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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6월~1592년 11월달 까지 명나라가 조선에 지원한 내용과 조선 상황.

바래미나 2013. 3. 26. 03:49

1592년 6월~1592년 11월달 까지 명나라가 조선에 지원한 내용과 조선 상황.|

징비록에 비춰지는 개전초 최초의 명나라의 지원내용과 조선의 상황. 


선조가 의주에 도착할즘 명나라 장수 참장 대모와 유격장 사유가 군대를 이끌고 평양으로 향하던중 암반역에서 평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주로 돌아와 주둔하고 있었다. 
한편 명나라 조정에서는 군사들에게 은 2만냥을 내려 이를 가지고 관원이 의주에 도착했다. 

이전에 요동에서는 조선에 왜적의 침략이 있다는 보고를 조정에 올렸으나 조정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심지어 왜적의 길잡이 의심을 받기도 했지만 유독 병부상서 <석성>이란 사람만이 우리나라에 대한 지원을 강하게 주장했다.(조선에 원병 파병을 강력히 주장한 사람역시 존재했다.병부상서 석성이 바로 그다.) 

당시 우리나라 사신 신점이 옥하관에 머물렀는데 어느날 석성이 그를 불렀다.신점이 가자 그는(석성) 요동에서 보내온 왜적에 대한 보고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이를 읽고 난 신점은 소리내어 울기 시작했다. 
그러곤 아침저녁으로 일행과 함께 통곡하면서 구원병의 파견을 요청했다.석성은 이를 명나라 임금에게 보고했다.이에 명나라 임금은 병사 2개 부대를 파견하여 우리 임금을 호위하도록 명하고, 경비로 은까지 하사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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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부분이 명나라가 개전초 선조를 호위토록 보낸 병사와 경비입니다.그후 평양의 고니시 군이 그대로 진주하면서-이를 유성룡은 하늘이 도운 기회라고 평함-7월 명나라 요동 부총병 조승훈이 급히 기마부대를 이끌고 파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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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훈의 패전 

19일 요동 부총병 조승훈은 평양성 전투에서 패하고 선조를 호위토록 군대를 이끌고 온 유격장 사유는 부대의 선봉이 되었지만 전사한다. 

조승훈은 북방 오랑캐와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운 바 있다.그는 이번에도 반드시 왜적을 물리칠수 있다고 장담하곤 했다.가산에 도착해서 그는 물었다. 
"평양성에 머무르고 있는 적이 아직 그대로 있는가?" 
그렇다고 하자 
그는 술잔을 들어 하늘에 빌면서 말했다. 
"적이 아직 있다니 하늘이 나에게 큰 공을 세우도록 돕는것이다." 


그날 밤 자정 무렵에 평양성을 향해 순안에서 출진한 조승훈 부대는 비가 내려 땅이 질퍽한 상태에서 말을 몰아 평양성의 칠성문 안으로 돌입합니다.기록엔 길이 구불구불 하고 비좁아 통행이 힘들었다고 나오며 여기서 사유가 왜군이 쏜 조총에 맞아 전사하고 많은 병사와 말을 잃고 도망쳐 나옵니다. 

그리고 남은 군사를 이끌고 순안.순천을 거쳐 밤이 깊어 안주성 밖에 이른 조승훈은 통역관 박의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많은 적을 죽였으나 불행히도 유격대장을 잃고 날씨마저 좋지 않아 적을 섬멸하지는 못했다.허나 군사를 보충하여 다시 공격할 것이다.너희 재상께 말하여 조금도 동요하지 말고 부교도 철거하지 않도록 하라" 


말을 마친 그는 그대로 대정강과 청천강을 건너 공강정에 도착하자 진을 쳤다.(평양에서 더 이북으로 선조가 피신해 있는 의주가 한반도 북부 맨끝 오른쪽에 있다면 바로 그 주변입니다. 대동강을 지나 평야지대를 다시지나 더 북으로 가면 바로위에 청천강이 있습니다.청천강을 끼고 의주를 뒤로 진을쳤다는 이야기.) 


싸움에 패하자 적이 뒤쫓아 올까봐 겁이나서 이렇게 빨리 후퇴했을 것이다.나는 신경진을 보내어 그를 위로하고 양식과 음식도 보내주었다. 
명나라 군사가 공강정에 머물고 있는 이틀동안은 계속 큰비가 내려 노숙하고 있는 병사들의 옷이 다 젖었다.병사들 사이에 조승훈을 원망하는 소리가 커졌는데,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요동으로 돌아갔다. 
이로인하여 민심이 동요될까봐 나는 안주에 머무르면서 지원병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와 맞물려 이순신 장군님의 옥포해전으로 다행히 시간을 벌게 됩니다. 

