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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를 찾아왔던 범선들

바래미나 2011. 4. 22. 01:25

조선의 존재를 처음으로 안 유럽인은 포르투칼인 이었다. 1543년 이래, 그들은 일본의 나가사끼에 무역항을 두고 있었고, 쓰시마섬을 가로지른 북서쪽에 그들이 'Cooray'라 부르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Jan Huyghen van Linschoten (1585년에 "Santa Cruz"호로 일본 나가사끼에 도착) 이 1592년에 출판한 그의 항해일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일본해안에서 북쪽으로 뻗어있는 항로를 벗어나면 북서쪽에 일본과 교역을 하는 Cooray 라는 나라가 있는데, 나는 일찍이 이 나라로 항해했음은 물론 그곳 상황을 조사하고 항해한 사람들(그는 이들을 조종사들이라 부름)로부터 코레이에 대한 확실 하고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

일 년후에 발행된 " Itinerario" 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볼 수 있다.

16세기경(1595년) 포르투칼인에 의해 그려진 극동지역의 섬으로되어 있는 한국과 일본

일본에서 조금 위쪽인 위도 34도에서 35도에 중국해와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코레(Insula de Core)라 불리는 또 다른 큰 섬이 있는데, 지금까지 크기나 인구, 어떤 교역이 있는지에 관해 확실한 게 아무 것도 없다. 

포르투칼인들을 통해 네덜란드에도 알려져 있었는데, 1609년 네덜란드는 일본 나가사끼에 공장을 세워 일본과 교역을 하면서, 공장의 책임자인 Jacques Specx는 조선과 교역을 위해 후추를 실은 배를 쓰시마섬으로 보냈으나 군주는 이를 거절한 적이 있다. 총독이 보낸 편지는 물론, 멀리 헤이그에서 국왕이 1610년 12월 18일에 보낸 '일본의 전능한 황제이자 국왕에게' 란 제목의 서신도 일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해 네덜란드의 조선 진출은 실현되지 못했다

 

 

우베르케르크호(Ouwerkerek)는 네덜란드 상선으로 바타비아(Batavia, 오늘날 자카르타)를 출항하여 나가사끼로 항해하던 도중 1627년(인조 5년)에 제주도에 표착하였다. 당시 Jan Janse Weltevree, Theodorick Gijsbertz, Jan Perteree Verbaest 등 선원 3명이 음료수를 구하러 제주도에 상륙하였으나 제주 관헌에게 체포되어 포로가 되었다. 이때 포로로 잡힌 네덜란드 선원 중 한 사람인 네델란드 De Rijp출신의 Jan Janse Weltevre는 조선으로 귀화한 박연(1595-?)이다.

훈련도감에서 근무하였는데, 1636년 병자호란때 세 사람 모두 출전하여 박연을 제외한 두 사람은 전사하였다. 그는 포로가 된 왜인들을 감시 ·통솔하는 한편 명나라에서 들여온 홍이포(紅夷砲)의 제조법,·조작법을 지도하였다. 1653년 H.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이르렀을 때 그들을 서울로 호송하고, 하멜이 도감군오(都監軍伍)에 소속되자 전라도 병영으로 이송되기까지 3년간 조선의 풍속,말 등을 가르치며 그를 감독하는 한편, 조선 여자와 결혼하여 1남1녀를 두고 여생을 마쳤다. 박연의 고향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북쪽에 위치한 De Rijp 마을에는 현재 Jan Janse Weltevree를 기리는 교회앞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벨테브레에 대한 또 다른 보고서 내용
Weltevree가 1627년 조선인에게 붙잡혔던 상황을 볼 때, 여러 자료들은 모순되는 점이 있다. 그러나 1627년의 부산의 기록에 따르면 벨테브레가 경상도의 경주에 붙들려 왔었다고 한다. 이 기록이 다른 세부사항에서도 정확하며 벨테브레는 이 사실을 인정했다. 따라서 우리는 벨테브레가 경주에 붙들려 왔다고 봐야 한다. 하멜의 표류기 에는 벨테브레가 조선해안에서 좌초할때 Ouwerkerck 호에 승선하고 있었다고 적고있다. 여러 동료들과 함께 그는 물을 가져오기위해 해안으로 노를 저었다. 그러는 동안 이들은 벨테브레와 두명의 동료를 붙잡은 조선인들에 놀라서 나머지는 가까스로 달아났다.

하지만 데시마(지금의 일본 나가사끼에 있는 섬)상관장의 일일 보고서에서 벨테브레가 Ouwerkerck 호에 타고 있지 않았다고 쓰여 있다. 어느날 Ouwerkerck호의 선원들이 중국선박(Chinese junk)을 포획했는데, 벨테브레는 이 배를 Formosa(지금의 대만)로 가져가기 위해 다른 네덜란드인들과 함께 배에 올랐다. 폭풍으로 배는 조선해안에 다 달았다. 여기에서 세 명의 네덜란드인들은 중국인에게 압도당해 조선인에게 건네졌다.

