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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뮤어 패스를 향해 걷고 있는 백패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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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일차인 8월 18일 출발한 지 4시간 만에 실버 패스(Silver Pass)에 도착했다. 실버 패스에서 만난 마이클 일행은 친구 사이로 하루 10마일 정도 걸으면서 목표 예정일도 없이 존 뮤어 트레일을 천천히 즐기고 있었다. 마이클은 스코틀랜드식 치마를 입고 있어서 인상적이었는데 나도 친구와 다시 오고 싶다고 하니 그는 “Girl? or Boy?”라고 묻는다. 나는 그저 웃으면서 이미 결혼했다고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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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버 패스에서 내려다 본 광활한 하이 시에라(High Sier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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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완주할 수 있을까?
오후 3시37분 레이크 에디슨 페리 갈림길목에 도착했다(37°24.755'N 118°55.471'W·7,871ft). 실버 패스의 고도가 1만900ft이고 이곳의 고도가 7,871ft이므로 무려 3,000ft(900m) 이상을 내려온 것이다.
점심시간에 나를 앞서간 토머스를 다시 만났다. 그는 이미 발톱 3개가 검게 죽었고, 침낭도 얇아서 에디슨 레이크로 탈출하기로 했단다. 순간 나는 토머스를 따라 에디슨 레이크로 빠져나갈까 하는 유혹에 빠졌다. 혼자 여기까지 왔으면 많이 온 거 아닌가. 다음에 다시 더욱 철저하게 준비해서 오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나는 에디슨 레이크로 빠져나가겠다는 토머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나에게는 아직 더 걸어야 할 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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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레이크 에디슨 페리(Lake Edison Ferry) 갈림길목. 2 GPS와 필기도구. 주요한 마일스톤과 하루 일정 등을 빼놓지 않고 메모했다. 3 로즈 레이크(Rose Lake) 갈림길목에서의 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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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와 헤어진 후 오르막길이 계속되었다. 지도에는 패스라고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나는 속으로 이 오르막을 오르면서 ‘Hell Pass(지옥 고개)’라고 제멋대로 작명했다. 토머스와 헤어진 후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에다 충분한 음식을 먹지 못해 영양상태도 나빠 입술이 까맣게 터서 입을 벌리기 힘들었고, 손톱 주변은 갈라져서 따가웠다.
고개는 다 넘었어도 야영지까지는 멀었다. 개울이나 호수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상에서 다시 4km 정도를 지나자 야영지가 나왔다. 최악의 운행이었다. 처음으로 헤드랜턴을 켜고 운행했고, 완전히 어두워진 오후 8시5분에야 겨우 야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37°22.673'N 118°54.200'W·9,296ft).
7일차인 8월 19일. 이날은 셀든 패스(Selden Pass)를 넘어 뮤어 트레일 랜치(Muir Trail Ranch)에 도착할 예정이다. 이곳은 전체 일정에서 중간 지점에 해당되며, 다음날 부족한 식량과 스토브를 공급받기로 한 곳이다.
오후 1시10분쯤 나의 그림을 그려주었던 제시카를 다시 만났다. 역시나 빠른 걸음으로 올라오고 있다. 그녀는 맘모스 레이크(Mammoth Lake)까지 친구를 배웅하고 다시 트레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오후 1시30분 마리 레이크를 통과했다. 작거나 크거나 아름답지 않은 호수가 없지만 마리 레이크도 대단히 아름다운 호수였다. 특히 셀든 패스를 오르면서 내려다보는 마리 레이크는 한 폭의 그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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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40분 2개의 호수로 이루어진 샐리 키즈 호수를 통과했다. 초원을 가로지르고, 호수 옆으로 이어진 아름다운 트레일을 따라 빠른 속도로 걷는다. 뒤따르는 제시카도 쉬자는 얘기 한마디 없다. 나 역시 이제 곧 긴 여정의 가장 중요한 마일스톤(milestone)인 뮤어 트레일 랜치를 바로 앞두고 설레는 마음으로 걷고 있었다.
오후 4시51분 마침내 플로렌스 레이크(Florence Lake)로 내려가는 트레일과 존 뮤어 트레일의 갈림길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뮤어 트레일 랜치까지는 1마일도 안 된다. 그 어느 이정표보다 감개가 무량하다. 이제 나는 이곳에서 하루 푹 쉴 수 있으며, 스토브와 부족한 식량을 얻게 될 것이다.
8월 20일 이 날은 뮤어 트레일 랜치에서 하루 쉬면서 식량과 스토브를 보급 받기로 한 날이다. 물론 왕복 20km 정도를 걸어가서 보급 받아야 했지만 나는 마치 소풍가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식량을 받기로 한 플로렌스 레이크로 향했다.
