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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판토 해전2

바래미나 2011. 4. 22. 00:54

전투의 배경
스페인제국은 1492년 추방시킨 무어인들이 북아프리카에 기반을 두고 터키의 지원을 받으면서 지속적인 해적질을 하면서 피해를 입게 되고, 프레베자해전(1538년), 제르바해전(1560년)에서 연속으로 기독교함대가 패하고, 1565년에는 몰타섬까지 터키군의 포위작전이 시도되자 더이상 사태를 방관할수 없었고, 시칠리 해협까지 위협받는 상황에서 자신의 영토가 있는 이태리지역을 방어해야만 했습니다.
베네치아는 터키와 평화조약을 맺은 1540년이후 마음놓고 중립국으로서 교역에만 몰두합니다.
1568년 합스부르크제국과 평화조약을 맺고 평화를 누리던 터키가 갑자기 베네치아 영인 키프로스섬 침공을 시도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
강경파인 Piali Pasha가 승리를 장담하면서 술탄의 신임을 이끌어내려는 신하들이 전쟁을 기획했고, 일설에는 알콜중독자인 술탄 셀림2세가 최고의 포도주생산지인 키프러스섬을 탐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이론상 베네치아에서부터 2,000km이상 떨어진 섬을 방해받지않고 장악하는것은 자신있었기에 전쟁반발의 핑계를 찾았는데, 이슬람학자에게 한때 이슬람영토이던 키프러스섬을 침공하는것이 이슬람교도의 의무이냐고 묻자, 당근 맞다는 대답이 나오고, 바로 1570년 4월 성전이 선포됩니다.    

 

 

 

 

 

사진의 왼편아래 빨간색 네모칸있는곳이 키프로스섬입니다.


 

 

10,000명의 병사를 거느린 베네치아의 키프로스총독인 단돌로는 부대를 2개로 나눠, 니코시아와 파마구스타에 배치합니다.
70,000명을 거느린 터키군사령관 무스타파 파샤는 7월 22일 가장 중요한 요새인 니코시아에 대한 포위공격을 개시합니다.
(1561년에 중세에 지어진 성곽이 포격에 무용지물인것을 안 베네치아 요새건축가인 Savorgnano가 신규 요새를 건축하다가 베네치아본국의 호출을 받게 되자 무능한 후임자에게 완공을 맡기고, 그는 외곽의 중세 해자와 성벽을 그대로 남겨두는 치명적 실수를 합니다.
11개의 보루를 가진 별모양의 요새는 당시의 최신
기술이 동원되어 1567년 완공됩니다.)
터키군은 포병진지를 구축하여 엄호사격하에 요새외곽에 위치한 해자를 점령하고는 지그재그로 참호를 파나갑니다
성벽아래까지 참호가 접근하면서 성벽을 부수기 시작하자, 베네치아군은 한낮에 기습을 하여 2곳의 터키군포병진지를 점령하기도 했지만 결국 반격에 밀리면서 방어선으로 후퇴하게 됩니다.
베네치아함대의 지원을 기대했기에 항복제의를 거부하고는 끝까지 저항했지만 9월9일 새벽 예니체니군단의 집중공격으로 요새는 함락됩니다.
시가지에 진입한 터키군대는 남여노소를 가리지않고, 거의 모든 사람을 학살합니다. 2만명중 1천명이 살아남고, 노예로 팔립니다.

 

 

 


 

 

 

