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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퍼럴 미사일

바래미나 2020. 3. 17. 15:25

코퍼럴 미사일
최초로 만족해야 했던 미국의 단거리 핵 탄도미사일


개발의 역사


미국은 이미 2차대전 당시부터 독자적인 탄도미사일의 개발을 위해 노력했다. 미 육군 병기국은 1944년 5월부터 캘리포니아 공과대학(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 일명 '칼텍')과 함께 고고도 비행에 관한 공동연구를 시작했다. 칼텍의 GALCIT(Guggenheim Aeronautical Laboratory at the California Institute of Technology, 구텐하임 항공공학연구소)는 미국판 탄도미사일 개발계획을 제안했고, 병기국은 이를 받아들여 연구자금을 지원하기로 했다. 미사일 개발사업은 ORDCIT(Ordnance California Institute Technology) 사업이라고 불렸다. 미사일의 개발은 구텐하임 연구소의 주도 하에 칼텍(Caltech)의 제트추진 연구소(Jet Propulsion Laboratory; JPL)가 참가했으며, 더글라스 항공(Douglas Aircraft Co.)이 제작을 담당했다.

미국 미사일개발의 선구자였던 프랭크 말리나(좌)와 테오도어 폰카르만(우) <출처: Public Domain>
사실 로켓과학자 한 명의 헌신이 없었다면 ORDCIT은 실현될 수 없었다. 프랭크 말리나(Frank Malina, 1912-1981)라는 칼텍의 연구원은 이미 1936년부터 지인을 설득하여 고고도 연구용 로켓의 개발을 추진했었다. 로버트 고다드(Robert H. Goddard, 1882-1945)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사적 재원을 모아 개발에 나섰는데, 특히 칼텍의 교수였던 폰카르만(Theodore von Kármán, 1881-1963)을 설득하여, 연구실 한 켠에 로켓 개발 부서를 만들었다. 이후 수년간 미 정부를 설득하여 개발 사업을 본격화 하고자 했으나, 1943년 독일의 V-1 로켓이 밝혀지고 나서야 미군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육군 병기국에 로켓 연구 부서가 신설되고, 그 부서장인 트리첼(Gervais Trichel, 1898-1990) 대령이 말리나팀의 연구계획을 입수하고 나서야 ORDCIT 사업이 추진될 수 있었다. 물론 ORDCIT 사업의 책임자로는 말리나 박사가 임명되었다.
ORDCIT 사업으로 개발된 프라이빗 A(좌)와 프라이빗 F(우) <출처: Public Domain>
개발진은 연구용 로켓의 개발에 나서, 8피트(약 2.4m) 크기의 축소 모형인 '프라이빗(Private, '졸병'이란 뜻) A'를 만들었다. 1944년 12월부터 모두 24발의 프라이빗 A가 발사되었다. 초기부터 다양한 설계안들이 제안되어 4개의 수직미익부터 2개의 주익이 장착되는 등의 시도가 이어졌다. 결과 프라이빗 F까지 만들어져 1945년 4월에는 F형이 17발 발사되었다. 프라이빗 시리즈 로켓은 모두 고체연료를 사용했으며, 일련의 시험을 통해 발사, 안정성, 제어 등에 관한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프라이빗 시리즈의 시험이 끝나자 이어진 발사체에는 당연히 코퍼럴(Corporal, '상병'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WAC 코퍼럴 A를 운반중인 개발진들 <출처: Boeing>
코퍼럴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크기로, 먼저 실물의 1/5 크기(전장 6.4 m)인 연구용 축소로켓 'WAC 코퍼럴(WAC Corporal)'이 만들어졌다. WAC는 '자세 제어 기능이 없다(Without Attitude Control)'는 의미로 개발되는 발사체에는 유도 장치나 안정 장치가 부착되지 않아 실제로는 로켓에 불과했다. 또한 코퍼럴은 충분한 추력을 얻기 위해 프라이빗과는 달리 액체연료로 추진체계를 바꿨다. 최초의 시제 모델인 WAC 코퍼럴 A는 1945년 7월부터 시험 평가가 시작되었다. 1945년 10월 11일 WAC A는 고체연료 발사체인 타이니 팀(Tiny Tim)을 부스터로 결합하여 71.6km 상공까지 다다랐다.
WAC 코퍼럴 앞에선 프랭크 말리나 박사의 모습 <출처: NASA/JPL-Caltech>
개량형인 WAC 코퍼럴 B는 개선된 동체구조에 더욱 가벼운 엔진을 장착하였으며, 신형 5채널 텔레메트리 장비도 내장했다. 1946년 12월부터 이듬해 중반까지 모두 8발의 WAC B 로켓이 발사되었는데, 특히 1947년 2월 발사에서는 별도의 부스터 없이 72km까지 상승했는데, 이는 개발진이 애초에 계획했던 것보다 2배나 높은 고도였다. WAC 코퍼럴 축소 모형의 발사는 총 17회의 발사를 수행하고 1947년 6월 종료되었다. 축소 모형 발사 이후는 실물 크기의 로켓의 발사가 이뤄질 차례였다.
