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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축성 300주년 기념 14성문 순례] ‘천혜의 요새’ 북한산성-3-

바래미나 2012. 2. 8. 23:50

 

[북한산성 축성 300주년 기념 14성문 순례] ‘천혜의 요새’ 북한산성
임란·병자호란 전에 축성했다면 도성이 함락됐을까?
숙종 때 축성 놓고 찬반 상소문 잇따라

그러나 축성 반대 입장도 만만찮았다. 판부사 서문중이 상소를 올려 축성 반대 입장을 밝혔다.

“뭍에는 남한산성이 있고, 물에는 강도(江都, 지금의 강화도)가 있는데, 이제 두 곳을 버리고 따로 사방의 문을 활짝 열어 놓아도 적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는 땅을 구하려 하면, 신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말하기를 ‘가까운 땅에 성을 만들어서, 급할 때에 임하여 옮겨 들어가서 도성을 비우고 청야(淸野)하면 적이 얻을 것이 없어서 오래 머물지 못한다’고 하며, 또 말하기를 ‘다른 군대가 도성을 지키다가 도성이 함락되면 물러가서 북성을 지킨다’고 합니다. 대체로 우리가 중히 여기는 바는 적이 달려오는 바인데, 성을 지키는 자는 진실로 완급이 있지만 성을 공격하는 자 또한 차례가 있겠습니까?”

▲ 북한산성의 암문은 비밀리에 드나들었던 문이다. 의상봉과 용출봉 사이에 있는 가사당암문.
예조판서 김진귀도 같은 해 축성 반대의 상소를 올렸으나 숙종은 “이미 내 뜻을 개유(開諭)하였다”며 축성 고수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반대 상소문은 축성 공사를 시작하는 숙종 37년(1711)까지 계속됐다. 병조판서 최석항은 “산성은 바깥은 험하고 안은 평평한 뒤에야 암벽을 타고 접근할 우려가 없고 왕래하고 접응하는 데 편리함이 있는 법인데, 여기는 내외가 모두 험준하니 그 불편한 것의 하나입니다. 도성의 백성과 같이 들어가게 되면 실로 모두 포용할 만한 형세가 못 되니…, (후략)”라며 축성 반대 입장을 명확히 했다.

대체로 축성 반대 이유는 기근과 재난 등으로 경제여건이 익지 않았다는 것과 풍수지리상 도성의 지맥을 손상시킨다는 것,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맺은 약조에서 축성이 금지되었다는 것 등이다. 사실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도성 가까이 산성을 축조하면 도성과 산성을 동시에 방어해야만 실효가 있는데, 두 개의 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부족하고, 도성을 버리고 산성으로 피난해 저항한다면 도성 내의 백성이 갈 곳이 없게 된다는 것 등이었다.

▲ 북한산 의상봉 능선의 용혈봉과 나월봉 사이에 있는 부왕동암문.
이에 숙종은 “도성은 지킬 수 없음을 익히 헤아린 것이다. 북한산성의 축성은 백성과 더불어 함께 지키자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니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밝혀 축성 공사를 강행했다. 이때가 1711년 4월 3일이다.

장기간 축성 논란이 있었던 만큼 숙종은 공사를 신속히 끝내기를 원했다. 전국에서 부역에 동원된 인원과 승군은 총 10만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의 3군문으로 구역을 분담해서 성을 쌓도록 했으며, 성곽의 총 길이는 약 12.7km에 달했다. 성이 완공된 뒤에는 승군으로 하여금 성을 수비하도록 했으며, 승군대장에게는 팔도도청섭이란 직책이 주어졌다.

축성 총책임자였던 승려 성능이 <북한지> 편찬

초대 승군대장은 성능이었다. 성능이 바로 영조 21년, 1745년에 <北漢誌(북한지)>를 쓴 주인공이다. <북한지>에 소개된 북한산성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 북한산 의상봉 능선의 나한봉과 문수봉 사이에 있는 청수동암문.
‘북한산성의 전체 둘레는 12.7km에 이르고, 성곽 시설은 수문 1개소와 북·대동·보국·대성·대남·대서문 등 6개소의 성문, 서·백운봉·용암봉·가사동·부왕동·청수동암문 등 6개소의 암문, 그리고 중성문 등 모두 14개의 문으로 이뤄졌다. 성곽공사에 이어 군사지휘소인 동장대·남장대·북장대 등 장대(將臺) 3개소가 마련됐다. 동장대가 북한산성의 총 지휘소 역할을 했다.

성 내의 식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물 99개소와 저수지 26개소를 숙종 38년(1712) 10월까지 만들어 북한산성 축성 공사를 마무리했다. 북한산성 축성 당시 14개의 성문 중 북문·대동문·대서문·대성문·중성문의 5개 문은 높이 11~13척, 너비 13~14척으로 홍예와 초루가 설치되었다. 소동문·소남문·서암문·백운동암문·용암봉암문·동암문·청수동암문·부왕동암문·가사당암문 등 9개 문의 높이는 약 7척, 너비 약 7~8척 내외로 높고 낮음이 일정치 않다. 또 수문은 높이 16척, 너비 50척이었다. 소동문은 보국문, 소남문은 대남문, 백운봉암문은 위문, 청수동암문은 위녕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중성은 노적봉과 중봉 사이에 있는 협곡을 차단하기 위해 쌓은 성이다. 지형이 평탄해 취약한 대서문 방면이 적에게 뚫리더라도 병목과 같이 이 일대를 차단하면 행궁을 비롯한 주요 시설과 인명을 보호할 수 있기에 이중으로 쌓은 것이다.

▲ 북한산성의 가장 남쪽에 있는 대남문. 도읍에서 왕이 피신하는 문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행궁은 유사시 임금이 옮겨와 임시로 거처하는 별궁이다. 숙종 37년(1711) 7월에 행궁자리를 정하고 8월에 착공해 이듬해 5월에 130여 칸 규모로 완공됐다.

산성 내 많은 절을 창건해 승군의 병영으로 사용하면서 북한산성을 지키게 했다. 당시 병영으로 사용하던 사찰은 도총섭이 머물던 136칸의 중흥사를 비롯해서 태고사·서암사·용암사·보국사·보광사·부왕사·원각사·국녕사·진국사·상운사 등 11개 사찰과 원효암·봉성암 등 2개의 암자가 있다.’

이후 승군들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강제 해산됐고, 사찰도 점차로 해체됐다. 이어 1915년 8월 북한산에 내린 집중호우로 돌로 된 성벽만 남겨놓은 채 행궁과 동장대 등 산성 내부의 주요 시설물 대부분 무너지거나 홍수에 떠내려갔다. 현재의 산성은 1990년부터 서울 정도(定都) 600년 사업 일환으로 복원과 재정비를 거듭, 역사탐방로와 등산로로 활용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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