플로렌스 레이크 리조트는 말이 리조트이지 한국의 대형 위락시설을 연상하면 안 된다. 그저 우리나라의 편의점보다 작은 가게가 하나 있을 뿐이며, 전화 통화도 되지 않는 곳이다. 가게에는 주식이 될 만한 식품은 많지 않았지만 햄버거와 견과류, 음료 등을 팔고 있었으며, 가스와 휘발유 등의 연료도 팔고 있었다. 간단한 진통제와 반창고, 정수약품, 아스피린 등도 구할 수 있다. 플로렌스 레이크 리조트도 하이 시에라에 겨울이 찾아오는 9월 중순이면 폐쇄된다. 자세한 것은 웹사이트(http://www.florence-lake.com)를 참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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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셀던 패스를 오르면서 내려다 본 마리 레이크 (Marie L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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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곳에서 미국 현지에서 트레커들을 지원하는 케이트렉(K-Trek) 전석훈 대표로부터 미리 맡겨 두었던 식량과 스토브를 보급 받았다. 남은 일정은 7~8일 예정이었지만 가벼운 라면과 누룽지, 알파미 등 약 6일치 식량만을 챙겼다. 식욕을 돋우는 김치제육 등의 포장 식품이나 보관이 편한 통조림은 무게와 쓰레기 때문에 아예 제외했다. 라면도 봉지를 모두 해체하여 잘게 부수어 곰통에 넣고, 라면 수프도 다 뜯어 커다란 지퍼백 하나에 모두 담았다. 짐을 단 1g이라도 줄여야 했으며, 쓰레기를 남기지 않기 위한 조치였다.
예전에 봐왔던 사진 속으로 뛰어든 느낌
이제 절반을 왔다. 휘트니까지 남은 절반 구간에는 식량을 보급 받을 수도, 중간에 탈출하기도 여의치 않다. 이제 이곳을 통과하면 휘트니 포탈까지 계속 가야 한다. 식량과 스토브를 보급 받은 나는 마치 전쟁터에서 총과 총알을 보급 받은 병사와 같은 심정이었다. 모든 게 여유로웠고, 하이 시에라의 아름다운 풍경은 더욱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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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에볼루션 레이크(Evolution Lake)를 뒤돌아보며. 2 샐리 키즈 호수(Sallie Keyes Lakes)를 지나고 있다. 3 플로렌스 레이크 선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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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게 너무 느려 시간마저도 정지된 듯한 한 장의 그림 같았다. 한계가 있는 나의 기억 때문에 나는 그 아름다움을 완전히 봉인해서 간직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억으로도, 사진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단지 지금 이 순간 마음껏 즐기는 게 올바른 일이다.
뮤어 패스는 오늘 일정에서 가장 중요한 마일스톤이다. 높이(3,644m)도 높이려니와 뮤어 패스에는 존 뮤어 트레일의 가장 대표적인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뮤어 헛(Muir Hut)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뮤어 헛 앞에 서자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난 2년간 여러 가지 자료와 서적을 뒤지며 사전 조사를 했을 때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뮤어 헛. 나는 실제 뮤어 헛 앞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예전에 보았던 그 사진 속으로 갑자기 뛰어든 듯한 느낌이었다. 이 무인 대피소는 존 뮤어를 기리며 1931년 시에라클럽에서 세운 것이다.
11일차가 되던 8월 23일 누적 운행 거리가 255km에 이르렀다. 이제 남은 거리는 ‘불과’ 100km 정도다. 나는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어느 순간 ‘걷는’ 내 육신과 ‘사고’하는 내 머리가 분리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까맣게 죽은 발톱도, 이미 터져 버린 물집도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어깨를 짓누르던 배낭의 무게도 마치 풍선처럼 느껴졌다.
8월 25일은 하루에 2개의 패스를 넘은 날이었다. 오전 10시25분 글렌 패스(Glen Pass)는 쉽게 넘었으나 존 뮤어 트레일에서 가장 높은 포레스터 패스(Forester Pass·1만3,200ft)는 그 높이만큼이나 쉽지 않았다. 어느덧 해가 진 오후 6시55분, 마침내 포레스터 패스에 도착했다. 포레스터 패스를 넘는 길은 예상보다 거칠고 힘들었다. 만년설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스위치백으로 이어진 오르막도 상당히 가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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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너휴 패스를 향하는 길에 만년설이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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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째 앞서거니 뒤서거니 동행했던 로버트는 어젯밤 약간 상기된 표정이었다. “One day, Two Pass!, one day, Two Pass!”라고 여러 번 중얼거렸다. 하루에 두 개의 패스를 넘어온 자신이 자랑스러웠던 게다. 아홉 개의 패스를 모두 넘었고, 이제 휘트니 정상만을 남겨두고 있다는 사실은 내게도 뿌듯한 일이었다.
구릉지대를 지나면서 휘트니에서 출발한 존 뮤어 트레일 종주자 2명을 만났다. 그들은 이제 막 휘트니를 지났으니 아직도 보름 이상을 걸어야 요세미티에 닿게 될 것이다. 나는 길을 끝내가고 있었으나 오히려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