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선 '레이테 만 해전'(Battle of Leyte Gulf, 1944년 10월 23~26일)
1 개요 ¶태평양 전쟁 기간인 1944년 10월 22일에서 27일까지 벌어진 수리가오 해전, 엔가노 곶 해전, 사마르 해전, 시부얀해 해전을 통틀어 말하는 인류 사상 최대의 해전. 양측 함대의 총배수량은 약 250만톤이었다. 절대 깨지지 않을 기록이란 소릴 듣기도 한다. 정작 레이테 만에서는 해전이 없었는데도 레이테 만 해전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에 대해서는 따지지 말자.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전황이 유리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전쟁 초반에 잃었던 필리핀 탈환을 원하고 있었다. 만일 필리핀이 미군 손안에 들어갈 경우 일본이 아직 점유하고 있는 남방지역과 본토가 완전히 나누어지게 되므로 더 이상 일본은 전쟁수행에 필요한 물자를 얻을 수 없었다. 따라서 일본도 그에 대응해서 미군의 필리핀 탈환전을 저지하려 했다. 동시에 아직 남아있는 해군전력 전체를 동원해서 미국의 필리핀 상륙부대와 미해군에 심각한 타격을 줌으로서 더 이상의 침공을 막으려고 했다. 그에 따라 미군의 상륙지점인 레이테 만을 공격할 계획을 짜게 된다. 2 전투 초기 ¶일본군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구리다가 이끄는 부대는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통과해 사마르 섬을 돌아 레이테 만의 상륙 부대의 후방을 공격하고 니시무라가 이끄는 함대는 수리가오 해협 쪽을 통과해 후방을 치는, 이른바 과거 시대의 함포 위주의 해전을 떠올리게 하는 작전을 짰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일본 해군의 항공력은 필리핀 해 해전에서 탈탈 털렸고 육군 항공대도 연합군 항공력에 완전히 털리고 있던 상황이라 항공전력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구리다 함대는 너무 빨리 미군에게 발각되었고 미처 작전대로 합류하기도 전에 잠수함과 항모전단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게 된다. 구리다 사령관이 좌승했던 중순양함 아타고가 미 잠수함의 뇌격으로 격침되면서 구리다 사령관은 전함 야마토로 옮겼지만 숙련된 사령부 통신요원들은 옮겨타지 못했는데, 이게 엔가노 곶 해전에서 전황을 바꾸는 큰 문제를 일으켰다. 이 전투에서 야마토의 자매함인 무사시가 공습을 탱킹하려는 목적으로 함체 도색을 기존의 일본 해군 함선보다 밝은 회색으로 조금 다르게 색칠했다가 말 그대로 탱킹의 방어력을 훨씬 능가하는 대공습을 집중적으로 받은 후 함포 한번 못쏘고 침몰해버렸다. 또한, 일본군이 함대를 너무 잘게 나눈 것도 문제였는데, 이는 작전을 너무 세밀하게 나누는 일본군 특유의 뻘짓근성도 한몫했지만, 더 큰 이유는 사방에 흩어진 함대 세력을 한곳에 모을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본국에서 출격하는 함대 따로, 남방지역에 있는 함대 따로 식으로 개별적인 접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통합된 작전이었지만 무선송신 일치등의 기본적인 조치도 제대로 하지 않아서 나중에 보면 알듯이 서로간의 통신에도 큰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3 엔가노 곶 해전 ¶오자와 중장의 북방함대에 소속되어 미끼로 쓰이다가 결국 미 함재기의 공격을 받고 기울어진 즈이가쿠. 한편 오자와 지사부로는 항공모함까지 포함한 본대를 지휘하고 있었으나 사실 일본 해군의 항공전력이 부실한 상태에서 항공모함은 그저 장식 정도에 불과할 뿐이였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간에 항공모함은 상당히 전략적인 요소였고, 진주만 공습 당시 참가해서 미국의 격침우선순위에 든 즈이카쿠도 있었다고. 이걸 이용해 오자와는 미군의 호위부대를 유인하려 하였다. 