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참전용사들은 베트남 전쟁의 대표적 영웅으로 고 지덕칠 중사를 지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제2해병여단 제2중대 제3소대 위생 하사관이었던 지덕칠 하사가 베트남 중부 꽝응아이성 동쪽 해안 빈쩌우 반도에 투입된 것은 1967년 1월31일. 미군 UDT의 수로 측량을 엄호하는 ‘강구(江口) 전투’였다.
그날 아침, 헬기를 이용해 탐사가 예정된 쪼모이 강 주변에 착륙한 제1대대가 강을 따라 수색작전을 시작했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그러나 지하사가 속한 제3소대가 계획된 목표를 향하고 있을 때 예기치 못한 적의 집중 사격이 벼락을 내리치듯 시작됐다.
소대장은 즉각 증원을 요청하면서 후방으로 철수하려 했다. 그러나 적은 소대를 더욱 옥죄기 시작했고, 전사상자가 속출했다.
쓰러진 전우를 구출하던 지하사도 부상을 입었지만 부상 전우를 찾아 총탄이 난무하는 전장을 뛰고 있었다.
소대의 악전고투가 계속됐지만 아군의 포병은 사거리가 미치지 못했고, 증원 헬기는 오지 않았다. 결국 2시간이 지나 제1중대를 태운 헬기가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들은 적의 좋은 표적이었다. 적의 대공 사격이 불을 뿜자 날아온 헬기 중 일부는 피격돼 불시착했고 나머지는 되돌아가 버렸다. 그중 한 대가 겨우 착륙했지만 위치가 달라 도움이 되지 못했다.
증원이 실패한 후 소대는 무장 헬기가 집중 사격을 퍼붓는 틈을 이용, 탈출을 시작했지만 분대장들이 차례로 전사해 지휘 부재 상태였다. 소대장은 부상당한 지하사를 제1분대장으로 임명해 탈출을 지휘토록 했다. 지하사를 비롯한 소대원들의 투혼과 무장 헬기의 지원에 힘입어 적의 포위망에서 벗어난 소대는 구호 헬기를 요청해 부상자를 후송하기 시작했다.
온몸에 여덟 발의 총탄을 맞은 지하사는 한사코 양보하며 다른 전우 여섯 명을 먼저 후송시켰다. 그러나 날이 어두워져 두 번째 헬기 도착이 지연되면서 지하사는 출혈 과다로 숨지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제3소대 46명 중 13명 전사, 10명 부상, 증원 병력 7명 전사, 4명 부상 등 피해만 입고 작전은 실패했다.
강구 전투는 문제점이 많은 전투였다. 우선 지난 12월부터 계획했던 전투였음에도 작전 지역 정보가 부족했다. 또 하루 동안의 엄호 작전이라는 안이한 사고로 소대를 지원 화력도 없는 곳에 무작정 투입, 적의 살상지대로 넣어 준 꼴이 되고 말았다.
소대가 고립된 후에도 헬기를 기다리며 2시간을 소모했고, 증원 병력을 적의 강점에 투입시켜 피해를 자초했다. 그때 만약 적과 접촉이 없던 나머지 병력을 집중해 적 후방을 역포위했다면 소대 구출은 물론 적을 섬멸하는 호기가 될 수도 있었다.
그 같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지하사의 살신성인의 투혼이 있었기에 소대 전체의 몰살을 면하고 일부가 철수할 수 있었다. 정부는 그에게 1계급 특진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으며, 해군은 진해 작전사령부에 동상(사진)을 세워 그의 용맹과 희생정신을 기리고 있다.
<최용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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