터키군 사령관인 무스타파 파샤는 니코시아에 4천명을 남겨두고는 8월에 파마구스타에 도착하지만 방어가 강력한것을 보고는 사살한 단돌로의 목을 보내면서 항복을 종용했지만, 거절당하자 다음해 4월까지 지원군을 기다리면서 포위선을 구축하면서 겨울을 보냅니다.
8월이 되자 베네치아의 노력에 의해 교황 피우스5세와 스페인의 필리페2세가 십자군결성을 승인하고 180척의 연합함대구성이 이뤄집니다.
9월 19일이 되자 애초부터 전투에 소극적이던 스페인의 안드레아 도리아(Andrea Doria)는 시실리섬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고, 무능한 베네치아사령관은 휘하 함대를 크레테섬으로 철수시킵니다.
이를 지켜본 터키해군사령관인 Piali Pasha는 로도스섬과 이스탄불로 함선을 분산시키고
그틈을 이용해서 크레타섬에 주둔한 12척의 베네치아갤리선은 1,600명의 병사와 물자를 포위당한 파마구스타에 보급하는데 성공합니다.
겨울동안에 교황과 베네치아의 외교에 의해 십자군결성이 각국에 요청되면서 결국 스페인 필리페2세는 적극 참여를 결심하고 지난번 불화의 원인이었던 안드레아 도리아(Andrea Doria) 대신 돈 후안(Don Joan)을 스페인군 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1571년 5월 25일에 전비의 부담을 스페인 50%, 베네치아 35% 교황 15%가 책임지기로 하면서 공식적으로 연합함대가 결성됩니다.
8월말이 되어서야 연합함대의 출발준비가 끝났지만 이때는 키프로스섬을 구하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터키육군은 이듬해 5월 1일부터 80,000명의 병력으로 공격을 시작했는데, 브라가디노(Bragadino)가 이끄는 6,500명의 수비군이 버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참호를 파면서 삼각보루와 무기고 타워밑에 폭약을 설치하는 터키군에 맞서 베네치아군은 역방향으로 땅굴을 파면서 폭약을 노획해서 화약으로 재활용해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6월 21일에 무기고타워가 폭약폭발로 무너지자 틈새로 쳐들어오는 터키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격퇴에 성공합니다.
6월 29일 또 다시 삼각보루밑에 폭약이 터지면서 성벽에 틈새가 생기자 공격이 개시되고, 이번에도 겨우 막아냄니다.
7월9일에 공격은 성곽주변의 삼각보루에 집중되고, 미리 폭약이 설치된 보루가 함락되자 수비군은 자폭하고 주변에 있던 천명의 터키군이 날라갑니다.
7월내내 포격과 돌격으로 성벽의 틈새를 공격한 터키군은 제2방어선을 친 베네치아군에 밀려납니다.
식량과 탄약이 고갈된 수비군은 결국 8월1일에 항복을 결심하고 협상을 하여 조약이 타결됩니다.
모든 수비군은 안전하게 크레타섬으로 이송되고 주민들의 안전을 보장하기로 했습니다.

 

 

 


 

 

(파마구스타는 해안가에 인접한 요새로 해군의 충분한 지원이 있었다면 장기간 방어가 가능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요새건축가인 Sammichele의 작품으로 공사도중 1559년 여기서 병사합니다.)

8월4일 저녁에 베네치아장교들과 브라가디노는 터키군 사령관인 무스타파 파샤의 저녁만찬에 초대됩니다.
브라가디노가 크레타섬까지 가는 터키 함대의 안전을 위해 인질을 요구하는 파샤의 요구에 불응하면서 터키군의 잔인함을 비난하자, 파샤는 크게 화를 내면서 협상의 파기를 선언합니다.
- http://www.cypnet.com/.ncyprus/history/venetian/v10.htm의 내용이며, 기록마다 내용이 다르게 나옵니다. 첨부터 베네치아인들을 몰살시킬 생각은 없었던거 같습니다.-

Bragadino의 면전앞에서 부하장교들을 참수하고, 그의 옷을 벗긴후, 귀와 코를 잘랐습니다.
Famagusta에서 부하들은 약속한 크레타섬으로의 이송을 위해 무장해제후 터키군의 갤리선에 오르자마자 체인에 묶이고 노예로 전락하게 됩니다.
2주간의 고문후 브라가디노는 노새의 재갈을 물리고, 등에 짐짝이 올려진채 터키군 텐트주변을 개처럼 기게 되고, 갤리선 돛대의 맨위에 마스코트처럼 매달린후에 노예가 된 부하들을 쳐다보게 합니다. 그후에 파마구스타의 광장으로 끌고가서 채찍질을 하고, 산채로 피부를 벗겨 죽입니다.
이렇게 벗겨낸 피부에 짚풀을 넣어서 인형을 만든후에 그의 말위에 앉혀서 시내곳곳을 퍼레이드시킵니다. (후에 그의 형이 막대한 액수를 주고 구매한후에 베네치아의 성당에 매장합니다.)