이에 대해 유성룡의 징비록에서는... 

그보다 앞서(옥포해전 보다 앞서)고니시 유기나가가 평양에 당도했을 때 우리 진영에 이런 글을 보내왔다. 
'우리 수군 10만이 또 서해로부터 도착할 것입니다.조선 임금께서는 이제 어디로 가실 예정인지요?' 

원래 적은 수군과 육군이 합세해 서쪽을 공략하려 했던 것이다.그런데 거제 싸움에서 패함으로써 한 팔이 끊어진 것이었다.이렇게 되니 평양성을 점령한 유기나가라 할지라도 지원군이 사라지게 되어 더이상 진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전라도와 충청도를 보전하고 아울러 황해도와 평안도 연안 지방까지 지키게 됨으로써 군량의 조달과 통신체계가 확립될수 있었다.도 요동과 천진 지방에 왜적의 손길이 닿지 않게 되어 명나라 군사들이 육로를 통해 우리나라를 구원할 수 있었다. 


7월달 조승훈의 평양성 공격패전이후 8월 1일 조선군 순찰사 이원익과 순변사 이빈 등이 평양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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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개전이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서 적군이 확인된 것을 이래로 
14일 부산포가 함락되므로서 시작됐지만 그후로 4개월동안 육전에서는 제대로 된 성과를 올리질 못한다.거기에는 제대로 병사들을 집결시키지 못한 이유도 있는데 이렇게 된 이유는 당시 조선조정의 군사 제도를 보면 을묘왜변 이후 김수문(?~1568:제주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 성부판윤이 됨후에 북방 방어에 공을 세움)이 전라도의 군 편제를 고쳤다. 
이에 따라 도내의 여러 읍을 나누어 이를 모두 순변사(조선시대 왕의 명령에 따라 변방을 순시하며 군무를 감독했던 특사.임시직),방어사,조방장,도원수, 및 본도의 병사,수사에 예속시킨다.이를 제승방략 법이라 하는데 이법은 전쟁발발시 여러읍의 군대가 모두 움직여 한곳에 집결하여 중앙에서 보낸 사령관의 명령을 받아 싸우게 하는법으로 대개 지휘관의 도착이 늦어질 경우 모든 진의 군사들만 모여있게되어 적의 정규병력에 노출될경우 제대로 지휘도 받지 못한채 흩어져 버리는 단점이 있는 방식이었다.더군다나 당시 각 읍의 진들은 서로 연락조차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조선 초의 진관체계는 모든 도의 병력이 진관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전쟁시 진관이 산하 읍을 통솔하여 장군의 명령을 기다렸다.예를들어 경상도의 경우 김해,대구,상주,경주,안동,진주등 6개진으로 되어있는데 적의 공격을 받아 한 진이 부서지더라도 다른진이 굳게 지켜 도 전체가 붕괴되는 일 없이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제승방략식 제도가 여러 도에 걸쳐 퍼져있었다는 것이었으며 일본군의 쾌속 전진은 이러한 제승방략식 전법을 무효화 시키고 있는 추세였다.(이것이 사전에 입수된 정보로 알고서 그런것인지 모르고서 그런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흔히 유성룡이나 이이가 주장한 조선 초기의 군제를 유지하자는 것은 이러한 진관체제로의 전환도 있었던 것이다. 
이를 걱정하여 유성룡이 조정에 보고하여 다시 진관체계를 살리려 했으나 경상 감사 김수의 반론으로 폐기되고 만다. 

이유는 오래전부터 훈련해오던 제승방략을 갑자기 바꿀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과 조선이 개전 몇달만에 남부에서 평양까지 점령당하는 사태를 초례하게 된다. 

일본군의 전격전에 제승방략식 지방군 편제의 실패로 인해 산산이 흩어져 버린 조선군의 재정비 시간을 벌어줄 <커다란 변수>가 필요했다.그것이 바로 "명군의 개입"과 이를 유연하게 만들어준 이순신 장군의 "옥포해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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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달 평양성을 공격한 이원익과 이빈은 수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순안에 머무르고 있었다.별장 김응서 등은 용강,삼화,증산,강서의 네 고을 군사를 20여 개 부대로 배치한 후에 평양 서쪽에 합세할 태세였다. 
그날 이원익등은 평야성 북쪽의 병사를 보내 적 선봉대 20명을 물리쳤지만 적의 대부대가 나타나면서 많은 아군이 무너지고 피해를 입고만다. 
다시 순안으로 진주하게 된다. 



