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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형에 빠진 동이족, 죽음을 무릅쓰고...

바래미나 2013. 1. 1. 00:51

성형에 빠진 동이족, 죽음을 무릅쓰고...|

1600년 전 가야인들의 편두 습성을 증거해준 예안리 인골.

정상인골(오른쪽)에 비해 두정부가 돌출하고 미가부가 눌려 눈 안쪽에

아래로 쳐지고 눈꼬리 쪽이 위쪽으로 치켜 올라간 모습이다.(왼쪽) 부산대박물관 제공

 

“머리가 왠지 이상한데?”
1976~80년 사이 김해 예안리 고분을 조사한 부산대박물관 발굴단의 시선은 뜨거웠다.

확인된 인골 210구 가운데 희한한 인골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부산대의대 김진정 박사팀의 분석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몇몇 인골의 머리가 인공적으로 변형된

흔적이 역력했던 것이다. 검토해보니 10구나 됐다. 연구자들은 퍼뜩 <삼국지> ‘위서·동이전·변진조’를 떠올렸다.

“아이가 태어나면 돌로 머리를 누른다. 머리를 모나게 하려는 것이다.(兒生 便以石厭其頭 欲其편)

지금 진한 사람은 모두 편두다.(今辰韓人皆편頭) 왜와 가깝다보니 남녀가 문신도 한다.(男女近倭 亦文身)”

■뒤짱구를 만들어라

그러니까 ‘변진(가야+신라) 사람들의 편두(편頭)’의 기록을 입증해주는 획기적인 발굴결과였던 것이다.

더 정밀하게 검토해보니 흥미로운 단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우선 편두 인골의 경우 머리의 이마 부분이 들어간 대신

뒷머리가 튀어나온 형태가 역력했다. 말하자면 뒤짱구였다. 예컨대 85호분 인골의 머리를 보면 최대길이 162㎜, 너비 151㎜,

높이 116㎜였다. 99호분의 경우 길이 149㎜, 너비 147㎜ 였다. 이는 당시 평균 여성(머리 길이 177.3㎜, 너비 137.1,

높이 129.8㎜)에 비하면 상당한 편두였다. 머리높이는 평균치 보다 13.8㎜ 정도 짧은 특징을 보였다.
이는 갓난 아이 때 무거운 물건을 앞 이마에 눌러 인위적으로 뼈를 굳게 만든 것이 분명했다. <삼국지>의 기록과 정확하게

부합됐다. 또 하나 편두의 사례(10구)는 모두 4세기대 목곽묘에서 확인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편두 인골 10구 가운데 7구가 여성이었다. 남성이 2구였으며, 성별을 알 수 없는 유아(5~6살)의 인골이 1구였다. 그러니까 4세기대 편두를 한 이들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편두가 되는 것일까. 김진정 교수는 아기의 머리 앞 뒤에 판자를 대고 끈으로 묶기를 10여 차례 실험을

반복했다. 그러자 아기의 유연한 두개골이 앞 뒤로 납작해질 가능성이 있음을 확인했다. 태어난 지 1개월이 안되는 아기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따라서 <삼국지>의 기록대로 돌같이 무거운 물건을 얹어 두개골을 변형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예안리 편두의 인골을 복원해본 결과, 두정부가 돌출하면서 미간부가 눌려 눈 안쪽이 아래로 처지고, 눈꼬리 쪽은 위쪽으로

치켜올라갔다. 마치 성형수술한 현대여성처럼 오뚝한 높은 코와 턱이 유난히 작은, ‘아리따운’ 20대 여인의 얼굴이었다.

■죽음을 부릅 쓴 1600년 전 성형

전곡 선사박물관이 예안리에서 확인된 편두 인골을 토대로 복원한 예안리 여인.

돌이나 판자 같은 무거운 물건을 눌러 머리모양을 본형시켰을 것이다. 전곡 선사박물관 제공

 

이 뿐이 아니었다. 인골 가운데는 이빨을 일부러 뺀 이른바 발치(拔齒)의 흔적도 남아있는 사례(87호)도 있었다. 예안리 인골을 실견한 일본의 인골학자 다나카 요시유키는 다른 2구의 인골에서도 발치의 가능성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았다. 또 하나 재미있는 현상은 90호분 출토 인골에서 이빨이 수평방향으로 마모된 이른바 연삭흔(硏削痕)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을 전문용어로 구함구(口含球)이라 한다. 돌구슬 같은 도구로 이빨을 지속적으로 연마했다 해서 얻은 이름이다. 그런데 이같은 ‘성형’은 예안리에서만 있었던 풍습은 아니다. 경남 사천 늑도에서 출토된 인골 2구에서는 일부러 이빨을 뺀, 이른바 발치의 흔적이 역력했다.