함선 및 참가인원의 숫자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남

기독교함대의 전력
206 galleys, 6 Galleass,
총사령관 : 돈 후안(Don Joan) 합스부르크 스페인 - 80척 제공
베네치아 - 갤리선105척/갤리아스 6척
교황령 - 12척
제노아 - 3척
말타섬기사단 - 3척
savoy군주 - 3척 (이외 개인참가자 다수)

40,000명의 선원과 30,000명의 전투원(5,000명의 베네치아군인, 4,000명의 다국적 지원자, 8,000명 의 스페인군인+10,000명의 독일/이태리 용병포함)
전투원이 부족한 베네치아함대는 코르푸섬에서 현지전투원과 스페인군1,500명, 이태리군 2,500명을 태워서 갤리선당 평균 80명의 전투원 보유함(스페인은 145명/교황 및 제노아군은 120-130명)
교황령 함대는 안토니오 코논나(Antonio Colonna)가 지휘

     전투의 승패를 결정한 요인
1. 스페인/제노아함선은 대포를 5대를 탑재했고(베네치아는 대부분 3대) 기독교 보병들은 화승총으로 무장하여 강력한 화력을 가짐
반면에 터키갤리선에는 3대의 대포만 있었고, 전투원의 2/3가 활로 무장
2. 대부분 베네치아함선의 노잡이들은 자유시민이어서 백병전이 벌어지면 무기를 들고 싸울수 있었지만, 터키군은 정반대로 오히려 노예들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음
(전투원의 숫자뿐만 아니라 전투원으로 돌변할수 있는 선원의 숫자도 중요함)
3. 해상전투시에는 유리한 함선배치와 재빠른 전환/회피기동으로 기습공격과 포위섬멸전을 해야하는데 베네치아의 막강한 갤리어스선박에 의해 초반부터 터키함선대형이 망가지면서 각개 격파당하게 됩니다. (베네치아의 우수한 항해술도 한몫 했습니다.)
4. 우군을 담당한 우루치 알리(Uluch Ali)가 외곽에서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일찍 중앙군을 지원하여 알리 파샤(Ali Pasha)를 구했다면 완패는 면했을 겁니다.  

터키함대의 전력
220 galleys, 50-60 galliots, 64 fusta
50,000명의 선원(주로 기도교도 노예)와 27,000명의 전투원(그리스주둔 10,000명의 예니체니군단 포함)
특히 사령관인 알리파샤의 기함 Sultana에는 예니체니군단 200명이 탑승
* 스페인의 최정예병인 tercio와 더불어 유럽최강의 부대임

기독교군 사령관
돈 후안(Don Joan) : 합스부르크왕조 카를5세의 사생아로 필리페2세의 이복동생이기도 합니다.
기병대지휘관으로 시작하여 1570년에는 스페인 안달루시아에서 발생한 무어인들의 반란을 진압
하는데 성공하자 외교적 능력을 높이 산 필리페2세가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반목이 심한 연합함대내에서 제역할을 충분히 하여 승리에 기여했고, 몇년후 31살에 병사합니다.

터키군 사령관
알리 파샤(Ali Pasha) : 무엣진(코란을 외치는 회교도목사)의 아들로 외교관 겸 행정가로 출세의 길을 걸었는데 일설에의하면 코란을 읽는 아름다운 목소리에 반한 술탄의 부인이 그를 적극 추천했다고 합니다. 여러 전투를 거치면서 키프로스섬 침공시에는 부사령관이었다가 사령관이 경질되자 최고사령관이 되어 공격을 감행하라는 술탄의 강한 명령을 받고 전투를 서두르게 됩니다.

우루치 알리(Uluch Ali) : 이태리인으로 해적들에게 납치되어 노예노잡이가 되었다가 회교도로 개종하면서 자유인이 되고 해군지휘관으로 출세하게 됩니다. 트리폴리총독이 되고 여러 보직을 거친끝에 레판토해전에서는 좌군을 이끌고 맹활약하고 탈출후에는 터키군의 지중해사령관이 되어서 함대 복구에 성공합니다.