9월 명나라의 유격장군 심유경이 왔다. 

그 전에 조승훈이 패하고 돌아가자 왜적들은 의기양양해져 '염소떼가 호랑이를 치는구나'. 하는 내용의 글을 보내오기도 했다.명나라 군대를 두고 염소에 비유한 것이다.그러곤 곧 서쪽을 공격하겠다고 떠들고 다녔다. 
그러자 의주(선조가 피신해있는곳)백성들이 모두 짐을 싸고 기다릴 판이었다. 
심유경은 본래 절강사람이었는데 상서 석성(조선 파병을 강조한인물)이 왜적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유격장군이라는 칭호를 거짓으로 붙여 파견했다.순안에 도착한 그는 '조선이 무슨잘못을 하였기에 일본은 군대를 일으키는 등 난리를 피우느냐?' 하는 내용의 명나라 황제의 편지를 적진에 전달했다. 


그때는 왜적의 움직임이 활발하고 그 잔인함이 극에 달해 아무도 접촉하려고 하지 않았다.그러나 심유경은 노란보자기에 편지를 싸서 심부름꾼에게 보냈다.편지를 등에진 심부름 꾼은 보통문으로 말을 달렸다.편지를 읽은 고니시 유기나가는 이내 '직접 만나 협의합시다.' 하는 답장을 보내왔다. 

답장을 받은 심유경은 몸소 나섰다.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나서 말렸다. 
심유경은 웃으면서 말했다. 
"저들이 감히 나를 헤치겠느냐" 
서너명의 부하를 대동한 그가 평양성에 당도하자 고니시 유기나가,요시토시,겐소 등이 평양성에서 10리나 떨어져 있는 강복산 아래 군대를 도열시키고 그를 맞았다. 

우리 군사들은 대흥산 정상에 올라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수많은 왜군이 그를 에워싼 것이었다.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그가 잡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심유경이 돌아왔는데 왜적은 아주 공손한 태도로 그를 배웅했다.다음 날 유기나가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어 심유경의 안부를 물었다. 
'대인께서는 칼날 위에서도 얼굴빛 하나 변치 않으시니 비록 일본인이라 할지라도 더 당당할 수는 없을 것 입니다.' 

이에 심유경이 답변했다. 

'너희는 중국 곽영공(당나라때 인물 곽자의.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공을세운사람이기도 하다)을 알지 못하느냐? 그는 회흘(回紇:중국 동북쪽의 부족으로 흉노족의 후예로 알려져 있다.)의 만군 사이를 홀로 들어가면서도 전혀 두려워 하지 않았다.하물며 내 어찌 너희들을 두려워 하겠느냐?.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내가 돌아가 황제께 보고하면 처분을 내리실 것이다.그러니 앞으로 50일 동안 왜군은 평양성 10리 밖으로 나와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조선 병사들은 10리 안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하라.' 

그런후에 그는 경계선에 나무로 금지 표시를 세워놓았다.그런지만 우리는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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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으로 옥포해전과 함께 9월에서 12월 명나라의 대군이 도착할때까지 다시 시간을 벌게됩니다.12월달 안주(의주를 뒤로한 청천강 부근의 지방.)에 진을 칠때까지 왜군은 명군이 도착한 사실조차 모르게 됩니다. 
여기서 심유경의 말재간과 나무 금패 하나로 근 세달동안 고니시군의 발을 묶고 명나라군이 도착하여 의주를 지킬수 있게 하는 기회를 만들어 냅니다. 
역시 변수 하나가 더해진 셈이죠. 
본문에도 썼듯이 당시 조선인사들은 왜군의 분위기를 고려하여 만나려 하는것을 꺼려했던것을 볼때 심유경의 이러한 공이 없었다면 자칫 고니시군이 별동대를 조직해 의주로 진격하여 선조를 볼모로 잡아갔을지도 모르며 이는 곧 조선전체의 붕괴로 이어졌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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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1592년 12월 시작분기까지 명나라의 활동및 조선의 상황을 씁니다. 
잘못된 점 있으면 가르쳐 주세요. 

출처:서해 문집 출판사 <징비록> 김흥식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