 않은 것은 오오도모나 우기다나 마찬가지라고 말하였다 한다.
고니시 부대는 겨우 서울에 후퇴했으나 병력의 2/3가 희생되고 고니시의 건강도 아주 악화되어 있었다. 평양에서 패전한 명예를 회복하기 위하여 고니시는 마침 전라도에서 서울을 수복하기 위해 북상하여 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있는 권율 장군이 지휘하는 약 3천명의 조선군을 공격할 약 4만명의 일본군 선봉장이 되었는데. 조선군이 결사 항전을 하므로 2차에 걸친 공격도 실패하고 말았다. 각지에서 패전하고, 극도의 식량난으로 아사자가 속출하여 사기가 땅에 떨어진 것이 일본군의 이때의 패전의 주원인이었다.
조선이 제외된 채 진행된 명, 일간의 강화회담의 일본측 대표를 고니시가 맡았는데 풍신수길은 전투의 패배를 외교로써 만회하려고 승전국 같이 행세하여 명나라가 들어줄리 없는 7개조의 국서를 명나라 사신에게 들려보냈다. 
고니시는 명나라 사신과 밀약하여 오만불손한 일본의 국서를 명나라 황제에게 아부하는 내용으로 변조하여 강화 성립에 노력하였으나, 강화는 결렬되고 오히려 국서 변조 사건만 탄로나 풍신수길이 노발대발하여 고니시의 목을 치겠다고 하였다. 
고니시가 "나혼자서 한 것이 아니오" 하며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보이니, 풍신수길의 측근 중신들도 국서 변조에 찬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그들까지 처벌할 수도 없어 풍신수길은 화를 삭이며 자리를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니시는 1600년 일본이 양분되어 패권을 다툰 세기가하라노 다다가이에서 패하여 참수당하고 멸문되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으며, 당시 탄압 받는 천주교의 보호에 힘썼으므로 사후 천주교에서는 성인의 반열에 올려놓고 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가토 기요마사(1562~1611)는 풍신수길과 같은 아이지겐 나가무라에서 태어났다. 그는 풍신수길의 어머니의 4촌 여동생의 아들인데, 3살 때 아버지가 죽어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풍신수길의 부하가 되어 전공을 많이 세워 구마모도의 구마모도죠오 성주가 되었다.
인접해있는 우도성의 성주 고니시 유기나가와는 이해관계가 얽혀 사이기 나빴다. 풍신수길이 죽고서 세기가하라의 싸움에서 도구가와측에 가담하여 승리하였고, 고니시의 영토인 우도를 빼앗아 구마모도의 영주가 되어 지금의 구마모도죠오를 축성하였다.
현재 일본에서는 신격화되어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는데, 도구도미 소호오는 "가토 기요마사는 세상 사람들이 상상하고 있는 정도의 신이 아니었다"고 말하였다.

시마쓰 요시히로(島津義弘) 시마쓰 요시히로(1535~1619)는 오오스미 구리노죠오의 성주였다. 임진왜란 초기 한반도에 출병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나고야에 집결하고 있을 때, 오오시미의 호족 우메기다 구니가네가 반란을 일으켰다. 시마쓰 부대가 출병한 후 후방을 맡고 있는 시마쓰 요시히로의 동생 시마쓰 도시히사를 풍신수길이 할복자살 시켰다.
요시히로는 1만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강원도 점령을 담당하였다. 이때 한반도 파견군이 반란을 일으켜 돌아오는 것을 근심한 풍신수길의 명에 의하여 수송선을 모두 본국으로 돌려보냈는데, 요시히로는 귀환선편으로 가장 많이 조선 사람들을 강제 납치해갔다. 
정유재란때는 선봉부대 다음으로 1597년 5월 1일에 가덕도에 상륙, 3개월간 무위도식하고 있었다. 후속부대가 도착하자 행동을 개시하여 7월 28일 견내량을 지나 남원성 전투에 참가, 이 전투에서 얻은 코 61개를 인도하여 할당량을 완납하였다. 
용안회의에서 전라북도 부안에 배치되었으나, 금구의 조선의병이 공격하였으므로 전라북도는 불안해서 있을 곳이 못된다고 판단, 정읍회의에서 더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전라남도 해남, 강진으로 배치되었다. 여기에서 약 15일간 머물다가 조선 의병에 밀려 경상도 사천으로 후퇴, 신진리 왜성을 축성하고 주둔하였다.
방을 걸고 "조선 사람은 일본군을 믿고 농사에 전념하라, 조선 사람에게 피해를 준 일본군은 신고하면 처벌하겠다"는 선무공작의 경상도 책임자가 되었다.
풍신수길이 죽은 사실을 접하고 명군과 싸우지 않고 있다가, 본국에서 온 자기 부대의 수송선을 타고 남해도 남단을 지나 일본 본토 방향으로 흐르는 조류와 북서 계절풍을 이용하여 귀환하였다.