이 사실은 1627년 7월 22일 Formosa의(지금의 대만) 장관이 Batavia(지금의 자카르타) 상관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확인되었다. Formosa 장관은 7월 16일 Amoy로 가는 도중에 Ouwerkerck이 중국상선을 포획했다고 발표했다. 150명중 70명의 중국선원들이 Ouwerkerck으로 옮겨간 반면, 네덜란드인 16명은 나머지 중국선원들과 함께 대만으로 가기 위해 상선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상선은 폭풍으로 북동쪽에서 표류했고 그 후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봐서 좌초의 우려가 있다. Ouwerkerck호는 몇 달후에 포르투칼선에 의해 포획되어 마카오에서 불태워졌다. 위의 언급으로 봐서 배는 조선해협에 도달한 적이 없으며, 벨테브레는 Hollandse 사략선 무리에 인질로 붙잡혀서 조선인에게 건네진 것이 분명하다.

 

De Sperwer호(galleon)는 네덜란드 상선으로 1653년 8월(효종 4년)에 나가사끼로 항해도중 제주도 해안에 표착하였다. 1653년 1월에 네덜란드를 떠난 포겔 스트루이스(Vogel Struuijs)호는 6월 자바섬의 바타비아(Badavia)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총독 명령에 따라 스페르베르호로 갈아 타고 Fomosa(지금의 대만)로 출발하였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네덜란드의 대만 신임총독으로 부임하는 레세르를 임지로 데려다주는 일이었다. 임무가 끝난 뒤 다시 대만에서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7월 나가사키를 향해 출발하였으나 풍랑이 심하여, 1653년 8월 15일 배는 난파되고 선원의 일부만이 제주도 남해안(the island of Quelpaert)에 상륙할 수 있었다.선원 64명 중 38명이 구조되어 제주 관헌의 보호를 받은 바 있었다.

당시 선원 가운데 화물 감독이었던 하멜(Hendrik Hamel, 1630-1692)은 억류된 지 13년만인 1666년 9월 15일(음력) 동료 선원 7명과 함께 탈출하여 일본을 거쳐, 1668년 7월 20일 암스테르담으로 귀환하였으며,

"하멜표류기" 에 있는 De Sperwer호

이후 하멜표류기로 알려져 있는 "Journal van de ongeluckige Voyage van't Jacht de Sperwer" (Sperwer호의 불운한 항해표류기) 라는 제목으로 책을 써서 조선을 서양에 처음으로 소개하였다. Hendrick Hamel의 출생지인 Gorkum에는 1998년 9월 11일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다.)

 

부솔(La Boussole 500톤)호와 아스트로라베(L' Astrolabe 500톤)호는 1787년 정조 11년 5월에 프랑스의 해군 대령인 라 페루즈(Jean-François de Galaup, comte de La Perouse , 1741-1788)가 이끌고 세계 일주 항해를 하던 도중 우리 나라 남해안과 동해안을 탐사, 1787년 5월 27일 서양인중 울릉도를 최초로 목격, 동승했던 천문학자 다줄레의 이름을 따 다줄레 섬(Isle Dagelet)이라 명명하였으며, 이 이름은1950년대까지 세계지도에 오르게 되었다.

La perouse당시 울릉도의 어민들은 폐루즈의 탐사대를 목격하고 봉화불을 밝히는 등 신속히 대응한 것으로 보이며, 라페루즈의 탐험대는 울릉도 상륙 일보전에 철수하여 독도는 보지 못하고 항로를 북쪽으로 하여 타타르 해협으로 향하고 만다. 그러나 이들이 단순히 탐사 활동만 하고 지나쳐서인지 조선 왕조 실록에는 이들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다.

울릉도 탐사 경위는「The voyage of La Pérouse around the world 라페루즈의 세계 탐험기」에 실려 있는데, 이 책은 1791년 4월22일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명에 의해 출판 작업에 착수, 1797년 프랑스 국립인쇄소에서 출판됐다. 항해 일지 형식의 이 탐험기에는 울릉도 탐사 경위가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남해안과 동해안의 해안선을 실측하여 작성한 해도, 제주도 남부 해안 및 울릉도의 실측 지도가 수록되어 있다. 이는 1668년「하멜 표류기」 이래 서양인이 한국을 직접 목격, 관찰하고 과학적으로 측정하여 기록한 최초의 자료이다.

라페루즈 탐험대가 1785~87년 사이에 측정한 해안선, 해도, 섬들의 위치, 산의 높이, 수심 등은 대단히 정확한 것이어서, 프랑스 해군은 이 해도들을 수정 없이 반세기 이상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수치와 비교해도 오차가 미미해, 현재까지도 유효하다고 할 만큼 과학적이고 정밀한 것이었다. 1788년에 태평양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탐험대 2백여명의 노력과 이들의 목숨, 새로 건조한 두 척의 프리깃함정, 당시로서는 가장 발달된 항해 장비, 측정 장비, 방대한 자료 등이 희생되고 그 대가로 남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