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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축성 300주년 기념 14성문 순례] ‘천혜의 요새’ 북한산성 -1-

바래미나 2012. 2. 8. 23:41
[북한산성 축성 300주년 기념 14성문 순례] ‘천혜의 요새’ 북한산성
임란·병자호란 전에 축성했다면 도성이 함락됐을까?
큰 성문은 홍예와 초루 갖춰

길 따라 가다 보니 어느 덧 대남문에 도착했다. 홍예와 초루를 갖춘 웅장한 문이다. 안내판에는 ‘대남문은 북한산성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성문으로, (중략) 소남문이라고도 불린 대남문은 비봉 능선을 통해 도성의 탕춘대성과 연결되는 전략상 중요한 성문이다. 성문 하부는 홍예 모양으로 통로를 내고 성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했다. 상부에는 군사를 지휘하고 성문을 지키기 위한 단층의 문루가 있다. (후략)’고 돼 있다.

탕춘대성은 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조성한 성이다. 이 성도 숙종 때 만들면서 찬반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북한지>에 따르면 ‘도성의 북벽(숙정문과 자하문)을 넘어 탕춘대성을 통해 북한산성으로 피난 농성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왕이 도성이 함락될 위기에 있을 때 안전하게 피신하기 위해서 탕춘대성과 북한산성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탕춘대성은 중간의 방어선이고, 북한산성은 행궁을 건립해서 왕이 머물도록 한 것이다.

▲ 대동문과 대성문 사이에 있는 보국문. 소동문으로도 불렸다.
대남문에서 대성문까지 불과 0.3km밖에 안 된다. 대남문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부왕동암문, 동쪽으로 대동문까지 불과 좌우 1km 남짓 되는 거리에 성문들이 줄줄이 있다. 결국 왕이 도성에서 피신해 올 때 많은 군사들의 호위를 받기 위해선 많은 성문들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대성문에 이어 보국문까지 갔다. 성곽 복원이 제대로 이루어진 구간이다. 길게 늘어선 성벽들이 마치 난공불락의 천혜의 요새같이 보인다. 만약 조선시대의 북한산성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일찌감치 건립되었더라면 과연 어떠했을까 라는 상상도 해본다.

보국문은 성문이지만 암문 형태로 지어졌으며, 소동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보국문에서 대동문까지는 불과 700m. 이젠 등산로도 완만하다. 용암문까지 오르락내리락하는 구간도 없다.

대동문은 북한산성의 동쪽에 있는 문이며, 가장 큰 홍예문을 가졌다. 성 밖으로 우이동과 수유리로 연결된다. 용암문은 만경대 남쪽 용암봉 아래에 있는 문이라 해서 이름 붙여졌다.

▲ 북한산성의 가장 동쪽에 있는 대동문. 성 밖으로 우이동과 수유리로 연결된다.
용암문에서 위문까지는 만경대를 중심으로 좌우로 능선이 이어지지만 위험한 암릉 구간이어서 그 밑 우회 등산로로 사람들이 다니고 있다. 중간쯤 지점에서 노적봉 어깨를 살짝 걸쳐 지나간다. <북한지>에는 ‘노적봉은 만경대 서쪽에 있는데, 솟아오를 듯한 산봉우리와 뾰족뾰족한 바위의 형상이 노적가리와 같으므로 노적봉이라 부른다. 중흥동의 옛 석성이 여기에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윽고 위문이다. 원래 이름은 백운봉암문이었다. 항상 등산객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이틀째 구름이 잔뜩 끼어 있지만 후텁지근한 날씨로 땀은 온몸을 적신다. 위문에서는 항상 시원한 바람이 지난다. 바람길이 이곳에 있는 것 같다.

북한산성 행궁도 머지않아 복원될 듯

북한산 정상 백운대가 바로 위에 있다. 원래 백운봉이라 불리던 것이 널찍한 터가 있어 백운대로도 불리고 있다. 탁 트인 백운대에서는 사방 조망이 가능하다.

▲ 북한산성 행궁지로 향하는 이중방어문 성격을 띠고 있는 중성문. 대서문이 평지에 위치, 적에게 뚫릴 위험이 커 중성문을 건립해 적의 침입을 막도록 했다.
다시 조금 내려와 위문에서 북문으로 향한다. 능선은 백운봉에서 염초봉을 거쳐 원효봉으로 이어지지만 염초봉 주변이 위험한 리지 구간으로 등산객들의 사고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라 일반 등산로로 우회하기로 했다. 위문에서 상운사를 거쳐 북문까지 갔다. 2km가 조금 안 되는 거리다. 많은 등산객이 이용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북문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두 개의 홍예문으로 연결돼 있다. 초루도 없어 중간에 구멍이 뻥 뚫려, 다른 성문과 또 조금 다른 모습이다. 이렇게 보면 북한산성은 도읍에서 피신해 들어올 수 있는 대남문을 중심으로 좌우 방어진지를 확실히 구축하고, 북쪽은 소홀히 한 것 같은 느낌이다.

능선 따라 성곽은 계속 이어진다. 잠시 오르면 원효봉이 나온다. 당나라로 유학 가던 중 동굴에서 잠을 자다 해골 물을 마시고 ‘일체유심조’를 깨친 그 원효대사가 연관된 봉우리다. 원효대사가 중국 유학을 포기하고 원효봉 밑 조그만 암자에 자리 잡고 기도를 했다고 전한다. 현재의 원효암이 그 원효암인지는 알 수 없다.

능선 따라 내려가는 길은 가파른 암벽길에 놓인 철제사다리, 혹은 성곽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성벽 따라 걷는 성문 중에 마지막 문인 서암문인 시구문에 다다른다. 시체를 옮기기 위한 문이라 해서 시구문이라 이름 붙여졌다. 이렇게 해서 수문 포함 14개의 성문 따라 걷기는 끝났다.

그러나 북한산성에서 가장 중요한 행궁지를 찾아서 출발이다. 북한산성 방향에서 행궁지로 가려면 중성문·중흥사를 지나야 한다. <북한지>에는 ‘중성문은 원효봉과 의상봉 사이에 있으며, 서쪽은 수구(水口)로 되어 있고 바닥에는 얕은 물이 흐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성문은 행궁지로 향하는 이중방어문 성격을 띠고 있다. 대서문이 비교적 평지에 위치해 있어 적에게 뚫릴 위험이 커, 중앙으로 향하는 길 정중간에 중성문을 건립해서 적의 침입을 막도록 했다.

중흥사는 고려 초 창건한 절로 알려져 있으나 이후 쇠퇴하다 숙종 때 북한산성을 축성할 당시 전국 승군을 지휘한 팔도 도청섭이 이곳에 기거할 정도로 커졌다. 1904년 화재와 1915년 대홍수로 흔적만 남긴 채 건물은 전부 쓸려갔다고 한다.

행궁지는 중성문에서 중흥사를 거쳐 약 1.8km 떨어진 나한봉에서 북한산성 안으로 뻗은 능선 끝자락쯤에 위치해 있다. 축성 초기 당시 내전과 외전 합해 총 124칸에 이르렀다고 전하나, 1915년 홍수로 무너져 지금은 그 흔적만 전하고 있다. 북한산성 전체가 사적 제162호이며, 또한 행궁지도 사적 제479호로 지정돼 있다.

북한산성 행궁은 고양시에서 (재)한울문화재연구원에 용역을 줘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는 일단 유물부터 찾은 뒤 어느 정도 복원이 가능한지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북한산성 행궁 터는 유적 발굴로 이리저리 파헤쳐져 있는 상태다. 머지않아 북한산성 행궁도 복원될 것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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