이시다 미쓰나리
풍신수길이 오다 노부나가의 부장이었을 때 나가하마에 갔는데. 어느 절에서 심부름을 하는 어린 이시다가 차를 마음에 들게 끓여줘서 데리고 왔다. 장성하여 문관으로 임용되어 풍신수길의 측근에서 총애를 받았다.
임진왜란 때 군감으로 한반도 전선에 왔는데, 이 전쟁이 승리의 희망이 없다고 판다, 풍신수길에게 전선의 실정을 알리고 후퇴를 상신하여 허락받고 일본군을 철수시켰다.
정유재란이 끝난 후의 세기가하라 싸움에서 풍신수길의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하여 서군을 총지휘, 도구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동군과 싸웠는데, 전투 도중 히데아기가 모반하여 서군이 패배하였다. 그리하여 동군에 붙잡혀 사가이와 경도 시내를 고니시 유기나가, 안고구지 에게이와 함께 조리돌림을 당한 후 참수당했다.

도요도미 히데나가(豊臣秀長)
도요도미 히데나가(1540~1590)는 아버지가 다른 풍신수길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으로, 풍신수길에게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1591년 1월 25일에 사망하였는데, 이 자가 살아 있었다면 전쟁을 반대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후구시마 마사노리
후구시마 마사노리(1561~1624)는 오아리 출신이다. 어려서 풍신수길 아래에서 자랐고, 시바다 가쓰이에와의 싸움에서 선봉으로 전공을 세웠다.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기, 와기사가 야스하루, 가다기리 가쓰모도, 히라노 나가야스, 가스야 다데노리와 함께 시스가다께노 히지혼야리라고 부른다.
임진왜란 때에는 충청도 점령을 담당하였다. 풍신수길 아래에서 함께 자란 이시다 미쓰나리와 같은 문치파와는 달리, 가토 기요마사와 함께 무단파라고 하여 서로 대립하였다. 
세기가하라노 싸움에서는 서군의 이시다 미쓰나리와 사이가 나빠 도구가와 이에야스를 지지하는 동군에 가담하였다. 덕분에 종전후 히로시마죠오의 성주가 되었는데, 허락없이 성을 신축하여 감봉되고 시나노로 좌천되었다. 