                       기독교함대의 구성
                                
                    우함대                            중앙함대
 사령관  안드레아 도리아(Andrea Doria)        돈 후안(Don Joan)
  함선  갤리선 53척/갤리어스 2척              갤리선 62척/갤리어스 2척
   
                    좌함대                            예비함대
 사령관  바르바리고(Agostin Barbarigo)     바잔(Don Alvaro de Bazan)
  함선  갤리선 53척/갤리어스 2척           갤리선 38척

                            터키함대의 구성

                    우함대                               중앙함대
 사령관  시코로(Mehmet Sulik or Suluk Pasha)      알리 파사(Ali Pasha)
  함선  갤리선 60척/갤리엇 2척                    갤리선 87척
  
               좌함대                                    예비함대
 사령관  우루치 알리(Uluch Ali)                   라이스(Amurat Dragut Rais)
  함선  갤리선 61척/갤리엇 32척                   갤리선 8척/갤리엇 22척

* 별도의 fustas 64척 (중앙선단 뒷편에 위치)

1. 갤리선(galley) : 베네치아의 기준 길이 41M, 폭 5M, 200톤
무장 : 선수에 대형포1, 소형포2씩(스페인,제노아는 4개를 설치함),
lanternas : 함선사령관용으로 사용된 선수부분이 강화된 대형갤리선, 선미에 달린 신호등을 보고서 이름이 유래됨
2. 갤리엇(galiot) : 길이 27M, 폭 3M
무장 : 선수에 대포1문+회전총포 설치됨, 60-80명의 노잡이/40-60명의 전투병
* fusta : 갤리엇 비슷한 소형 터키함선으로 (길이 21M), 전투중에 지원병력을 옮기는데 사용됨
3. 갤리어스(Galleass) : 베네치아의 발명품으로 대형 갤리선 선수부분을 원형포탑으로 만들어서 대포9문을 탑재하고, 배옆면에도 방패를 세우고 대포를 탑재한 공격용 함선
기동력이 현저하게 떨어져서 갤리선이 견인을 해야하는 단점이 있음
아래 사진에는 이들 1/2번 함선의 모습이 잘 나와있습니다.

 

 

 

 


 

 

 

 

전투 배치도
 1571년 10월 4일 레판토성에서 터키군 작전회의가 소집되었는데, 정찰대가 보고한 140척의 기독교 함대 규모는 적에 대한 과소평가를 하게 만들고, 일부 지휘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알리 파샤(Ali Pasha)는 자신의 함대는 기독교함대를 쫓아서 코르프섬까지 점령하겠다고 선언하고는 전투시작을 명령합니다.
10월 7일 새벽에 코린토스만 하구에 있는 레판토에서 서쪽으로 약 40km 떨어져 있는 스크로파곶 해역에서 양함대가 마주치게 됩니다.
기독교 함대는 한 줄로 나란히 3개 함대로 정렬해 약 5km에 걸쳐 포진하면서 기다렸습니다.
아래의 빨간색 원주변이 전투가 벌어진 코린트만에 인접한 레판토해안

 


 

 

 

돈 후안(don joan)의 기함인 Real (선미에 매달린 깃발은 교황이 하사한것)

 


 