한편 미 해군을 지휘중이던 윌리엄 홀시는 구리다 함대가 격파당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구리다의 함대는 비록 피해를 보기는 했어도 무사시의 탱킹으로 인해 실제로 기타 함선들의 피해가 거의 없는 등 여전히 위협적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당시 미 해군 조종사들은 격침 보고를 과장해서 하는 편이었고 상관들도 대부분 눈을 감고 넘어가주었다. 이런사실을 잘 알고 있던 스프루언스 제독의 경우 전과보고를 대폭 깎아서 봤을 정도다. 게다가 구리다의 부대에 포함되어 있던 무사시같은 대형 전함은 더더욱 성과가 부풀려지는 효과를 만들었다. 여하튼 오자와는 홀시의 3함대 후방에서 계속 유인 작전을 벌였다. 사실 오자와 함대는 항공모함에 비행기도 거의 없는 상황이라 큰 문제는 안됐지만 뒤통수에서 십몇대 정도 함재기를 날리면서 자꾸 위협적인 행위를 벌이자 3함대 입장에서도 신경이 안 쓰일 수는 없었다. 또한 일본군의 함재기 세력이 이미 좆망했다는 사실은 아직 미국에는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고, 이 상황에서 해상전의 주력으로 떠오른 항공모함의 함재기가 깔짝거린다는 것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라고 충분히 볼 수 있다. 사실상 이런 점이 위험한게 오자와 함대가 아웃레인지 전법, 즉 필리핀 제도의 루손섬이나 다른 섬에 있는 일본군 기지에 출격한 함재기들이 착륙해서 재보급을 받고 재폭격에 나선다면 미 항모전단은 사정거리 밖에서 양측으로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필리핀 해 해전 당시 오자와는 이런 전술을 쓰다가 탈탈 털렸었다. 전술 자체가 삽질은 아니고 숙련된 조종사와 나름대로 우위를 가진 항공대가 있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지속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내의 일본군 비행장은 아직 존재하는 상황이었으며, 앞서 말했듯이 일본 해군 함재기 세력이 미약하다는 사실을 미국이 아직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하게도 북부의 오자와 함대는 반드시 없애버려야 할 존재로 급부상하게 된다. 결국 홀시는 더 이상 구리다가 이끄는 함대가 적수가 안되고 오자와의 함대가 위험하다고 판단, 휘하 부대를 이끌고 오자와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3함대의 고속전함 기동부대를 이끌고 있던 윌리스 A. 리 중장은 전함들만이라도 남아서 호위를 계속해야 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개진하였지만, 홀시는 오자와의 항공모함들을 완전히 격침시키기 위해서는 전함의 함포도 필요하다는 이유로 그냥 씹어버렸다. 또한 미처 제독은 전속력으로 북방부대를 전멸시킨 후 즉시 중앙부대를 막는 걸 제의했으나 무시되었다. 이렇게 반대를 묵살한 이유는 홀시는 야전을 벌이기도 껄끄러웠던 것도 있었다. 한편 상황을 정확하게 눈치챈 사람도 있는데 일본 함재기의 지나치게 사소한 공격때문에 이미 아웃레인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자와 부대는 미끼라고 분석한 사람이 바로 알레이 버크 제독이다. 어쨌든간에 오자와를 끝장내기도 마음먹은 홀시는 3함대 전력을 몽땅 이끌고 추격에 나섰으며,[1] 태평양 함대 사령부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이나 제7함대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 모두 3함대 전체가 추격에 나선 것을 알고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니미츠 제독이나 킨케이드 제독은 홀시 제독이 고속전함들은 산 베르난디노 해협에 놔두고 항공모함만 이끌고 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 이유는 여태까지의 항공모함 대 항공모함의 전투에서는 함재기들이 전투의 주축이 되고, 수상함들은 전투가 다 끝난 다음에 침몰 직전으로 표류하는 적함 몇 척을 정리하는 수준에 그쳤기 때문에 굳이 전투에 필요하지 않고, 수상함으로 구성된 적의 다른 함대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수상함 전력의 일부라도 해협에 놔두고 북상했으리라 추측하는 것이 지배적인 분석이긴 했다. 