실물 크기의 코퍼럴 E는 1947년부터 시험발사를 시작했다. <출처: New Mexico State University Library>
이미 전쟁이 끝나고 국방 예산이 급감하던 시기였으므로 미사일 개발 사업 자체도 예산상 어려움을 맞았고, 결국 무기체계 개발 사업에서 연구 개발 사업으로 강등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발 사업은 어떻게든 진행되어, 더글라스 항공의 제작으로 첫 실물 로켓인 코포럴 E(제식명칭 RTV-G-2)가 1947년 등장했다. 코포럴 E는 직경 762mm, 길이 12m에, 중량은 약 4.2t에 이르렀다. 코포럴 E는 비록 초기형이나마 어엿한 유도 장치를 장착한 미사일로서, 반이동식 발사대를 활용하여 발사될 수 있었다. 코포럴 E의 시험발사는 1947년 5월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은 또다른 탄도미사일로 헤르메스 사업을 실시하고 있었다. 왼쪽부터 헤르메스 A-1과 A-3B이다. <출처: Public Domain>
물론 탄도미사일의 개발 계획은 코포럴 뿐만이 아니었다. 제너럴일렉트릭이 주도하는 헤르메스 계획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지만, 실전 배치까지는 상당히 먼 일정이 될 것이 예측되었다. 이에 따라 일정이 촉박해진 미군은 1950년 코퍼럴 E를 바탕으로 핵 탄도미사일을 개발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따라 실전 배치용 코퍼럴 미사일은 시험 평가를 거치면서 XSSM-A-17로 명명되었다.
1954년 화이트샌즈 미사일 시험장에서 코포럴 I의 시험발사가 실시되는 모습 <출처: Dave Christensen>
원래 코퍼럴 미사일의 개발주체는 제트추진연구소로, 초기 미사일의 생산은 더글러스 항공이 담당했지만, 설계가 확정되고 양산 단계로 넘어가면서 파이어스톤이 제작을 담당하게 되었다. 최초의 양산형은 코퍼럴 타입 I으로 불렸다. 코퍼럴 I의 최초 시험 발사는 1952년 8월에 시작되었으며, 1954년 경에는 시험 발사가 종료되어 동년 4월부터 일선 부대의 시험 배치가 시작되었다. 실전 배치와 함께 코포럴 I은 M2 유도미사일로 명명되면서 파괴력 20kt의 W-7 핵탄두가 탑재되었다. 그리하여 M2 코퍼럴 미사일은 미군 최초로 실전배치된 핵탑재 탄도미사일이 되었다.
코퍼럴 미사일은 미군 최초로 실전배치된 핵탑재 탄도미사일이었다. <출처: Public Domain>
최초의 핵미사일이었지만 코퍼럴 I은 여전히 신뢰성이 낮고 명중률이 떨어지는 미사일이었다. 이미 개발 과정에서부터 코퍼럴 I은 미사일 자체 뿐만 아니라 지상지원장비도 전술적 상황에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을지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미 육군은 개량 사업을 실시하여 코퍼럴 I을 배치하는 와중에도 코퍼럴 II의 개발을 시작했다. 코퍼럴 I의 신뢰성 저하 원인은 기계와 전기계통 모두 실전에서 사용하기는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기계와 배선을 상대적으로 단순화한 코퍼럴 II가 개발되어 1953년 10월 8일부터 시험 발사를 시작했다.
코퍼럴은 1954년부터 실전배치를 시작했다. <출처: Public Domain>
코퍼럴 II는 1955년 2월부터 인도가 시작되었으며 M2A1으로 명명되었다. 코퍼럴 II는 1957년 코퍼럴 IIa로 이듬해에는 코퍼럴 IIb로 점차적으로 개량되면서 정확성과 신뢰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해나갔다. 코퍼럴 I과 비교하면 코퍼럴 II는 실전적으로 사용가능할 만큼의 성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형공산오차(circular-error probability; CEP)는 무려 350m에 이르렀는데, 이는 육군이 요구했던 300m에 비하여 부족한 성능이었다.
코퍼럴 III는 서전트 미사일의 개발에 밀려 개발이 취소되었다. <출처: Public Domain>
코퍼럴 II의 성능 부족으로 인하여 결국 코퍼럴 III의 개발이 추진되었다. 코퍼럴 III 개발 사업은 신뢰성이 향상된 미사일과 지상장비를 갖추어 최종적으로 육군이 원하는 무기체계로 완성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러한 목표는 가장 최신형인 코퍼럴 IIb를 최소한 개량하는 것으로 달성가능할 터였다. 그러나 1956년 코퍼럴 II의 개발이 완료된 시점에서, 육군은 1963년 경에는 후속인 '서전트' 미사일을 실전 배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이미 1957년경 코퍼럴 III의 시제 모델이 시험 비행을 실시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예산의 압박 속에서 육군은 남은 개발 예산을 서전트 미사일에 집중하기로 결정하고 1958년 코퍼럴 III의 개발을 백지화했다. 사업이 종료될 때까지 코퍼럴은 모두 1,100기가 생산되었다.