북부 지역 전투

10:20 중앙선대에 위치한 2대의 갤리어스(Galleass)가 발포함으로써 전투가 시작됩니다.
북부에 있던 2대의 갤리어스(Galleass)도 10:30분에 발포를 시작했고, 2명의 형제지휘관은 파마구스타에서 살해당한 브라가디노의 친척이라서 복수심에 불탔습니다.
3번째 발포만에 터키 갤리선의 선수아랫부분이 명중하여 바로 침몰하고, 이를 바라본 알리 파샤(Ali Pasha)는 수염을 쥐어뜯으면서 불운의 징조라 보고 화를 냈다고 후일 포로는 증언했습니다.
시로코는 60척의 함대를 3개로 나누어서 자신이 1/2 함대는 직접 정면승부하고, 3번째 함대를 기도교선단과 육지사이의 틈으로 침투시킨후 우회하여 기독교함선을 포위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눈치챈 바르바리고(Agostin Barbarigo)는 좌측의 갭을 매우기위해 함대를 이동했지만 7척의 터키갤리선이 틈새를 뚫고 우회하는데 성공합니다.
최북단의 갤리어스(Galleass)는 터키함선들이 스쳐 지나가자, 서서히 180도 회전하면서 일제사격으로 터키군함들에게 피해를 주면서 함선대열을 깨트렸습니다.
10:40 북단의 양함대는 정면충돌하면서 3마일 떨어진 남단 함대에도 소리가 들릴 정도였습니다.
한편 우회공격에 성공한 시로코의 7대의 갤리선은 재빠르게 4척의 베네치아갤리선을 침몰시키는데 성공하고 좌군 사령관인 베네치아기함인 바르바리고(Agostin Barbarigo)의 lanterna에 5대의 터키갤리선이 다가가서 백병전이 벌어지고 후위부대에 있던 바르바리고의 조카가 그를 구하기 위해 달려옵니다. 정오의 햇살이 비추었지만 전투지역은 온통 화약연기로 가리워져서 어두웠습니다.
이순간 전투의 승패가 갈리게 되는데..
틈새를 뚫는데 정신이 팔린 터키갤리선 사이로 마르코 퀴리니가 지휘하는 베네치아갤리선이(기독교 좌군의 오른편 편대지휘) 피해가 없는 남편에 있던 편대를 이끌고 반격에 나서서 터키군의 뒤를 덮치고 암초쪽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합니다.
지휘관인 바르바리고(Agostin Barbarigo)는 부하들의 만류로 지휘관석에 앉아있었지만, 격전의 와중에 직접 지휘하기위해 투구를 벗고 소리를 지르다가 터키군의 화살이 오른편눈에 명중합니다
시기적절하게 베네치아함대는 후위부대의 지원으로 터키군을 물리치고, 퇴로가 차단된걸 안 터키갤리선들은 퇴각하고, 일부는 남아서 싸우지만 결국 숫적우위인 베네치아함대에 침몰됩니다.일부 터키갤리선들의 기독교도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함대는 혼돈에 빠지면서 포위망에 걸려든 터키군은 살아남기위해 배를 해안가에 붙이고 승무원들은 작은배에 옮겨타서 상륙하여 도망칩니다.
13시에 터키군은 전멸합니다. 부상당한 시로코는 사로잡히고, 정중한 처우를 받으나 부상이 심하자 사살을 애원하여 다음날 머리에 총을 맞고 죽습니다. 부상당한 바르바리고(Agostin Barbarigo)도 그때 쯤 사망합니다.

중앙부의 전투
11:00 선두에 선 2대의 갤리어스(Galleass)가 1km거리에서 알리파샤의 기함에 사격하여 갤리선위에 매달린 랜턴을 명중시킵니다.
집중사격으로 인해 터키갤리선들은 대형이 깨지면서 3그룹을 이루면서 이들을 비켜서 지나치게 됩니다.
터키군은 원거리 사격을 했지만, 기도교군은 근접시까지 침묵을 지키며 기다리고,
기독교군 사령관인 돈 후안(Don Joan), 세바스찬 베니에로(Sebastian Venierro), 마르크 안토니오 코론나(Marc Antonio Colonna) 는 각기 다른 위치에 포진하면서, 터키군의 집중공격에 대비하여 지원함들을 배후에 거느렸습니다.
터키군 사령관 알리 파샤(Ali Pasha)도 페르타우 파샤(Pertau Pasha)와 부하함선들을 거느리고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11:40 기독교함선의 일제사격 직후 양함대는 충돌합니다. 이제 전투는 육지의 백병전과 같이 총,칼, 창, 도끼, 화살이 날라다니면서 혼전에 빠집니다.
알리 파샤(Ali Pasha)는 활의 명수답게 직접 화살을 쏘면서 전투에 참여하고, 전투는 이들 사령관기함 주위에서 30여척이 참여하면서 절정을 이룹니다.
바잔(Don Alvaro de Bazan)이 예비군을 투입하고 그중 한척인 faith of venice가 육탄충돌로 터키갤리선 한척을 침몰시키고 터키함선의 추가진입을 가로막자 터키군은 수세에 몰립니다.
승세를 타자 현명한 예비함대 지휘관인 바잔(Don Alvaro de Bazan)은 남은 함선을 대기시키면서오른편끝에서 고군분투하던 몰타기사단장 기함의 전투를 돕습니다.
전투가 치열해지자, 터키 예비군함장인 라이스(Amurat Dragut Rais)가 추가함선을 알리 파샤(Ali Pasha)의 기함에 파견합니다
12:30 마르크 안토니오 코론나(Marc Antonio Colonna)는 화염에 부상당한 페르타우 파샤가 작은배에 옮겨타고 피신하자, 즉시 적선을 점령합니다.
교황군의 함선인 Capitana가 돌격을 감행하여 알리 파샤(Ali Pasha)의 기함 Sultana의 선수와 맞부딪치게 됩니다.  완전포위당한 상태에서 터키군은 무력화되고 13:00경에 돈 후안(Don Joan)의 군대는 3번의 실패끝에 알리파샤의 Sultana기함에 상륙하여 점령하고, 알리파샤의 목을 자릅니다.
돈 후안(Don Joan)의 기함에 알리 파샤(Ali Pasha)의 목을 창끝에 달아서 매달자 터키군은 사기를 잃고, 전투는 기독교군에 유리하게 진행됩니다.