하지만 홀시의 입장에서는 이 참에 일본군 항공모함을 씨를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므로 수상함 세력도 반드시 필요했다. 원래 항공폭탄의 경우에는 위력은 강하지만 함선의 상부구조물만 파괴하므로 적함이 전투능력을 상실하지만 배 자체는 살아남으므로 추진력만 상실하지 않는다면 해전에서는 패배하더라도 살아서 돌아가서 다시 수리받고 전력을 재건하는 일이 많았다. 문제는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확실하게 선체에 물구멍을 뚫어놓는 어뢰의 경우, 미국 어뢰는 개전 초반에 작동불능에 조기폭발, 제멋대로 항주 등 각종 사고와 문제점을 일으켰기 때문에 문제점이 해결되고 성능이 향상된 레이테 만 해전 시점에서도 여전히 불신의 대상이라 뇌격기도 철갑탄을 달고 적을 폭격하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타는 적 항공모함을 적의 수상함의 방해를 뚫고 끝장을 내려면 반드시 고속전함세력이 필요한 것이었다. 게다가 이때 서로가 날린 전문을 보면 서로 애매한 표현을 해대서 그냥 저쪽에서 알아서 하겠지 심정으로 넘어간 듯 하다. 근데 세상 일이라는게...결국 양측이 상황을 확실하게 파악하지 않고 애매하게 넘어감에 따라 절묘한 타이밍에 산 베르난디노 해협이 텅빈 상태가 되었다. 이로 인해 구리다 함대가 사마르 해협에 출몰하여 전투가 벌어지자 니미츠 제독과 킨케이드 제독이 길길이 날뛰면서 홀시에게 무전을 때려댔다. 게다가 무선 자체도 뒤죽박죽인 경우가 많았고 직접 보내거나 혹은 직접 보낼수 있어도 마누스 섬을 경유해서 가느라고 늦게 도착하는 경우도 많았었다. 무선의 혼란성은 일본군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런 이유로 인해 홀시는 킨케이드가 보내는 무전에는 그냥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다가, 무전이 계속되자 조금은 난감해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니미츠까지 개입하자 결국 추격을 포기하고 뱃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때까지도 홀시는 여전히 구리다 함대의 전력을 오판하고 있었던 데다 그때쯤이면 돌아오기엔 너무 늦을 정도로 멀리 나가 있었기 때문에 귀환 요청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 돌아오긴 했지만 그때는 이미 상황이 끝나 있었다. 어쨌든, 추격에 나선 홀시의 3함대는 엔가노 곶에서 오자와 함대와 교전에 들어가 큰 피해없이 항공모함 4척을 격침시키는 등의 성과를 올렸다. 이 때 진주만 공습에 참가한 6척의 일본군 주력 항모들중 미드웨이 해전 때 가라앉은 아카기, 카가, 히류, 소류, 이후 필리핀 해 해전 때 가라앉은 쇼카쿠를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한 척, 즈이카쿠가 이번 해전에서 가라앉았다. 그러나 이 유인 작전으로 인해 상륙함대는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4 사마르 해전 ¶산 베르난디노 해협의 감시가 약화...된 게 아니라 완전히 없어지면서 잔존해 있던 구리다 함대는 무사하게 해협을 통과, 남하를 하기 시작해서, 미 항공모함 함대와 마주치게 되었다. 구리다 제독은 이 함대를 홀시가 이끄는 3함대라고 판단하고 함재기의 공격을 받아 불덩어리가 되기 전에 항공모함을 벌집으로 만들어 수장시키기 위해서 즉각 교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구리다 제독의 판단과는 달리 이 함대는 C.A. 스프레이그 소장이 지휘하는, USS 갬비어 베이호 등 호위항공모함 6척, 구축함 3척, 대잠 구축함 4척 등으로 이뤄진 일명 '태피3'라는 소규모 함대였다. 당시 구리다 함대와 태피3의 전력은...야마토와 공고를 비롯한 전함만 4척에다가 중/경순양함과 구축함을 합치면 27척. 사실 태피3의 모든 함정의 배수량이 야마토 한 척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한편 스프레이그 호위항공모함부대는 이런 예측하지 못한 사태를 맞게되자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생각하지도 못한 기습을 받은데다가 실제 전력상으로도 일본 전함은 항공모함 코 앞에 있는데 남아있는 미군 전함은 거리가 상당히 떨어진 수리가오 해협에 있고 간밤의 전투로 주포탄도 부족한 상황. 