특징


코퍼럴은 미국 최초의 핵탄두 탑재 탄도미사일로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단거리 미사일이다. 코퍼럴은 1단 추진체로 연료와 산화제를 수납하여 추진하는 액체연료 방식이다. 연료는 개발당시에는 RFNA(red fuming nitric acid)를 사용했지만, 양산으로 전환하면서 추진력 강화를 위하여 IRFNA (inhibited red fuming nitric acid)로 전환했다. 이에 따라 연료는 46.5% 아닐린(aniline), 46.5% 프르프릴 알코올(furfuryl alcohol), 7% 하이드라진(hydrazine)으로, 산화제는 14% NO2, 2.5% H20, 0.6% HF, 82.9% HNO3로 구성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복잡한 구성으로 인하여 발사준비에 엄청난 시간이 소모되어 즉각적인 발사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코퍼럴은 이동식 미사일 발사대에서 발사된다. <출처: Public Domain>
또한 코퍼럴은 미사일 내부장치나 지상지원장치 등 유도방식이 복잡하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유도장치로는 스페리 자이로스코프가 장착되어 미사일의 상승단계와 탄도비행에 필요한 자세제어를 제공한다. 자동항법 장치는 자이로신(gyrosyn) 자이로스코프 2개로 롤링과 피칭을 A-12 버티컬 자이로로 요잉을 입력하여 자세제어에 적용한다. 지상유도시스템은 2차대전 시기의 SCR-584 레이더의 개량형인 AN/MPQ-25으로 미사일의 궤적을 추적한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비행시작후 95초와 130초 사이 아날로그 컴퓨터가 탄도와 보정값을 계산하여 미사일에 지령함으로써 표적으로의 유도를 돕는다. MPQ-25는 미사일의 정확한 속도를 측정하여 탄도계산에 필요한 정보값을 산출한다. 또한 MPQ-25는 최종탄착궤적 보정과 함께 대기권 재진입 후 탄두의 장전명령을 미사일로 전달하는 역할도 한다. 최대 사거리에서의 미사일 위치추적은 내장된 트랜스폰더 비콘으로 가능하다. 미사일에 대한 전자전대응능력은 코퍼럴 III에서 완성될 예정이었지만 취소되었으며, 이전의 I/II형은 취약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코퍼럴은 복잡한 연료계통으로 인하여 발사준비시간이 길고 유도장치의 정밀도가 떨어졌다. <출처: Public Domain>

W7 탄두에 핵 코어를 장착하는 모습. <출처: Public Domain>
코퍼럴은 핵탄두 탑재 탄도미사일이다. 애초에 여러가지 핵탄두가 고려되었지만, 미사일의 직경이 30인치(76.2cm) 였으므로, 가장 크기가 맞는 W7 핵분열탄두가 선정되었다. W7은 폭발렌즈 92개로 구성되어 확실하고 강력한 폭발력을 자랑했으며, 중량은 680kg으로 당시 탄두로는 경량인 편이었다.W7은 전기기계식 스크류 시스템을 채용하여 비행중에만 핵 캡슐을 폭발기구 내부로 자동적으로 장착하도록 하여 발사실패시 핵폭발을 막는 안전장치를 갖추었다. 또한 핵물질로는 플루토늄 합금 코어를 사용하여 제한된 핵물질으로도 최대의 파괴력을 낼 수 있도록 했다. W7은 어네스트 존의 핵탄두로도 활용되면서 신뢰성을 인정받았으며, 코퍼럴 미사일을 위하여 300발이 생산되었다.