 

이중으로 된 알리의 칼을 중심으로 코란의 글과 별들을 금실로 장식한 터키군의 깃발
노획되어서 베네치아에 소장된것으로, 시오노나나미 소설에 나온 알리파샤의 기함에 있던 깃발인지는 확실치않음(이태리 베네치아 해군박물관에서 소장하다가 몇십년전에 터키측에 반환한 이후 일반공개가 안된다고 함)

 

13:20 대부분의 터키함선은 포획되거나 침몰되고 꼼짝못하게된 병사들은 물에 뛰어들거나 운좋은 이들은 소형배에 타서 도망가고 남은이들은 끝까지 싸우거나 학살됩니다.
치열한 살육전과 키프로스섬의 학살에 열받아있던 기독교군은 물위에 떠있는 터키군을 일일이 미늘창으로 찔러죽이고 적선에 상륙하여 전리품을 건지는데 몰두하여 지휘관의 통제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그림 : 함대 배치도  
남부지역전투설명 : 기독교함대는 우루치 알리(Uluch Ali)의 전술에 넘어가서, 본진과 거리를 두면서 거리가 멀어져 가고 이 와중에 무모하게 돌진해나간 16척의 함선이 각개 격파당하고, 본진을 거느린 안드레아 도리아(Andrea Doria)가 뒤늦게 합류할때 우루치 알리(Uluch Ali)는 이미 중앙전투지역에 참전하기 위해 30척을 이끌고 이곳을 벗어납니다.

 

 

 

 

그림 : 함대 배치도  
남부지역전투설명 : 기독교함대는 우루치 알리(Uluch Ali)의 전술에 넘어가서, 본진과 거리를 두면서 거리가 멀어져 가고 이 와중에 무모하게 돌진해나간 16척의 함선이 각개 격파당하고, 본진을 거느린 안드레아 도리아(Andrea Doria)가 뒤늦게 합류할때 우루치 알리(Uluch Ali)는 이미 중앙전투지역에 참전하기 위해 30척을 이끌고 이곳을 벗어납니다.