따라서 호위항공모함과 킨케이드 휘하의 항공 지원을 제외하고는 우세라는 게 없었다. 최초로 접촉사실을 보고한 스프레이그 제독의 호위항모부대는 킨케이드 제독에게 7함대가 있는 곳으로 철수를 허가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렇게 되면 강력한 적을 상륙지로 끌고 들어오는 셈이라 상륙부대의 안전을 이유로 거절당했다. 결국 인근의 다른 호위항모부대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고,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호위항모부대와 일본함대 간의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전투기들은 급히 출격하느라 기총 사격만 하고 호위항공모함까지도 근접전에 들어가 함포 사격을 해야 할 정도로 큰 위기였다. 스프레이그 함대는 호위항모 '키트쿤 베이'가 역사상 첫 카미카제공격을 받는 등 패퇴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실제로 구리다 함대는 스프레이그의 호위항공부대를 제압할 여력이 분명히 있었다. 이 함대만 돌파하면 킨케이드의 상륙 부대는 그대로 구리다 함대에게 무방비 상태가 되는 상황이였다. 그 와중에 대잠 구축함 USS 사무엘 B. 로버츠와 플래처급 구축함 USS 존스턴, 그리고 호위항공모함 USS 세인트 로[2], USS 갬비어 베이가 격침당했는데, 특히 세인트 로는 역사상 첫 카미카제의 희생물로 기록되었고 갬비어 베이는 태평양 전쟁에서 전함의 포격에 격침당한 항공모함이라는 기록의 주인공이 되었다(다만 갬비어 베이를 끝장낸 건 야마토나 공고가 아니라 초카이 등, 순양함들이라는 말도 있다.). 단 1940년 노르웨이에서 영국 항모 글로리어스가 독일해군의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에게 격침당했기 때문에 최초로 전함에게 격침당한 항모라고 볼순 없다. 사무엘 B. 로버츠와 존스턴은 체급이 한참 차이나는 일본 순양함 초카이와 전함 공고 등을 상대로 분전했지만 역시 역부족이었다. 여담이지만 이 때의 공훈으로 사무엘 B. 로버츠는 전함처럼 싸운 구축함이라는 찬사를 얻었다(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호위함 중에 이 배의 이름을 계승한 배가 있다.). 다만 스프레이그 제독 휘하의 호위항공모함부대가 미친듯이 연막을 뿌려대고, 어뢰를 난사하고, 긴급출격한 전투기들이 폭탄을 장착하지 않았지만[3] 폭격을 가하는 척 훼이크성 움직임을 보이고 기관총이라도 난사하고, 총알이 다 떨어져도 계속 주변을 맴도는 등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바람에 효과적으로 제압하지 못했다. 여기에 구리다의 함대가 철갑탄을 장착한 상태로 포격을 가했기 때문에 장갑판이 상대적으로 얆았던 호위항모 입장에서는 명중한 포탄이 아예 관통해 버렸는데 심지어는 포탄이 신관작동으로 폭발하기도 전에 갑판과 선체를 동시에 뚫고 지나가서 그냥 바람구멍만 뚫리는 일이 발생했으므로 결정적인 손상을 입지도 않았다. 더욱이 당시 구리다 제독 역시 홀시 제독과 마찬가지로 치명적인 오판을 하고 있었는데, 항공모함을 보고서는 스프레이그 함대를 홀시의 3함대로 착각하고 말았다. 이런 오판 때문에 '빨리 못 잡으면 함재기가 날아와서 우릴 고깃밥으로 만들거다!'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서 전투 대형을 짜지도 않고(못하고) 항해하던 대형 그대로 전투를 시작했기에 압도적인 화력을 충분히 살릴 수도 없었다. 여기엔 스프레이그 함대의 분전도 영향을 끼쳤다. 빈약한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있는 힘을 다해서 교전에 임하다 보니, 구리다 입장에선 상대를 과대평가하게 된 것이다. 전투 도중에는 기함 야마토가 미군의 호위 구축함이 목숨을 걸고 돌격해서 발사한 어뢰를 피하려다가 방향을 잘못잡는 바람에 어뢰에 쫒겨서 오히려 전장에서 벗어나는 막장스러운 사태까지 벌어졌다. 