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은 1966년 10월 베트남 중부 뀌년의 수도사단사령부를 방문, 둑꼬 전투의 영웅 이종세 상사와 채명신 주월 한국군사령관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채사령관의 작전 개념, 즉 ‘중대 기지 전술’에 의한 둑꼬 전투의 성과 등 그간의 작전 결과를 높이 평가한 것이다.
한국군의 중대 기지 전술은 베트남 게릴라전의 특성을 감안한 전술이었다. 게릴라전에서 주민이 물이라면 게릴라는 물고기와 같은 관계이므로 “중대 단위로 핵심 지역을 점령, 주민과 게릴라를 차단하는 전초기지로 활용한다. 각 기지는 연대 규모의 적 부대가 공격하더라도 48시간 이상 지탱할 수 있도록 강력한 방호 시설을 구축해 필요한 탄약과 식량을 비축하며 기지 외곽은 지원 화력의 살상 지대로 보호한다”는 것이다.
미군들은 한국군의 전술을 신뢰하지 않았다. 중대 기지는 적이 집중 공격을 감행할 경우 각개 격파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최소한 대대 단위 이상의 강력한 부대로 적을 탐색하고 격멸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가용 병력이었다.
그 같은 개념의 차이로 66년 7월9일, 둑꼬에 파견된 한국군 대대 역시 중대 단위로 기지를 편성하려 했기 때문에 미군과 사사건건 충돌했다. 미군 여단장은 자신의 지침을 강요하기 위해 48시간 지탱에 필요한 비축용 보급을 통제하는 등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채사령관의 명확한 지침을 받아 파견된 대대장은 굽히지 않았다.
여단장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강력한 기지를 구축하고 필요한 물자와 탄약을 비축했다. 기지 주변에 화력 장벽도 구축했다. 미군 여단장은 마지못해 추인하는 형식을 취했다. 전쟁 원칙으로 본다면 지휘 통일이 더욱 중요하지만 게릴라전의 특성과 국가간 연합작전이라는 특수성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 같은 배경은 한국군 전투 부대를 파병하면서 논란이 됐던 작전통제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주월 미군사령관은 파병되는 한국군을 자신의 작전 통제 하에 두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의 주장은 본국의 한국군 전체를 주한 미군사령관이 작전 통제하고 있으며 파월 한국군은 모든 면에서 미군의 지원이 있어야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대부분의 한국군 간부들도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파병 협상에 임했던 관계자들은 한사코 독자적 작전권을 주장했다. 특히 현지 사령관 채명신 장군은 베트남의 게릴라전은 군사적 효율성보다 정치적 고려가 더욱 중요하다는 주장으로 한국군의 독자적 작전권을 끝까지 고수했다. 그에 따라 둑꼬에 파견된 부대가 한국군의 전술에 따라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으며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둑꼬 전투 이후 미군들은 한국군의 전술에 대해 반신반의했던 태도를 바꿔 중대 기지 전술을 보다 심각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67년 2월, 또 한차례 짜빈동 전투의 대승이 이어지자 중대 기지 전술을 그들의 부대 운용에 도입했다. 단지 중대 기지의 명칭을 ‘사격 진지’(Fire Base)로 바꿨을 뿐이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선전할 수 있었던 비결은 중대 기지 전술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용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
[전술기지경계]
적은 항상 고립된 목표에 대하여 우세한 병력으로 야간기습 또는 박격포 사격을 가해왔다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사단은 전지역 요소에 중대단위 전술기지를 구축하고
박격포 사격거리를 고려하여 기지주변 4km이내를 항시 불규축적으로 정찰매복을 실시하였다.
전술기지는 적 연대급 병력의 기습으로부터 48시간이상 지탱할 수 있고 기지주변에 3중4중의
철조망과 크레모아, 조명지뢰등이 매설되고 기지전방에 경계초소를 설치하여 적의 접근을
조기에 탐지 격멸할 수 있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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