      남부지역 전투
우루치알리(Uluch Ali)는 함대를 남서쪽으로 틀어서 측면공격을 꾀하자, 안드레아 도리아(Andrea Doria)는 즉시 우회하여 우측이 공격당하는것을 막고자 했고 이때문에 전투시작이 늦고, 기독교본진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는 결과가 됩니다
운나쁘게도 기동력이 떨어지는 갤리어스(Galleass) 2척은 견인되고 있었지만, 전투시작에 참여하기는 너무 늦었습니다.
터키군의 작은갤리선인 galiots는 전투에 부적합해 보였지만, 민첩했고 안드레아 도리아(Andrea Doria)의 함대보다 40척이 더 많았기에 재빠르게 측면으로 우회하여 기독교함대를 공격하기로 우루치알리는 결심합니다.
한편 총사령관인 돈 후안(Don Joan)은 우측함대가 본진에서 너무 벗어나자 연락선을 보내서 본진에 합류할것을 명령했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12:00 돌연 16척의 기독교함선이 안드레아 도리아(Andrea Doria)의 허락없이 돌진하여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터키함대의 오른편을 공격하자, 우루치 알리(Uluch Ali)는 75척의 터키갤리선단으로 이들을 고립시키면서 공격합니다.
뒤늦게 나타난 2척의 갤리어스(Galleass)는 원거리에서 함포사격을 하지만 큰 도움이 못되고, 포위된 상황에서 한척의 베네치안갤리선이 화약고에 불을 붙여 자폭을 하자, 여러척의 터키선이 피해를 입게 됩니다.
13:00 고립된 함대가 전멸의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안드레아 도리아(Andrea Doria)가 이끄는 35척의 갤리선이 도착하자, 우루치알리(Uluch Ali)는 30척의 함선을 이끌고 여기를 벗어나고 기독교함대 중앙부의 오른편을 기습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알리 파샤(Ali Pasha)가 전사하고, 전황이 기운것을 알게되자 가장 근처에 위치한  몰타섬의 기사단 기함을 공격합니다. (그는 평생을 이들과 싸워왔고, 작년에도 3척을 나포하는데 성공한 전과가 있음)
순식간에 몰타기사단장의 기함을 점령하고, 6명의 부상당한 포로(단장인 Giustiano포함)를 제외하고 모두 살해합니다.
전리품으로 기함을 견인해가면서 출발지로 복귀하려는 그에게 기독교 예비함대사령관인 Bazan이 추격대를 보내고, 중앙함대에 있던 2척의 몰타함선이 다가오자,  우루치알리(Uluch Ali)는 전투를 중지하고 노획한 기함의 깃발을 돛대 꼭대기에 올리고 견인중이던 기사단장의 기함을 포기한채 부하들을 이끌고 서편으로 도주합니다.
14:00 전투에 몰두중이던 일부 함선을 제외하고는 약 30척의 터키갤리선이 탈출에 성공합니다.
일부 지휘관은 추격을 주장하지만 피해입은 기독교함선들을 항구로 옮겨야했고, 저녁에 폭풍우가 예상되고, 바람이 드세지자 이를 포기합니다.

우루치 알리(Uluch Ali)가 몰타기사단장의 기함을 나포하여 빨간 깃발을 돛대에 매달고 질주하는 장면


 

  양편의 피해상황

              기독교함대                             터키함대
인명손실  8,000명전사/21,000명 부상     30,000명 전사 혹은 부상/3,000명 포로
함선손실  갤리선 10척 침몰/30척은 파손  갤리선 170척/갤리엇 60척(117/13척만 재활용 됨)


 * 터키갤리선에서 15,000명의 기독교노예 노잡이가 해방됨

그날 저녁 총사령관인 돈 후안(Don Joan)은 포로가 된 알리파샤의 두 아들을 동정하여 살려주지만 대부분의 포로들을 처형시킵니다.
폭풍우가 불기 시작하는 그날, Porta Petala에 정박하면서 축하를 했지만, 안드레아 도리아(Andrea Doria)가 일부로 전투에 소극적이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베네치아와 제노아인들 사이의 불화가 시작되고(우루치 알리(Uluch Ali)에게 전향공작을 펴던 스페인왕의 명령으로 일부러 놓아주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결국 코르프섬에 도착하여 전리품을 나눠갖고 연합함대를 해산합니다.
1573년 4월 베네치아는 터키와 평화조약을 맺으면서 크레타섬과 기타해안지역의 안보를 보장받고 다시 안전한 해상무역을 시작하게되어 이번 전투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됩니다.

터키총리인 소쿨루 메흐멧 파샤가 말했듯 ' 기독교인들은 나의 수염 한가닥을 뽑았지만(터키함대)
나는 그들의 팔(키프러스섬)을 뽑았다.' 물자와 인원이 풍부한 터키로서는 금방 새로운 함대를 복원했지만, 그후 서부지중해의 지배권은 영원히 되찾지 못합니다.
산전수전 다겪은 유능한 선원들의 대량손실과 더불어 무패의 신화는 깨졌습니다.

글을 마치며 : OSPREY출판사의 'Lepanto 1571'를 기본도서로 참조하여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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