이는 구리다가 정확한 전황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때 일본 해군은 모든 상황을 눈으로 직접 관측하는 상황이다 보니 스프레이그 함대의 이동속도를 실제 이동속도보다 훨신 더 빠른 30노트 이상의 속도로 추정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스프레이그 제독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내가 그때 겁먹긴 했지만 그정도로 급하진 않았음."이라고 회고했다. 게다가 여기에서도 한 가지 절묘한 상황이 있었는데, 원래 오자와 함대가 홀시를 낚으면 무전으로 이 사실을 알려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자와 제독은 구리다 제독에게 낚시성공 사실을 무전으로 몇 번이나 날렸는데, 이 무전이 어디로 날아갔는지 이걸 수신한 배가 한 척도 없었다. 게다가 위에 언급된 것처럼 시부얀 해전 당시 구리다 제독의 좌승함 아타고가 격침되면서 구리다 제독과 고위 참모진들만 야마토로 옮겨 탔고 숙련된 사령부 통신요원들은 야마토에 타지 못했기 때문에 더더욱 전황 파악이 쉽지가 않았다. 그 때문에 구리다 제독은 미 3함대가 거기에 없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고, 단순히 현재 전개된 상황을 바탕으로 추론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구리다 함대는 미국 호위항공모함의 분전으로 순양함을 몇 척 격침당한 것도 있어서 미 3함대를 상대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했고 연막과 레이더의 부실로 인해 거리 측정에서 애를 먹었으며 연이은 전투로 구리다는 완전히 지쳐있는 상태였다. 이러한 구리다 제독의 결정적인 오판으로 인해 일본함대는 전장에서 서둘러 철수하였고 까닥하다간 요단강 익스프레스 탈 위기에 처했던 미 해군은 뜻밖의 기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본 스프레이그 제독은 "저 망할 놈들이 도망간다!"고 외쳤다. 사마르 해전은 레이테 만 해전에서 가장 중요한 교전이였으며 이 기회를 오판으로 놓치면서 일본군은 승리할 마지막 기회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특히 3함대 소속의 구축함 7척은 경우 일본 순양함들에게 자살적인 개돌을 감행하여 주포 부앙각이 닿지 않는 근거리에서 장갑 관통 능력도 떨어지는 5인치 함포로 그나마 피해를 줄 수 있는 구조물들을 공격하고 어뢰를 쏴대는 무용을 펼쳤다. 그 결과로서 단 한척을 남기고는 죄다 대파당하거나 격침당해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일본군의 카미카제하고도 대비되는 게 이건 전적으로 아군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이 행동은 일본군이 평소 강조하던 근성과 정신력을 강조하는 것과 일치했으며, 그걸 빼더라도 어찌나 용감해 보였는지 USS 존스턴 같은 경우 침몰할 때 일본 수병들이 경례까지 해주었다고 한다. 당시 참전자들의 회상에 따르면 진짜 이제는 죽는구나 싶은 순간 갑자기 일본 해군이 퇴각하는 걸 보고 어안이 벙벙했지만 "쟤들이 갑자기 왜 후퇴하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살았다!"라는 안도감이 들었다고 한다. 5 수리가오 해협 해전 ¶한편 전날 밤에 남쪽에서는 시마와 니시무라의 연합함대가 수리가오 해협을 통과해 미 상륙 함대의 후방을 공격하려고 했다. 수리가오 해협을 방어중이던 올덴도로프 함대는 즉각 단종진을 치고 해협을 넘어가려는 일본 해군을 저지하기 위한 움직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본 해군은 야간에 미군의 어뢰정들이 계속해서 후방에서 어뢰를 쏘고 도망치며 게릴라전을 벌였기 때문에 해협에 들어가기도 전에 사소하지만 피해를 입고 탄약을 낭비하였으며 정신이 산만해졌다. 이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긁어모은 함대를 전부 모아서 돌파하려고 했지만 방어진의 전방에서는 구축함이 이미 기다리고 있다가 엄청난 숫자의 어뢰를 날리고 후퇴했으며, 방어진의 후방에는 순양함과 전함으로 구성된 단종진이 엄청난 포탄을 레이더 관제사격으로 날렸다. 한마디로 말해서 제대로 된 매복에 걸린 셈이다. 결국 일본군의 함대는 올덴도로프 함대의 견고한 방어진을 뚫지는 못했다. 