또 경상대가 발굴한 사천 본촌리 유적에서도 전형적인 발치의 흔적이 나왔다. 즉 30대 여성 인골의 구강 내에서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이빨이 확인된 것이다. 다른 석관에서 출토된 인골의 입 안에서도 다른 이의 치아가 보였다. 이는 어떤 사람이 일부러 자신의 이빨을 뽑아 다른 사람의 입에 넣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사례는 1999년 경북대박물관이 발굴한 대구 화원 성산리 유적에서 출토된 50대 후반 여성의 인골이었다. 이 인골은 편두였다. 또 발치의 사례도 보였다. 고인골 전문가인 김재현 동아대교수는 “전두골과 후두골을 변형시켜 평평한 형태의 인골”이라며 “판자와 같은 도구로 눌렀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편두의 경우 돌로 눌렀든, 판자로 눌렀든, 갓난아기에게 편두로 행위는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다.

머리에 강한 압력이 가해지면 그 압력을 줄이기 위해 뼈를 녹이는 세포를 내보낸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압력이 가해진 부위의

뼈가 얇아진다. 편두 두개골이 쉽게 부서지는 것도 그 때문이란다. 아마 편두를 만들다가 생명을 잃은 갓난아기도 속출했을 것이다. 발치 역시 견치(송곳니)와 측문치(위쪽 가운데부터 2번째 옆니) 등 생니를 마취없이 뽑았으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돌구슬 같은 도구를 장기간 입에 물어 이빨과 잇몸을 마모시켜 구강구조를 변형시키는

구함구 습속도 위험했을 것이다. 아래턱이 깊게 패이고, 이빨이 조기에 빠지는 일이 허다했을 것이다.

■성형은 동이족의 전통

왜일까. 왜 1600년 전 변진 사람들은, 특히나 여성들은 죽음을 무릅쓴 성형을 ‘감행’했을까.

더욱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갓난 아기 때인데….
한가지 흥미로운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즉 동양에서 편두와 발치, 그리고 구함구 문화는 동이족의 문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점이다.예컨대 중국과학원 고척추동물 및 고인류연구소는 “1980년대 지린성(吉林省)에서 확인된 인골 중 전형적인 변형두개골(편두)이 있었다”고 보고했다. 또 네이멍구 자치구 츠펑(赤峰)에서 발견된 샤오허옌(小河沿) 문화층(기원전 3000~2000)에서도 편두의 인골이 나왔다. 이 편두인골은 다뎬쯔(大甸子)유적(기원전 1600)으로 대표되는 샤자뎬(夏家店)

하층문화(기원전 2000~1200)의 인골과도 비슷했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된 샤오허옌-샤자뎬 하층문화는 전형적인 동이족의 문화이다. 또한 편두와 발치, 이빨을 연마하는

구함구 습속도 산둥반도의 동이문화인 다원커우(大汶口)문화(기원전 4300~2500)의 대표습속이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전설상의 동이계 신들에게 한결같이 보이는 공통점은 “짙은 성형의 향기’이다. 중난(中南)민족대

한국학연구소 김인희 연구교수는 “동이계의 신인 복희와 전욱, 치우 등이 모두 두개변형(頭蓋變形)을 했을

가능성이 짙다”고 보았다. 우선 팔괘(八卦)를 만들었다는 복희를 보자.

전설을 보면 복희의 어머니 화서는 지금의 산둥성 푸현(복縣)의 동남쪽 연못(뇌택)에서 큰 발자국을 밟은 뒤 복희를 낳았다,

그러니까 복희는 동이족 일파의 고향인 산둥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습유기(拾遺記)>는 “복희는 머리가

길고 눈이 길다(長頭修目)”고 했다. 김인희 교수는 “바로 이 머리가 길다는 것은 두개변형(편두)의 결과이며,

편두 때문에 눈의 모양도 변형되어 보이는 것”이라고 풀었다.

또 동이족 출신의 신 가운데 동이족인 소호를 계승하는 전욱(전頊)이라는 전설의 인물이 있었다. <산해경> ‘대황동경’을

보면 “동해 밖에 대학이 있는데 이곳에서 소호가 전욱 임금을 키웠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동해는 황해를 뜻한다.

그런데 <설문해자>는 전욱이라는 이름을 해석하면서 “전욱의 머리는 작다”고 풀이했다. 또 초나라 백서(帛書)에서는 “전욱의 머리가 기울어져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뿐이 아니다. <역사(繹史)> ‘백호통(白虎通)’은 “전욱의 정수리 모양이 사방형”이라고

했다. <논형>은 “전욱의 머리를 마치 방패를 쓴 것 같다. 전욱은 머리가 솟아있는데 요순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동이족(전욱)은 두개변형, 즉 편두를 했는데, 한족의 조상인 요순은 하지 않았다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김인희 교수는 또 전욱의 조상인 한류(韓流)를 설명한 글을 보면 확연해진다고 설명했다. 즉 <산해경> ‘해내경’을 보면

 “(전욱의 조상인) 한류는 머리가 매우 높이 솟아 있으며 귀가 작고 사람의 얼굴에 돼지주둥이를 하였으며~”라는 기록이 있다.

