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조선[朝鮮]과 대한[大韓]제국

그림으로 보는 임진왜란

바래미나 2013. 3. 17. 01:32

그림으로 보는 임진왜란|

 번째, 동래부순절도(東來府殉絶圖 , 보물 제392호)

 

 

 

  현재 육군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보물 제392호 동래부순절도(東來府殉絶圖)입니다.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전체적인 느낌을 볼까요? 가운데 있는 성은 동래성입니다. 동래성 전투는 임진왜란 중에서도 초반부에 있던 전투였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본이 가장 먼저 침입한 곳은 부산진입니다. 그리고 부산진을 함락한 다음 날 두 번째로 향한 곳이 바로 동래부였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렇다 할 방어선을 구축하지 못한 채 우르르 무너지고 맙니다. 그 아비규환이 이 그림에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동래성 내부에서 남쪽 성문을 사수하려고 노력하는 조선 군사들과 그것을 뚫기 위해 겹겹이 둘러싼 왜 군사들이 보이시나요?

자 이제 그림 곳곳에 숨겨진 이야기를 살펴보아요.

 

★ 시간 순서대로 번호에 따라, 자세히 살펴봅시다!

①번 부분  

4월 14일 조선에 도착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이 가장 먼저 침입한 곳은 부산진성입니다. 이때의 전쟁화도 남아있는데요. 바로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絶圖)입니다. 다음날인 4월 15일, 고니시는 부산진성에서 동래읍성으로 향합니다! 그러자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군사를 이끌고 남문을 수비합니다. 일본군은 남문 밖에 "전즉전의 부전즉가아도(戰卽戰 不戰卽假我道,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다면 우리에게 길을 내어라)"라는 목패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자 송상현은 그 목패를 빼서 던져버리며,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 싸워 죽는 건 쉬워도, 길을 내어주는 것은 어렵다)"고 쓴 목패를 적장에 던져버립니다. 오른쪽 그림 성문 앞에 놓인, 두 목패가 그 목패라고 하네요.

 

 

②번 부분

지만 제대로 방비가 되어 있지 않은 채, 조총을 들고 온 왜군에게 맞서는 것은 힘들었습니다. 울산에서 군사를 이끌고 온, 경상좌병사 이각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몰래 도망쳐버리고 맙니다. 그림의 북쪽에는 뒤꽁무니 빠지도록 도망가는 이각과 그의 비겁함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이런 장수들이 적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에서 적을 상대로 싸우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③번부분

세는 점점 더 기울어져 가고, 남문에 모든 병력이 배치되자 왜군은 도리어 약한 동쪽 벽을 공격해 성을 함락합니다

 

 

 

 

 

 

 

 

④번 부분

이 부분은 이 그림의 주제이자, 핵심인 부분입니다. 이 그림의 제목이 무엇인지 기억하시나요? 바로 동래부'순절'도입니다. 동래부사의 순절이 주제인데요. 그림 가운데에는, 동래부사였던 송상현 등이 전세가 기울어짐을 느끼고 조복을 입고 임금이 있는 북쪽을 바라본 채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앞에 보셨던 도망가는 이각의 비겁함과 비교되며, 임금에 대한 충성과 용감함을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그림을 그렸던 사람은 송상현의 충성심을 높이 샀기 때문에, 그림 정중앙에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이각과 극적으로 대립했던 셈이지요.

 

 

⑤번 부분

제가 생각하는 '동래부순절도'의 숨겨진 장면입니다. 왼쪽 부분은 아낙네들이 기왓장을 던져 왜구를 죽이는 모습이고, 오른쪽 부분은 송상현의 애첩이 지붕에서 뛰어내리는 모습입니다. 두 장면 모두 전쟁에서의 치열함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특히 왼쪽 장면은, 일본군사들이 조총을 겨누고 있는 걸 보아 아낙네들의 기왓장이 제법 위협적인 듯합니다. 마치 행주대첩에서 조선 여인들의 용기를 떠오르게 하지 않나요? 또한, 송상현을 따라 목숨을 끊는 애첩의 모습도 논개를 생각나게 하네요. 아낙네와 기생의 이러한 저항은 임진왜란 당시 국민이 가졌던 모습을 상상하기에 충분한 듯합니다.