운용의 역사
독일에 주둔했던 코포럴 대대(제84포병연대 제2 미사일대대)의 1964년 단체사진 모습 <출처: usarmygermany.com>
최초의 코퍼럴 운용대대는 1952년 3월 창설되었으며, 1953년 1월부터 본격적인 운용훈련이 시작되었다. 미국은 애초에 1954년 7월까지 코퍼럴 미사일대대 16개를 창설하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지만, 실제로는 목표로 한 시기까지 코퍼럴 I 미사일 2개 포대가 배치되었을 뿐이다. 코퍼럴은 소련의 공세를 막는 핵억제전력으로 유럽전선에 주로 배치되어, 제259 미사일 대대가 1955년 2월에 배치되면서 유럽에 첫 배치가 시작되었다. 1960년까지 모두 6개의 대대가 독일에, 2개가 이탈리아에, 그리고 4개가 미국 본토에 배치를 마쳤다. 한편 영국은 이미 1953년 코퍼럴 II의 구매계약을 체결하여 2개의 연대에 배치했다. 코퍼럴은 실전배치와 함께 제식명칭 M2/M2A1 등으로 분류되다가 1963년 미 육군의 제식명 재분류에 따라 MGM-5로 재명명되었다.
코퍼럴 포대의 야전 배치도 <출처: 미 육군>
코퍼럴 미사일 대대는 250명의 병력과 차량 35대로 구성되었다. 유럽에 배치된 코퍼럴 대대는 기동성에 중점을 두어 운용되었으며, 대규모의 차량과 병력을 사전 지정장소로 신속히 이동하여 전개하여야만 하기 때문에 훈련소요가 상당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전개한 장소에서 발사가 가능한 상태까지 준비하는데 무려 8~9시간이 걸렸기에, 코퍼럴은 그 실용성을 의심받았다.
코퍼럴 미사일의 실기동 훈련 장면 <출처: Public Domain>
결국 코퍼럴 미사일을 운용하기 위해서는 부대원들의 숙련도가 중요했다. 미국은 코퍼럴의 실사격 훈련을 주로 미국 본토의 포트 블리스(Fort Bliss)에서 실시했으나, 이후에는 영국 스코틀랜드의 벤베큘라(Benbecula)섬에 위치한 왕립포병 유도무기사격장(Royal Artillery Guided Weapons Range)에서 실시했다. 미사일은 대서양의 표적을 향해 발사되었으며, 세인트 키르다 군도(St Kilda archipelago)에서 가장 큰 섬인 히르타(Hirta)에 위치한 레이더가 탄착군을 식별했다. 이렇게 실사격 훈련이 실시되면 소련의 첩보수집선들이 표적지역으로 종종 몰려와 정보를 수집했다. 한편 영국은 코퍼럴을 도입하면서 소련의 첩보활동을 방지하기 위해 무인도인 로칼(Rockall)섬을 영토로 선언하고 소련함정의 접근을 막았다. 이에 따라 로칼은 영국이 가장 마지막 편입한 영토가 되었다.
영국군의 코퍼럴 미사일 운용장면 <출처: 유튜브>
한편 코퍼럴은 이러한 한계들로 인하여 무기체계로서의 신뢰성이나 소련에 대한 억제능력에 대하여 꾸준히 의심받아왔고, 실제로는 신뢰성 높은 무기체계가 들어오기까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결국 1963년이 되어서야 MGM-29 서전트 미사일이 실전배치 되어 유럽에 배치되었던 코퍼럴 IIb를 교체하기 시작했다. 고체연료의 서전트 미사일은 신뢰성이 높은 관성항법장치를 사용했으며 전개에서 발사까지 1시간 정도면 충분했다. 서전트의 배치는 순조로워 1964년 6월 미군은 코퍼럴을 모두 퇴역시켰다. 이후 1966년 6월 영국의 제27 유도무기연대를 마지막으로 코퍼럴은 완전히 일선에서 물러났다.


제원


형식 : 액체연료 미사일
전장 : 13.8m
직경 : 76.2cm
전폭 : 2.1m
중량 : 5,000kg
탄두 중량 : 680kg
추진체계 : JPL 액체연료 로켓모터; 89 kN (20,000 lbf)
연소 시간 : 64초
정점 고도 : 50km
속도 : 3,900km/h (마하 3.2)
사정 거리 : 48–130km
탄두 : W7 핵탄두 (파괴력 20 kt)


저자소개


양욱 | Defense Analyst

중동지역에서 군부대 교관을 역임했고, 민간군사기업을 경영했다. 현재 한남대 국방전략대학원과 신안산대 경호경찰행정학과의 겸임교수로 군사전략과 대테러실무를 가르치고 있다. 또한 각 군의 정책자문위원과 정부의 평가위원으로 국방 및 안보정책에 관해 자문하고 있다. 본 연재 '무기백과사전'의 총괄 에디터이다.