<산해경>은 바로 편두 이후에 머리가 길어진 외형을 <산해경>이 표현한 것이다.

또 치우도 동이 일족의 수장이었다. 그런데 “치우는 팔과 다리가 여덟개이고, 머리는 소수(疎首)”(<옥함산방집일서>)라 했다.

‘소(疎)’는 ‘길다(長)’는 주석이 있다. 그러니까 ‘소수’는 편두를 해서 머리가 긴 모양을 말한다는 것이다.

예안리 77호 무덤의 발굴 모습. 예안리 고분군에서는 210개 개체의 인골이 쏟아져 나왔다

무엇보다 <회남자> ‘지형’을 보면 명백하다.

“동방에~해와 달이 뜨는 곳의 사람들은 그 신체의 모양을 변형시키는데(其人兌形) 작은 머리와 높이 솟은 코, 큰 입, 소리개의 어깨를 하였으며 발돋움을 하고 걷고~.”
‘동방에 해와 달이 뜨는 곳의 사람들’은 곧 동이족을, 신체의 모양을 바꾸는 것은 편두를 비롯한 두개변형을 의미한다.

■성형수술을 끔찍히 사랑한 동이족

김인희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가 이런 동이족 신들의 편두모양은 새의 영혼으로 빙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회남자>에서 설명하는 ‘성형 후(後)’의 모습은 곧 동이족이 ‘발돋움하며 걷는 새’를 성형의 모델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는 ‘새의 영혼에 빙의하기 위해 성형수술을 한’ 이들이 곧 무(巫)일 것이라고 추정했다. 당대의 무(巫)는 하늘과 땅의 소통을 독점하는 제정일치의 수장을 뜻한다. 예컨대 당대의 무(巫)였던 전욱은 보통 인간과 하늘의 통로를 끊고(絶地天通), 오로지 자신을 통해서만 하늘과 땅을

소통하도록 했다.(<국어> ‘초어 하’)

예안리의 성형인들은 무엇인가. 그들도 무(巫)인가. 하늘과 땅, 인간을 소통시키는?
김재현 교수가 한가지 주목하는 대목이 있다. 예컨대 106호와 132호 편두인골의 경우 임신경력이 없는 여성의 인골이었다. 그런데 이 임신경력이 없는 여인을 중심으로 자기혈연적인 일종의 군(群)을 이루는 무덤들이 있었다. 김교수는 “임신경력이 없지만 혈연관계에 있는 일정한 무리를 지휘하는 여성 우두머리는 혹시 무(巫)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다른 해석도 나올 수 있다. 편두인골 대부분은 특별할 게 없는 일반인 여성들이었다. 무(巫)만이 성형을 강행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 당대의 미적 감각에 맞추기 위한 전통적인 습관일 수도 있지 않은가. 돌이나 판자 등으로 머리를 누른 가야인보다는 덜하지만 요즘도 갓난 아기의 머리를 변형시키려는 부모들도 있지 않은가. 아이의 머리모양을 예쁘게 한다며 아기를 엎드려서 재운다든지, 손으로 만져준다든지 하는….

어떻든 까마득한 전설의 시대부터 동이족의 성형사랑은 끔찍했던 것 같다. 성인식이나 결혼식을 위해, 혹은 조상이나 집단의 수장이 죽었을 때 생니를 뽑는 발치도 성형의 일종이니까. 여기에 돌구슬까지 입에 물고 이빨과 잇몸을 갈았다니까…. 더구나 <삼국지>에서도 살짝 언급됐듯이 온 남녀가 ‘문신’까지 했으니까. 그러고 보면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부문하고 성형수술에 빠지고,

중독에까지 이르며,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는 작금의 세태를 이해할 수도 있겠다.

<<매장인골에 의한 일한고분시대 비교>, 다나카 요시유키(김재현 역), ‘4,5세기 한·일 고고학’, 제2회 영남·규슈 합동고고학대회, 1996


참고자료>

<김해예안리고분군 Ⅱ(본문편)>, ‘부산대 유적조사보고서 15집’, 부산대박물관, 1993
<김해예안리고분군 Ⅱ(도판편)>, ‘부산대 유적조사보고서 15집’, 부산대박물관, 1992
<김해예안리고분군 출토인골(Ⅱ)>, 김진정 등, ‘부산대 유적조사보고서 15집’, 부산대박물관, 1993

 

<두개변형과 무의 통천의식>, 김인희, ‘동아시아고대학 제15집’, 동아시아고대학회, 2007

<가야인의 신체변형습속에 관한 연구>, 김상우,

인제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05

<인골로 본 고대 한일 관계사>, 김재현, ‘한국고대사연구 제27권’,

한국고대사학회,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