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11월6일 주월 한국군의 닌호아2호 작전시 고(故) 송서규 대령의 전사는 대대장이 최전방 전투원으로 직접 참가했다가 전사한 최초의 사례였다. 이야기는 그해 10월24일 2개 대대 규모의 베트콩이 9사단 사령부 남쪽 2㎞ 닌호아 시가지를 점령했을 때부터 시작된다.
당시 베트콩은 산악 정글을 장악하고 있었지만 시가지에 2개 대대를 투입한 공세는 대담한 도발이었다. 반면 9사단의 입장에서 보면 베트콩을 찾아 산악 정글을 헤맬 필요 없이 제발로 찾아온 그들을 안방에서 섬멸할 수 있는 호기를 맞이한 셈이었다.
사단은 즉각 29연대 2·3대대를 투입, ‘닌호아1호’ 작전을 전개했다. 문제는 베트콩이 시가지를 점령하고 있어 아군의 포격으로 많은 민간인 피해가 발생할 경우 오히려 그들의 심리전에 말려들 가능성이었다. 그 점을 감안해 채명신 주월사령관은 “공격 준비 사격 없이 적을 격멸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그럼에도 자체 화력만으로 공격을 감행한 29연대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적 주력은 도주해 버렸다.
아군의 약점을 간파한 베트콩은 11월6일 새벽, 또다시 1개 대대 규모로 닌호아를 점령했다. 29연대는 이번에도 2·3대대를 투입, 닌호아2호 작전을 전개했다. 당시 2대대장 송중령은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후임 대대장과 함께 출동했다.
故 송서규 대령 故 송서규 대령의 장남(5세) 재용군이 그의 아버지의 태극 무공훈장을 김계원 육군 참모 총장으로부터 수여받고 있다 ↗ |
송중령은 지난 작전의 교훈에 따라 제한된 포병 화력을 지원받아 4개 중대로 베트콩을 포위한 후 그들을 압축 섬멸하기로 했다. 그러나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작전은 진척되지 않았다. 헬기에 탑승해서 지휘하던 송중령은 작전이 지연될 경우 닌호아1호 작전과 같이 적의 주력이 야음을 이용, 도주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진격이 부진한 6중대 지역에 착륙한 송중령은 자신이 직접 중대를 지휘하면서 작전을 독려하기 시작했다.치열한 교전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송중령은 화기소대를 동쪽으로 우회시킨 후 전 중대가 일제히 공격하도록 했으나 이미 지쳐 있던 장병들은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오후 5시가 되면서 상황이 급박해지자 송중령은 더욱 강력히 밀어붙이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때 부상당한 3소대장이 전사하자 송중령은 3소대를 직접 지휘하면서 병사들과 함께 50여m를 전진했다. 이어서 병사의 유탄 발사기를 들고 사격을 계속하면서 진격하던 송중령은 30m 전방 농가에서 날아온 적의 집중 사격에 가슴을 맞고 쓰러지고 말았다.
송중령이 전사한 후 다음날까지 계속된 작전에서 29연대는 베트콩 14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으나 전사 38명, 부상 51명의 피해를 입었다. 따라서 닌호아2호 작전은 막대한 아군 피해와 적의 주력을 격멸하는 데 실패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고 하겠다.
지휘관이 전투원으로 나선 송중령의 지휘에 대해서도 엇갈린 평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부하가 쓰러져 가는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최전선에 나선 지휘관의 살신성인 정신만큼은 높이 평가돼야 한다.
또 후임 대대장이 함께하고 있었다는 점과 게릴라전의 특수성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전투가 끝난 후 정부는 송중령에게 태극무공훈장과 함께 1계급 특진을 추서했으며 전쟁기념관은 호국인물로 선정, 그를 추모하고 있다.
<최용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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