시마와 니시무라의 협력이 전혀 없어서 니시무라 함대가 먼저 돌입해서 개박살 난 후 시마 함대가 돌입한 것도 패인이였다. 당장 양 함대를 합치면 적에게 거의 타격도 못주고 이렇게 맥없이 당하지는 못했을 것이며, 재수가 엄청나게 좋았다면 매복진을 돌파할 가능성도 눈꼽만큼 있었다. 결국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 연합함대는 전투를 지속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사실 상황만 보면 일본 함대를 쫓아가 소탕시킬 수 있었으나 올덴도로프가 수비적인 자세를 고수하였고 사마르 해전이 시작되서 그 방면을 급히 지원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항공지원이 처리해주겠지 하고 그냥 보내주었다. 그 덕에 일본 해군은 대패를 면할 수 있었다. 여담으로, 이 해전은 전함들끼리 주포를 교환한 마지막 해전이며, 여기서 가라앉은 일본 전함 야마시로는 전함 주포에 가라앉은 최후의 전함으로 기록된다(같이 활동한 전함 후소는 구축함이 발사한 어뢰로 인해 화약고 유폭으로 침몰했다). 그리고 올덴도로프의 전함 6척 중 USS 미시시피를 제외한 USS 펜실베이니아, USS 테네시, USS 캘리포니아, USS 메릴랜드, USS 웨스트버지니아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때 침몰 내지 피격되었던 전함들로, 진주만의 복수에 마침표를 찍은 셈이다. 6 마무리 ¶한편 홀시는 사마르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긴급 무전을 받았지만 이미 오자와의 유인에 너무 깊이 따라와서 사실 돌아온다고 해도 할 수 있는게 없었고 실제로 홀시가 다시 돌아왔을땐 상황이 거의 종료되어 있었다. 여하튼 홀시가 복귀하라는 무전을 받고 다시 돌아오자 남아있는 일본 해군 함대는 더 이상 미군을 공격할 수 없었다. 결국 오자와, 시마, 구리다 등은 휘하 함대를 이끌고 미군 함대의 추격을 피해 필리핀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홀시는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빠져나가는 구리다를 막는답시고 체급도 가볍고 빠른 소수의 함선들을 먼저 보내는 삽질을 저질렀으나 다행히도(?) 구리다가 매우 빨리 해협을 벗어나서 함대가 도착하기 전에 다 빠져나가 해협에는 구조 작업중인 노와케만 남아있었다. 미군에게는 다행이였던 셈. 이후로도 일본 함대는 미군의 추격으로 피해를 입었으나 여하튼 대부분의 함선은 살아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상황은 종료되었다. 7 결과 ¶일본군은 이 해전에서 동원할 수 있는 함선이란 함선은 다 동원해서 미군을 공격했으나 미군은 이미 쇼미더머니 파워로 인해 더이상 일본군이 상대하기도 어려운 지경이 되어있었다. 특히 항공전력에 있어서 미군은 압도적인 항공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반면 일본군은 그렇지 못해서 구시대적인 함포사격시대의 함대함 결전으로 밀어붙여야 했다. 그러나 그 마지막 도박도 실패했고 이제 일본군은 미군을 막을 여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일본군의 도박이 성공해서 구리다 함대가 레이테 만을 성공적으로 공격했더라도 일본 해군이 모든 것을 날려먹는다는 결과에는 차이는 없었을 것이다. 이 해전에서 일본군의 공격 목표는 미 해군이 아니라 레이테 만의 상륙부대였고, 해상에서의 교전 역시 미 해군 함대를 격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이미 일본 연합함대는 모든 가용 전력을 동원해도 미 해군을 격멸하는 것은 고사하고 미군 상륙부대에 포격 한 번 하기에도 모자란 상태였던 것이다. 홀시 자체도 이런 점을 생각해서 해협 방비를 7함대에 맡겨도 된다고 봤었다. 물론 이것은 니미츠가 내린 기본 명령에 위반된다. 이 일로 평생까임권을 당하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의 인명경시사상을 상징하는 카미카제도 이 전투에서 처음 등장했다. 사실 이건 그 정도로 일본군의 항공전력이 미군보다 열세였기 때문에 나온 고육지책이었던 셈이지만, 도덕적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합리적인 정책이라고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후 태평양 전선에서는 이런 광경을 자주 보게 된다. 