우기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우기다 히데이에(1573~1655)는 오가야마죠오의 성주였다. 전국시대의 무장이었던 아버지가 8세때 죽어 풍신수길의 양자가 되어 성장하였고, 풍신수길의 측근 마에다 도시이에의 딸과 결혼했다. 
임진왜란 때는 19세의 나이로 일본군 총사령관이 되어 서울에 있으면서 전 일본군을 지휘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좌군의 총지휘자가 되어 남원성을 공략하여 8월 15일에 함락시키고, 일본군 부대장들을 전주에서 모아 회의를 하고 일제히 충청도로 북상하였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되었다는 소식이 들리고, 군량이 없어 다시 전라도로 후퇴, 1597년 9월 11일 용안에서 부대장들을 모아 전라북토 각군에 배치하였다.
9월 13일 금구에 배치된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대가 조선 의병의 결사적인 공격을 받자 전라북도는 불안해서 있을 곳이 못된다고 판단, 용안회의의 결정을 백지화하고, 9월 16일 정읍에서 회으를 열고 더 안전한 전라남도로의 부대 배치를 결정했다. 그리하여 우기다 부대는 장흥, 보성으로 갔는데, 거기에는 일본 수군이 명량해협에서 대패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후 전라남도에서도 안전하게 주둔할 곳이 없어 20일 정도 있다가 경상도 해안가로 이동했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여러 영주들이 두 파로 양분돼 천하대권을 놓고 싸운 세기가하라노 다다가이에서 도구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하여 동경 남쪽 하지조지마에 유배되어 83세로 생애를 마쳤다. 
우기다 가문은 단절되어 그에 대한 기록이나 문헌이 하나도 없다. 그는 임진, 정유자랜에 걸쳐 조선의 문화재를 가장 많이 약탈하였는데, 현재 그 문화재가 일본 각지에 산재해 있다.

조오소가베 모도지가(長宗我部元親)
조오소가베 모도지가(1539~99)는 고오지죠오의 성주였다. 무장의 가문에서 태어나 지금의 시고구를 평정하였다. 오다 노부나가 사후 풍신수길의 공격을 받아 중과부적으로 항복하고 신하가 되어 도사의 영주가 되고, 그외 영토는 몰수당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충청도에 있다가 남으로 후퇴하여 장문포 왜성을 수축하고 본국으로 귀환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는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하고, 정읍회의에서 나주에 배치되었다. 나주에 가서 코 6,006개를 베어 6개의 나무통에 넣어 가져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 내용은 222년 후에 기록된 것이고, 이것을 뒷받침해 줄 당신의 기록이 없어 날조라 할 수밖에 없다.
모리 데루모도(毛利輝元)
모리 데루모도(1553~1625)는 히로마죠오의 성주였다. 전국 시대의 유명한 무장 모리 모도나리의 손자다.
그는 오다 노부나가와 대항하여 오다 노부나가의 부장 풍신수길과 싸우고 있었다. 모리측의 다가마쓰죠오가 강물가 저지대에 있었으므로 풍신수길이 이 강에 둑을 만들어 물을 막으니, 그 성이 물위에 뜬 섬 같이 되어 버렸다. 승부가 나지 않고 장기화되자, 경도에 있는 오다 노부나가는 부장 아게지 미쓰히데의 부대를 풍신수길을 지원시키기 위하여 파견했다. 그런데 아게지 미쓰히데가 돌연 회군하여 오다 노부나가를 살해하였다. 아게지가 비밀리에 모리 데루모도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밀사를 보냈는데, 그 밀사가 길을 잘못 들어 풍신수길의 부대로 들어가 잡혔다. 풍신수길은 오다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모리 데루모도와 화해했다. 그리고는 아게지 부대와 야마사기에서 싸워 승리했다. 그후 풍신수길의 세력이 커지게 되었으므로 데루모도는 그의 부하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3만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제7군의 장수로서 경상도 점령을 담당하여 개녕에 본부를 두었다. 그리고 부산 왜성과 자성대를 축성하였다.
정유재란 때 풍신수길의 코베기 명령이 있자, 모리 데루모도는 우기다 히데이에와 "가엾은 일이다. 차마 어떻게 손을 댄담!"하고, 가엾다는 마음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한반도 전선에서 "많은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가엾으니, 모두 코만 잘라서 인도하라"고 하였다 한다. 1597년 8월 15일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하고, 9월 16일 정읍회의에서 진원에 배치되었다.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구로다 나가마사(1568년~1622)는 지금의 오오이다겐에 있는 나가죠오의 성주였다. 전국시대의 무장 구로다 요시다가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1만 2천명을 이끌고 고니시 유기나가와 같이 평양성에 입성하고 황해도에 가서 주둔하였는데, 곧 이정암이 지휘하는 의병에게 패전하여 서울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다시 서울에서 퇴각하여 양산군 기장면 해안가에 견고한 왜성을 축성하여 머물러 있다가 본국으로 돌아갔다.
정유재란 때에는 우군으로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하였고, 북상하다 충천도 직산에서 조, 명군을 만나 싸우지 않고 퇴각하여 기장 왜성에 들어갔다.
구로다 가문의 문서보관소인 슈게쓰교도관에 보관되어 있는 코 영수증을 살펴보면, 구로다는 전라도에는 가지 않았고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1597년 8월 16일부터 약 한달간 코베기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베시마 나오시게
임나베시마 나오시게(1538~1618)는 사가겐 사가성의 성주였다. 
임진왜란 때 1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아들 나베시마 가쓰시게와 함께 가토 기요마사의 지휘를 받으며 함경도 진격하였으나 정문부가 지휘하는 의병에게 밀려 퇴각, 지금의 부산시 강서구 죽림동의 낙동강변에 죽림 왜성을 축성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우군으로 황석산성 전투에 참전하였고, 북진하다가 조,명군의 출현으로 남으로 후퇴, 용안회의에서 금구, 김제에 비치되었다. 금구에서 조선 의병의 격렬한 공격을 받아 전라북도는 불안해서 있을 곳이 못된다하여 용안회의의 결정을 백지화하고, 정읍회의에서 다시 전라남도에 재배치할 때 나베시마 부대는 화순, 능주에 배치되었다. 이후 경상도로 지금의 후퇴하여 지금의 마산시 산호동에 있는 산호공원 자리에 마산 왜성을 축성하였다.
금구 전투에서의 코 영수증을 보면, 전투는 8월 14일 에 있었는데 영수증을 받은 날짜는 10월 1일로 되어 있어, 충청도에서 얻은 코를 전라도에서 얻은 것처럼 문서를 만들었다고 판단된다. 조선에서 포로들, 특히 도공을 강제로 많이 납치해 와서 아리다, 이마리 등 세계저긴 도자기 명산지를 만들었다.

