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산성이 올해로 축성 300년을 맞았다. 조선시대 숙종 37년(1711) 4월 초에 확장공사를 시작해서 그해 9월, 만 6개월 만에 오늘날의 모습대로 완공했다. 9월이 되면 축성 꼭 300주년이 되는 것이다.
북한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삼국의 영토 각축장으로 알려져 있다. 등산객들은 실제로 신라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비봉이나 북한산의 한 봉우리에 올라 주변을 둘러보면 ‘이런 땅에 누가 침입해 들어오며, 누가 이런 땅을 두고 각축을 벌였을까’하는 의구심을 자연스레 갖는다. 성 내부의 협소한 지형은 사람이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
- ▲ 사진은 만경대에서 바라본 백운대 정상과 북한산성 성벽의 모습을 답았다. / 사진·염동우 기자
- 그러나 비봉 정상에 국보 3호인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걸 보면 실제로 각축을 벌였던 것 같다. 아마 한강의 물이 주는 자연의 생산력과 그 배후지역으로 북한산이 갖는 관방기능 때문에 지형적으로는 험한 악산이지만 삼국시대부터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 다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북한산은 고려시대 거란족과 왜구의 침입 때 왕실의 피난지로서 이용됐고, 몽골의 침입 때도 방어기지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한다.
북한산성 축조 기록을 담은 <북한지> 연혁부분에 따르면 ‘북한산성은 원래 고구려의 산군이었으며, 남평양(南平壤)이라고도 했다. 백제의 온조왕이 이를 차지하여 온조왕 14년(B.C 5)에 성을 쌓았다. 남평양성은 지금 경도의 북한산성이며, <삼국사기>에는 개루왕(蓋婁王) 5년(132)에 북한산성을 쌓았다고 기록돼 있다. 근초고왕 26년(371)에 도읍을 이곳으로 옮겼는데, 개로왕(蓋鹵王) 21년 고구려 장수왕이 침입하여 이 성을 포위하자 개로왕이 탈출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마침내 성은 폐지되었다’고 돼 있다. 이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거의 비슷하게 나온다. 따라서 고대 삼국시대부터 북한산성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삼국사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북한지> 등을 통해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북한산성은 조선시대 들어와서부터 본격 논의된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 외침을 막기 위해 ‘한양 도성을 더 높이 축조를 할 것이냐’와 새로운 성인 ‘북한산성을 쌓을 것인가’를 놓고 신하들은 오랜 기간 동안 갑론을박을 벌인다. 이는 도성을 지킬 것인지 버릴 것인지의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에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조선 세조 때 첫 축성 상소문
북한산성 축성에 대한 첫 상소는 의외로 일찍 제기된다.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에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왕에게 상소를 올려 북한산성 축성을 권한다. 그 때가 세조 2년(1456)이었다.
-
- ▲ 전란 시 왕의 피난처로 사용했던 북한산성 행궁지의 모습. 1915년 8월 북한산의 대홍수로 건물은 다 무너지고 터만 남아 있다.
- ‘경도는 곧 북한산성입니다. 삼국시대에 있어서는 3국이 교전하던 땅이며, 고려가 3국을 통합하고 조선이 도읍을 정한 뒤로는 이곳을 가지고 사방을 공제하니, 예전에는 사방으로부터 중앙을 서로 다투었으나 이제는 중앙에 있으면서 그 형세를 알 만합니다. 삼산은 북을 진압하고, 한강은 남을 에워싸고, 서에는 임진을 두고 동에는 용진을 두었으며, 토지가 비옥하고 도리가 고르며, 조운(漕運)이 모이고 축목(畜牧)이 편리하여 경도의 사면 수십 리의 땅을 두고 보면, 그것이 천작(天作)의 땅임을 알 만합니다. (중략) 이제 중외에 익진(翼鎭)을 열치하였으되 경도의 기내에는 단지 3진만을 설치하였으니 참으로 미편합니다. (후략)’
이후 잠잠하다 효종 10년(1659)에 효종이 송시열에게 북한산성 축성의 필요성을 매우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조선왕조실록> 효종실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 ▲ 1 북한산성 계곡에 있는 북한산성의 수문 터에 대해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이 설명하고 있다. 2 가파른 능선길에 있는 성벽은 축성 이후 300년이 지난 세월을 대변하는 듯하다.
-
‘대개 외침을 받는 나라는 변방의 성곽이 견고해야 끝까지 패망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작은 병란만 일어나도 먼저 도성이 무너져 공사간의 비축물자가 모조리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니 참으로 한스러운 일이다. 어찌하여 조정의 정책이 이처럼 엉성할 수 있는가? 일찍이 북한산성을 축조하고 또한 조지서(造紙署·종이 만드는 것을 관장하던 관서이며, 현재 종로구 평창동 세검정초등학교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입구를 막아 국난이 일어났을 때 이를 왕의 피난처로 삼았으면 모두 보존할 수 있었을 것이며, 필시 적이 쳐들어와 싸우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곳은 적의 사지가 되었을 것이다.’
축성논의가 본격 논란이 된 시기는 1674년 숙종 즉위 첫 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신하가 “청나라로부터 곧 군사요청이 있을 것”이라고 전하면서부터다. 이 문제로 조정 대신들은 본격 논란을 벌이고 왕이 동조하면서 가속화됐다.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에 따르면, 숙종 29년(1703) 이조 판서 김구는 상소문에서 “신이 일찍이 북한산성이 편리하다고 여겨 다시 가서 거듭 살펴보니, 천지만엽이 둘러싸여서 진실로 아주 안전하고 함락되지 아니할 형세가 있었으며, 또 깎아지른 듯한 곳이 많아서 성을 쌓을 즈음에 공역이 크게 줄어들고, 위급할 때에 힘을 얻음이 이곳보다 더 나은 곳이 없었으니, 큰 계책을 빨리 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도성을 지켜야만 된다’고 하지만 군부를 받들고 외로운 성을 지키는 것은 진실로 위태로운 일이니, 먼저 북한산성을 쌓아서 도성과 안팎으로 서로 의지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대가(大駕)를 따르는 군병은 북한산성을 지키고 도성 백성과 다른 군사는 도성을 지키면, 설령 도성이 함락된다 하더라도 족히 급함에 임하여 물러가서 지킬 수 있습니다”라고 북한산성 축성을 건의했다.
-
- ▲ 북한산성에서 올라가면 가장 먼저 나오는 문이 대서문이다. 평일인데도 등산객들이 대서문을 통해 북한산으로 올라가고 있다.
-
우의정 신완도 “북한산성은 지세가 높아서 도성 안을 눌러 내려다보고 있으니, 사람에 비유하면 목을 조르고 등을 누르는 형세입니다. 만약 도성을 수축하여 북한산성을 자성(子城)으로 삼고 힘을 합하여 같이 지킨다면 진실로 좋을 것이나, 북한산성을 버린다면 도성이 아무리 튼튼하다 하더라도 결코 홀로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형편을 알지 못하고 다만 말하기를 ‘도성을 지켜야만 된다’고 하니, 진실로 웃을 만한 일입니다. 대저 일을 행할 시초에는 여러 의논이 뜰에 가득한 것인데, 오직 위에 있는 사람이 때를 헤아리고 힘을 헤아려서 단연코 시행할 뿐입니다”고 산성 축성 입장을 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