 

 

 

 

 

두 번째 그림, 정왜기공도병(征倭紀功圖屛)

 

ⓒ 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은 2달 전, 국립중앙박물관이 영국의 고미술상에서 구매한 병풍입니다. 이 병풍은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인 1598년에 있었던 순천왜성전투, 노량해전 등의 전쟁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앞서 본 동래부순절도와는 달리, 임진왜란의 후반부를 기록한 그림입니다. 또 특이한 점이 있다면 이 그림은 명나라 종군화가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전해진다는 점입니다. 그동안은 한국이나 일본의 그림만을 볼 수 있었던 것을 명나라의 그림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정유재란은 임진왜란 이후에 일어난, 재침략으로 정유재란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하지만 통상적으로 임진왜란이라고 함께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이 병풍은 정유재란 중에서도 후반부인 1598년 9-10월 사이 모습을 그렸다고 하네요.

 

★ 시간 순서대로 번호에 따라, 자세히 살펴봅시다!

  이 그림은 전투의 시간적, 지리적 특징을 반영했는데요. 오른쪽에서 왼쪽의 순서가 시간순이라고 합니다. 즉 오른쪽이 더 이전의 시간입니다.

①번 부분

그림의 오른쪽에 있는 부분을 살펴볼까요? 이 부분은 한 성을 둘러싼 전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공격하는 쪽은 조선군과 명군이며, 성을 수비하는 쪽은 왜군입니다. 함락한 성을 되찾기 위한 조선-명의 연합군의 공격인 셈입니다. 이 부분은, 순천왜성과 광양만 일대를 되찾기 위한 격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위에서 보았던 '동래부순절도'는 일본의 공격이었던 것과는 달리 시간이 지나 우리의 땅을 되찾기 위한 반격이네요. 또한 '동래부순절도'는 대응할 시간 없이 우르르 무너졌던 안타까운 광경을 보여주지만, 지금은 조선의 패기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②번 부분

이 전투는 조선과 명나라의 육군과 해군의 공격이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전 그림에서는 보다시피 수군의 전투를 포함한 전체적인 정경을 보여준다면 이 부분에서는 육지에서 이루어진 전투를 보여줍니다. 명의 유정 장군과 육군, 조선 권율 장군과 육군의 3만 6천여 명은 명의 진린 제독과 수군,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수군 1만 5천여 명은 순천 왜성을 비롯해 장도(노루섬) 등을 오가며 왜군과 싸웠습니다. 치열한 전투는 수군뿐만 아니라 육군에서도 이루어진 셈입니다.

 

 

③번 그림

순천왜성전투와 함께 이야기해야 할 것은 바로, '노량해전'입니다. 이순신이 27일간 머물면서 왜의 장수 고니시를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전투를 벌였죠. 이 전투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이자,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 '노량해전'입니다. 위의 '동래부순절도'가 조선의 첫 전투를 보여준다면, 이 부분은 조선의 마지막 전투를 보여줍니다. 노량해전은 너무나 유명한 전투입니다. 정유재란으로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 소식과 함께 전쟁에서 불리해짐을 깨닫고 철군하게 됩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경남 사천에 있던 시마쓰 요시히로와 남해 소시라노부와 함께 500여 척을 끌고 조-명 연합군과 싸우게 됩니다. 왜는 명과 조선의 협공을 받아 관음포()로 후퇴하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은 왜군들을 한 명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필사적으로 추격하였습니다. 이 추격전에서 적의 유탄을 맞고 전사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추격을 계속하라고 했기 때문에 50여 척의 왜군을 제외하고는 모두 격파하기에 이릅니다. 그림(ⓒ네이버)을 참고하시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④번 그림

이런 전쟁이 끝나고 난 모습을 보여주는 게 왼쪽 부분입니다. 조선과 명에서는 죽은 장군들을 위해 행사를 열고, 명나라 장수들은 중국 북경으로 돌아가 황제에게 전쟁 결과를 보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쟁은 끝났고, 전쟁의 과정에서는 '동래부순절도'와 같은 시기도, '정왜기공도병'과 같은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에는 보이지 않는 한 명 한 명의 장군과 군사들 덕분에 우리의 국토를 지킬 수 있었던 셈입니다. 임진왜란 후 420주년이라는 기나긴 시간이 흘렀지만 그래도 우리는 임진왜란의 의미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