깃가와 히로이에
깃가와 히로이에는 도미다죠오의 성주였다.
전국시대의 유명한 무장인 모리 모도나리의 손자이고, 모리 데루모도와는 4촌간이다. 아버지 모리 모도하루가 깃가와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다. 임진왜란 때는 부하 5천명을 이끌고 모리 데루모도 밑에서 경상도에 주둔하였고 행주산성 싸움에서 부상당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우군으로 황석산성 전투에 참가하였다. 용안회의에서 영광에 배치되었는데 가지 않았고, 정읍회의에서 진원에 배치받았다.

소오 요시도시(宗義智)
소오 요시도시(1568~1615)는 대마도의 영주인데,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고, 고니시 유기나가의 사위였으며 조선말을 잘 하였다. 대마도는 농토가 적으면서도 박토여서 주민들은 생존을 수단으로 왜구가 되어 조선과 중국의 해안지대를 침범, 약탈했다. 이를 근절시키기 위하여 조선에서 소오 요시도시에게 녹봉을 주고, 또 무역을 독점시키는 특권을 주고서 왜군의 단속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년전에 풍신수길이 소오에게 "조선왕이 일본으로 건너와 영토를 바치고 항복하게 주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반대의견을 말하면 자기 목이 날아갈 것이 뻔하므로 조선왕이 병이 들어 못온다는 등 여러 가지 구실로 시간을 끌다가, 조선 조정의 중신들에게 풍신수길의 속셈을 전하였다.
그는 선조를 알현하고 공작 한쌍, 조총 여러자루, 말 한 마리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통신사를 풍신수길에게 접견시켜 전쟁 방지에 노력하였으나 임진왜란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임진, 정유재란 때는 장인 고니시와 행동을 같이하였다. 전후 도구가와 천하가 되자 도구가와의 비위를 맞추려고 고니시의 딸은 부인과 이혼하고, 조선과 일본간의 화친에 힘썼다.