한편 홀시는 오자와에게 낚인 것 때문에 두고두고 씹혔다. 킨케이드와 니미츠는 홀시의 예상치 못한 전장 이탈에 당황했고 특히 3, 4함대가 뚫릴 경우 상륙병력을 지원하느라 무방비상태인 7함대의 지휘관 킨케이드 제독이 몇 번이고 무전을 보내면서 홀시를 닥달했고 니미츠도 홀시에게 여러 차례 돌아오라고 종용해서 다시 원위치로 돌아왔지만 그때는 이미 상황 종료였으므로(...) 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이 전투 후에 홀시는 태풍이 휘몰아치는 해역에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가 비전투 손실로 배와 비행기를 좀 깨먹어서 더더욱 씹혔다(…). 더불어 구리다 역시 오판으로 일찌감치 철수한 것 때문에 결과론적으로 "그 때 너님이 상륙부대 있는 곳까치 처들어갔으면 더글러스 맥아더를 고기밥으로 만들 수 있었을 거임!"이란 이야기를 들으며 두고두고 씹혔다. 물론 제공권이 미국에 있는데다가 맥아더도 그런 상황이 되면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결사적으로 싸울 것이니 적어도 레이테만 내에서 일본 함대는 전멸하고 맥아더도 물에 빠지는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구리다의 오판은 일본군의 고질적인 문제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군은 지휘관이 올바른 결정을 내릴 것을 요구할 뿐 정작 그러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정보를 수집하고 공유하는데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레이테 만 해전에서 구리다는 일본군의 다른 함대와의 통신도 두절되었고 미군의 상황을 정찰할 수단도 없었으므로 사실 이 전투의 의의는 홀시가 낚였느냐, 구리다가 오판을 했느냐 정도가 아니다. 더 중요한 건 이 전투로 인해서 사실상 일본군의 해상전력이 거의 와해가 될 정도로 큰 손상을 입었다는 점이다.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정규항모 1척, 경항모 3척, 전함 3척, 순양함 10척, 구축함 11척, 항공기 500대 이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손실을 입게 된다. 반면 미군은 경항모 3척, 구축함 3척이라는 비교적 경미한 손상을 입는데 그쳤다. 그 동안 피해가 누적된 것과 함께 이 해전으로 인해 치명적일 정도의 큰 손상을 입은 일본해군은 이 전투에서의 손실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고, 이 후 제대로 된 해상 작전을 벌이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때문에 미군은 더 이상 해상에서 일본해군의 활동을 두려워할 필요없이 자유롭게 작전을 전개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이 전투는 미군의 필리핀 상륙을 막지 못한대다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으니 전략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일본군의 완전한 참패로 끝난셈이다. 8 기타 이야기 ¶
---- [1] 그리나 전문은 그래도 몇 척은 남기겠다는 투로 보냈다(...).[2] 원래는 '미드웨이'였는데 이번 해전이 벌어지기 직전에 배 이름이 갑자기 바뀌었다. 열받은 수병들은 "배 이름을 마음대로 바꾸는 무식한 놈들이 어디 있어! 그러면 마가 낀단 말이야! 배는 분명히 2주안에 침몰할거야, 내가 장담한다!"라면서 분노했었다. 그리고 말이 씨가 된건지, 진짜로 마가 낀건지 그 말은 현실로 나타났다. [3] 중후반때에 구축함들이 필사적으로 옆에 붙어서 폭뢰를 떨구긴 했다. [4] 국내 번역된 모 출판사 판 붉은 10월에서는 일본어판 중역 때문에 하루제 제독으로 나와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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