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사진--후기--

[북한산성 축성 300주년 기념 14성문 순례] ‘천혜의 요새’ 북한산성-4-

바래미나 2012. 2. 8. 23:45
[북한산성 축성 300주년 기념 14성문 순례] ‘천혜의 요새’ 북한산성
임란·병자호란 전에 축성했다면 도성이 함락됐을까?
성문은 모두 14개 문으로 구성

그 북한산성 성곽을 따라 한 바퀴 돌기로 하고, 먼저 수문 터부터 찾았다. 14개의 성문 중 수문을 제외하고는 전부 복원한 상태지만 수문은 이정표도 없이 내버려져 있다. 북한산성 계곡을 따라 500m쯤 올라가니 흐르는 물 아래 바위에 커다란 구멍이 몇 개 뚫린 바위가 보인다. 그게 바로 수문 터다. 수문은 북한산성의 식수원 역할을 했던 문이다. 원래 북한산성의 시구문 쪽 계곡과 중성문 옆 계곡에 두 곳이 있었지만 지금은 중성문 옆 한 곳의 흔적밖에 남아 있지 않다. 평소엔 식수원 역할을 하지만 적이 침입해 올 때는 방어진지 역할까지도 했다고 전한다. 이정표라도 세워 놓으면 오가는 등산객들이 역사의 현장을 떠올릴 수 있을 텐데.

수문 터에서 조금 내려와 대서문으로 향했다. 북한산성의 성문은 일반적으로 대서문과 같이 큰 성문은 홍예(무지개문)와 초루(성문 위 다락집 같은 정자)가 갖추어진 반면 암문은 군수물자나 적의 동태, 시체를 옮기기 위해 조그만 비밀문같이 만들어 사용했다.

▲ 염초봉고 원효봉 사이에 있는 북문. 문의 모양은 홍예로 복원했으나 초루가 없고 두 개의 문으로 구성된 것이 특징이다. 옛 문헌의 고증을 거쳐 복원했는지는 의문이다.

대서문은 제법 위용을 갖춘 문으로 웅장하다. 문 위에는 초루까지 갖춰져 소수의 군사들이 머물며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게 돼있다. 지금은 등산객들의 쉼터로 활용되고 있다. 대서문에서 의상봉 방향으로 성곽이 연결돼 있다.

성곽 따라 계속 올라간다. 가파른 능선길이라 이 방향으로는 도저히 적이 침입할 수 없어 보인다. 그 가파른 능선에도 성곽은 끊어질 듯하면서 연결된다. 숙종 시절 병조판서 최석항이 반대 상소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산성은 바깥은 험하고 안은 평평한 뒤에야 암벽을 타고 접근할 우려가 없고 왕래하고 접응하는 데 편리함이 있는 법인데, 여기는 내외가 모두 험준…(후략)”한 형국이다.

대서문에서 의상봉까지 불과 1km도 안 되는 거리를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른 시간이 1시간 이상은 족히 소요된 것 같다. <북한지>에서는 의상봉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북한산 산성주능선 위 위문과 대동문 사이에 있는 용암문.
‘미륵봉 아래에 있으며, 신라시대 의상조사가 이곳에 머물렀다. 의상조사는 처음에 흥주의 태백산에 이르러 부석사를 창건하고 북한산에 와서 머물렀다. (후략)’

의상조사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 절벽에 가까운 지형이다. 남한산성처럼 외벽은 깎아지른 듯하지만 성 안으로는 평평한 ‘천작지형’이 아니라 양쪽 모두 험준하기 짝이 없다.

성벽은 끊어지고 험준한 암벽이 대신했다. 암벽 능선은 계속 이어졌다. 최근 깔끔하게 복원한 성곽이 암벽 능선이 끝난 뒤 연결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사당암문이 나왔다.

▲ 북한산 정상 백운대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위문. 원래 이름은 백운봉암문이었다.
암문은 성곽에서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든 비상 출입구로서 평상시에는 백성들의 출입문으로, 전쟁 때는 비밀통로로 사용됐다. 암문은 돌로 만들었지만 홍예 형태가 아닌 방형의 평문 형식이며, 상부에 문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가사당암문도 조그맣다. 키 큰 성인이 서서 들어가면 머리가 부딪힐 정도로 낮다. 암문은 대개 계곡으로 내려가는 곳에 만들어져 있다. 봉우리에서 내려다보면 암문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다.

용출·용혈·증취봉을 오르내려 부왕동암문에 이르렀다. 해발 600m도 안 되는 봉우리지만 산세가 험하고 암벽 능선길이라 땀이 뻘뻘 흐른다. 등산로도 험해서 때로는 철제 사다리로 오르내린다. 몇 년 전 용혈봉에서 벼락이 내리친 사고가 있을 만큼 우뚝 솟은 봉우리들이다.

부왕동암문은 윗부분은 홍예로, 나머지 세 부분은 방형으로 복원돼 있다. 원래의 모습은 전부 방형이지 않을까 싶은데…. 옛 문헌의 고증을 거쳐 복원했는지 궁금해진다.

나월·나한봉을 거쳐 청수동암문으로 향했다. 나월·나한봉은 출입금지구역이라 우회했다. 구름이 잔뜩 낀 날씨로 저 멀리 다른 봉우리들을 볼 수 없을 정도다. 나한봉을 지나 제법 큰 쉼터가 나온다. 성으로 치자면 옹성에 가깝다. 성벽에서 조금 튀어나와 옆의 성벽으로 침입하는 적을 바로 무찌를 수 있도록 한 성이다. 좌우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 북문과 수문 터 사이에 있는 시구문. 시체를 나르던 문이라고 해서 시구문이라 했으며, 서암문이라고도 불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청수동암문이다. 청수동암문에서 성 밖으로 나가면 진흥왕순수비가 있는 비봉이 나온다. 비봉의 진흥왕순수비는 진흥왕이 세운 4개의 순수비 중 가장 높은 곳, 가장 험한 곳에 있는 비석이다. 신라 진흥왕이 이 지역을 정복한 뒤 정말 이곳에 와서 비석을 세웠을까 싶다. 말 타고 올라가기 힘든 길을 그 당시 걸어서 왔을까? 역사는 때로는 사실과 허구(신화)가 혼돈돼서 후세에 전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런 의문이 든다.

청수동암문 다음에 있는 봉우리가 문수봉이지만 대남문까지는 약간 우회하는 능선으로 연결돼 있다. 지도를 보면서 위치를 확인하려 했지만 구름이 잔뜩 끼어서 도저히 방향감각을 잡을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등산로 따라 간다.

한국의 산들이 대개 그렇듯이 불교식 이름을 가진 봉우리가 많다. 북한산에도 마찬가지다. 불교에서 석가모니불을 가까이서 모시는 협시 보살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로 알려져 있다. 보통 왼쪽에 있는 문수보살은 지혜를 상징하고, 오른쪽에 있는 보현보살은 실천적 구도자의 모습을 띤다. 북한산에도 그 이름을 따서 이 봉우리들의 이름을 붙였다.
1 · 2 · 3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