고바야가와 다가가게(小早川隆景)
고바야가와 다가가게(1533~97)는 전국시대의 유명한 무장 모리 모도나리의 셋째 아들인데, 고바야가와 가문에 양자로 갔다. 깃가와가로 양자간 형 모도하루와 같이 모리 가문을 잘 돌봤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둘을 '모리 료오센'이라 했다. 
풍신수길의 양자 중에서 사고를 잘 낸 히데아기를 자기의 양자로 맡아 풍신수길의 신임이 두터웠다.
임진왜란 때는 1만 2천 7백명을 지휘하여 서울에 입성한 후 전라도에 진격하였는데, 1592년 7월 8일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가는 이치에서 전라절제사 권율, 동복현감 황진이 이끈 약 1천 5여명의 조선군의 반격을 받고 패전하였고, 2차에 걸친 금산전투에서 전라도민의 반격을 당하여 전라도 점령을 단념하게 되었다. 
일본군은 전라도에서 패전한 고바야가와 다가가게의 명예 회복을 위하여 벽제에 잠복, 방심하고 있던 명군을 기습 공격하니, 원래 전투 의자가 없었던 명군은 평양까지 퇴각하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덕분에 고바야가와는 일본 역사에서 일약 명장이 되었다.

안고구지 에게이
안고구지 에게이(?~1600)는 승려였는데, 학식이 있고 언변이 좋아 풍신수길의 마음에 들어 영주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군사를 이끌고 진안을 거쳐 전주에 입성하려다 웅치에서 조선 의병들의 격렬한 반격을 받고 퇴각하였다. 
한반도에 일본어 보급에 힘썼고, 조선의 문화재를 많이 약탈하였는데, 풍신수길 사후 세기가하라노 다다가이에서 패전하여 참수되고, 그가 약탈해간 많은 조선의 문화재가 흩어져 버렸다.

요시라(要時羅)
고니시 유기나가의 부하중에 조선말을 잘 하는 가게하시 히지다이후, 요지로오, 요시라라고 부르는 이중 간첩이 있었다.
정유재란 초기 고니시 유기나가가 농간을 부려, 요시라가 경상우도병사 김응서에게 가토 기요마사의 거짓 상륙 예정일을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어리석은 선조와 당파 싸움에 눈이 먼 조선 조정을 속여 이순신 장군을 제거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북경으로 달아났지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하시바 히데가쓰(羽柴秀勝)
하시바 히데가쓰는 기후죠오의 성주였다. 풍신수길의 누나의 아들로 풍신수길의 양자가 되었다. 간빠구 히데쓰구의 동생이다. 임진왜란 시기 제 9군의 지휘자로 한반도에 출병하여 거제도에서 병사하였다. 

와기사가 야스하루
와기사가 야스하루(1554~1626)는 오오미 출신이다. 처음에는 아게지 미쓰히데의 부하였는데, 나중에 풍신수길의 부하가 되어 1583년 시바다 가쓰이에와의 시스가다게 싸움에서 전공을 세웠다. 
아와지시마 스모도죠오의 성주가 되어 임진왜란에 참가했다. 전선 60여 척을 이끌고 한산도 앞바다에서 싸웠으나 조선 수군에게 대패하고 간신히 살아 돌아와 육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세기가하라 싸움에서 풍신수길의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하는 서군에 가담해 참전하였는데, 미리 도구가와 이에야스와 내통, 고바야가와 히데아기와 함께 배반하여 전투중에 돌연 아군을 공격, 서군을 패전하게 했다.
일본측 기록을 보면, 와기사가가 임진왜란 때 수군을 이끌고 전공을 세웠다고 쓰여져 있지만, 한산도 해전에서 패했다는 기록은 없다.

구루시마 미지후사(來島通總)
구루시마 미지후사는 이오죠오의 성주였다. 일본군 수군 대장으로 임진왜란 때는 옥포해전에서 패전하여 달아났고, 정유재란 때는 명량해전에 참전하여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